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6일 목요일

술은 건강에 해롭다

 술은 건강에 해롭다. 디오니소스 안전에 웬 공익 광고 같은 소리냐 싶어질 테다. 하지만 정말이지, 술은 몸에 나쁘다. 온갖 장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술에 취하면 사람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고 술술 내온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피스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처음 본 사람에게 연쇄살인범 같다며 칼을 들어 위협하는 그는 말 그대로 날이 서 있다. 사람이 몰리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때로는 노트북을 잡고 제삼자처럼 군다. 피스는 ‘경계’하고 있다, 공연 중반까지의 동떨어진 피스의 모습은 한 명의 배우가 떨어져 나와 대화를 주고받는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이자 배우였던 테스피스를 연상시킨다. 경계하는 피스는 몰입을 깨고 경계를 세운다. 경계면 한쪽으로는 연극 지식을 전달하고, 다른 쪽으로는 신화를 소화하도록 돕는다. 경계라는 행위는 무언가 지켜낼 것이 있다는 방증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소스를 나무라고, 종내 아리로 인해 공연이 중단되자, 연기를 잇지 못하고 퇴장하는 피스. 무대와 무대 아닌 것을 강박적으로 구분 짓는다. 오로지 무대를 지키기 위해서. 그 무대가 너나 할 것 없이 서는 곳이 되고, 소스의 즉흥 연기로 인해 그저 구석진 자리로 변모했을 때, 비로소 피스는 술을 마신다. 무대를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 엎지른다. 포석정을 떠올리게 하며 객석까지 흐른 술은 관객을 다시금 방심케 한다. 모형 칼의 존재로 느슨해진 경계를 더욱 풀어버린다. 그때 카루를 적극적으로 제지한 것은, 주야장천 술을 마시던 노스이고, 비틀거리던 아리였다. 

 노스에게 술을 마시는 것은 죽음이 아닌 떠난 이에게 가까워지는 길이었나 보다. 떠난 이는 통 말이 없어 아리를 뒤돌게 한다. 돌아본 길 끝의 자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술을 마셨나 보다. 삶은 겨우 찾은 나를 영영 잃는 짓이다. 술에 취해 나를 잃고 깨어 되찾는 짓을 뒤집은 것 같다. 나의 분실을 각오하고 내던진 노스와 아리야말로 죽음으로부터 카루를 깨울 수 있었다. 그러나 술은 건강에 해롭다. 그렇다, 나는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술을 경계하고 꽃을 경계하고 사람을 경계하던 피스가 술을 마시고 꽃을 노래하며 사람과 함께하는 모습을 따라갔다. 사랑 잃은 아리가 다시 실을 건넸듯이, 날개 잃은 카루가 추락을 바라고 뛰었듯이, 갈등이 해소되더라도, 경계가 사그라들더라도, 경계면의 플롯은 건재하다. 제법 익숙한 피스의 변화와 조금 널뛰는 카루의 행동이 공존하는 것은, 디오니소스가 카오스에 서고, 카오스는 규칙적이기 때문이리라.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머릿속은 단단하고 가슴 속은 물렀다. 젊음이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듯, 죽음은 특정 세대만의 공감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머리로는 정리되지 않는 흐름이 있었다. 그것을 짚어내려 발버둥 치다 무심코 디딘 내 마음이 부드러웠다. 돌이켜보니 봄 같았다. 나에게 봄은 각종 알레르기의 계절이라 봄에 봄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봄 같았다. 이해되지 않고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봄처럼 풀어진 마음에 첨벙대는 내 꼴을 지켜볼 소스는 없다. 언제까지고 지망생일 수 없다면, 삶에서 만큼은 언제까지나 서툰 배우여도 괜찮지 않을까? 괜찮다고 해줄 소스도 없다. 나는 여전히 술이 두렵다. 

장혜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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