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9일 목요일

기능 없는 글쓰기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2부)

⍽⍽⍽⍽⍽⍽⍽⍽⍽⍽⍽⍽⍽⍽⍽⍽⍽⍽⍽⍽⍽⍽⍽⍽⍽⍽⍽⍽⍽⍽⍽⍽⍽⍽⍽⍽

[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

1부. 침투하는 비체들 

2부. 기능 없는 글쓰기


6. 글쓰기, 기능, 미로

민조

이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일단 두 분께서는 전통적인 희곡 장르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계신데요, 연재님께서는 2019년에 저랑 인터뷰하셨을 때 희곡이라는 장르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말씀해 주신 적도 있었죠. 그 후로 시간이 좀 지났고요.  


연재 

작가마다 제각기 다른 언어와 글쓰기의 충동이 있을 텐데, 희곡은 전통적 극작술을 입어야 글쓰기가 가능한 장르라고 여겨지는 것 같아요. ‘엄청나게 쓰고 싶은 것이 있어? 나를 넘어야 희곡이라 칭해줄 테야. 형식 실험을 할 거야? 나를 경유해야지.’ 하는 식의. 전통적 극작술의 실체를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모범적인 희곡의 구조가 있잖아요. 그런 희곡에게 질문해야 해요. 전통적 극작술은 누가 만들었으며 누가 계승, 전수하는가. 남성 언어의 전유물로서 극작가의 자격 요건 내지 권력을 강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최근의 <낙과줍기> 작업은 희곡을 희곡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성적 글쓰기가 희곡으로 어떻게 구현되는가, 질문하는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직접 연출할 수밖에 없었고요. <낙과줍기>에는 희곡의 요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어요. 배역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지문도 대사도 없는 줄글이었죠. 그걸 소설적인 글쓰기, 낭송을 위한 글쓰기라고 말씀하신 분들도 있었어요. 저에게는 희곡에서 밀어(蜜語)를 구사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어느 순간 ‘대화’라는 행위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에요. 화자가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청자에게 말을 건네고 청자가 이에 반응해 행동하고 말한다는 희곡 속 대화의 규칙이 근대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졌거든요. 희곡쓰기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민조

과거에는 희곡이 지닌 대화성이 오히려 서술자가 지배하는 단성적인(monologic) 목소리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야기되곤 했죠. 여러 명의 인물이 하나의 흐름으로 귀속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것이 보다 여성적인 말하기에 가깝다고 얘기해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연재님은 반대로 보고 계셔서 흥미롭네요. 


연재

희곡은 여러 인물들의 목소리가 겹쳐 있다는 점에서 다성적이지만, 인물에게 일정한 입장과 목소리가 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성적이기도 해요. 단성도 다성도 인물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일 텐데, 저는 인물 이전에 목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중에는 한 인물에게 귀속되지 않는 목소리가 있는데요. 주인을 알 수 없는 미지의 목소리, 지하로부터 터져 나오는 목소리, 쉽게는 무의식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목소리는 특정 인물을 초과하고, 대화의 형식에 담기지도 않고, 오직 시선이자 목소리로서 세계를 바라보고 읽어내며 내밀한 말을 읊조려요. 자신이 원할 때 인물이 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무인칭이죠. 이런 목소리를 써내려갈 때 저는 제가 무언가에 들려서 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흉포한 짐승이 된 기분이기도 해요. 이렇게 쓰인 목소리는 배우의 삶을 흔들어야 하고 배우의 몸을 비집고 나가야만 말해질 수 있어요. 비집고 나간다는 점에서 피복의 성질을 가지는 어떤 주술적인 희곡 언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효진

보통 희곡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진 발화가 다른 등장인물한테 가닿아야 하고,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도 그 지점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반응이 느린 편이거든요.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제가 소화해서 반응을 한다기보다 한 며칠 지나서 대답을 돌려줄 때도 있고요. 그런데 희곡은 정해진 시간 안에 등장인물들이 상호작용을 해야 하고, 그런 정제된 형식 안에서 제가 원하는 바를 100%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의미 없어 보이는 장광설에 더 관심을 갖고 있어요. ‘뭔 소리야?’ 싶은 말이 더 많아야 되지 않을까. 

사실 희곡의 구조라는 것은 건축물과 비슷해요. 문은 열어서 들어가기 위해 있다는 식으로 용도와 목적이 분명히 정해져 있고, 희곡도 사실 그렇게 쓰여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그걸 안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문이 있긴 한데 열고 들어가라고 있는 문이 아닌, 그런 식으로 써보고 싶은 거죠. 물론 배우의 몸을 경유해서 신체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극작가 수준에서 그런 형식을 어떻게 구현해 볼 수 있을까가 저한테도 화두인 상태예요. 말하자면 미로를 만들고 싶은 거죠.  

신효진

연재

내가 입구를 열고 들어가서 A라는 출구로 나가겠다고 생각을 해도 B라는 출구로 나갈 때가 있고, 그건 사실 나도 모르게 B로 나가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던 거죠. 그런 것처럼 최종적인 명확함에 도달하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효진님 말씀처럼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건축 설계도를 그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명확함에 도달해야 할 때가 있죠.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기도 하고요. 글쓰기 과정에서 계속 협상이 이루어지는 거죠. 

저의 경우에, 최근에 <낙과줍기>를 쓸 때는 그동안 희곡을 쓸 때와는 엄청 다른 ‘쾌’가 있었어요. 건축적인 쾌가 아니라 공예적인 쾌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모양이 될지 모르는 채로 뜨개질을 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진짜 좀 글쓰기를 수행하는 것 같다, A부터 Z까지 어떤 문으로 나갈지 모르는 탐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저는 그런 글쓰기를 우연하고 즉발적인 시도로 남겨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기술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7. 연극, 규약, 문어(文語)

승태

두 분은 공연이 아닌 ‘텍스트’를 통해 직접 독자와 만난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나요? 말씀하신 내용을 들었을 때 공연이라는 매개를 경유했을 때 발생하는 어떤 물리적인 한계나 어려움을 느끼시는 것 같아서요. 


효진

<탈피>나 <밤에 먹는 무화과>는 공연을 상정하고 썼기 때문에 A로 들어와서 B로 나가게끔 정확하게 설계도를 그리고 썼는데요, <머핀과 치와와>는 공연화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썼던 작품이라 태도상에 차이가 조금 있었어요. 가령 <머핀과 치와와> 같은 경우에는 일부러 문장 부호를 삭제하고 썼는데, 단순히 배우가 이렇게 발화해달라고 지시하기 위한 선택은 아니었어요. 독자가 읽을 때 문장 부호 없이 이어지는 느낌을 받기를 원했던 게 컸죠.


연재

예전에는 미래 독자를 상상하며 썼는데, 지금은 제가 쓴 텍스트를 가지고 작업할 배우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극단 동을 만나면서 달라진 지점도 있고요. 텍스트로서의 희곡과 공연됐을 때 들리는 말이 제게는 좀 나뉘어져 있었는데, 극단 동을 만나면서부터는 제 텍스트가 이 배우들한테 완전히 몸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되니까 둘이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관객과 독자가 섞이는 느낌이랄까요. 


효진

저는 공동창작을 하는 쿵짝 프로젝트와 협업을 하면서 데뷔를 했기 때문에 공연화, 그리고 메시지에 대한 염두가 컸던 것 같아요. 관객이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굉장히 의식했는데 점점 그게 안 맞는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저는 사실 제 작품이 여러 방향으로 해석되기를 바라면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적으로 여러 명의 연출이나 공연팀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제가 해석을 열어놓는다고 해서 다양하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체감하게 된 거죠. 오히려 작가주의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차피 입구와 출구를 찾는 과정이 생기니까 내가 쓸 때는 그냥 미로를 만들자.


민조

저는 입말과 구별되는 ‘글’, 문자언어가 애초에 비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문자언어는 인간이 마주한 최초의 AI일 수도 있다는 생각? 글 자체가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인간의 생각을 변형시켜 담는 매체이기 때문에 사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인간들이 나누는 대화를 글로 옮겼을 때의 땐땐함이라는 게 언제나 존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초기 할리우드 영화가 솔기 없이 매끄럽게 봉합된 것 같은 편집술을 창안했던 것처럼 사실주의 극작술 전통이 마치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것마냥 발달시켜왔던 것에 불과한 게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점차 탈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해요. 


효진

사실 전통적인 극작술을 많이 따라본 적은 없어요. 제가 요새 대중적인 드라마를 쓰고 있다 보니 드는 고민인데, 희곡 텍스트를 저희가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 현재로서는 많이 없잖아요. 결국 공연으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극작가로서 취해야 되는 태도가 무엇인지 정말 고민이 돼요. 전통적인 사건 중심의 드라마는 전부 다 매체로 빨려 나가 중인데 그러면 연극은 여분의 찻잎 찌꺼기 같은 것이 아닌가. (웃음) 다른 사람들과 협력을 해서 무엇을 보여줄지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이 그나마 연극의 특별한 지점인 것 같은데 그럴 때 극작가로서 어느 정도의 롤을 해야 하는 것인가. 현실적으로 캐스팅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내가 염두에 두는 이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이미지가 왔을 때 훨씬 더 좋은 시너지가 날 수도 있는데 그럼 나는 어디까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접근을 해야 되는가.


연재

진짜 고질적인 어려움이에요. 극작가의 글쓰기 실험은 공연의 여러 요소들을 만나 굴절되기 마련이니 어디서부터 탐구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어요. 입문 시절 제가 봤던 연극들은 주로 사실주의 극작법을 따른 작품, 이야기를 들려주고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요. 지금은 그때만큼 연극에 드라마가 요청되지 않는 것 같아요.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넷플릭스에서 더 잘 구현하고 있고요. 제가 지금의 연극에 기대하는 것은 형식의 실험이에요. 저 또한 연극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텍스트를 쓰고자 하고요. 하지만 연극이라는 장르와 나의 글쓰기가 어떤 형식으로 만나는가, 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할 수가 없었어요. 더 적극적으로 텍스트의 형식을 실험하고 탐구해야 하는 것 같아요.

김연재

효진

동시에 ‘서사의 귀환’을 바라는 면도 있고요. 연극에서는 실험을 많이 하다보니 결국 사람들이 연극을 안 보러 오게 되는 굴레가 생기는 같아서 중심을 잡기가 너무너무 어려워요. 사람들은 익숙한 이야기라든지, 스펙터클이라든지, 강렬한 정동을 기대하면서 극장에 올 텐데 이렇게 작은 연극 안에서 뭘 보여줄 수 있는가가 계속 고민이 되죠. 


민조

기후위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연극과 극장이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잖아요. 극장은 자연, 동물, 기후를 전부 몰아낸 공간이니까요. 연극이 오랫동안 ‘휴먼 스케일’의 예술이라 불려왔다면 요즘에는 그럼 연극이 포스트휴머니티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장르냐는 고민도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최근의 포스트휴먼 연극들이 인간의 신체성을 경유해서 비인간에 대해 말하려 노력하는 점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효진

저도 CG로 처리된 멋들어진 비인간 존재가 나오는 것보다도, 인간이 걸어나와서 ‘나 인간이 아니야’ 라고 주장을 하는 쪽이 더 재밌어요. 


승태

<라이온 킹> 시리즈의 경우에도 실사판이 실패했잖아요. 사자와 원숭이를 그럴듯하게 실사로 표현했는데도 오히려 뮤지컬 <라이온 킹>이 제일 흥미로운 작품으로 남았다는 점이 저는 재미있어요. 어쩌면 공연예술은 가장 적은 제작비로 만들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바꾸어 표현하면서 공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오늘날에는 극작에 있어서 삼일치 법칙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어떤 종류의 글쓰기도 연극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미학적인 토대가 이미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조

왜 얼마 전에 <인어공주> 실사판 영화와 관련해서 인어공주 역에 흑인 배우가 캐스팅되었다고 논란이 되었잖아요. 그 논란을 지켜보면서 아, 내가 연극을 너무 많이 봐서 뇌가 절여졌나 싶었어요. 연극에서는 백인도 한국인이 하고 흑인도 한국인이 하는데 저게 저렇게 난리칠 일이야? (웃음) 달리 말하면 연극이 어떤 관람의 규약이나 모드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유연한 샌드박스형 예술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배우가 나와서 ‘저는 비둘기입니다’ 라고 하면 비둘기라고 생각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규약만 잘 설정되면 대화를 대화처럼 읽지 않아도 되고요. 관객을 규약에 참여시킨다는 점에서 연극은 기본적으로 참여도가 높은 예술이고, 이리저리 규약을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는 예술이 아닌가 싶어요. 

김민조


효진

외국인 배경이고 외국인들이 나오지만 한국인이 아무런 분장도 없이 뻔뻔하게… (웃음)


민조

뻔뻔한 예술이에요, 뻔뻔한 예술. (웃음)


승태

저는 번역극 작업을 많이 하는데, 아까 민조님이 문어체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배우가 무대에서 문어체로 발화할 때 오히려 매력적일 때가 있어요. 관객들도 잘 받아들이고요. 어쩌면 의도적으로 문어체를 낭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연극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규모의 차이도 있을 텐데, 백만 명이나 천만 명이 봐야 하는 영화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데 백 명이 보는 연극에서는 가능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겠죠. 


연재

최근 작품 <복도 굴뚝 유골함>이 떠올랐는데요. 전부 비슷한 대사를 구사하는 인물들에 대해 팀원들과 대화한 적이 있어요. 다큐멘터리 연극적인 측면이 있는 작품이었는데도 대부분의 대사가 문어체로 쓰였거든요. 저는 그 이유가 내적 언어로의 번역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듣거나 누군가를 만나 대화한 내용이 나의 말투로 정리되는 것처럼요. 희곡쓰기에 대한 생각은 늘 바뀌지만, 저는 희곡쓰기가 내가 감각하는 세계의 기이한 구석을 관철시킴으로써 실제가 아닌 다른 세계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인물이 할 법한 말이 아니라 작가가 소환한 목소리, 내적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승태

‘핍진성’ 혹은 ‘박진성’이라는 이름으로 신고전주의 이래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개념이 알게 모르게 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측면이 있죠. 이 인물이 과연 이런 말을 쓸까, 이런 어휘를 쓸까 고민들을 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거에요. 오히려 이 인물은 이런 말을 구사하는 인물이구나 하고 사후적으로 구축될 수도 있고요. 연재님이 쓰신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을 보면 교수가 조교수랑 대화하면서 ‘휴강도 때리고’ 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그게 20~30대까지는 익숙한 말일 수 있지만 사실 50대 이상은 휴강을 때린다는 표현을 안 쓰니까 재미있게 느껴지는 거예요. 


연재

고증 실패예요. (웃음)


승태 

알게 모르게 사실주의에 잠겨 있었던 한국 연극의 풍토가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벗어나려는  시도들을 다양하게 해보는 게 오히려 신선할 수 있고요. TV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면이 극장으로 오게 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민조 

어느덧 세 시간이나 지났네요. 오늘 대화는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될 것 같습니다. 혹시 미처 못 나눈 말씀이 있으신가요?


효진

아뇨, 너무 즐거웠습니다. 이런 자리가 많아야 되는 것 같아요.


연재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민조

그러면 녹음은 여기서 끊을게요.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녹취 및 정리: 김민조

사진: 임승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