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3일 일요일

불안한 춤

임승태

인간이 사라진 무대에 로봇이 서 있다. 그리고 움직인다. (하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 말이 좀 어색하지만 작가가 그것을 '춤'이라고 부른 것은 정당한 것 같다. 춤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은 '춤추는 풍선 인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 형상을 하지 않은 로봇의 움직임을 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쉽지 않지만 받아들여 보겠다.  

나는 고든 크레이그가 이 광경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그래, 21세기에는 내가 꿈꿨던 위버마리오네트가 마침내 인간 배우를 대체하는구나, 라며 무릎을 탁 쳤을까. 아니면 이마를 치면서, 아, 로봇도 인간 배우 만큼이나 통제가 안 되는구나, 라며 탄식했을까. 

관객과의 대화(관대) 시간에 작가의 말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로봇이 인간 배우를 대체하더라도 완전한 제어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로봇은 인간 배우와 달리 제어가 되지 않더라도 연출가가 로봇을 향해 나쁜 감정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거기서 질문이 생긴다. 제어되지 않는 로봇의 의외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인간 배우의 의외성 역시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술관 '전시'에 더 적합한 퍼포먼스라고 느꼈다. 관람객이 자신이 보고 싶은 시간 만큼만 보고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연 시간 포함) 한 시간 가까이 객석에서 꼼짝 않고 봐야 할 공연이었는지, 끝까지 본다고 달라지는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는 불멍, 물멍하듯이 나는 로봇의 회전 운동을 마치 해파리의 춤을 보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고, 로봇을 움직이는 데 사용했을 법한 프로그래밍 언어, 혹은 수식이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록 그것을 단 한 줄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음악은 공연장에서 듣기에 괜찮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바, 그 음악은 공연 중 연출가가 직접 라이브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비인간을 내세운 공연에서 인간의 직접적 개입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가장 좋았다니, 내가 너무 낡은 '공연성'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관대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얘기가 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공연 도중 있었던 오작동, 걸려 넘어짐 등의 오류에 대한 해명이었다. 공연장에 불러 놓고 할 얘기인가 싶었다. 중간시연회도 아니고 그것도 무려 SPAF에서 말이다. 나중에 다시 보니 이 공연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아트랩코리아의 중장기 협력 프로젝트인 <예술 X 기술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는 사전 고지도 있었다. 그러니 미리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내 탓이지 미완의 공연을 나무랄 수는 없다. 게다가 '인간' 공연도 언제나 수정과 보완이 이뤄지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로봇이 하든 인간이 하든 공연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아직 인간이 무대에 있는 공연을 더 보고 싶다. 무서운 속도로 무인화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에서 '공연예술제' 만큼은 대세를 거슬렀으면 좋겠다. 





2024년 9월 25일 수요일

난 아가멤논이 아니다.

제목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너는 발각된다.

‘난 아가멤논이 아니다.’

이름을 대고 싶어지는가? 너는 극 중 인물이다.

‘난 아가멤논이 아니다.’

이름을 묻고 싶어지는가? 너는 바깥 인물이다.

“난 아가멤논이다.”

너는 아가멤논이 아니다.


연극 <용서되지 않는> 속 아가멤논은 인물보다 역할이다. 의자 앉기 게임을 하듯, 여럿이 아가멤논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 다만, 이 놀이에는 엄중한 규칙이 있다. 겨루지 말 것. 미는 대로 밀려나는 사람만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될 아가멤논은 아니다. 그는 정해져 있다. 코러스와 배우는 양분되나, 입구 부근 『인물관계도』를 자세히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초장에 누가 코러스이며 배우인지 알기 어렵다. 최민서 코러스가 의기양양하게 아가멤논을 선언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 무대에 늘어선 무리는 적극적으로 비소한다. 그러다 전통적 아가멤논을 선보이는 김은수 배우가 들어오자, 분주하게 가라앉는다. 이 비밀스러우나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 판은 최지연 아가멤논 입장 전에도 한바탕 벌어진다. 조롱에 드는 말은 아가멤논 대사와 같아, 연기자들의 연기 말고는 흉내의 목적을 정할 방법이 없다. 둘째 판에서는 클뤼타이메스트라에 의해 여러 번 조롱하기를 지시받는데, 채 오지도 않은 아가멤논을 재연하는 것으로 보였다.

무대를 둘러 잠근 흰 천에 얼굴을 파묻는다 해 보자. 천은 잠깐 가면처럼 얼굴을 들추겠지만, 이내 덮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고 들이박는다면, 천은 얼굴대로 주름 잡혀 곧 선을 팔 것이고, 선이 그려진 흰 천을 본이라 생각지 않을 수 있을까? 코러스는 운명을 알고, 마련하고, 물러난다. 바뀌는 얼굴에 발맞춰 뛰고 아가멤논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다. 결국 따라잡을 거북이 앞지르지 않으려고 잠자코 기다리는 아킬레우스 같은, 역설보다 역설 같은 신세다.1)

앞뒤로만 붙는 두 아가멤논은 죽을 때도 의자를 점선 삼아 접혀 죽었다. 반면 이피게네이아 둘은 앞뒤로 접혔다가 옆으로 펼쳐 죽는다. <용서되지 않는>의 코러스는 방관자로 상정되고, 잘 웃는다. 서은지 이피게네이아 다음으로 아가멤논의 회상을 받는 이채은 이피게네이아의 얼굴에 웃음기라곤 없다.

운명의 비정한 점은 딱 한 면만 앞장으로 둔다는 점이다. 앞장은 사람이기도, 사태이기도 하지만, 사람일 때 유독 얇아진다. 두꺼운 장보다 얇은 장이 넘기기에 번거롭다. 진한 글씨로 들어찬 앞장 아가멤논에 뒷장 이피게네이아, 카산드라가 차례로 쌓여 있다. 아무도 넘겨 보지 않을 것을 알아 이피게네이아는 세로 종이 더미 사이에서 가로로 두 손 꼭 붙잡고 섰다.

카산드라는 등장인물 중 제일 요란한데, 지면에는 조용히 적힐 뿐이다. 아무리 시끄러운 “삐-”소리라도 ‘삐’로만 기록된다. 담배를, 방울을, 비명을. 어떤 소리를 내도 소용없어 자리라도 길게 차지하자 하고 다음 면으로 넘는다. 안 넘기고 못 배기게 악을 쓴다. 그가 끌려가 죽은 후에도 악기 소리가 자리를 지킨다. 자못 경건하다. 죽음이 풍족한 극이라지만, 이만큼 무겁고 심란한 죽음 묘사는 없었다. 여태껏 편안하게 목격해 온 바깥을 노려보는 장면이었다.

끝쯤, 죽은 이피게네이아들과 카산드라가 산 엘렉트라를 안아 준다. 연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주 잡은 손도, 내어준 품도 다 따뜻했다. 경쾌한 등장가, 댄스 크루다운 의상과 대형,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모를 불협화음, 그리고 오이. 이처럼 극은 전반적으로 밝고 기운차다. 그러나 이 밝음에 온기를 덧댄 것은 휴대전화가 울리더라도 째려보지 말고, 기다려 주자는 공연 안내 말부터 시작된 연대 의식이었다.

역할에서 비킨 배우는 코러스 무리에 낀다. 양분되어도 돌아 돌아 모두가 코러스다. 배우를 맡으면 진지하다가도, 코러스로 돌아오면 그냥 친구들끼리 재미 삼아 ‘해 본’ 양 연기한다. 희곡 텍스트에서 “난 아가멤논이다.”하는 첫 대사 또한 역할과 연기자를 떼어놓으려는 시도가 배어 있어, 더 흥미로웠다.

두 동강 난 오이와 같이 갈린 줄서기는 오레스테스가 오이(디푸스)보다 불행하다는 쪽으로 결판난다. 결과보다도 줄 서는 무리의 발랄함이 돋보였다. 고정훈 코러스의 표정과 최재욱 코러스의 몸짓을 필두로 무대를 채운 연기자들의 활력은 방관자마저 영입할 기세였다. 그래서 외려 관객 참여로 보이는 장면이 다소 맥없게 느껴졌다. 먼 이야기라 가벼이 결정했겠지만, 코러스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극이 방관자를 꼬집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 끌어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 되짚어보면 좋겠다. 전자였다면, 희곡 텍스트의 건조하고 냉소적인 구석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우려했었던 카산드라, 오레스테스와 퓔라데스의 언어 표현은 전태유 카산드라의 절도 있는 호루라기와 하지호 오레스테스, 이원빈 퓔라데스가 적절히 주고받은 어조로 정돈되었다.  우려를 배신해 주어 고맙다.

귀환한 최지연 아가멤논을 만취 상태로 설정하고, 붉은 하이힐을 소품으로 가져온 것도 재미있었다. 코러스가 ‘재연’할 때에도 이 하이힐을 앞세워 더 그랬다. 붉은 융단이 마중 나가기 전부터 붉음을 밟도록 마련한 듯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올라서 항변하는 텍스트상 지시는 <용서되지 않는>이 내뿜는 에너지와 꼭 맞지는 않았으나, 공유림 엘렉트라의 곧은 톤과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사후에 오레스테스와 재판으로 겨루어, 진다. 그 잘난 아폴론이 내세운 고릿적 논리가 아테나의 선입관에 맞아떨어져 지고 만다.2) 죄를 물으라면 클뤼타이메스트라도 떳떳하지 못하나, 처분이 못마땅한 것은 어쩌지 못하겠다. 딸을 제물로 내놓은 인간에게 복수하여 딸의 원수를 갚고자 행했음에도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는다. <용서되지 않는> 속 이피게네이아조차 엘렉트라를 안아주었다. 김경수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이러한 생각을 건드리는 곡을 했다.


<진리는 나의 빚>에서 살풍경하고 견유적인 세계를 보았다. 나는 이 세계가 퍽 안락하여 한참을 둘러보았다. “그래. 더 늦기 전에.” 문을 닫는 소리였다.

<용서되지 않는>에서 “그래. 더 늦기 전에.”하고 문을 여는 세계를 보았다. 나에게는 썩 나가라는 불호령이었다. 

환대하지 않지만 머무름을 허하는 곳과 환대하지만 머무름을 금하는 곳. 

두 곳이나 들른 나는 운이 좋았다.

‘용서되지 않는’은

‘용서할 수 없는’

‘용서될 수 없는’

과 비교하면 드문 어구다. 그래서 헷갈리기 쉽지만,

‘용서할 수 없는’이 감정(感情)에, ‘용서될 수 없는’이 감정(鑑定)에 기울 때,

<용서되지 않는>만이 감정의 양면을 지닌다.


장혜경이다. 


1) 제논의 역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2) 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


용서되지 않는 

 제 32회 젊은연극제 평택대학교 연극영화과 참가작

2024년 6월 16, 17일 대학로 공간아울

출연 고정훈 공유림 김경수 김은수 서은지 이원빈 이채은 전태유 최민서 최재욱 최지연 하지호

원작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 각색 임승태 <진리는 나의 빚>

연출 안성환 / 조연출 강정희 전우진 / 무대감독 허태환 / 기획 강민서 박규민 / 기획보조 정수아 / 음향 김예인 박재원 / 조명 이재형 / 조명디자인 백은열 / 무대디자인 김혜성 / 무대 안성주 홍승민 박경두 / 의상,분장,소품 조혜은 김다혜 김주미 / 진행 김가연 박성실 최해안 / 촬영 정진욱 홍윤제 / 지도교수 서나영


사진: 임승태


2024년 9월 17일 화요일

좌표추「ㄱ」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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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이 글은 아래 링크에서 출력용 문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체험에 앞서
체험용 좌표추「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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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습니다, 도와주세요.

·무엇을 잃어버리셨나요?

:모르겠습니다, 도와주시겠어요?

길을 잃은 사람도 물건을 잃은 사람도 찾아가면 됩니다. 잃음을 찾음으로 벌충합니다. 하지만 잃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민 휴대전화는 단서일 것입니다. 으레 위치나 사진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들여다보니

「부응해 오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검은 깃털 붙은 생물 무리 앞, K는 지하철 의자에 뻗어 잠든 인간이다. 갸웃거리는 머릿덩이가 가볍다. K는 무겁게 선생님이라 불러야 했지만.」

·선생님, 죄송하지만 뭐가 뜨질 않네요.

:뭐가 떠야만 하나요?

·제게 잃어버린 걸 보여주시려던 것 아니셨나요?

:그냥 잠깐

「“맡아줘, 너네 집은 안 혼나잖아.” ‘선생님’이 더할 나위 없는 존경을 지기도, 부박한 냉소를 지기도 하듯, 맡김과 맡음이 맡는 대상의 무게는 다르다. K는 조류 공포증이 있다. 그래서 존칭하고, 피하고, 주도권을 넘긴다. 너무 넘긴 나머지, 시커먼 천을 뒤집어써 머리부터 음성까지 변조된 ‘주인’에게서 원치 않는 선생님 하나를 떠맡는다.」

손바닥이 왜 바닥인지 알았습니다. 으름장 놓듯 휴대전화를 내려놓을 자리가 되어야 했으니까요. 심지어 액정이 아래를 보니 구경거리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시죠?

:도와주시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무것도 안 뜨는 휴대전화가요?

:빈손과 그렇지 못한 손이요.

양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이 두 손을 지칭한 것인지, 휴대전화 주인이 가진 빈 손과 휴대전화로 평평해진 손의 대비를 칭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뭘 해야 될까요 이제?

:뭘 해야 될까요?

「앵무새, 구관조, 찌르레기, 까마귀. 말을, 소리를 흉내 내는 새는 많다. 십장새도 그런 새인가 보다. 들어본 적 없지만, K는 개의치 않는다. 않아야만 한다. 그리도 무서운 새와 함께인데, 말하는 새라면 말도 통할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생존하기 유리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 새는 반드시 하루에 한 번 외출해 사람 많은 곳에 증식한 탄산가스, 어쩌면 이산화탄소에 중독되었다는 점에서 더한층 사람 같다. 대중교통은 공황발작을 잘 일으키는 장소고, 주요 증상인 과호흡은 이산화탄소 부족으로 일어남을 고려할 때, 중독을 밝히며 헐떡이던 십장새는 진묘하게도 그 크기 못지않게 인간 같다. 욕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K는 십장새에게 욕을 뱉는다. 아기 먹일 정도로 잘게 씹어 준 것도 아니다. 꼭꼭 씹어 삼킬 여유도 없는데 무슨. 꾹 참는다. 분쇄되지 않은 말이 기도 벽을 구르고, 퉁겨져 오른다. 잘못 없이 험담을 듣고도 잘못 없는 자신에게 대갚음하는 메아리를 낸다. 이로써 십장새는 흉내를 멈추고 속엣말을 한다. 외출하자며 K 손목에도 묶어 준 끈은 파랗고, 리본 모양에, 동등하게 광택이 돌고, 연결된 중간이 띄지 않더라도 둘은 ‘매여’있다는」

·나가실 건가요?

:나갈 수 있을까요?

·나가지 않고 잃은 걸 찾을 수는 없잖아요.

:도와주신다고 했잖아요.

·제가 찾기를 바라시는 거 아닌가요?

:제가 찾기를 바라는 건데요.

·그러니까, 그걸 못하시니까 저를

:못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건데요.

·그걸 제가 찾아내라는 말씀이잖습니까?

:도와만 주세요.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렇다면 잃은 ‘것’보다야 ‘곳’에 가까웠을까요? 길은 가는 것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아니면 기억마저 잃은 이로서는 잃음을 찾음으로 벌충한다는 이상이 듣지 않는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의 분실로 더 이상 홈에 들어맞추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찾은 다음 기억해 내면 홈에 끼우기는커녕 홈을 끼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억을 돕는다? 그러려면 자극이 필요합니다!

·나가야만 기억을 도울 수 있어요.

:이미 나감보다 더 나갔을 거예요. 나가봤자 지금보다 더할 수는 없다고요.

·무슨 말이죠?

:‘파랑새’라는 글자를 쓴다고 해 봐요. 마침 파랑색 펜이 있어요. 쓰고 싶겠죠. 파랗게, 파랑새를.

·그렇긴 하겠죠.

:그 욕구를 안고서 이제까지 쓴 색 펜을 그만두지 않는 거예요.

·왜요?

:그래야

「나간다. 산책 간다. 참새의 지저귐을 귀여워한다. 십장새가 보송한 K에게 넌지시 헤드폰을 걸어 준다. 헤드폰이 새를 통째로 번역한다. 청각 정보와 시각 정보가 죄다 덧입혀진다. 깜찍하던 참새가 험상궂게 욕지거리를 한다. 종종걸음치던 참새는 온데간데없고, 볍씨에 두손 두발 다 건 난봉꾼만 남았다. 억울한 난봉꾼, 그놈의 “씨빡새끼”한테 볍씨 스무 알을 꾸어주고 뜯긴 난봉 難捧 꾼. K는 겁날 텐데도 묻고 듣기 바쁘다. 참새의 울분이 내는 달각거림. 보고 듣다 못 한 십장새는 순찰 담당 비둘기를 호출한다. 바바리코트 입은 수상한 행색의 비둘기는 신사적인 태도를 반짝 보이다 이내 참새를 제압한다. 재촉에 떠밀려 손목 파란 끈으로 분출을 틀어막는 K. 다리가 가지런히 묶여 얌전해진 참새는, 변함없이 볍씨 스무 알을 호소하고, 그러다 격분하여 비둘기에게 때려 잡힌다. 질질 끌려가는 다리, 뿌듯한 비둘기와 개운한 십장새 사이 쥔 손바닥처럼 희게 질린 K가 있다. 꼭 십장새의 말버릇처럼, 한 손은 마음을, 다른 손은」

휴대전화를 힘없이 쥐었습니다. 부탁하는 쪽이 뒤바뀐 듯했습니다. 뭐든 좋으니, 단서를 내어 달라 애걸복걸해야 할 판이었지요. 쥔 것이 펜이었으면 좋았을까요? 답답함을 써 내릴 수라도 있었을 테니!

:마음에 드세요, 그거?

·뭘 원하시는지를 말씀해 주시죠.

:도와줄 자신을 잃을 것 같나요?

·잃은 건 선생님이시잖습니까?

:잃은 거지 잃을 건 아닌걸요.

·맙소사. 정신을 잃을 것 같군요.

:쥐고 있으니까요. 

「남의 것을, 참새의 경우 볍씨 스무 알. 안절부절못하는 K를 위해 십장새가 건넨 해결책이다. 남의 것을 나의 마음으로 나누어 쥔다. 마음대로만, 나누어 쥔다. 쥐고, 가슴에 가져다 대고, “자유로워졌다.”며 안심하면 된다고 한다. 남의 것은 힘주어 움켜쥘 수 없다. 그렇다고 힘 빼면 “떨어트린다!”. 떨어트린 사람은 다시는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쥔다. 나는 법 배우려는 아기 새 떨어질라, 쥐어서라도 붙잡으려 한다.」

·그럼, 이거 그만 놓을까요?

:안 돼요!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말만 했습니다. 행동한 쪽은 따로 있었습니다. 마치 휴대전화를 쳐들기라도 한 것처럼 빈손이 그렇지 못한 손에 매달렸습니다. 

·그럼 도로 가져가세요. 저는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안 된다고요!

·뭐가 그렇게 안 되는데요?

:내가 잃어버린 건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돕기도 전에 돌려받으면 나는, 나는

「잘못을 저질렀다. 놓아주면 잘못이 남고, 놓아주지 않으면 사람이 남는다. K는 놓친 죄로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사람이어야 한다. 어릴 적 떠맡은 새가 잘못돼서 책망하던 친구가 머릿속에 집 짓고 산다. K가 어디에 살든, 항상 한 층 위에 몸 겨우 누인다. 누웠다, 일어났다, 구경하다 “떨어트린다!”하고 함성도 내질러 보고. 저 조막만 한 정수리로 기웃기웃하는 것이 흉물스럽다는 듯 수치를 줘야 한다. K가 고개를 조아리며 간청했을 테니. 다시는 놓치지 않기 위해 ‘꽉’ 빈 주먹을 쥔다. 십장새는 틈을 놓칠세라 “새가 돼 볼래?” 한다.」

:영영 찾을 수 없어요. 

·어차피 못 찾을 거라면 이게 옳지 않나요?

:그게 어떻게 옳아요?

·당신은 도로 찾은 사람이 되고, 나는 도운 사람이 되잖아요.

:실상 찾은 사람도 도운 사람도 없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 비슷해요. 이러다 못 찾으면

:우리는 처음부터 비슷해요.

「매무새는 십장새와 대등하게 소통하는 유일한 새다. 알록달록 촘촘히 도르르 빛나는 전구 망토 날개를 뽐내는 새. 십장새가 외출을 겁내며 과호흡을 겪는 점과 같이, 매무새는 날지 못하고, 울음소리가 없다는 인간다운 면모를 보인다. 이죽대는 매무새는 말한다. 울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대화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헤드폰 없이도 새를 알아듣는 K-솔로몬의 권능이었을 것이다.1) 매무새는 십장새와 낳은 알 이야기를 꺼내고, 나가떨어진 알 하나 인간이 주워가 키우다 고양이한테 먹혔다는 데까지 굴린다. 데구루루. 둘의 아이가 남긴 눈알 말아쥔 주먹. 희게 질린 십장새는 ‘새’를 내던지고 간다.」

·따지고 보면 도움이 필요한 건 휴대전화도 없는 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슷하다면.

:글쎄요, 보통 부족해서 모으잖아요. 그러다 쥐고.

·그래서 켜지도 못하는 전화기를 쥐고 계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내가 부족하네요.

:도와드릴까요?

護. 도울 호 자는 隹. 새 추 자를 又. 잡고 있습니다. 잡은 손이 새를 保護. 보호할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그저 새를 잡는 중 言. 사람 말이 관여했다 해서 허울 좋게 도우니 마니 하는 것이겠지요. 잡아 놓고 나불대는 주둥이의 가벼움. 마치 애꿎은 새 잡고 나니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한 사람이네요. 쥐는 것은 매한가집니다.

「K는 십장새를 찾는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러 쫓는다. 그 길에 서 있는 빡새, 쿠새, 노새를 만난다. 빡새는 K가 동물 학대범, 유기범이 아니냐며 겁박해 사탕을 갈취하고, 쿠새는 구애의 춤을 선동한다. 춤이 서툰 K는 쿠새에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 보였다. 새를 버린 덜 된 새라. 제 새끼 간수도 잘 못한 십장새를 닮았다. 조류 공포증의 진위를 따지자는 심보는 아니다. 다만, K는 새를 무작정 피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다. 갈수록 새와 가까워지고, 자신이 새 같다는 말을 듣고서도 말똥말똥 멍하다. 새보다 기억이 무서웠다면? “인생 최초의 책임감, 그리고 죄의식”이 새로 지어졌다면? 차마 되새기지 못한 잘못, 죄로 유보되기 전 팔팔하던 잘못을 체험한다. 십장새가 내버린 ‘새’를 쓰고, K는 차라리 새가 되고 싶다.」

·난 찾고 싶은 게 아닙니다. 도움은 필요 없어요. 여전히 당신을 돕고 싶지만, 이건 돌려드릴게요.

군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아까 피운 소란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손바닥이 가볍습니다. 오직 손바닥만 가볍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찾으셨나요?

:비슷하지만 같지 않아요, 당신은 찾길 원하지 않으니까요.

·아까는 돕기만 하라면서요?

:그랬죠. 하지만 당신은 찾는 걸 도우려던 게 아니에요, 돌아가기를 바랐던 거지.

·당연히 되돌아갔으면 하죠, 원래대로.

「죄의식에 나를 나 밖으로 내모는 감각이 샘솟는다. 몸이 있기에 내가 나 안에 ‘들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 안팎은 인체 내부와 외부를 들락거려 질펀하다. 거슬러 오르자. 타자와의 관계맺음 이전의 내외, 떼려야 뗄 수 없는 속과 겉. 지도보다도 길보다도 오래된 점, 빈 주먹 쥐고 꽉. 손의 안팎은 손바닥과 손등으로 치지만, 주먹 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손바닥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손등은 꺼지고 손바닥 안과 밖이 튀어나온다. 따라서 주먹은 안팎 아닌 속겉으로 부풀어 오른다.」

:되돌아간다고요? 어디로요?

·잃지 않았던 상태로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던 때로.

:난 찾고 싶지, 찾아가고 싶지 않아요.

·길이 아니라 물건을 찾는다는 말씀이신가요?

:잃은 걸 찾더라도, 나를 찾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에요.

되돌아감은 나를 찾아감을 의미합니다.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이라고 다 잠잠할까요?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헤르베르트 플뤼게는, “행복감에서 나는 내 몸의 상태를 전혀 인지하지 않는다”고 논한다.2) 주먹도 그렇다. 평화로운 손바닥 한 점의 여유를 즐긴다. 겉을 느낄 때는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다. 속이 다쳐도 겉으로 울린다. 필요에 따라 속은 겉으로 넓어지고, 이 움직임을 배속하면 우글거리는 점이 된다. 어디까지 속으로 정할지는 점에 달려 있고, 점은 ‘나’이기도, ‘나’를 내쫓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예 겉으로 빠지지 못한다. 내가 빠지는 순간, 속도 겉도 없는 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내몰린다. 속에서 제일 겉에 벼랑길 돌듯 붙는다.」

·그럼, 계속 이대로도 괜찮으신가요? 결국은 찾아서 돌아가야 하잖아요.

:찾을 수는 있겠죠. 못 찾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나는 이동하지 않습니다.

·잘만 움직이고 있으면서 이러깁니까?

:목적지일 수는 있어도 도착지는 아니라는 겁니다.

나가자는 권유를 극구 만류한 까닭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그런데 또 목적지는 된다니, 향할 곳으로 삼기는 가능하다는 말 같았습니다. 삶은 잃음을 연계하여 경로처럼 포장합니다. 나를 찾는 과정이라며 열심히 양손에 무어를 챙겨 꾸립니다. 진정한 나로 거듭나기 위해…

「나를 이탈 離脫 해야 숨이 트인다. 죄의식은 내가 나라서 사라지지 않는다. 離. 새라서 괴로워 새를 떠나려 하는 십장새, 새를 놓친 인간을 떠나고 싶은 K. 십장새는 K가 무대에 없을 때만 올라 다음 장면을 짓고 황급히 나간다. 십장새가 당기는 대로 끌려오는 K, 역시 파란 끈은 서로를 맸다. 끌려가 본 마지막 새는 노새다. 새에게 시간은 밤낮 아닌 달이 해를, 해가 달을 쫓는 술래잡기라고 방실방실 웃으며 K를 쫓아간다. 기겁하며 달아나는 K도 웃지 못할 말을 웃으며 하는 노새를 흘려들을 수 없었다. 죽어가는 친구가 음식물 쓰레기 중독이니 그걸 달라, 없으면 뱃속에 있는 거라도 달라는 말이었다. 머뭇거리던 K는 이윽고 시키는 대로 게워 내는 버섯을 먹고, 친구는 죽는다. 죽고 나서야 ‘욱’. 토악질한다. 노새는 토사물로 사체를 축인다. 속이 울렁거려 괴로워지면, 이 속이 내 속이 아니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란다. 그런다고 울렁거리는 속이 겉으로 밀려나는 일은 없다. 내가 밀려 나간다. 겉을 속으로 토한다. 간신히 점 속에 붙어 있던 나도 외면하고 있던 기억도 한달음에 속으로 뿜어져 나온다. K는 십장새로 향하는 매무새, 빡새, 쿠새, 노새 모두를 도우려 했다. 속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십장새를 찾아갈 희망 잃은 K에게 남은 방법은 구토뿐이었다. 담담한 노새를 뒤로 하고 연신 “미안해요” 하고 오열한다. 때늦은 참회를 퍼붓는다, 욱.」

·당신이 잃은 것은 뭔지 모르지만, 당신이 찾는 것은 당신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기에 찾을 수는 있어도 찾아갈 수는 없고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물건보단 장소에 가깝죠, 맞나요?

:그런 것 같아요.

·우선 그 전화기부터 켜 보면 어때요?

:…네?

·왜, 일종의 좌표 같은 거잖아요. 찾은 척도 해보고, 아니면 잃은 셈 쳐도 되고. 일단 손에 있는 것부터 힘껏 쥐어보자고요.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켜 보면 알겠죠. 좌표가 빈다고 점까지 없어지진 않잖아요?

「K는 십장새를 찾으며 돌아가는 길을 잊는다. 또한 극이 다양한 새를 이정표 삼아 나아가기에, 모든 것이 K의 ‘여정’으로 보이기 쉽다. 한편, 속과 겉이 요동치는 한편, 달-해-달-해 술래잡기하는 한편, K와 십장새는 찾아가지 않는다. 듬성듬성 검은 터래기 훌륭한 깃털 무더기 될 때까지 ‘새’로 된 K가 절규하면서도 새를 끝까지 이행하는. 죄를 쥐어 들어 올릴 힘은 내도 된다는 결단이다. “자유는 무거운 거니까.” 그렇게 말한 K가 날아가자, 한 층 위 친구가 십장새를 따라 천천히 눕는다. 할 일을 다하고 겨우 내쉬는 숨처럼. 얼마 안 있어 변조된 주인이 들어온다. 맡긴 새를 찾으러 왔다는데 새는 나가고 없다고 대답한다. 이곳에는 인간밖에 없다. 주인은 오로지 맡기기 위해 새가 필요하고, ‘인간 하는’ 십장새에게 새가 되어보겠냐고 제안한다. 저가 한 말 메아리로 돌려받았다. 이다지도 K와 십장새는 앞으로도 내쫓고, 내쫓기리라. ‘나’로 말미암아 우글대리라. 함부로 여정이라 부르지 말라. 조감 鳥瞰 하려 들지 마라, 제아무리 붕새 鵬 일지라도 점 볼 길 없이 길만 굽어보니.」

그나저나, 검은 깃털과 비명은 어울려 마땅해 보입니다. 허나 검은 새가 불길한 징조라는 속설에 기대다 보니 조류 공포증이라는 한 가지 가능성에 엎어지기도 하겠습니다. 꽉. 하고 욱. 하는 ‘기역’ 자는 모양도, 발음도 꾹 눌러 막는 듯합니다. 그러니 무겁겠지요. 이동하지 않지만 움직이는, 매달린 추 錘 처럼 말입니다. 어이쿠, 마침 반가운 새도 날아옵니다. 휴대전화 전원은 잘 켜셨는지요? 내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어드리리다. 자, 다 같이 하나, 둘-

⁖좌표
隹 추
「ㄱ」
.

〈색인〉

▷ 難捧 난봉_꾸어 준 돈이나 물건을 되돌려받기 어려움_표준국어대사전

▶ 護(도울 호)_護자는 ‘보호하다’나 ‘돕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護자는 言(말씀 언)자와 蒦(자 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蒦자는 풀숲에 있는 새를 손으로 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새를 잡는 모습을 그린 蒦자에 言자를 결합한 護자는 ‘말로 붙잡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말로 붙잡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을 보살피고 돕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護자는 ‘보호하다’나 ‘돕다’와 같이 누군가의 안전을 지킨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_[한자로드(路)] 신동윤

▶ 隹(새 추)_隹자는 ‘새’나 ‘높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隹자를 보면 새의 머리와 날개, 꼬리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새를 표현한 것이다. 隹자는 사전적으로는 ‘꽁지가 짧은 새’로 정의하고 있지만, 실제 쓰임에서는 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隹자는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새의 특성이나 새의 종류와 같이 새와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_[한자로드(路)]

▶ 又(또 우)_又자는 ‘또’나 ‘다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又자는 사람의 오른손을 그린 것으로 이전에는 ‘손’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중국에서는 오른쪽이 옳고 바름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가 어릴 때부터 오른손잡이가 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又자는 ‘손’을 뜻하다가 후에 ‘또’나 ‘자주’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자주 쓰는 손이라는 뜻인 것이다. 특히 금문에서부터는 손과 관련된 여러 글자가 파생되면서 又자는 손이 아닌 ‘자주 사용한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又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여전히 ‘손’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_[한자로드(路)]

▷ 保護 보호_위험이나 곤란 따위가 미치지 아니하도록 잘 보살펴 돌봄_표준국어대사전

▶ 言(말씀 언)_言자는 ‘말씀’이나 ‘말’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言자의 갑골문을 보면 口(입 구)자 위로 나팔과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생황(笙簧)이라고 하는 악기의 일종을 그린 것이라는 설도 있고 나팔을 부는 모습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말소리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言자는 이렇게 입에서 소리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부수로 쓰일 때는 ‘말하다’와 관계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참고로 갑골문에서의 言자는 ‘소리’나 ‘말’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래서 금문에서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여기에 획을 하나 그은 音(소리 음)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_[한자로드(路)]

▷ 離脫 이탈_어떤 범위나 대열 따위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떨어져 나감_표준국어대사전

▶ 離(떠날 리)_離자는 ‘떠나다’나 ‘흩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離자는 离(흩어질 리)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离자는 짐승의 발자국에 덫을 그린 것으로 ‘흩어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離자를 보면 그물 위쪽으로 한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었다. 새가 그물 밖에 그려진 것은 새를 놓쳤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소전에서는 그물이 짐승을 잡는 덫을 그린 离자로 바뀌었고 그물 위로 날아가던 새는 隹자가 되어 지금의 離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離자는 ‘새(隹)가 흩어지다(离)’라는 뜻으로 해석된다_[한자로드(路)]

▷ 鳥瞰 조감_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눈으로 관찰함_표준국어대사전

▷ 鵬새 붕새_하루에 구만 리(里)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想像)의 새. 북해(北海)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해서 되었다고 한다_표준국어대사전

▶ 錘 추_끈에 매달려 늘어진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_표준국어대사전

᛬᛫_부탁해 오듯 난처하게 물은 이름 잃은 앱을 잃어 찾는 승객 자리 옆. 나는 버스 의자에 앉아 응한 인간이었다. 갸웃거리는 손가락이 가볍다. 나는 무겁게 모르겠다며 돌려드려야 했지만_장혜경





연극 <십장새>
2024.6.14.-6.22. 평일19:00, 15:00
신촌문화발전소 공연장
 
십장새를 찾습니다.
 
이것 좀 맡아주라. 너네 집은 안 혼나잖아.”
그런 날이 있다.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에 취약해 지면,
 
거절하지 못했던 그 날의 기억,
잊고 있던, 잊고 싶던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이
거대한 괴물처럼 요상하게 짜깁기 되고, 과장되어
자꾸만 꿈속을 날아다닌다.
인생 최초의 책임감, 그리고 죄의식
퍼드덕ㅡ퍼드덕-..
! 선생님... 어느 쪽으로 가실 거예요?”
 
출연 | 김병건, 김수완, 김진복, 이가은, 이관목, 이지혜, 이현경, 조은, 홍명환
작연출 | 수정, 진행 | 김강태, 무대감독 | 손청강, 오퍼레이팅 | 강유나, 음악 | 우치, 그래픽&의상 | 사니, 조명 | 호랑이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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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문화발전소 창작자의 공구함 [미술 비평 글쓰기 워크숍: 비평, 절망을 버티며 쓰기] 에 힘입어 들어 올린 글임을 밝힌다.

2024년 7월 8일 월요일

死의 화법으로 행복을

추상은 (@choosangeun


*다음 글에는 자살 및 동반 자살, 유서, 기계 사고로 인한 장애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연극을 고르게 된 데에는 여러 얄팍한 요소가 작용했다. 유명하다 하는 뮤지컬들을 꽤나 자주 보곤 했으니 새로운 장르의 공연을 보는 것도 좋겠다는 일종의 모험심과. 그렇다고 티켓팅이 아주 어려운, 성공의 확률이 나의 손가락에 달려있는 그런 공연은 영 어려울 것 같다는 조금의 자신감 부족과. 유명하지 않은 연극을 보겠다면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연극을 보는 게 더 낫겠다는 소위 ‘홍대병’ 정도가 그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예매의 과정은 아주 즉흥적이었다. 검색창에 대학로 연극을 검색하고, 사이트에 들어가서 진행 중인 공연 리스트를 클릭했다. 제목 아래에 간략하게 적힌 한 줄 소개를 읽긴 하였으나 이는 결정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연극의 분위기를 추측하며 3분 정도의 고민을 하였다. 예매 전 과정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대학생 할인을 적용하니 연극 티켓이 영화 티켓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것이 다였다.

   극장에 가는 길까지도 나는 연극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아는 배우가 나오는 것도,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극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연극에 가슴 설레기 시작한 순간은 지하 소극장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제목에도 ‘사진’ 이 등장하는 이 연극은 허름한 골목에 위치한 ‘추억관’ 이라는 이름의 사진관이 배경이다. 하나 특별한 게 있다면 이 사진관은 어떤 사연 때문인지 영정 사진만 찍어준다. 어느 날 새파랗게 어린 고등학생 소년이 영정 사진을 찍어달라며 찾아왔는데, 사진사가 이 터무니 없는 부탁을 거절하자 소년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얼마 전 엄마의 유서를 발견했는데, 모든 가족들의 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태를 막을 방법을 찾던 사진사는 고심 끝에 공짜로 가족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소년 더러 가족들을 데려오라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연극은 시작된다. 

   ‘추억관’ 은 아주 좁았다. 극장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나의 예상 밖이었던 것은 20평 남짓한 무대의 형태였다. 객석이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으로, 정사각형 공간의 네 변 중 ‘ㄱ’ 자 모양의 두 변이 무대라면 나머지 ‘ㄴ’ 자 모양의 두 변은 계단으로 된 객석이었다. 관객들이 배우들의 숨소리까지도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는데, 가장 아래에 있는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이 연기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종종 움찔거리기도 하였다. 나는 그 좁은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주 기대되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힘을 합쳐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하고, 공을 들인 결과물을 보는 일은 언제나 설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걸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연 시작 몇 분 전, 묘하게 들뜬 공기 속에서 제작진의 땀이 묻었을 세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감정이 덜컥 마음을 덮쳤다.

   엄마가 동반 자살을 계획한 이유는 ‘언제 또 불행이 닥칠지 알 수 없으니’ 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의 현실은 너무나도 기구했다. 중졸인 엄마는 파출부 일을 한다.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도주했고, 집에는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빨려 들어가 오른팔이 없는 삼촌이 함께 산다.

   극 중반부에 아빠에게 보증을 부탁한 사람이 사진사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진사도 동반 자살의 멤버가 되는데,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6명이 신세 한탄을 하거나 다같이 황당한 자살 방법을 생각해내 한번씩 해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목에 넥타이를 매고 서로 당기기, 젖은 셔츠를 목에 묶고 잠에 들기 등이 그 방법들이다. 그러다 “이렇게 해선 안 죽는 거 다 알지 않느냐. 다들 죽기 싫으면서 왜 자꾸 다들 죽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딱 한 달만 더 살아보면 안 되겠냐” 는 둘째 딸의 발화를 계기로 다들 집으로 돌아가며 연극이 끝난다.

   극 내내 배경은 ‘추억관’ 에서 바뀌지 않았고, 삼각대에 세워놓은 카메라 말곤 이렇다할 소품도 없었다. 정말 배우들의 대화와 감정 연기로 연극의 퀄리티가 결정되는 연출이었다. 극을 보면서 나에게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감상은 ‘극의 내용이 재미있었다’, ‘공연의 비주얼이 좋았다’ 도 아니고 ‘배우라는 직업은 정말 멋진 직업이구나’ 였다. 관객은 무대에서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게 되기 마련인데, 컷 편집이 되어 관객의 눈 앞에 발화자를 가져다 주는 영화와 다르게 연극은 발화자가 대사를 시작하면 관객이 직접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혹은 의식적으로 반대로 행동할 수도 있다. 발화자가 대사를 뱉는 동안 그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은 본인이 맡은 배역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의 공기까지도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분명 스크린을 통해선 절대 알아낼 수 없는 ‘무언가’ 였다. 공연을 마치고 엄숙한 표정으로 관객에게 인사하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일종의 사명감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땅을 치며 우는 연기를 펼치고 있었음에도 내가 그들에게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행복은 잠깐입니다. 그러니 놓치지 마세요. 다른 생각 말고 그 순간을 즐기세요.”

   입장할 때 받았던 팜플렛 속 연출의 말 한 구절. 공연 시작 전 침침한 조명에 의지해 팜플렛을 읽어 나가던 중 가장 마음에 콕 박힌 말이다. 제목에 죽을 사死를 이렇게나 크게 써놓고는 어떻게 이 연극으로 행복을 즐기라는 말을 전하려나 싶었다. 하지만 연극을 끝까지 보고 극장을 나설 때의 나는 꽤나 행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행복한 상태를 백프로 즐기라는 연출의 말을 찬찬히 곱씹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행복한 상태임을 인지한 상태로 행복했다.




가족死진
2024.5.29~6.9 
동숭무대소극장
제24회서울연극제 자유경연작

주최 서울연극협회
주관 서울연극협회 집행위원회
제작 극단 동숭무대, 극단 몽중자각
작/연출 김성진
출연 민병욱, 이성순, 김성태, 류지훈, 권겸민, 명인호, 안동기, 김남호, 박인서, 박소연
기획 김유정
프로듀서 박민지
무대 유다미
조명 김광훈
조연출 윤경화
오퍼레이터 윤소이
사진, 그래픽 박주혜

2024년 6월 6일 목요일

O…U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발이 보슬보슬하다. 이전은 서걱서걱했다. 마당은 잔디와 돌 몇 덩이로 차 있었다. 그래서 서걱서걱했다. 신발은 발과 함께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슬보슬하다. 공연 전 원하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관객이었다. 카펫 바닥이 양말과 마주 댈 때마다 보풀이 수많은 알에 달라붙고자 했다. 오른 벽에 돋은 계단을 오르자, 방 몇 개와 창이 있었다. 닫힌 문 하나를 열자 흰 양복 차림 한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한 사람은 두 층에 병존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내려가 피아노를 쳤다. 공간에 들이치는 흰 양복 차림 한 사람. 2층 관객은 다가들고, 1층 관객은 자리 잡았다. 공연에 익숙한 집단 습성인지, 외부 자극에의 호기심인지 단정 짓기 어려웠다. 시작 시각에서 약 3분이 흐르고, 서걱한 출입에서 스포이트로 손등에 물방울을 내려준 한 사람이 공연은 마당에서 시작된다고 알렸다. 정박했던 관객은 일제히 신발 차림이 됐다. 발이 서걱서걱하다. 관객은 안내에 따라 마당 한 귀를 에워쌌다. 발이 참 많다. 등장한 한 방울의 나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발 틈으로 흘러온 나의 말은 메이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메이는 파란 지구에서 빨간 지구를 산다. 사람이라 테두리 바깥에 붙어 산다. 대리나 주임쯤을 단 주변 사람을 위한 날에 빨갛게 동그라미 친다. 그들은 사람이라서 테두리 안에 산다. 워낙 잘 우는 메이에게서 태어나자마자 발밑으로 굴러떨어진 나. 이번 생은 웅덩이라지만, 눈물이었던 지난 생에 고여 있는 듯했다. 소리도 진동도 필요 없이 표표히 돌단 위 창으로 들어가 따라오라 손짓하는 나. 도로 양말 차림을 하는 관객. 발이 보슬보슬하다. 발의 감촉을 잘 기억해 두자. 

떠도는 나에게 강이 말을 걸어온다. 대화는 모두 피아노로 걸려 온다. 흰 양복 차림 한 사람이 치는 고체음. 고체를 매질로 두고 벽으로, 바닥으로, 그러다 공기로 퍼져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음은 대체음이기도, 아니기도 할 것이다. 다른 존재인 오리나 바람이라면 변환되어야 말이 통하겠지만, 같은 물인 강과 바다는 변환이 무용하다고 추측했다. 이 고체음은 나에게 말이 오는 형태이며, 같은 언어를 쓰든 쓰지 않든, 그리 오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반드시 ‘피아노 소리’로 온다고 확신할 수 없다. 사람에게 내가 받는 형태를 변환한 결과로써의 피아노 고체음일 수 있다는 말이다. 어째서 이 음이 대체음으로 발탁되었을지를 나의 말에서 알아내길 바라며 들었다. 강은 제법 큰 물인데도 괄괄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나에게 차근차근 교섭을 시도한다. 나는 기죽지 않고, 도리어 강이 나와 함께 ‘나’가 되고 싶어 한다고 알아듣기도 한다. 강도 물러서지 않고 함께 강이 되자고 설득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큰 물은 기쁘지 않다면서. 이는 ‘’ 개념과 상응한다. 나는 합주 전 조율을 위한 ‘라’ 음을 내듯, 명상을 위한 ‘옴’ 소리를 내듯, 낮고 일정한 음정의 ‘온’을 길게 빼낸다. 물세계에는 물 하나에 온 하나라는 규칙이 있다. 온은 전부이자 일부이다. 모든 온은 단일 개체의 전부이고, 복수 개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 한 방울의 전부를 상실하지 않으려 강을 거부한 것이다. 난 두려운 게 아니야, 그리운 거야. 물에게 죽음은 이전의 나와 다음의 내가 ‘너’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죽음은 나 하나 떠내려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메이를 잃는 것이다. 메이의 일부였던 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실이 아닌 상실이다. 나는 넘실거린다. 저러다 부딪혀도 섞이지 않을 관객에게 넘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동화의 춤’은 화려하고, 전형적인 춤 같았다. 즐거운 기색으로 나풀거리는 나에 매료되어 그만 ‘동화’를 동심 가득한 의미로 알아들었다. 착각에서 건져 올려진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갈라져야 했다, 거실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나를 위해. 따뜻한 노란 빛을 내는 구체 조명이 하얀 다각형 탁상 아래 놓였고, 저녁의 푸른 빛이 마당 풍광과 한데 비쳐 들어오는 얇은 커튼이 홍색 중심의 긴 털실 구조물과 같은 높이에 걸려 있는 방이었다. 이 털실 구조물은 계단 옆에서 아래로 걸린 거미줄 같은 구조물과 비교했을 때, 그물 같았다. 갈라져야 했다. 길을 터주는 것은 나를 따르는 것이다. 이전 이동에서 맨 앞 관객이 다음 이동에서 맨 뒤 관객에 되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벽에 바싹 붙어 나를 보았다. 

쿵쿵 소리가 뒤꿈치 같았다. 강물이 되지 않기 위해 도망쳐 들어온 곳이 오리의 뱃속이라니. 건반 모르게 밟은 페달도 음을 낸다. 실낱같은 심음은 박동에 간신히 붙어 있다. 설명 앞에 서는 알아차림. 오리 뱃속임을 몰랐다 뿐이지, 방과 울림으로 생명체 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메이의 눈물. 오리가 될 순 없어. 실핏줄을 뒤집어쓰면 부속될 수 있다. 전부는 아니 될 수 있다. 털실 구조물을 쓰고 탁상 위에 앉아 기울이고 펼치는 나. 빛나는 구체를 쓰다듬는다. 너와 함께 네가 되고 싶어. 그 말이 어디를 향하는지 생각했다. 살아있는 알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네는 나. 알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더 있었는데, 어째서 기억이 흐릿한지 나는 의아해한다. 살아있는 알은 아기 오리로 되고, 나는 거실 계단에 앉는다. 다른 벽에 바싹 붙어 그림자극 마임처럼 손과 팔로 나타낸 아기 오리를 구경했다. 통통 튀는 고체음. 더 이상 아기가 아니더라도 아기로 기억할 수 있도록, 나는 아기 오리에게 비비라는 이름을 준다. 정작 나는 이름을 받은 적이 없다. 메이는 사람이고, 사람은 눈물을 방울방울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눈물은 기억에서 감정으로 흐르며 나오는 부산물이고, 떠날 것이 확실하니 미련 없이 기억으로 상납하는 한 때의 유실물이다. 눈물 전후로 감정이 차 있고, 그 감정은 눈물 전후로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눈물은 감정의 과도기이자 기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눈물은 방울방울 다르지만, 유일하지 않다. 나는 메이의 눈물 중에서도 한 방울로 존재하지만, 한 방울의 ‘나’로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잊지 않아도 잊히는 기억을 말하던 내가 떠올린 기억. 비비의 엄마가 나의 일부를 먹은 일. 잊힌 알의 기억이다. 이는 메이의 눈물이 아니게 되고서 그 사실조차 모르게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충격에 휩싸인 나는 잠시 거실 안쪽 격자 유리 미닫이문을 닫고 모습을 감춘다. 

다시 나타난 나는 바다에 흘러들어 있다. 거칠고 사납고 아주아주 큰 물. 더럽지만 섞이지 않을 농장용 비닐에 들어 있다. 미닫이문이 열리지 않게 등으로, 팔로 버티던 나는 속절없이 젖혀진 오른 틈으로 배출되고 만다. 비닐에 구멍이 났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나. 위아래 문틀에 매달려 몸통만이 관객을 향해 굽이친다. 물 하나에 온 하나. 규칙에 따라 나는 ‘동화의 춤’을 춰야 한다. 이는 병합 의식이다. 물에게 잊어버림은 잃어버림과 같으므로, 나에게 동화는 위협이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던 물세계는 경직된 체제로 있던 것이다. 격랑을 헤쳐나온 나는 하나도 깨지지 않은 나의 ‘온’을 확인한다. 온은 구슬으로 표현된다. 피아노 고체음이 발탁된 이유를 다시금 상상했다. 공기음은 끝이 흩어진다. 반면 고체음, 특히 피아노 음은 끝이 구른다. 음으로 된 구슬 같다. 참 아름다운 경직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구슬이 깨진다. 바다의 온이 깨진다. 바다가 내가 된다. 나는 어디서든지 메이를 느낀다. 메이에게 뻗은 팔은 거둬지지 않고 해일이 된다. 그리움에 죽지 못해 죽인다. 물의 그리움은 이기심이라고 바람이 그랬던가. 묻어둘 수 없는 물은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널브러진 나는 나를 멈춰 달라 애원한다. 잦아든 바다는 나로서 계단을 오른다. 

계단 끝 벽 시작 면에 바싹 붙어서는 왼쪽 방에 쏙 들어간 내가 보일 리 없었다. 방 앞 바닥 희미한 털실 한 둘레만 보이다 메이를 찾았다며 창 앞에 나온 나도 보이게 됐다. 빨간 밧줄을 나뭇가지에 묶는 메이를 보고 있다. 나는 메이가 무얼 하는지 안다. 죽고 싶어. 메이는 고체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와 말한 적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간간이 내가 입에 담는 죽고 싶다는 말은 분명 메이의 말이었을 것이다. 죽음이 물세계 순리라 치더라도 나는 메이를 그리워하기에 죽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리움에 지쳐 순리를 따라가려 했더라도 필히 저항의 말을 따라붙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명한 근거는, 죽고 싶어라고 할 때만 뚝 떨어지는 음조였다. 메이에게서 뚝. 떨어질 때 흘러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은 말보다 감정을 담는다. 죽고 싶어와 같이 태어난 내가 그토록 애타는 마음을 짓는 것은, 메이 안에서 몇 번이고 내쫓긴 애처로움의 반영이리라. 메이에게 가야 한다. 말리는 바람을 제치고 위로 오른다. 2층 창 맞은편에는 계단이 든 방이 있었다. 무수한 물방울에게 사과할 틈도 없이 밟고 위로, 위로, 구름의 꼭대기로. 관객은 이동할 틈도 없이 나와 꼭대기에 와 있다. 나는 마침내 기억하려는, 움직이려는, 사라지지 않으려는 힘, 물의 근원으로서의 ‘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한 사람의 관객에게 준다. 스물다섯 명의 한 사람에게. 어느 한 사람 빠뜨리지 않고 부어준다. 관객에게서 관객으로. 벽 구석에 붙어 있던 관객이라 받지 못하고 넘어가나 싶었지만, 나에 의해 한 바퀴를 더 돌아 받게 되었다. 그 세심함에 정말 물로서 온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눈송이가 되었다. 바람이 성을 낼수록 더 멀리 날아갔다. 나는 메이 가까이에 간다.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너는 눈에 부러진 나뭇가지로 살아남기도 하고, 내린 눈에 파묻혀 다음 계절까지 그곳에 있기도 하고. 무수한 눈송이만큼 무수한 너를 보는 한 방울의 나. 나는 너를 향해 하강하는 거야. 내리는 눈과, 계단을 내려가는 나. 열린 1층 창 한구석, 그 앞에서 끝을 낸다. 꼭대기에 오른 한 방울을 닮은 조명 곁에서, 한 방울의 내가. 

발의 감촉을 기억했는가? 이 공연에서 발의 감촉은 곧 이동이다. 이동은 곧 나의 흐름이다. 관객은 공연 전 서걱한 밖에서 보슬한 안으로 유도 받았다. 공연이 밖에서 시작된다는 예고는 없었으므로, 관객은 주로 안을 탐색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서걱 다음 보슬이라는 ‘감촉 경로’를 공연 전에 한 차례 밟고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서걱 다음 보슬로 이동한다. 공연도 공연 전과 같은 경로를 탄다는 뜻이다. 그런고로 관객은 몰입 전 현실에서 한 차례 몰입의 이동을 경험한 셈이다. 이는 어딘가 모르게 이전의 나와 다음의 나라는 물(水)적 개념을 연상시킨다. 서걱에서 보슬이라는 이동을 두 차례 겪어 완결된 구슬 같은 순환 구조를 띠는 관객과 달리, 나는 서걱에서 보슬로 한 번 이동한다. 관객이 현실과 몰입으로 뚜렷이 나뉜 경직된 질서를 갖춘 것과 달리, 나는 혼재된 흐름을 지닌다. 마지막 장면은 완전한 안도, 완전한 밖도 아닌 곳에서 진행된다. 작은 스툴에 앉은 내가 기억을 되짚는 나인지, 기억의 나인지 알지 못한다. 이를 ‘나로 넘어진 나’로 풀어 보았다. 한 방울의 나는 ‘나’로 넘어진다. 한 번은 나를 잃지 않으려, 한 번은 나를 잃으려 넘어진다. 시작은 메이의 눈물로 있기 위해, 끝은 메이에게 가기 위해. 너를 잊지 않기 위해 나를 잃지 못하고, 나를 잃어서라도 너를 향한 것이다. ‘나’로 넘어진 나의 ‘온’은 그래서 눈물 모양이 된다. 시작과 끝이 ‘나’로 매듭지어지는 구슬에서, ‘너’로 이어지는 눈물로. 너와 함께 네가 되고 싶어…

*필자 요청에 따라 대사 인용은 굵은 글씨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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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승태


한 방울의 내가

2024년 5월 23일(목) ~ 26일(일)
LDK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20길 8)

출연 | 경지은
작 | 현호정
연출 | 우지안
안무 | 하은빈
음악·연주 | 오정웅
미술·의상 | 윤이람
PM | 박종주
영상 촬영 | 김예솔비, 박정연
사진 | 전인
‘작은 모래알’ 원안 | 하은빈
그래픽 디자인 | 정소영
포스터 서체 | Velvetyne BianZhiDai
주최·주관 | 현호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작·공동창작 | 안티무민클럽AMC

2024년 6월 3일 월요일

예) 하고 흔들다.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사과는 장하다.
꼭 이상적인 사과가 아니더라도 사과에는 가죽도 있고 속살도 있고 뼈도 있어서, 곧추세운 척추뼈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깔끔하게 관통할 듯싶으니 말이다. 뼈는 가지런하게 어질러져 있어야 한다. 무작정 팔뼈를 앞으로 뻗어 줄을 맞추자, 옆으로 누워 껍질만 덮고 과육은 빼낸 일자허리 제물이 된다. 차갑고 딱딱한 제단에서 구른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성스러운 빛에 잘 쪼여야 한다. /바치기에 족한가요/ -내셨잖아요 /제 뼈가 그렇게 고아한가요/ -과하다 할 정도는 아니고요 오래 앉아서 문서 작업을 하세요 /사무직이냐고요/ -아뇨 이제 공연 기술 좀 하시라고요 그만 딴짓하고
예?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는 감각하랴, 기능하랴 바쁜데 아프기까지 한 신체를 한탄하는 몸의 책임자가 등장하는 극이다. 각기 다른 몸 셋 깊숙이 같은 몸 하나가 묻혀 있는 느낌을 준다. 그것이 잃어버린 몸이라면, 단서가 될 몸을 파헤쳐야 한다. 몸을 찾기 위해 몸을 해치다니, 지독히 의학적이지 않은가. 과연, 하루 8시간을 앉아서 근무하는 사무직 종사자는 허리가 아프다. 누구도 통증을 받고 싶지는 않다. 돈을 바치고, 몸을 바친다. 병원 측 재량에 따라 나누어 찍고, 나누어 뽑고, 문제만 추린다. 돈은 진료로 돌려받고, 통증은 평온에의 고대로 돌려받는다. 그래서, 몸은 돌아오는가? 돈은 바꿔 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통증은 버린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좇아오겠지만). 몸은 돌려받을 수 없다. 몸은 돌아와야만 한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문제 있는 부분을 자료로 설명받을 뿐이다. 

TV로 송출된 척추 엑스레이 사진을 곁에 두고, 병명을 밝히기까지의 여정은 배우1 (이동영 분)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배우2 (정나무 분)가 보라색이고 초록색인 우유 박스 하나당 주어진 네 개의 옆면을 돌려가며 차별 없이 바닥에 내려쳤고, 이는 매우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배우2가 우유 박스를 소리 내서 선별하는 반복은 노동이고, 차차 생긴 리듬의 빈 구간을 찾아 말을 끊어 연골로 넣는 배우1의 요령은 적응이다. 노동은 적응할 생각이 없다. 요란스레 걸러낸 박스를 바닥에 ‘1’ 자로 길게 나열하면, 배우2와 배우3 (박정근 분)이 위를 밟으며 부적합한 박스를 쳐낸다. 척추관협착증은 사진으로 체감된다. 병으로부터 죽어라 도망치고 싶을 때쯤 의사가 물증을 들이민다. 누가 진단명으로 머리를 뎅 치고 간 것 같다. 직후 나온 가톨릭 성가는 이러한 환자의 심정을 잘 헤아렸다.

사과는 비장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쌓인 우유 박스 탑 위에 군림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신이 아닌 것이 자신으로 비유되는 일을 묵과해야 한다. 배우2는 우리가 이미 진짜 사과를 알고, 먹어본 적 있으므로 우유 박스 탑 위의 비대한 사과가 가짜임을 안다고 했다, 몸에 들어 있는 체계로 판단한다고. 그러면서 진짜를 깨문다. 신체는 비참하다. 단지 일자로 높게 세운 뼈대 구조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빼놓을 수 없는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몸 아닌 신체가 내 몸으로 여겨지는 일을 묵인해야 한다.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모두의 것이다. 모두가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몸은 지극히 혼자의 것이다. 사과의 경험이 베어물지도 않은 사과를 가짜라 판단하듯, 몸의 경험은 겪어보지도 않은 몸을 선뜻 기각한다. 다각도로 바라보면 해결될까? 어느새 배우1은 캔버스 같은 것에 사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다. 세잔이라는 화가는 온 방향에서 묘사한 사과를 탁상 하나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 뻑뻑한 물감으로는 매끄럽게 사과를 그릴 수 없다. 그러다 옆의 배우3에게 묻는다, 가짜 사과를 얼마에 샀냐고. 자그마치 구만 구천 원! 진짜 사과도 하나에 만 원이나 했댄다. 라면 몇 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비발디 사계 중 봄 1악장이 짧게 흘러나오고) 비스듬한 각도로 우측에 앉아 사과를 먹는 배우2의 얼굴이 앞에 놓인 카메라로 촬영되어 TV에 송출되며 그 맛있어하는 표정을 벚꽃이 일찍 개화할 만큼 심각한 기후변화와 심각하게 치솟는 과일값과 심각하게 감소한 수확량에 관한 뉴스 기사 제목들이 날개 돋친 듯 긁고 지나간다 (숨). 미학적 사과를 논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세잔의 의견을 들을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네 사과 ‘각’이기 때문이다. 생중계되는 그는 자신이 오른손잡이라 말하며 왼손으로 사과를 깎기 시작한다. 익숙하고 전형적인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살아있는 일을 한다면서. 손흥민이 왼발을 훈련했듯, 쓰면 쓸수록 단련되는 왼손의 감각을 좋아하는 그의 손놀림은 아슬아슬하다. 아니, 딱히 그 부위가 클로즈업되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다시 사계 중 봄 1악장, 짧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가느다란 전신거울 같은, 그런데 많이 두꺼운, 접이식인, 투명한 듯 그렇지 않은, 뭔가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반지러운 재질의 은빛을 표면으로 두른. ‘그것’이 왔다. 그것은 무대 좌측 구석에 놓이고, 볼록할 철(凸) 모양으로 쌓인 우유 박스 구조물 오른편에 배우3이 앉는다. 배우1은 흰색 물백묵으로 배우3의 얼굴을 그것에 그리기 시작한다. 단, 대상물의 설명에 의존할 것. 대상물3은 이목구비 이모저모를 털어놓는다. 순간, 조목조목 말하던 그가 우물우물한다. 그리는 사람1은 되묻는다. 뭐라고요? 대상물은 마지못해 분다. 그 설명에는 불만이 섞여 있다. 낯부끄러워 고객 센터에 접수하기는 그른 불만이다. 아무리 생김새에 창피함을 느낀대도 TV는 가차 없다. 이 광경은 대상물1과 그리는 사람2 간에도 펼쳐진다. 관객의 눈알은 무대 가로선 끝에서 끝으로 굴러다닌다. 순수 설명으로 그려지는 얼굴과 순수 기술로 송출되는 얼굴. 몸은 그 사이에 끼어 안중에 없다. 관객에게 희끄무레한 ‘진짜 얼굴’은 뒷전이 된다. 마지막 순서인 대상물2와 그리는 사람3에게 장면이 그대로 운반되지 않는 것으로, 몸은 더 찌그러진다. 대상물2가 변칙적으로 “메롱” 했기 때문이다. 이목구비 설명하다 말고 어디 가냐 물을 것도 없이 “메롱”이다. 혓바닥을 내미는 수만큼 혓바닥이 그려진다. 관객은 웃는다. “메롱” “하하하” “메롱” “하하하”. 대사 사이에 낀 지문을 펴서 보면 이렇다. “메롱” (관객이 TV의 혓바닥을 본다) (그리는 사람이 혓바닥을 그린다) (관객이 그려지는 혓바닥을 본다) “하하하”. “메롱”으로 TV는 관객 충성도를 얻었다. ‘그것’에는 차곡차곡 쌓인 가짜 얼굴 셋이 남고, 그것을 보기 위해 등진 배우 셋은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을 부른다. 사과 삼중창은 화음이 없어 하나씩 그만두어도 싱겁지는 않다지마는, 홀로 남겨진 배우3은 헛헛해 노래를 멈췄을지 모를 일이었다.

TV는 잠시 고전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튼다. 영화가 끊기기 무섭게 중앙에 세팅된 우유 박스 무리가 무대 역을 맡았다. 구겨진 돌 같은 얼굴을 쓴 배우3. 아니, 괴물의 이야기가 무성영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배우들은 등장인물 역을 맡아 우유 박스 위나 주위에서 연기를 하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맡아 내용을 내보내는 것이다. TV: 생김새 탓에 배척당하던 괴물이 어느 날 창문으로 보인 한 가정집 풍경을 동경하게 된다. 괴물은 열심히 가족을 모방하고, 방문하기에 이르렀으나, 구타당한다. 짓밟힌 괴물은 우유 박스에 걸터앉아 탈을 벗고, TV는 인터타이틀 역을 벗는다. 배우3. 아마, 괴물은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괴물이라 불리고, 자신은 그 모습을 “너”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어 배우3. 혹은, 괴물은 말한다.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 허리가 아픈 거예요. 아니, 제 고통은 허리에서 오는 거예요. 아니, 제가 아픈 거예요.” 불가역적 변화를 일으킨 몸은 여전히 나로 감각되지만, 통증은 끊임없이 잃어버리기 전을 상기시키며 “너”로 분리되기를 권한다. 현존을 강제하는 동시에 한사코 반대하는 얄궂은 감각이다. 아픔은 몸을 모아 이름을 알린다. 하지만 아픔이 곧 몸이 될 수는 없다. 아픔의 이름이 몸의 이름을 대체하게 둬서는 안 된다.

배우들은 우유 박스를 계단처럼 좌우로 쌓아 마주 앉는다. 자, 어딘가 아픈 곳을 떠받들고, ‘아야아야’ 희랍 비극같은 울음을 내는 가면 쓴 현대인들이 납신다! 물론 가면은 ‘그것’에 그려진 ‘가짜 얼굴’들이고, 울음은 말소리지만 말이다. 대화가 아닌 말소리다. 재건축이라든가, 입봉작이라든가, 요양원에서 일하며 만난 치매 환자라든가. 저마다 하고픈 말만 하기 때문이다. 기껏 마주 앉아 놓고 마주 보지 못하는 노릇이다. 그게 영 갑갑했는지, 배우2는 가면을 벗고 일어나 관객을 마주한다. 요양원 이야기를 잇는다. 치매 예방에 좋은 손벽치기, 손등치기, 손끝치기 (배우는 관객에게 따라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것은 스킨십이랜다 (배우는 객석에 돌격해 열마다 목차처럼 선다). -우리 서로 옆자리 분과 손을 잡아볼까요 /예?/ -악수 말고 손을 잡으시라고요 /예/ -어떤가요 차가운가요 /예/ -지금 내가 손을 만지는 걸까요 상대가 내 손을 만지는 걸까요 /예/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마다의 울음은 마주치지 않아 관객에게 튄다. 어리둥절하다. 본 극에서 주된 긴장을 유발하던 구도는 TV와 몸이라는, 가로선이 아니었던가? 가로용지를 긴 쪽으로 넘기듯 객석으로 덮쳐온 장면이 버거웠다. 시종일관 변해버린 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화자가, 당신들은 몸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하려던 것이었을까? 아픈 허리를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의자였다. 통증은 유사 경험자 간의 공감을 매개로 거리를 좁혀 밀착시킨다. 불꽃이 튄다. 아픔을 나누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부지불식간에 어떤 ‘몸’으로 분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똥이 튄다. ‘손잡기’를 요구한 맨얼굴의 배우들은 무대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 대화 아닌 말소리를 낸다. 멀찍이 떨어지고픈 관객이 된다.

TV는 600타 타자 실력을 가진 사람의 스크립트와 내레이션을 튼다. 키보드를 바꾸고 나니 타자가 느려져 할 일을 시간 내에 마칠 수 없어 곤란하다는 말. 당장이라도 도로 600타를 칠 수 있는 키보드가 필요하다는 말. 몸은 당위에 진다. 해야만 하는 일에 무뎌져야 하고, 무뎌지지 못하면 걸러진다. 600타를 치는 나는 원래의 몸, 600타를 못 치게 하는 키보드는 변해버린 나의 몸. 비친 나를 “너”라고 부르던 그처럼, 우리는 병들어 가는 몸을 수긍하기 어렵다. TV는 신체검사 결과지를 튼다. 배우1: 참여 등급, 배우2: 3등급, 배우3: 2등급(민첩성 평균 이하). 무대 가운데를 천천히 줄지어 도는 배우들이 있다. 배우2: 앞, 배우3: 중간, 배우1: 뒤. TV는 그들의 모습과 내레이션을 튼다. 길을 가다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주변인은 웃게 된다는 말. 주저앉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출 영상 속도가 빨라지고, 뒤이어 배우들도 빨라진다). 습관은 속도를 정했고, 그 속도를 바꿨어야 했다는 말 (배우2가 갑자기 신발끈을 묶는 바람에 배우3이 넘어지고, 배우3의 발에 걸려 배우1까지 넘어진다). 내레이션이 끝나고 (나머지 배우들 사이로 우뚝 선 배우3은 대략 이렇게 고함친다). “이게 다 내 탓이라고? 내 부족한 민첩성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나는 2등급이야. 이 사람들보다 더 높은데. 어우!!!!! 으아아아아!!!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측정 도구가 세밀해질수록, 개인의 몸은 우거진 병명에 가려진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속죄하게 한다. 비록 키보드에 적응할 시간도, 넘어진 뒷사람을 살필 여유도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잃어버린 몸’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몸은 돌아오지 않는데. 몸에 주렁주렁 열린 과실로 믿어온 수식어와 의미, 의미. 그놈의 의미들이 사실은 치렁치렁 매달아둔 과욕이 아니었을까? 너도나도 결실을 맺기를 원하잖아, 안 그런 척해도 다 알아. 이 일도 저 일도 맺고 맺고 또 맺고 끝맺지 못하는 몸은 필요 없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가로로 긴 TV, 가로로 긴 무대, 가로로 긴 우유 박스
가운데
세로로 긴 엑스레이 사진, 세로로 긴 그것, 세로로 긴 사람들.
떠받치기 지쳐 가로만큼 드러눕고 싶댄다.
여행보다 먼저 여행 브이로그를 튼다거나, 영화보다 먼저 영화 요약 영상을 튼다거나.
날 것의 반응은 줄어들고, 그마저도 감각 기관에 굴려져 뭉툭해지고.
어쩌면 나에게 영원을 약속해 줄 것은 통증뿐일지도 모른다는
그래도 가로로 가만히 맞잡고 있기보다는
세로로 흔들어 악수하고 싶다.
그것이 당신이든
통증이든 간에,
잘 지내고
싶으니까.


이 이미지는 필자가 공연을 감상하고 글과 한 쌍으로 작성한 두 개의 그림과 그림 제목이 담긴 이미지이다.

위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1이라는 제목이 달려있고아래 그림은 예하고 흔들기2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두 그림 모두 한국어 글자 예의 이응과 여이 예 자를 분리해 늘어놓은 모양이다.

 

하고 흔들기1

이응 하나를 꼭대기에 두고여이 예 자를 아래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세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하고 흔들기2

이응 하나 밑에 여이 예 자 하나를 쓴 조합을 옆으로 지그재그처럼 찍어두어 가로로 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역사시비 4월]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2024. 4. 5. (금) ~ 4. 14. (일)

만드는 사람들
공동창작
연출_정유진
출연_박정근, 이동영, 정나무
조명디자인_전규상
목소리 출연_송정화
기록 촬영_한문희
그래픽디자인_워크룸
기획_나유진, 노지상
공동기획_창작주체 예술공간 혜화
제작_그린피그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지원사업







2024년 3월 28일 목요일

보기해 보기

장 혜 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18개의 의자로 객석, 한 개의 의자로 무대, 옆의 모니터는 뻐끔뻐끔 열심히 빛으로 말을 뱉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지 1분 이상은 흐른 신촌극장의 객석이 무대보다 먼저 막을 올리며 “해설자”를 선보인다. 해설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맨 뒤 높은 의자의 관객으로서, 그의 해설이 시작되고 1분 이상이 흐른 후에야 이것이 스피커의 음성이 아님을 깨달았다. 해설자는 “상상해 보기” 문장을 차곡차곡 쌓아 사북 삼고, 극장의 살을 탄탄하게 펼쳐 관객의 상상을 부채질한다.


우리는 곧잘 공연을 ‘보러 간다’는 말을 사용하고, 말은 곧장 공연을 ‘보고 온다’는 말로 읽히지만, 상상해 보자. ‘보고 온다’와는 다르게, ‘보러 간다’에는 관람, 즉 ‘보기’가 암시되지만, 보장되지는 않는다. 공연을 보려고 교통수단을 이용해 몇 시간이고 소모했어도, 간발의 차로 입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매한 줄 알았는데, 예매한 줄만 알았던 매진 공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쥘 수 있는 것은 ‘가기’뿐이다. “상상해 보기”로 기억된 수많은 “보기” 해설에서 이러한 ‘미완결’이 느껴졌다. ‘보러 가기’가 곧 ‘보기’가 아닌 ‘가기’를 보장하는 것과 같이, “상상해 보기”도 “상상하기”가 아닌 “해 보기”만을 보장한다는 사실에서.


해설자는 수신인으로서 극장에 도착한 투명한 편지봉투 속 사만 구천 개의 조각 난 편지를 읽어내기 위해 발신인 재현 역으로서 행위자를 소개한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말이 현재, 행위자의 말이 과거를 대변한다고 한다. 자막으로 표시되는 말은 서체로 구분되고, 반투명한 글씨는 음성이 닿으면 테두리 안이 차올라 불투명해진다. 영적인 존재는 투명하다는 인상을 지니므로, 본 극의 특수한 자막 형태는 우선 “강령술”이라는 시놉시스 속 용어를 상기시킨다.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는 것인지, 해설자는 들쑥날쑥한 번호가 적힌 편지를 스마트폰 이미지 번역 기능을 써서 번역하려 든다. 번역 후에도 여전히 뜻 모를 말로 한가득하니 도리 없이 행위자에게 발신인 행세하게 한다. 처음은 빙의다. 행위자는 귀신으로서 얼마나 집중해서 좌표를 고정하는지를 설명하고, 해설자가 러닝타임을 인질 삼아 독촉하는 인터뷰에 어쩔 수 없이 극장에 편지를 보낸 이유를 발설한다. 다음은 회상이다. 행세는 온전한 빙의가 될 수 없었으므로, 행위자는 발신인의 기억 속 세 가지 상황의 세 명의 상대방을 연기한다. 발신인의 친구, 발신인의 애인, 발신인의 집을 방문한 보험사 직원. 행위자의 대사로부터 발신인이 상대방 셋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셋은 자신의 죽음을 고하는 발신인에게 합리적 ‘증명’과 합당한 ‘서사’를 요구한다.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정신질환자와 성소수자를 향한 너그러운 폄하들,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라면서 거론되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행위자를 재현 속 재현으로 이끈다. 발이 추워 온몸을 긁는, 문 잠긴 화장실에 9년이나 갇힌 사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되풀이되는 말은 문을 넘지 못한다. 화면에서 보라색 글씨가 나오는데 열린 입은 없다. 벌어진 일을 대하는 주변 분위기가 자신과 동떨어져 공감되지 않는다는 음성이 스피커에서 울릴 뿐이다. 폭언을 퍼붓는 애인을 넘어 방문한 보험사 직원은 이미 사망했다는 발신인의 말을 믿지 않지만, 업무상 답변과 끄덕거림을 거둘 수는 없다. “고개를 위아래로 흔든다”라는 해설자의 지시에 따라 목을 굽히던 행위자는 어느덧 분노로 재현을 멈춘다. 대사를 외우지도 않고 편하게 읽기만 하는 해설자를 나무라고 지시문에서 벗어나 해방감에 겨운 춤을 춘다. 춤사위는 글씨를 걸친 보라색 클럽, 입은 다시 스피커의 몫이다. 노는 곳에서 추모하는 분위기가 거북하다는 음성이 들린다. 행위자는 숨이 가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본 극은 사회적 참사 희생자를 기억하는 산 사람을 다룬다. 앞서 설명한 해설자와 행위자의 위치를 되짚어 보자, 어떤 경우에서든 해설자는 현재에, 행위자는 과거에 몸담는다. 자막의 특수성도 되새겨 보자, 발화로 불투명해지는 글씨. 알아보자, 자막을 보는 관객에게 해설자는 이미 현재를 지났다는 사실을. 해설자가 관객의 현재로 기능하려면 자막은 그의 발화에 따라 나타나야 했다. 따라서 해설자를 일종의 ‘메타현재’라고 불러 보자. 그는 애써 대사를 암기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초침 소리”를 “초오오오치이이이임소오오오리이이이”라고 발음하며 시간을 양껏 늘어뜨린다. 힘껏 대사를 달달 외고, 시간이 없다며 재촉당하는 행위자와는 처지가 다르다. 현재는 존재만으로 충분하지만, 과거는 그 존재가 없어 고달프다. 존재가 없어 자리할 수 없고, 자리할 수 없어 “이상한 기분”이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된다, 해설자는 현재가 아니다. 진짜 ‘현재’인 관객이 넓은 아량으로 “상상해 보기”를 베풀어야 행위자와 구별될 수 있다. 현재에 대한 현재, 현재가 인식하는 현재. ‘메타현재’를 ‘현실’로 풀어써 보자.


현실은 지금을 ‘지이이이그으으음’으로 발음한 것만 같다. 현재라는 말보다 현실이라는 말에 묻힐 수 있는 순간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통탄스러운 현실을 비판할 때 저마다 다른 양을 퍼담는다. 그러므로 ‘밈’에서 제목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숏츠’를 넘기는 행위자가 등장하는, 말 많은 해설자가 정신없이 통설하는 본 극 역시 누군가에게는 MZ세대의 산만함을 지적할 거리가 될지 모른다. 단시간 콘텐츠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주의 집중력을 탓하곤 한다. 따라서 “스와이프”하는 행위자의 모습은 관객에게 반성의 시간을 삽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는 빠르게 ‘업데이트’된 사람만을 원한다. 한 정보에 머무를 여유는 없다. 애도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산 사람의 지금으로 이루어진다. 현재를 누리는 산 사람의 감정은 점점 짧아진다.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발신인은 거부한다. 극장에 “불러오기”를 금지한다. 급박하고 존중 없는 강령술을 거절한다.


사람은 고운 입자로 만들어져 고운 입자로 만들어진다.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는, 들어가도 탈을 내지 않을, 부딪혀도 시끄럽지 않을, 고운 입자. 어디까지나 고와야 한다. 빛나야 한다. 특별해야만 하니까. 오색 빛깔 조명에 행위자의 오로라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태양에서 지구로 밀려든 무수한 조각이 마찰하며 내는 빛을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로 부정된 “귀신”들은 증명된 오로라의 증명되지 않은 안으로 든다. 그곳은 “클럽”이다. 소리가 없는, 보이지 않는, 냄새가 없는, “만져지지 않는” 존재들이 부대낀다. 기꺼이 부닥침은 어울림의 증거다. 짧은 입자가 부딪혀 긴 반짝임을 이룬다. 성급한 이해를 내려놓은 행위자는 마이크를 든다. “귀신은 사디스트”라 주창한다. 오색 빛깔 미러볼에 악보를 표시하는 노래방 모니터. 행위자는 마이크를 건네며 “귀신은 사디스트”라 관객과 제창한다. 과거, 현실, 현재가 반투명한 가사에 음성을 부닥쳐 불투명하게 만든다. 불가해함을 인정하고, 불충분함을 인정하고, 불투명한 확신을 앞세우지 않기. 박자를 놓치고, 실수로 다른 버튼 누르기. 미래만 불참한 노래방에서 다가올 가사를 불안해하고, 지나간 가사를 기억하며 불러 ‘보기’.


해설자는 수신인에서 발신인이 된다. 그는 현실이 아닌 자신을 해설하기 시작한다. 조각 편지 아닌 산문 편지를 짚고 숲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수신인이 된 당신과 죽은 나무를 보고, 맛없는 담배를 말아 문 이야기를 한다. 당신과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고 뗏목에 태워 이별하는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과 오래오래 작별하는 내용과 피어오르는 안개가 자연스레 제사를 상상하게 했다. 다만 제사는 주로 고인과 생전 가까웠던 이들이 치르지만, 발신인과 수신인 사이 그러한 관계 서술은 찾기 어려웠다. 만난 적 없는 존재와 헤어질 수 있는가? 매체의 다양화로 주고받음 없이 유대감을 제공하는 콘텐츠가 늘고 있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왜 현재인가? 이들은 반응을 내놓는 대가로 현재를 받아왔다. 비대면 공연은 현재를 맡은 관객에게서 반응을 덜어냈다. 일방향적 감상(感想)으로도 충족되는 감상(鑑賞)의 유대감이 확산된다. 이는 관계 정의가 중요한 유대와는 다르다. 따라서 유대감만으로 이루어지는 애도가 언제나 신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애도할 겨를도 없이 보랏빛으로 질려 떠나가는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극 중 편지는 일방향적 감상(感想)의 던지기일 수 있다. 사만 구천 개의 조각난 편지가 사람 아닌 극장에 닿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반응 없는 산 자가 여전히 관객이라면, 반응 없는 망자가 관객이 못될 이유는 또 뭔가? 관객은 이미 반응하기에서 반응해 ‘보기’로 퍼지고 있다. 산 자가 반응 아닌 존재만으로 현재를 받아낸다면, 망자는 현재만 아닌 관객이렷다. 산 자가 망자를 상상해 볼 때, 정중함의 결여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망자의 ‘관객됨’이 불가결하다. 더듬더듬 거친 무례한 강령술이 낯선 자와 오래오래 작별할 수 있게 했을 테다.

 

사실, 극은 초장부터 결론을 내고 있다. “투명한 편지봉투도 봉투”라는 결론을 말이다. 간발의 차로 입장하지 못한 공연도, 예매한 줄만 알았던 매진 공연도 ‘보러 가기’라는 ‘미완결의 완결’이다. 그러나 상상해 보기, 기승전결을 뿌리치려 한 창작자를. 상상해 보기, 순서 정렬을 밀어내려 한 필자를. 오로라와 숲이 내뿜는 반투명한 안개 속 나는 가장 불투명했다. 불쾌했다. 안개와 함께 섞여 보고 싶었다. 미완결되고 싶다. 완결로 증명을 요구받고 싶지 않으므로.

 

그러니 상상해 보기…해 보기…해 보기해…보기 해…




[ 극장 지평좌표계에 귀신을 고정시키는 방법 X 최현비 ]
2024년 1월 12일(금) - 1월 20일(토)

#괴담 #아님 #공포연극 #아님
#제목영감 #제목아이디어 #유튜브 #궤도 #침착맨 #공포의과학특강

#극장지평좌표계에귀신을고정시키는방법
글#정한별 #김수려 #이유라 #최현비
구성/연출#최현비
미술#김수려
음향/음악#정한별
음악도움#홍석영
출연#이유라 #김현재
진행#김현빈
제작#임시극장

#신촌극장 #신촌극장라인업

2024년 2월 14일 수요일

연극과 부(富): 부(父)의 전문가

조혜인 (https://brunch.co.kr/@hichotheatre/)

부로드웨이 (富'roadway X 조다은)

관극 일시: 2023-07-01 14:00

장소: 신촌극장

#연극 #부동산 #연극과현실 #아빠 #일상의전문가



“아빠, 나, 계속 연극해도

서울에 집 하나 살 수 있을까?”


<부로드웨이(富'roadway)>는 아로웍스 조다은 연출의 입봉작이다. 입봉작부터 연극에 대한 고민을, 청년 창작자로서 가장 강렬하고도 현실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본 공연에는 연극하는 딸을 위해 부동산 아카데미를 여는 55세 공인중개사 조성진이 등장한다.


“부동산으로 잘만하면, 네가 좋아하는 연극,

걱정 없이 할 수 있어.”


비현실적인 생각과 실험을 형식이라는 현실로 만들어내는 연극.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으로 고난을 비현실처럼 느끼게 하는 부(富). 이러한 대립적 가치 어느 사이를 그려내는 본 공연 속에 아버지(父)가 존재한다.



아빠와 함께하는 부동산 연극놀이!


프리셋(preset: 공연 시작 전 무대가 세팅된 상태, 즉 관객이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가장 정결한 제단과 같은 연극이란 제의의 시작)에서 윤희지(조다은을 대변하고 있는 배우. 이하  조다은)가 핸드폰을 하며 무기력한 듯 베란다 입구에 앉아있다. 그는 부동산 어플로 종로구 홍파동 일대의 집을 알아보고 있으며 이 화면은 무대 중앙 벽에 영사되고 있다. 또한 주식, 비트코인, 호갱노노 어플이 교차되며 실패한 주식과 비트코인은 대한민국의 한 청년이 꿈꾸기엔 너무나 어려운 내집마련의 현실을 나타내며 집을 살 수 있는 희망을 단절시켜버린다. 무대 중앙 바닥에는 게임 판을 연상시키는 동그란 방석들이 모여있으며,  관객이 저마다의 존재를 내뿜으며 공연에 참여할 것임을 암시하듯 알록달록 무대 위를 물들이고 있다.


조성진은 조다은 연출의 실제 아버지다. 조성진은 극 중 조성진 역으로 출연하여 마치 명절에 여러 자녀들과 함께 오순도순 놀이를 하듯 관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년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푸근한 진행으로 부(富)루마블 게임을 벌인다. 조성진이 부루마블을 진행할 때 틈틈이 그의 성격이 엿보이기도 하는데, 매매의 기회를 놓친 관객에게 "집을 빨리빨리 사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고 진행이 더디어질 때면 관객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의 적극적 성품이 돋보이는 요소들이 나타나는 순간에는 연기와 실제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가진 실제 당사자가 무대에 등장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연기를 선보이지는 않는다. 연극학자 남지수가 뉴다큐멘터리 연극의 연기에 관해 언급했던 것처럼 이 공연은 우리에게 '연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한다(158). 그러나, 이러한 실제 당사자가 등장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 당사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어떻게 무대 위에 드러낼 것인가이다.


부(富)와 부(父)


관객을 직접 움직이게끔 하는 힘이 있는 참여 연극 <부로드웨이>는 부동산 즉, '움직여 옮길 수 없는 재산'이라는 개념을 다루지만 관객이 보다 능동적으로 부동산을 접할 수 있게끔 한다. 부루마블을 통해 갭투자와 부동산 경매 개념을 습득한다. 부루마블 판에는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여의도 시범아파트, 대치 은마아파트, 압구정 현대 아파트 등 현재 재건축으로 열기를 띠는 지역의 아파트들이 존재하고 참여 관객은 주사위를 굴려 직접 판에 나열된 집을 갭투자 방식으로 산다. 게임 도중 금리가 변동될 때 미리 집을 매매하지 못한 관객은 후회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한, 조성진은 극 중 딸과의 대화에서 담담하게 딸에게 현실을 말해주는 아버지의 역할을 소화한다. 극 중 조다은은 연극과 생존의 고민을 넘어 부동산의 생리에 대해 분노한다. 경매라는 시스템이 결국 세입자를 쫓아내야 하는 점, 부동산 전세 사기, 연극으로는 생계를 온전히 유지하기 힘든 현실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 조다은의 감정의 파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때, 조성진은 딸의 혈기를 잠재우기 위해 부동산의 긍정적 측면을 들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점을 설명해 준다.


이처럼 본 공연에서는 청년 연극인의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쩌면, 이러한 분노를 연극이란 형식으로 표현한 것 자체가 아티스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저항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에 섬세한 완급조정이 요청되는 부분이 있다.  극 중 청년 연극인의 고민 '연극으로는 내 집을 마련하기 힘든 점' 그리고 '부동산 피해에 대한 분노'를 대사만으로 압축하여 드러낸 점이 다소 아쉬웠으며, 이를 분노함에 있어서 두 인물사이의 세밀한 브레이크가 있었다면 극 중 조다은이 지닌 고민의 층위가 더욱 풍부해졌을 테다. 예를 들어, 조다은이 아버지의 근거 있는 설득에 때로는 납득하는 모습과 함께 화를 절제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현실이 더욱 깊이 있게 다가왔을 테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모습이 있음에도 그 현실에 대해 발화하고 뛰어넘고자 연극으로 저항하려는 시도 자체가 연기자의 대사와 표현을 넘어 한층 깊이 있는 암묵적 분노의 층위로 다가왔을 것이다.


조성진은 아버지로서 조다은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한다. 비록 부(富)를 근거로 설득을 시도하지만 그 마음 한편에는 딸을 향한 부(父)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공인중개사로서 경험한 부동산은 결코 양심과 따뜻한 세상을 지향하는 온정적 수단인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딸의 힘겨움을 덜어주고자 연극으로의 여정에 까지 동참하게 된 것이 아닐까.


나가며: 아빠. 일상의 전문가


조성진은 공인중개사라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일상의 전문가다. 일상의 전문가(expert in a daily life)는 동시대 연극의 경향에서 포착되는 공연자의 양상 중 하나다. 독일의 연극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은 진즉 이러한 일상의 전문가들과 작업을 해왔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일반인 배우 캐스팅은 그 범위가 넓다. 예를 들어, <Cargo X> 시리즈에서는 화물 트럭수송 기사를, <크로스워드 핏 스탑>에서는 젊은 시절 레이싱장에서 일했던 여성 노인들을 캐스팅하였다. 극 중의 조성진은 공인중개사 사무실에만 있어서는 경제적 어려움이 존재하기에 투잡으로 대리운전 콜을 받는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조성진에 대한 허구일까?'라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그는 콜을 받으며 담담히 말한다.


“위기에 움츠러들기보다
돌파하며 나아갈 때 기회가 온다.”


조성진은 공인중개사라는 사회적 위치와 더불어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일상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본 공연에선 조성진을 일상의 전문가로 바라볼 수 있는 두 개의 겹이 존재하는 바다. 조성진이 가장으로서 현실에 대한 위태로움과 그것을 돌파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담담한 선포와 같은 대사를 남길 때 그만이 지닐 수 있는 불안한 현존은 진정성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자기 이야기' 형식을 지닌 <부로드웨이>는 특별한 연극적 사건을 꾸며내기보다 사건을 초월하는 부녀간의 삶의 한 대목을 그려낸다.


극 중 조성진과 조다은이 서로의 양손을 마주하고 두 눈을 바라보며 인생이라는 게임 로드맵의 한 좌표에 서있을 때 공인중개사라는 사회적 지위로서 조성진을 바라보는 게 아닌, 누군가의 아빠인 조성진을 바라보는 관객이 생겨난다. 딸과의 기억과 경험을 무대 위에서 드러내기 위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조성진은 연극에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기보다 한 명의 공인중개사로, 아버지로 연극이란 과정을 통해 딸 조다은 연출과 특별한 일상을 만들어 나간다. 연극이 가정, 일상, 관계 곳곳에 침투하여 그 일상을 더욱 공고히 기억하게 한다. 일상을 새롭게 세우고 있다. 이것이 <부로드웨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연극의 힘이다.


“<부로드웨이>는
부(富)를 말하고 있으나,
부(父)를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남지수. 뉴다큐멘터리연극. 연극과인간. 2017.



[ 부로드웨이(富’roadway) X 조다은 ]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하는 연극을 건강하게 해 나갈 수 있을까?


창작/연출 #조다은

창작/출연 #윤희지 #조성진

드라마터그 #한지혜

무대 #박동수

조명 #권서령

음악 #채군

오퍼레이터 #최예원 #한사빈

주최/주관 #조다은 (#아로웍스)


#신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