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발이 보슬보슬하다. 이전은 서걱서걱했다. 마당은 잔디와 돌 몇 덩이로 차 있었다. 그래서 서걱서걱했다. 신발은 발과 함께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슬보슬하다. 공연 전 원하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관객이었다. 카펫 바닥이 양말과 마주 댈 때마다 보풀이 수많은 알에 달라붙고자 했다. 오른 벽에 돋은 계단을 오르자, 방 몇 개와 창이 있었다. 닫힌 문 하나를 열자 흰 양복 차림 한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한 사람은 두 층에 병존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내려가 피아노를 쳤다. 공간에 들이치는 흰 양복 차림 한 사람. 2층 관객은 다가들고, 1층 관객은 자리 잡았다. 공연에 익숙한 집단 습성인지, 외부 자극에의 호기심인지 단정 짓기 어려웠다. 시작 시각에서 약 3분이 흐르고, 서걱한 출입에서 스포이트로 손등에 물방울을 내려준 한 사람이 공연은 마당에서 시작된다고 알렸다. 정박했던 관객은 일제히 신발 차림이 됐다. 발이 서걱서걱하다. 관객은 안내에 따라 마당 한 귀를 에워쌌다. 발이 참 많다. 등장한 한 방울의 나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발 틈으로 흘러온 나의 말은 메이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메이는 파란 지구에서 빨간 지구를 산다. 사람이라 테두리 바깥에 붙어 산다. 대리나 주임쯤을 단 주변 사람을 위한 날에 빨갛게 동그라미 친다. 그들은 사람이라서 테두리 안에 산다. 워낙 잘 우는 메이에게서 태어나자마자 발밑으로 굴러떨어진 나. 이번 생은 웅덩이라지만, 눈물이었던 지난 생에 고여 있는 듯했다. 소리도 진동도 필요 없이 표표히 돌단 위 창으로 들어가 따라오라 손짓하는 나. 도로 양말 차림을 하는 관객. 발이 보슬보슬하다. 발의 감촉을 잘 기억해 두자.
떠도는 나에게 강이 말을 걸어온다. 대화는 모두 피아노로 걸려 온다. 흰 양복 차림 한 사람이 치는 고체음. 고체를 매질로 두고 벽으로, 바닥으로, 그러다 공기로 퍼져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음은 대체음이기도, 아니기도 할 것이다. 다른 존재인 오리나 바람이라면 변환되어야 말이 통하겠지만, 같은 물인 강과 바다는 변환이 무용하다고 추측했다. 이 고체음은 나에게 말이 오는 형태이며, 같은 언어를 쓰든 쓰지 않든, 그리 오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반드시 ‘피아노 소리’로 온다고 확신할 수 없다. 사람에게 내가 받는 형태를 변환한 결과로써의 피아노 고체음일 수 있다는 말이다. 어째서 이 음이 대체음으로 발탁되었을지를 나의 말에서 알아내길 바라며 들었다. 강은 제법 큰 물인데도 괄괄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나에게 차근차근 교섭을 시도한다. 나는 기죽지 않고, 도리어 강이 나와 함께 ‘나’가 되고 싶어 한다고 알아듣기도 한다. 강도 물러서지 않고 함께 강이 되자고 설득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큰 물은 기쁘지 않다면서. 이는 ‘온’ 개념과 상응한다. 나는 합주 전 조율을 위한 ‘라’ 음을 내듯, 명상을 위한 ‘옴’ 소리를 내듯, 낮고 일정한 음정의 ‘온’을 길게 빼낸다. 물세계에는 물 하나에 온 하나라는 규칙이 있다. 온은 전부이자 일부이다. 모든 온은 단일 개체의 전부이고, 복수 개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한 방울의 전부를 상실하지 않으려 강을 거부한 것이다. 난 두려운 게 아니야, 그리운 거야. 물에게 죽음은 이전의 나와 다음의 내가 ‘너’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죽음은 나 하나 떠내려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메이를 잃는 것이다. 메이의 일부였던 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실이 아닌 상실이다. 나는 넘실거린다. 저러다 부딪혀도 섞이지 않을 관객에게 넘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동화의 춤’은 화려하고, 전형적인 춤 같았다. 즐거운 기색으로 나풀거리는 나에 매료되어 그만 ‘동화’를 동심 가득한 의미로 알아들었다. 착각에서 건져 올려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갈라져야 했다, 거실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나를 위해. 따뜻한 노란 빛을 내는 구체 조명이 하얀 다각형 탁상 아래 놓였고, 저녁의 푸른 빛이 마당 풍광과 한데 비쳐 들어오는 얇은 커튼이 홍색 중심의 긴 털실 구조물과 같은 높이에 걸려 있는 방이었다. 이 털실 구조물은 계단 옆에서 아래로 걸린 거미줄 같은 구조물과 비교했을 때, 그물 같았다. 갈라져야 했다. 길을 터주는 것은 나를 따르는 것이다. 이전 이동에서 맨 앞 관객이 다음 이동에서 맨 뒤 관객에 되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벽에 바싹 붙어 나를 보았다.
쿵쿵 소리가 뒤꿈치 같았다. 강물이 되지 않기 위해 도망쳐 들어온 곳이 오리의 뱃속이라니. 건반 모르게 밟은 페달도 음을 낸다. 실낱같은 심음은 박동에 간신히 붙어 있다. 설명 앞에 서는 알아차림. 오리 뱃속임을 몰랐다 뿐이지, 방과 울림으로 생명체 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메이의 눈물. 오리가 될 순 없어. 실핏줄을 뒤집어쓰면 부속될 수 있다. 전부는 아니 될 수 있다. 털실 구조물을 쓰고 탁상 위에 앉아 기울이고 펼치는 나. 빛나는 구체를 쓰다듬는다. 너와 함께 네가 되고 싶어. 그 말이 어디를 향하는지 생각했다. 살아있는 알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네는 나. 알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더 있었는데, 어째서 기억이 흐릿한지 나는 의아해한다. 살아있는 알은 아기 오리로 되고, 나는 거실 계단에 앉는다. 다른 벽에 바싹 붙어 그림자극 마임처럼 손과 팔로 나타낸 아기 오리를 구경했다. 통통 튀는 고체음. 더 이상 아기가 아니더라도 아기로 기억할 수 있도록, 나는 아기 오리에게 비비라는 이름을 준다. 정작 나는 이름을 받은 적이 없다. 메이는 사람이고, 사람은 눈물을 방울방울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눈물은 기억에서 감정으로 흐르며 나오는 부산물이고, 떠날 것이 확실하니 미련 없이 기억으로 상납하는 한 때의 유실물이다. 눈물 전후로 감정이 차 있고, 그 감정은 눈물 전후로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눈물은 감정의 과도기이자 기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눈물은 방울방울 다르지만, 유일하지 않다. 나는 메이의 눈물 중에서도 한 방울로 존재하지만, 한 방울의 ‘나’로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잊지 않아도 잊히는 기억을 말하던 내가 떠올린 기억. 비비의 엄마가 나의 일부를 먹은 일. 잊힌 알의 기억이다. 이는 메이의 눈물이 아니게 되고서 그 사실조차 모르게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충격에 휩싸인 나는 잠시 거실 안쪽 격자 유리 미닫이문을 닫고 모습을 감춘다.
다시 나타난 나는 바다에 흘러들어 있다. 거칠고 사납고 아주아주 큰 물. 더럽지만 섞이지 않을 농장용 비닐에 들어 있다. 미닫이문이 열리지 않게 등으로, 팔로 버티던 나는 속절없이 젖혀진 오른 틈으로 배출되고 만다. 비닐에 구멍이 났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나. 위아래 문틀에 매달려 몸통만이 관객을 향해 굽이친다. 물 하나에 온 하나. 규칙에 따라 나는 ‘동화의 춤’을 춰야 한다. 이는 병합 의식이다. 물에게 잊어버림은 잃어버림과 같으므로, 나에게 동화는 위협이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던 물세계는 경직된 체제로 있던 것이다. 격랑을 헤쳐나온 나는 하나도 깨지지 않은 나의 ‘온’을 확인한다. 온은 구슬으로 표현된다. 피아노 고체음이 발탁된 이유를 다시금 상상했다. 공기음은 끝이 흩어진다. 반면 고체음, 특히 피아노 음은 끝이 구른다. 음으로 된 구슬 같다. 참 아름다운 경직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구슬이 깨진다. 바다의 온이 깨진다. 바다가 내가 된다. 나는 어디서든지 메이를 느낀다. 메이에게 뻗은 팔은 거둬지지 않고 해일이 된다. 그리움에 죽지 못해 죽인다. 물의 그리움은 이기심이라고 바람이 그랬던가. 묻어둘 수 없는 물은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널브러진 나는 나를 멈춰 달라 애원한다. 잦아든 바다는 나로서 계단을 오른다.
계단 끝 벽 시작 면에 바싹 붙어서는 왼쪽 방에 쏙 들어간 내가 보일 리 없었다. 방 앞 바닥 희미한 털실 한 둘레만 보이다 메이를 찾았다며 창 앞에 나온 나도 보이게 됐다. 빨간 밧줄을 나뭇가지에 묶는 메이를 보고 있다. 나는 메이가 무얼 하는지 안다. 죽고 싶어. 메이는 고체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와 말한 적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간간이 내가 입에 담는 죽고 싶다는 말은 분명 메이의 말이었을 것이다. 죽음이 물세계 순리라 치더라도 나는 메이를 그리워하기에 죽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리움에 지쳐 순리를 따라가려 했더라도 필히 저항의 말을 따라붙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명한 근거는, 죽고 싶어라고 할 때만 뚝 떨어지는 음조였다. 메이에게서 뚝. 떨어질 때 흘러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은 말보다 감정을 담는다. 죽고 싶어와 같이 태어난 내가 그토록 애타는 마음을 짓는 것은, 메이 안에서 몇 번이고 내쫓긴 애처로움의 반영이리라. 메이에게 가야 한다. 말리는 바람을 제치고 위로 오른다. 2층 창 맞은편에는 계단이 든 방이 있었다. 무수한 물방울에게 사과할 틈도 없이 밟고 위로, 위로, 구름의 꼭대기로. 관객은 이동할 틈도 없이 나와 꼭대기에 와 있다. 나는 마침내 기억하려는, 움직이려는, 사라지지 않으려는 힘, 물의 근원으로서의 ‘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한 사람의 관객에게 준다. 스물다섯 명의 한 사람에게. 어느 한 사람 빠뜨리지 않고 부어준다. 관객에게서 관객으로. 벽 구석에 붙어 있던 관객이라 받지 못하고 넘어가나 싶었지만, 나에 의해 한 바퀴를 더 돌아 받게 되었다. 그 세심함에 정말 물로서 온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눈송이가 되었다. 바람이 성을 낼수록 더 멀리 날아갔다. 나는 메이 가까이에 간다.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너는 눈에 부러진 나뭇가지로 살아남기도 하고, 내린 눈에 파묻혀 다음 계절까지 그곳에 있기도 하고. 무수한 눈송이만큼 무수한 너를 보는 한 방울의 나. 나는 너를 향해 하강하는 거야. 내리는 눈과, 계단을 내려가는 나. 열린 1층 창 한구석, 그 앞에서 끝을 낸다. 꼭대기에 오른 한 방울을 닮은 조명 곁에서, 한 방울의 내가.
발의 감촉을 기억했는가? 이 공연에서 발의 감촉은 곧 이동이다. 이동은 곧 나의 흐름이다. 관객은 공연 전 서걱한 밖에서 보슬한 안으로 유도 받았다. 공연이 밖에서 시작된다는 예고는 없었으므로, 관객은 주로 안을 탐색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서걱 다음 보슬이라는 ‘감촉 경로’를 공연 전에 한 차례 밟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서걱 다음 보슬로 이동한다. 공연도 공연 전과 같은 경로를 탄다는 뜻이다. 그런고로 관객은 몰입 전 현실에서 한 차례 몰입의 이동을 경험한 셈이다. 이는 어딘가 모르게 이전의 나와 다음의 나라는 물(水)적 개념을 연상시킨다. 서걱에서 보슬이라는 이동을 두 차례 겪어 완결된 구슬 같은 순환 구조를 띠는 관객과 달리, 나는 서걱에서 보슬로 한 번 이동한다. 관객이 현실과 몰입으로 뚜렷이 나뉜 경직된 질서를 갖춘 것과 달리, 나는 혼재된 흐름을 지닌다. 마지막 장면은 완전한 안도, 완전한 밖도 아닌 곳에서 진행된다. 작은 스툴에 앉은 내가 기억을 되짚는 나인지, 기억의 나인지 알지 못한다. 이를 ‘나로 넘어진 나’로 풀어 보았다. 한 방울의 나는 ‘나’로 넘어진다. 한 번은 나를 잃지 않으려, 한 번은 나를 잃으려 넘어진다. 시작은 메이의 눈물로 있기 위해, 끝은 메이에게 가기 위해. 너를 잊지 않기 위해 나를 잃지 못하고, 나를 잃어서라도 너를 향한 것이다. ‘나’로 넘어진 나의 ‘온’은 그래서 눈물 모양이 된다. 시작과 끝이 ‘나’로 매듭지어지는 구슬에서, ‘너’로 이어지는 눈물로. 너와 함께 네가 되고 싶어…
*필자 요청에 따라 대사 인용은 굵은 글씨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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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승태 |
한 방울의 내가
2024년 5월 23일(목) ~ 26일(일)
LDK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20길 8)
출연 | 경지은
작 | 현호정
연출 | 우지안
안무 | 하은빈
음악·연주 | 오정웅
미술·의상 | 윤이람
PM | 박종주
영상 촬영 | 김예솔비, 박정연
사진 | 전인
‘작은 모래알’ 원안 | 하은빈
그래픽 디자인 | 정소영
포스터 서체 | Velvetyne BianZhiDai
주최·주관 | 현호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작·공동창작 | 안티무민클럽A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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