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8일 금요일

배꼽을 파는 건 위험하다

지하 극장에 안개가 자욱하다.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은 폴과 함께 깊은 물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을 앞 바다에 있는 신비한 구멍인 배꼽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곳엔 많은 사연과 감정이 서려 있다: 슬픔, 책망과 자책, 분노, 공허 등등.
폴이 배꼽으로 들어가는 건 자기 배 속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며,  
이때 폴과 더불어 관객도 각자의 배꼽 아래 자리한 심연을 바라보게 된다. 
이건 꽤 위험한 일이다. 
배꼽을 “파면 큰일 나니까.” 
그 속을 들여다보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심연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배꼽 안에 들어갔던 폴은 결국 사라진다. 
어디로 갔을까. 
그곳이 알사탕같이 달콤한 곳이길 바라는 것은 너무 낭만적일지라도
고통스럽기보다 평화롭기를 바란다.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이기도 할 테니.

임승태 (i......@gmail.com)



뤂_홀
예시공프로젝트
2023 11.30~12.03
극장 PLOT

출연_박성도, 박영민, 보나 정, 용아, 이성하, 정연
작/연출 백미미
공동연출 보나 정
기획 MJ Kim
조명감독 유보민
음악감독 노영원
프로덕션 매니저 이승찬
디자인 송선영

2023년 10월 26일 목요일

술은 건강에 해롭다

 술은 건강에 해롭다. 디오니소스 안전에 웬 공익 광고 같은 소리냐 싶어질 테다. 하지만 정말이지, 술은 몸에 나쁘다. 온갖 장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술에 취하면 사람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하고 술술 내온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피스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처음 본 사람에게 연쇄살인범 같다며 칼을 들어 위협하는 그는 말 그대로 날이 서 있다. 사람이 몰리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때로는 노트북을 잡고 제삼자처럼 군다. 피스는 ‘경계’하고 있다, 공연 중반까지의 동떨어진 피스의 모습은 한 명의 배우가 떨어져 나와 대화를 주고받는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이자 배우였던 테스피스를 연상시킨다. 경계하는 피스는 몰입을 깨고 경계를 세운다. 경계면 한쪽으로는 연극 지식을 전달하고, 다른 쪽으로는 신화를 소화하도록 돕는다. 경계라는 행위는 무언가 지켜낼 것이 있다는 방증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소스를 나무라고, 종내 아리로 인해 공연이 중단되자, 연기를 잇지 못하고 퇴장하는 피스. 무대와 무대 아닌 것을 강박적으로 구분 짓는다. 오로지 무대를 지키기 위해서. 그 무대가 너나 할 것 없이 서는 곳이 되고, 소스의 즉흥 연기로 인해 그저 구석진 자리로 변모했을 때, 비로소 피스는 술을 마신다. 무대를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 엎지른다. 포석정을 떠올리게 하며 객석까지 흐른 술은 관객을 다시금 방심케 한다. 모형 칼의 존재로 느슨해진 경계를 더욱 풀어버린다. 그때 카루를 적극적으로 제지한 것은, 주야장천 술을 마시던 노스이고, 비틀거리던 아리였다. 

 노스에게 술을 마시는 것은 죽음이 아닌 떠난 이에게 가까워지는 길이었나 보다. 떠난 이는 통 말이 없어 아리를 뒤돌게 한다. 돌아본 길 끝의 자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술을 마셨나 보다. 삶은 겨우 찾은 나를 영영 잃는 짓이다. 술에 취해 나를 잃고 깨어 되찾는 짓을 뒤집은 것 같다. 나의 분실을 각오하고 내던진 노스와 아리야말로 죽음으로부터 카루를 깨울 수 있었다. 그러나 술은 건강에 해롭다. 그렇다, 나는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술을 경계하고 꽃을 경계하고 사람을 경계하던 피스가 술을 마시고 꽃을 노래하며 사람과 함께하는 모습을 따라갔다. 사랑 잃은 아리가 다시 실을 건넸듯이, 날개 잃은 카루가 추락을 바라고 뛰었듯이, 갈등이 해소되더라도, 경계가 사그라들더라도, 경계면의 플롯은 건재하다. 제법 익숙한 피스의 변화와 조금 널뛰는 카루의 행동이 공존하는 것은, 디오니소스가 카오스에 서고, 카오스는 규칙적이기 때문이리라.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머릿속은 단단하고 가슴 속은 물렀다. 젊음이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듯, 죽음은 특정 세대만의 공감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머리로는 정리되지 않는 흐름이 있었다. 그것을 짚어내려 발버둥 치다 무심코 디딘 내 마음이 부드러웠다. 돌이켜보니 봄 같았다. 나에게 봄은 각종 알레르기의 계절이라 봄에 봄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봄 같았다. 이해되지 않고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봄처럼 풀어진 마음에 첨벙대는 내 꼴을 지켜볼 소스는 없다. 언제까지고 지망생일 수 없다면, 삶에서 만큼은 언제까지나 서툰 배우여도 괜찮지 않을까? 괜찮다고 해줄 소스도 없다. 나는 여전히 술이 두렵다. 

장혜경 (https://blog.naver.com/myeongmyeolga)



2023년 2월 14일 화요일

한 사람, 한 사람이 집이다: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 리뷰

양근애 (r......@hanmail.net)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손꼽아 기다렸어요. ‘미친존재감’이라는 센스있는 이름을 붙인 기획자는 누굴까 기대했고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이야기도 궁금했습니다. 하루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 남짓이라고 했을 때는 살짝 긴장도 했습니다. 다행히 제게도 기회가 있었어요. 그날 저는 동행인과 대흥역에서 내려 저녁을 먹고 토정로라고 적힌 골목을 걸어 어느 주택 앞에 도착했습니다. 화요일 저녁이었고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골목의 적요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골목을 걸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그때 누군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극장이나 문화시설, 거리처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 공연을 보러 가는 일도 처음이었습니다. 어느새 대문에 붙은 ‘ㅁㅊㅈ’이라는 초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어느 평범한 주택 앞에 도착했어요. 

흰색 페인트가 드문드문 벗겨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친집은 끝이 없어요. 미친집은 완벽하지 않아요. 미친건 특별하지 않아요. 미친집은 독특하지 않아요. 미친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미쳤다”이거 삶이거든요.”라는 손글씨가 보였어요. 어쩌면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라는 공연에 대한 설명은 이 글귀로 충분한지도 모르겠어요. 사회는 누군가를 ‘미쳤다’고 하지만 정신장애인에게 미쳤다는 건 극복할 수도, 완전히 치료될 수도 없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공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있는 몇 개의 방에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면이 전환되고 시점이 바뀌듯,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면서 정신장애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이었어요. 첫 번째 방에서는 왈왈님의 노래 두 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춤추는 걸 좋아하고 교회를 좋아하고 하루에 이만 보씩 걷는 왈왈님의 이야기 속에는 투쟁도 있고 편지도 있고 병원도 있었습니다. 그 방에는 식물이 많았고 왈왈님이 모아둔 편지도 많았습니다. 거기엔 제가 미처 모르는 시간이 들어있었겠지요. 

연화님의 방에서는 작은 공연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본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오다 노부나가와 알렉산드라와 카산드라를 말하는 연화님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벽에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고 책이 아주 많았어요. 책을 쌓아 만든 그림자와 붉은 조명 아래서 우리는 차를 나누어 마셨습니다. 고유한 선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연화님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십 대였고 연화님의 이야기 속에는 저 먼 나라의 전설 같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시간은 직선이 아니었고 엉킨 실타래를 풀려고 할 때 도리어 달아나는 모양이 어지럽게 떠올랐습니다. 

연화님은 카산드라를 통해 미쳤다는 말을 전유했습니다. 확실하지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마녀로 불린 카산드라. 연화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떠들었어도 아무도 안 믿잖아.”라는 일갈로 끝을 맺었습니다. 정신장애인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있는 그대로 발화되는 순간 사회는 그것을 못 들은 척하거나 없는 일로 만들거나 이상한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였습니다. 2021년 공연한 연극 <우리는 미쳤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런 저를 부르는 호칭은 참 많습니다. 사이코, 정신병자, 미친새끼, 또라이, 정신질환자, 사회공포증, 엉망진창, 주의력결핍장애, 범불안장애, 분노조절장애……. 저는 유소한을 혐오합니다. 저는 유소한을 사랑합니다. 혐오했다가 사랑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합니다. 이런 제가 매드 프라이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진요. 저는 계속 외치겠습니다. (쇳소리가 나도록 크게) “우리는 미쳤다.”*

실은 정신장애라는 말을 쓰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당사자의 ‘미쳤다’는 발화가 주는 해방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미친존재감의 지난 공연에 관한 정보와 몇 개의 논문을 찾아 읽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정신장애나 정신질환은 당사자의 삶을 배제한 의료적인 관점이며, 매드(Mad)는 퀴어(Queer)나 크립(Crip)처럼 차별과 낙인을 위해 만들어진 부정적인 용어를 전유하는 전복적인 용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친집으로 초대합니다>는 매드(Mad) 정체성을 드러내는 연극이고 그런 의미에서 당사자의 다양한 경험을 정신의학의 담론에 밀어 넣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하나의 운동이기도 하겠지요. 

거실로 나와 고유한 선님의 이야기를 듣기 전 잠깐의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색함도 조금 가신 터라 두리번거리며 집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친척 집에 갔던 일이 떠올랐어요.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던 나무 계단을 통해 이층 다락방으로 갈 수 있었던 집이었고 어린아이였던 나와 사촌들은 그 계단을 올라가 어른들과 상관없이 우리끼리 속닥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잊은 줄 알았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많은 일들은 사라지지 않고 나라는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있는 것만 같아요. 그 얼룩이 없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는 걸 알 것 같습니다. 

고유한 선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이제 세상에 없는 도마라는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도마가 고유한 선님의 친구 수아라는 걸 알았을 때 조금 놀랐어요.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지만 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황망하고 슬펐거든요. 고유한 선님이 준비한 이야기 속에서 도마의 노래를 듣고 또 부르는 동안 생각지 못한 어떤 연결이 틈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 틈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목소리로만 알고 있었던 한 사람의 생을 조금 엿본 느낌도 들었어요. 고유한 선님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감지하는 일을 환시나 환청, 망상과 같은 양성증상이라고 치부하고 그것을 치료의 대상으로 다루는 일은 얼마나 간단한지요. 고유한 선님의 이야기를 통해 증상 자체보다 그것을 가짜라고 하거나 떨쳐내야 할 일로 취급하는 일이 더 속상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고유한 님의 등을 어루만지던 온기는 진짜였을 테니까요.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가까운 이의 집에 방문했을 때처럼 적당한 침묵이 드나들 거리가 있어 편안했어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집 안에 놓인 고유한 선님이 그린 그림들이 우리는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유튜브에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었어요. 왈왈님과 연화님의 브이로그도 보았습니다. 미친집으로의 초대는 완벽하지도 특별하지도 독특하지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우리가 만난 것은 스스로를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매드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의 일상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병원에 가고 일자리를 구하고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하고 학교에 가고 그림을 그리는 하루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특정 질환이나 장애 여부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기도 하고 동시에 혐오하기도 하는 자기만의 고유성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이 오롯했습니다. 

사실 저는 장애를 잘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장애예술을 자주 만나고 장애학 관련 책을 읽고 몇 편의 글을 쓰기도 했지만 장애에 관해 말하는 건 여전히,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건 그저 작은 이유였을 거예요. 저는 글쓰기라는 것을 한 이후로 줄곧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이야기에 대해 말해왔으니까요. 그러나 장애연극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두렵고 괴로웠습니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겁이 많은 저는 어떤 날은 내가 쓴 어떤 문장이 차별과 배제의 문법을 반복하거나 그것을 묵인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고 또 어떤 날은 당연한 이야기를 이제야 깨달은 무지를 자랑하는 것은 아닐까 부끄러웠습니다. 장애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그렇다고 말하는 일이 장애라는 사실을 도리어 별일 아닌 것으로 여기게 만들까봐 무서웠습니다. 급기야 모든 글쓰기가 다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글을 쓴다는 일이 사실은 내가 모르는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고쳐 쓰는 이 글이 어떻게 당도할지도 겁이 납니다. 그렇지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날 제가 느낀 환대가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을 꺼내는 용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그날 초대한 사람과 초대받은 사람이 마주 앉아 어색함과 공감과 다정함을 나누는 동안 저는 장애나 질병, 질환, 통증, 아픔 같은 말들이 일상에 내려앉는 모습을 본 것 같아요. 그것은 한편으로 저에게 이미 있거나 도래할 그 말들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과일과 시나몬을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뱅쇼와 따듯한 차, 비건 쿠키와 케익과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이웃이라는 낱말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웃이라고 해도 가족이라고 해도 아주 친한 친구라고 해도 당사자의 고통과 곤혹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옆에 앉아서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지도 모르겠어요. 때로 마음은 온전한 이해가 아니라 무심한 동행으로 전달되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너무 조심해서 외롭게 하기보다 민폐를 끼치더라도 묻고 듣고 답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모두 조금씩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골목길을 돌아 나와 달라진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서울이 점점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는데 쾌적하지도 편리하지도 않은, 사람이 살다간 흔적으로 얼룩진 소담한 주택들이 아직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세상엔 참 많은 집이 있고 집마다 다 다른 사연을 품고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그 다름이 이 세계를 알록달록하게 만들어주는 거겠지요. 

미친집에 다녀왔습니다. 아름답지도 신기하지도 이상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진짜가 있었습니다. 

*송승연, 「정신건강에 어려움이 있는 당사자가 주도하는 연극 참여자들의 경험 및 인식에 관한 연구: 미친존재감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비판사회정책』 제75호, 비판과 대안을 위한 사회복지학회/건강정책학회, 2022. 279쪽에서 재인용.

사진: 김원만


2023년 1월 19일 목요일

기능 없는 글쓰기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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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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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침투하는 비체들 

2부. 기능 없는 글쓰기


6. 글쓰기, 기능, 미로

민조

이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일단 두 분께서는 전통적인 희곡 장르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계신데요, 연재님께서는 2019년에 저랑 인터뷰하셨을 때 희곡이라는 장르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포부를 말씀해 주신 적도 있었죠. 그 후로 시간이 좀 지났고요.  

2023년 1월 18일 수요일

침투하는 비체들 (김연재 × 신효진 미니 좌담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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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미니 좌담] 김연재 × 신효진  

일시_2022년 12월 5일 

장소_대학로 혜윰 창작실

참석자

  • 김민조 / 모더레이터
  • 김연재 /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작가
  • 신효진 / <머핀과 치와와> 작가
  • 임승태 / 《드라마인》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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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침투하는 비체들 


1. 팬데믹 이후 혹은 이전

민조

2022년 9월 《한국극예술연구》에 「이후의 신체를 조형하는 포스트휴먼 극작술-신효진 희곡 <머핀과 치와와>(2021), 김연재 희곡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2021)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실었는데요. 논문을 구상할 때 당연히 ‘비인간’, ‘동물-되기’ 이런 화두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한테 더 중요했던 것은 두 작품들 내에서 소위 ‘서사적 종말’이나 인간 사회 내부의 어떤 거대한 ‘공동(空洞)’이 엿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장르상의 차이가 조금 있는데도요. 비인간 개념을 넘어서 우리의 현실, 관계, 사회를 보는 시각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근에 포스트휴머니즘이 사이버네틱스 기술을 통한 인간의 보완이나 향상 프로젝트로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팬데믹 위기 이후에는 정반대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다고 봐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가 봤던 작품들 중에는 인간이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안의 어둠이나 구멍으로 더 들어가려 하고, 그 구멍을 통해서 비인간 존재자들과 만나려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두 분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생각을 많이 했고요. 

신효진 작가님께 먼저 여쭤볼게요.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도 <머핀과 치와와>가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마침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던 2021년에 나온 작품이기도 하고요. 

2023년 1월 7일 토요일

빛: 육체를 과묵히 관통하는 처음과 나중

조혜인


에릭 아르날 부르취(Eric Arnal-Burtschy)는 빛이 수행자로서 무한함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빛 퍼포먼스: 심연의 숲>을 고안하였다. 그리하여, 무한으로부터 상기할 수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에 관객은 자기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입구 바닥 정사각형들이 분할된 형태로 구역을 이루고 있는 곳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는 마치 무덤 혹은 납골당을 환기하며 신발이 벗겨진 상태는 가장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즉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때로 상정할 수 있다. 관객이 벗어놓고 간 신발로부터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론적 관점이 떠오른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구두>(1886)를 분석하며, 낡은 구두를 통해 농촌 여인의 고단한 삶이 탈은폐(Aletheia)되고 있음을 고찰한 바 있다. 본 공연에서 벗어놓은 관객의 신발 또한 마찬가지다. 신발은 무(無)가 아닌 ‘존재’이며, 신발 주인의 인생을 함축한다. 관객의 신발은 그들 스스로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상징’이다.


이러한 신발 벗기 행위와 공연장으로의 입장은 장례 절차를 상기시킨다. 신발을 벗고 공연장에 들어감으로써 관객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되고, 바닥에 누워 고요 속에서 자기 몸을 관통하는 빛을 경험한다. 공간은 온전히 빛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사면이 막혀 있는 블랙박스가 아닌 영원히 확장되는 우주와도 같고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빛줄기는 마치 이승 저편에 있는 어떠한 세계처럼 감각된다. 빛 줄기는 제리 주커(Jerry Zucker) 감독의 영화 <사랑과 영혼>(Ghost, 1990) 엔딩에서 등장하는 저승으로 가는 찬란하고도 밝은 입구처럼, 쉽사리 가 닿을 수 없는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낯선 초대 앞에서 이승에 대한 미련이 소멸하는 것 같이, 관객들은 그 빛에 손을 뻗어 보기도 하고, 소실점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한다. 촉각으로 결코 감각될 수 없는 빛에 대한 육체적 갈망은 커져만 간다. 빛은 과묵하게 관객의 몸을 관통할 뿐이다. 반면에, 편안과 평온의 한 지점에서 관객은 계속 누워있는 행위를 선택하기도 한다. 관객마다 빛을 맞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빛에 자기 육체를 기꺼이 내어준다는 점에서 빛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