추상은 (@choosangeun)
*다음 글에는 자살 및 동반 자살, 유서, 기계 사고로 인한 장애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연극을 고르게 된 데에는 여러 얄팍한 요소가 작용했다. 유명하다 하는 뮤지컬들을 꽤나 자주 보곤 했으니 새로운 장르의 공연을 보는 것도 좋겠다는 일종의 모험심과. 그렇다고 티켓팅이 아주 어려운, 성공의 확률이 나의 손가락에 달려있는 그런 공연은 영 어려울 것 같다는 조금의 자신감 부족과. 유명하지 않은 연극을 보겠다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연극을 보는 게 더 낫겠다는 소위 ‘홍대병’ 정도가 그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예매의 과정은 아주 즉흥적이었다. 검색창에 대학로 연극을 검색하고, 사이트에 들어가서 진행 중인 공연 리스트를 클릭했다. 제목 아래에 간략하게 적힌 한 줄 소개를 읽긴 하였으나 이는 결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연극의 분위기를 추측하며 3분 정도의 고민을 하였다. 예매 전 과정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대학생 할인을 적용하니 연극 티켓이 영화 티켓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것이 다였다.
극장에 가는 길까지도 나는 연극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아는 배우가 나오는 것도,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극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연극에 가슴 설레기 시작한 순간은 지하 소극장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제목에도 ‘사진’ 이 등장하는 이 연극은 허름한 골목에 위치한 ‘추억관’ 이라는 이름의 사진관이 배경이다. 하나 특별한 게 있다면 이 사진관은 어떤 사연 때문인지 영정 사진만 찍어준다. 어느 날 새파랗게 어린 고등학생 소년이 영정 사진을 찍어달라며 찾아왔는데, 사진사가 이 터무니 없는 부탁을 거절하자 소년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얼마 전 엄마의 유서를 발견했는데, 모든 가족들의 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태를 막을 방법을 찾던 사진사는 고심 끝에 공짜로 가족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소년 더러 가족들을 데려오라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연극은 시작된다.
‘추억관’ 은 아주 좁았다. 극장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나의 예상 밖이었던 것은 20평 남짓한 무대의 형태였다. 객석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으로, 정사각형 공간의 네 변 중 ‘ㄱ’ 자 모양의 두 변이 무대라면 나머지 ‘ㄴ’ 자 모양의 두 변은 계단으로 된 객석이었다. 관객들이 배우들의 숨소리까지도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는데, 가장 아래에 있는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이 연기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종종 움찔거리기도 하였다. 나는 그 좁은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주 기대되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힘을 합쳐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하고, 공을 들인 결과물을 보는 일은 언제나 설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걸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연 시작 몇 분 전, 묘하게 들뜬 공기 속에서 제작진의 땀이 묻었을 세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감정이 덜컥 마음을 덮쳤다.
엄마가 동반 자살을 계획한 이유는 ‘언제 또 불행이 닥칠지 알 수 없으니’ 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의 현실은 너무나도 기구했다. 중졸인 엄마는 파출부 일을 한다.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도주했고, 집에는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빨려 들어가 오른팔이 없는 삼촌이 함께 산다.
극 중반부에 아빠에게 보증을 부탁한 사람이 사진사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진사도 동반 자살의 멤버가 되는데,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6명이 신세 한탄을 하거나 다같이 황당한 자살 방법을 생각해내 한번씩 해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목에 넥타이를 매고 서로 당기기, 젖은 셔츠를 목에 묶고 잠에 들기 등이 그 방법들이다. 그러다 “이렇게 해선 안 죽는 거 다 알지 않느냐. 다들 죽기 싫으면서 왜 자꾸 다들 죽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딱 한 달만 더 살아보면 안 되겠냐” 는 둘째 딸의 발화를 계기로 다들 집으로 돌아가며 연극이 끝난다.
극 내내 배경은 ‘추억관’ 에서 바뀌지 않았고, 삼각대에 세워놓은 카메라 말곤 이렇다할 소품도 없었다. 정말 배우들의 대화와 감정 연기로 연극의 퀄리티가 결정되는 연출이었다. 극을 보면서 나에게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감상은 ‘극의 내용이 재미있었다’, ‘공연의 비주얼이 좋았다’ 도 아니고 ‘배우라는 직업은 정말 멋진 직업이구나’ 였다. 관객은 무대에서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게 되기 마련인데, 컷 편집이 되어 관객의 눈 앞에 발화자를 가져다 주는 영화와 다르게 연극은 발화자가 대사를 시작하면 관객이 직접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혹은 의식적으로 반대로 행동할 수도 있다. 발화자가 대사를 뱉는 동안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은 본인이 맡은 배역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의 공기까지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스크린을 통해선 절대 알아낼 수 없는 ‘무언가’ 였다. 공연을 마치고 엄숙한 표정으로 관객에게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일종의 사명감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땅을 치며 우는 연기를 펼치고 있었음에도 내가 그들에게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행복은 잠깐입니다. 그러니 놓치지 마세요. 다른 생각 말고 그 순간을 즐기세요.”
입장할 때 받았던 팜플렛 속 연출의 말 한 구절. 공연 시작 전 침침한 조명에 의지해 팜플렛을 읽어 나가던 중 가장 마음에 콕 박힌 말이다. 제목에 죽을 사死를 이렇게나 크게 써놓고는 어떻게 이 연극으로 행복을 즐기라는 말을 전하려나 싶었다. 하지만 연극을 끝까지 보고 극장을 나설 때의 나는 꽤나 행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행복한 상태를 백프로 즐기라는 연출의 말을 찬찬히 곱씹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한 상태임을 인지한 상태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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