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요일

예) 하고 흔들다.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사과는 장하다.
꼭 이상적인 사과가 아니더라도 사과에는 가죽도 있고 속살도 있고 뼈도 있어서, 곧추세운 척추뼈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깔끔하게 관통할 듯싶으니 말이다. 뼈는 가지런하게 어질러져 있어야 한다. 무작정 팔뼈를 앞으로 뻗어 줄을 맞추자, 옆으로 누워 껍질만 덮고 과육은 빼낸 일자허리 제물이 된다. 차갑고 딱딱한 제단에서 구른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성스러운 빛에 잘 쪼여야 한다. /바치기에 족한가요/ -내셨잖아요 /제 뼈가 그렇게 고아한가요/ -과하다 할 정도는 아니고요 오래 앉아서 문서 작업을 하세요 /사무직이냐고요/ -아뇨 이제 공연 기술 좀 하시라고요 그만 딴짓하고
예?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는 감각하랴, 기능하랴 바쁜데 아프기까지 한 신체를 한탄하는 몸의 책임자가 등장하는 극이다. 각기 다른 몸 셋 깊숙이 같은 몸 하나가 묻혀 있는 느낌을 준다. 그것이 잃어버린 몸이라면, 단서가 될 몸을 파헤쳐야 한다. 몸을 찾기 위해 몸을 해치다니, 지독히 의학적이지 않은가. 과연, 하루 8시간을 앉아서 근무하는 사무직 종사자는 허리가 아프다. 누구도 통증을 받고 싶지는 않다. 돈을 바치고, 몸을 바친다. 병원 측 재량에 따라 나누어 찍고, 나누어 뽑고, 문제만 추린다. 돈은 진료로 돌려받고, 통증은 평온에의 고대로 돌려받는다. 그래서, 몸은 돌아오는가? 돈은 바꿔 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통증은 버린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좇아오겠지만). 몸은 돌려받을 수 없다. 몸은 돌아와야만 한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 있는 부분을 자료로 설명받을 뿐이다. 

TV로 송출된 척추 엑스레이 사진을 곁에 두고, 병명을 밝히기까지의 여정은 배우1 (이동영 분)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배우2 (정나무 분)가 보라색이고 초록색인 우유 박스 하나당 주어진 네 개의 옆면을 돌려가며 차별 없이 바닥에 내려쳤고, 이는 매우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배우2가 우유 박스를 소리 내서 선별하는 반복은 노동이고, 차차 생긴 리듬의 빈 구간을 찾아 말을 끊어 연골로 넣는 배우1의 요령은 적응이다. 노동은 적응할 생각이 없다. 요란스레 걸러낸 박스를 바닥에 ‘1’ 자로 길게 나열하면, 배우2와 배우3 (박정근 분)이 위를 밟으며 부적합한 박스를 쳐낸다. 척추관협착증은 사진으로 체감된다. 병으로부터 죽어라 도망치고 싶을 때쯤 의사가 물증을 들이민다. 누가 진단명으로 머리를 뎅 치고 간 것 같다. 직후 나온 가톨릭 성가는 이러한 환자의 심정을 잘 헤아렸다.

사과는 비장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쌓인 우유 박스 탑 위에 군림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이 아닌 것이 자신으로 비유되는 일을 묵과해야 한다. 배우2는 우리가 이미 진짜 사과를 알고, 먹어본 적 있으므로 우유 박스 탑 위의 비대한 사과가 가짜임을 안다고 했다, 몸에 들어 있는 체계로 판단한다고. 그러면서 진짜를 깨문다. 신체는 비참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세운 뼈대 구조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몸 아닌 신체가 내 몸으로 여겨지는 일을 묵인해야 한다.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모두의 것이다. 모두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지극히 혼자의 것이다. 사과의 경험이 베어물지도 않은 사과를 가짜라 판단하듯, 몸의 경험은 겪어보지도 않은 몸을 선뜻 기각한다. 다각도로 바라보면 해결될까? 어느새 배우1은 캔버스 같은 것에 사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다. 세잔이라는 화가는 온 방향에서 묘사한 사과를 탁상 하나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 뻑뻑한 물감으로는 매끄럽게 사과를 그릴 수 없다. 그러다 옆의 배우3에게 묻는다, 가짜 사과를 얼마에 샀냐고. 자그마치 구만 구천 원! 진짜 사과도 하나에 만 원이나 했댄다. 라면 몇 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비발디 사계 중 봄 1악장이 짧게 흘러나오고) 비스듬한 각도로 우측에 앉아 사과를 먹는 배우2의 얼굴이 앞에 놓인 카메라로 촬영되어 TV에 송출되며 그 맛있어하는 표정을 벚꽃이 일찍 개화할 만큼 심각한 기후변화와 심각하게 치솟는 과일값과 심각하게 감소한 수확량에 관한 뉴스 기사 제목들이 날개 돋친 듯 긁고 지나간다 (숨). 미학적 사과를 논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세잔의 의견을 들을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네 사과 ‘각’이기 때문이다. 생중계되는 그는 자신이 오른손잡이라 말하며 왼손으로 사과를 깎기 시작한다. 익숙하고 전형적인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살아있는 일을 한다면서. 손흥민이 왼발을 훈련했듯, 쓰면 쓸수록 단련되는 왼손의 감각을 좋아하는 그의 손놀림은 아슬아슬하다. 아니, 딱히 그 부위가 클로즈업되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다시 사계 중 봄 1악장, 짧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가느다란 전신거울 같은, 그런데 많이 두꺼운, 접이식인, 투명한 듯 그렇지 않은, 뭔가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반지러운 재질의 은빛을 표면으로 두른. ‘그것’이 왔다. 그것은 무대 좌측 구석에 놓이고, 볼록할 철(凸) 모양으로 쌓인 우유 박스 구조물 오른편에 배우3이 앉는다. 배우1은 흰색 물백묵으로 배우3의 얼굴을 그것에 그리기 시작한다. 단, 대상물의 설명에 의존할 것. 대상물3은 이목구비 이모저모를 털어놓는다. 순간, 조목조목 말하던 그가 우물우물한다. 그리는 사람1은 되묻는다. 뭐라고요? 대상물은 마지못해 분다. 그 설명에는 불만이 섞여 있다. 낯부끄러워 고객 센터에 접수하기는 그른 불만이다. 아무리 생김새에 창피함을 느낀대도 TV는 가차 없다. 이 광경은 대상물1과 그리는 사람2 간에도 펼쳐진다. 관객의 눈알은 무대 가로선 끝에서 끝으로 굴러다닌다. 순수 설명으로 그려지는 얼굴과 순수 기술로 송출되는 얼굴. 몸은 그 사이에 끼어 안중에 없다. 관객에게 희끄무레한 ‘진짜 얼굴’은 뒷전이 된다. 마지막 순서인 대상물2와 그리는 사람3에게 장면이 그대로 운반되지 않는 것으로, 몸은 더 찌그러진다. 대상물2가 변칙적으로 “메롱” 했기 때문이다. 이목구비 설명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없이 “메롱”이다. 혓바닥을 내미는 수만큼 혓바닥이 그려진다. 관객은 웃는다. “메롱” “하하하” “메롱” “하하하”. 대사 사이에 낀 지문을 펴서 보면 이렇다. “메롱” (관객이 TV의 혓바닥을 본다) (그리는 사람이 혓바닥을 그린다) (관객이 그려지는 혓바닥을 본다) “하하하”. “메롱”으로 TV는 관객 충성도를 얻었다. ‘그것’에는 차곡차곡 쌓인 가짜 얼굴 셋이 남고, 그것을 보기 위해 등진 배우 셋은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을 부른다. 사과 삼중창은 화음이 없어 하나씩 그만두어도 싱겁지는 않다지마는, 홀로 남겨진 배우3은 헛헛해 노래를 멈췄을지 모를 일이었다.

TV는 잠시 고전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튼다. 영화가 끊기기 무섭게 중앙에 세팅된 우유 박스 무리가 무대 역을 맡았다. 구겨진 돌 같은 얼굴을 쓴 배우3. 아니, 괴물의 이야기가 무성영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배우들은 등장인물 역을 맡아 우유 박스 위나 주위에서 연기를 하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맡아 내용을 내보내는 것이다. TV: 생김새 탓에 배척당하던 괴물이 어느 날 창문으로 보인 한 가정집 풍경을 동경하게 된다. 괴물은 열심히 가족을 모방하고, 방문하기에 이르렀으나, 구타당한다. 짓밟힌 괴물은 우유 박스에 걸터앉아 탈을 벗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벗는다. 배우3. 아마, 괴물은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괴물이라 불리고, 자신은 그 모습을 “너”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어 배우3. 혹은, 괴물은 말한다.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제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가 아픈 거예요.” 불가역적 변화를 일으킨 몸은 여전히 나로 감각되지만, 통증은 끊임없이 잃어버리기 전을 상기시키며 “너”로 분리되기를 권한다. 현존을 강제하는 동시에 한사코 반대하는 얄궂은 감각이다. 아픔은 몸을 모아 이름을 알린다. 하지만 아픔이 곧 몸이 될 수는 없다. 아픔의 이름이 몸의 이름을 대체하게 둬서는 안 된다.

배우들은 우유 박스를 계단처럼 좌우로 쌓아 마주 앉는다. 자, 어딘가 아픈 곳을 떠받들고, ‘아야아야’ 희랍 비극같은 울음을 내는 가면 쓴 현대인들이 납신다! 물론 가면은 ‘그것’에 그려진 ‘가짜 얼굴’들이고, 울음은 말소리지만 말이다. 대화가 아닌 말소리다. 재건축이라든가, 입봉작이라든가, 요양원에서 일하며 만난 치매 환자라든가. 저마다 하고픈 말만 하기 때문이다. 기껏 마주 앉아 놓고 마주 보지 못하는 노릇이다. 그게 영 갑갑했는지, 배우2는 가면을 벗고 일어나 관객을 마주한다. 요양원 이야기를 잇는다. 치매 예방에 좋은 손벽치기, 손등치기, 손끝치기 (배우는 관객에게 따라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것은 스킨십이랜다 (배우는 객석에 돌격해 열마다 목차처럼 선다). -우리 서로 옆자리 분과 손을 잡아볼까요 /예?/ -악수 말고 손을 잡으시라고요 /예/ -어떤가요 차가운가요 /예/ -지금 내가 손을 만지는 걸까요 상대가 내 손을 만지는 걸까요 /예/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마다의 울음은 마주치지 않아 관객에게 튄다. 어리둥절하다. 본 극에서 주된 긴장을 유발하던 구도는 TV와 몸이라는, 가로선이 아니었던가? 가로용지를 긴 쪽으로 넘기듯 객석으로 덮쳐온 장면이 버거웠다. 시종일관 변해버린 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화자가, 당신들은 몸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하려던 것이었을까? 아픈 허리를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의자였다. 통증은 유사 경험자 간의 공감을 매개로 거리를 좁혀 밀착시킨다. 불꽃이 튄다. 아픔을 나누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부지불식간에 어떤 ‘몸’으로 분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똥이 튄다. ‘손잡기’를 요구한 맨얼굴의 배우들은 무대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 대화 아닌 말소리를 낸다. 멀찍이 떨어지고픈 관객이 된다.

TV는 600타 타자 실력을 가진 사람의 스크립트와 내레이션을 튼다. 키보드를 바꾸고 나니 타자가 느려져 할 일을 시간 내에 마칠 수 없어 곤란하다는 말. 당장이라도 도로 600타를 칠 수 있는 키보드가 필요하다는 말. 몸은 당위에 진다. 해야만 하는 일에 무뎌져야 하고, 무뎌지지 못하면 걸러진다. 600타를 치는 나는 원래의 몸, 600타를 못 치게 하는 키보드는 변해버린 나의 몸. 비친 나를 “너”라고 부르던 그처럼, 우리는 병들어 가는 몸을 수긍하기 어렵다. TV는 신체검사 결과지를 튼다. 배우1: 참여 등급, 배우2: 3등급, 배우3: 2등급(민첩성 평균 이하). 무대 가운데를 천천히 줄지어 도는 배우들이 있다. 배우2: 앞, 배우3: 중간, 배우1: 뒤. TV는 그들의 모습과 내레이션을 튼다. 길을 가다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주변인은 웃게 된다는 말. 주저앉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출 영상 속도가 빨라지고, 뒤이어 배우들도 빨라진다). 습관은 속도를 정했고, 그 속도를 바꿨어야 했다는 말 (배우2가 갑자기 신발끈을 묶는 바람에 배우3이 넘어지고, 배우3의 발에 걸려 배우1까지 넘어진다). 내레이션이 끝나고 (나머지 배우들 사이로 우뚝 선 배우3은 대략 이렇게 고함친다). “이게 다 내 탓이라고? 내 부족한 민첩성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나는 2등급이야. 이 사람들보다 더 높은데. 어우!!!!! 으아아아아!!!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측정 도구가 세밀해질수록, 개인의 몸은 우거진 병명에 가려진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속죄하게 한다. 비록 키보드에 적응할 시간도, 넘어진 뒷사람을 살필 여유도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잃어버린 몸’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몸은 돌아오지 않는데. 몸에 주렁주렁 열린 과실로 믿어온 수식어와 의미, 의미. 그놈의 의미들이 사실은 치렁치렁 매달아둔 과욕이 아니었을까? 너도나도 결실을 맺기를 원하잖아, 안 그런 척해도 다 알아. 이 일도 저 일도 맺고 맺고 또 맺고 끝맺지 못하는 몸은 필요 없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가로로 긴 TV, 가로로 긴 무대, 가로로 긴 우유 박스
가운데
세로로 긴 엑스레이 사진, 세로로 긴 그것, 세로로 긴 사람들.
떠받치기 지쳐 가로만큼 드러눕고 싶댄다.
여행보다 먼저 여행 브이로그를 튼다거나, 영화보다 먼저 영화 요약 영상을 튼다거나.
날 것의 반응은 줄어들고, 그마저도 감각 기관에 굴려져 뭉툭해지고.
어쩌면 나에게 영원을 약속해 줄 것은 통증뿐일지도 모른다는
그래도 가로로 가만히 맞잡고 있기보다는
세로로 흔들어 악수하고 싶다.
그것이 당신이든
통증이든 간에,
잘 지내고
싶으니까.


이 이미지는 필자가 공연을 감상하고 글과 한 쌍으로 작성한 두 개의 그림과 그림 제목이 담긴 이미지이다.

위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1이라는 제목이 달려있고아래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2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두 그림 모두 한국어 글자 예의 이응과 여이 예 자를 분리해 늘어놓은 모양이다.

 

하고 흔들기1

이응 하나를 꼭대기에 두고여이 예 자를 아래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세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하고 흔들기2

이응 하나 밑에 여이 예 자 하나를 쓴 조합을 옆으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가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역사시비 4월]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2024. 4. 5. (금) ~ 4. 14. (일)

만드는 사람들
공동창작
연출_정유진
출연_박정근, 이동영, 정나무
조명디자인_전규상
목소리 출연_송정화
기록 촬영_한문희
그래픽디자인_워크룸
기획_나유진, 노지상
공동기획_창작주체 예술공간 혜화
제작_그린피그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지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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