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5일 화요일

'경계'에 대하여: 2020 SPAF <보더라인>,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딸에 대하여>, <나는 스무살입니다>, <갈라>

조혜인, 퍼포먼스 매거진 <PERSIM> 작가

[알림]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 매거진<PERSIM>에 선 수록된 글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공연 사진 및 부가 설명은 필자의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hichotheatre/31 - 편집부

 



올해 2020년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이하: SPAF)가 2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올해 라인업은 SPAF 20주년을 맞이한만큼 더욱 풍성해졌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COVID-19)의 여파로 해외초청작은 단 한 작품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예술제 최초로 비대면 생중계를 시작했다. 극장 안에서 발생하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물리적 현존이 비대면이라는 경계로 해체된 것은 대단히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TV와 후원제도를 통해 아티스트를 응원하며 집에서 편안히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어 SPAF에 대한 접근장벽이 낮아졌다. 후원을 통해 집으로 배송된 리워드를 받고 공연을 기념할 수도 있었다. 필자가 본 작품은 아래와 같다. 상영일 순서대로 크리에이티브 VaQi & 레지덴츠테아터 <보더라인>(연극), 황수현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무용), 쇼빌컴퍼니 <딸에 대하여>(연극), 안은미컴퍼니 <나는 스무살입니다>(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일한 해외초청작인 제롬 벨 <갈라>(무용)이다. 본 리뷰에서는 '경계'라는 키워드로 이 작품들을 읽어보고자 한다.

 

1. NN들을 위하여 - 크리에이티브 VaQi & 레지덴츠테아터 <보더라인>

 

<보더라인>은 한국의 공동창작 실험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와 독일의 레지덴츠테아터가 협력하여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공연이었지만 코로나의 위험성 앞에 서울-뮌헨 8,000km를 아우르는 기술 도전이 되어버렸다.
 
레지덴츠테아터(Residenztheater)는 뮌헨을 기반으로 하여 현지인들에게는 'The Resi'라고 불리기도 하는 바이에른 지역의 주립극단이며, 이 극단이 상주하는 극장의 이름이기도 하다. 레지덴츠테아터는 국장 Andreas Beck부터 장애인 대표 Claus Baier 까지 극장 내 다양한 협력 앙상블을 이루며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보더라인>에는 레지덴츠테아터 소속 배우이자 동베를린 출신인 '플로리안 야르(Florian Jahr)'가 출연하여 크리에이티브 VaQi의  배소현, 장성익, 나경민, 우범진 배우와 함께 한국-독일 양국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공연은 '탈북인 인터뷰'로 시작된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할 때 비행기값이 15,000$라는 이야기, 통일은 이념싸움이란 이야기, 문제나 비용만 따진다면 통일 할 수 없다는 이야기, 여성 탈북자 '그레이스'의 등장을 거치며 야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순간을 회상한다. 공연은 또한 비대면 형식을 적극 활용해 연극무대와 영상매체를 유연하게 연결시킨다. '김현석(가명) 목사 인터뷰' 장면에서는 화면을 분할하여 왼편에는 뮌헨의 실제 무대를 보여주고, 오른편에는 영상을 송출한다. 이때, 목사를 통해 우리는 상기된다.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탈북을 선택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 한편으론 학업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임을. 
 
그렇게 인트로에 삽입된 인터뷰가 끝나면 무대 위에 텐트가 나타나며 난민 이슈로 이어진다. 야르는 난민을 바라보는 독일 현지인들의 의식수준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나 서독이 흡수통일을 이루면서 많은 서독인들은 자신이 동독인들 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 조상들도 경계를 너머온 난민이었단걸 모른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게 동시대에 경계를 가로질러온 사람도 꿈이 있는 사람이란 걸 자각조차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영상 속에 등장한 히잡 쓴 여성은 말한다.  "Ich möchte Ärztin werden(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다시 공연은 영상화되며 철조망(Border line)을 따라 걷는 인물의 뒷모습이 잡힌다. 이어 화면이 두 개로 분할되어 오른쪽 화면에는 독일 극장상황이 보여진다. 텐트 앞 바닥에 놓인 한국의 산 그림이 영상에 담긴다. 그 위에 철조망 파편들이 놓여진다. 이어서 DMZ 티셔츠, 코로나 검역 확인증, 접근금지 푯말, Ankunft(도착) 서류가 보인다. 이어서 오스트리아를 볼 수 있는 '베그샤이드(Wegscheid)'가 소개된다. 바이에른 남동부에 위치한 베그샤이드를 통해 "우리는 유럽에 경계가 있다는 걸 잊었다"까지 그 사유가 확장된다.
 
경계를 따라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탈북인들의 모습이 쇼트에 잡히고, 어린시절 야르의 사진들이 나열되며 다시 독일 극장으로 돌아온다. 야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점을 회상한다. 기뻐 경직된 할머니의 몸, 처음으로 서독에 간 날, 아버지와 함께 동/서독 경계를 넘나들던 기억, 경계를 사이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뜀뛰던 기억, 성 니콜라우스 축일 등 그날 이후의 생생한 감각들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보더라인>에서는 무대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객석을 위치시키고 한가운데 펼쳐놓은 텐트가 마치 우리나라의 판문점을 상기시킨다. 마주보던 건너편의 관객들이 언제든 텐트로 난입해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곳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공연이라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무대를 경계로 서로를 마주 할 수밖에 없다. 공연은 계속 이어진다. 여성 탈북인 '그레이스'에 대한 인터뷰가 펼져진다. 남자친구와 솔직한 대화가 불가능하고, 탈북인이란 걸 감추고 거짓말 하고 살아야 하는 삶과, 동시에 두 개의 삶(탈북인으로서의 정체성, 남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살아야하는 것,  남자친구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생각하며 관계에 대해 갈등을 이야기한다. 
 
영상은 다시 대한민국 국경의 바닷가로 이동되고, 철조망을 따라 걷는 야르의 모습이 잡힌다. 그는 철조망을 만져보기도 하며 길을 따라 유유히 걷는다. 자가격리에 대한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다. 코로나를 무릅쓰고 한국에 공연 스케줄차 왔지만 편의점 도시락과 생수로 끼니를 이어가는 야르의 셀프 영상이 큰 리얼리티를 창출한다. 코로나로 인한 세상과 세상 간의 경계(Border)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Hostility / Worriness)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야르는 말한다. "난 이미 이곳에 왔는데 도착하지 않은 기분이다."
 
이어서 '리허설 Probe' 장면에서는 나경민 배우와 야르가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한마디씩 주고받는다. 더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8,000km씩 떨어진 삶에서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지만 그들은 '배우'라는 닮은 점을 가지고 있다. 서로에 대해 공감 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흉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디션 볼 때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도 공유한다. 그러나 총을 쏴본 경험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극명히 다른 입장이 드러난다. 그 외에도 이 장면에서 나경민 배우의 의상이 인상적이다. 그는 평범한 옷을 입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제 19회 서울변방연극제 티셔츠를 입었다. Seoul marginal theatre festival, 그곳은 경계와 변두리를 사유하는 실험적인 공연작업의 장이다. 초록의 추상경계가 프린트된 의상을 입음으로써 <보더라인>의 감각이 더욱더 살아났다. 또한 "고성 갔을 때 남북한의 휴전선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어?"라는 질문에 이어 나경민은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다. 낯선 사람에 대해 환대와 경계를 동시에 가진다는 그는 타자, 이방인, 탈북민들을 환대해야겠다고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멀어진 가족과 전화 한통화 망설이는 자신을 자각한다고 담담히 말한다. "지금은 남북한의 경계보다 그게 더 높은 경계같아." 국가적 차원까지 생각하기 이전에 누구나 마음과 관계 속의 경계가 있다. 필자는 나경민 배우의 이 대사에 크게 공감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 많은 경계들이 있다. 그 경계는 각자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가족, 누구는 학업, 누구는 직장 등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경계 즉, 삶에서는 결코 내 노력만으로 극복 할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이처럼 국가적 차원의 경계(Border)에 대한 이야기에서 개인적 차원의 경계까지 관객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지점이 <보더라인>의 묘미다.
 
현철(탈북 남성)이 등장한다. 그는 동사 '그리워하다=그리다'가 같은 어원임을 알려준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는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림으로써 그리워했다고 한다. 야르는 '안전한 공간'에 대해 질문한다. 현철은 안정감을 느낄 때마다 괴롭다는 양가감정을 느낀다고 대답한다.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들을 바르고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어하는 환경 즉, 대한민국 사회 저변에 깔린 환경에 대해 말하며 "이런 환경이 나를 떠나고 싶게 해요."라고 한다. 떠나고 싶은 환경에서 떠나왔더니 또 떠나고 싶게 만드는 환경이 기다리는 난민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변해주는 장면이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탈북인의 심리에 대해서도 고백한다. 그는 "행복하신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 "Sometimes happy, usually unhappy."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갑자기 장면이 중단되고  탈북인을 연기한 배우 우범진으로 돌아온다. 그는 탈북인 연기를 하면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에 대해 '우리가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데 전념했음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은 소수자, 난민, 탈북인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강조하지만 우범진은 배우로서 그 반대의 전략을 취하면서 그들만이 가진 고유한 서사를 드러내기에 힘썼다. 이는 여성이 가진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역설적으로 평등에 가닿으려하는 페미니즘의 한 전략과도 흡사하다. 
 
<보더라인>에서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국경에 대해 독일과 한국의 큰 차이가 무엇일까? 바로 한국인들은 '합법적'으로 국경을 걸어서 넘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박탈된 가능성, 넘을 수 있다는 의지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불가능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NN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장면이 영상으로 전환되며 탈북인 출신 박사(장성익 배우)가 등장한다. 그는 기계로 돌 표면을 갈고 있다. 한편 뮌헨의 무대에는 야르가 큰 베낭을 매고 등장한다. 그는 베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맞은편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상을 응시한다. 돌에는 NN이라고 새겨져있다. "아메그 하산, 아메그 오스만 ..." 박사는 중동의 이름들을 부르고, 야르는 가방에서 돌을 하나씩 꺼낸다.
 
2020년 9월 26일 서울로 영상은 바뀐다. 화면 안에는 배우 배소현이 있다. 그녀는 독일어 기초반에 들어간다. 독일어 발음을 연습한다. 난민 현장의 Freiheit(자유)를 외치는 독일어에는 이동의 자유, 평등, 불평등, 동등한 권리가 있지만 그 언어는 난민 활동가들의 언어와 부딪힘을 일깨워준다. 말은 자유롭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한다. "Doch, ich bin illegal(그렇지만, 나는 불법입니다)." 배소현은 난민 당사자 활동가인 'Mimi'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Mimi는 케냐 출신이며 2014년 36살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배소현은 2020년 현재 36살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았을 배소현의 내면이 36이라는 숫자에서 드러난다. Mimi는 활동가이기 이전에 그저 음향엔지니어라는 꿈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또한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이곳은 하나의 행성, 하나의 세계, 하나의 사랑, 하나의 혈육, 차별의 근거는 찾을 수 없네요."
 
극장 무대 위의 스크린에는 배소현의 모습이 영사되고, 바닥에는 돌더미들이 쌓인 채 가녀린 스팟 조명을 받고있다. 언제쯤 우리는 다 같이 어우러져 살 수 있을까? 영상이 전환된다. 한국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텐트 앞에서 우쿨렐레를 치며 모닥불도 피어오르니 캠프파이어 분위기가 난다. 박사는 돌덩이에 계속해서 NN을 새긴다. No Name, 지중해에 빠져죽은 이들의 이름이다.
 
"넌 어디서 태어났니?" "넌 무엇을 두려워하니?" "경계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니?" 나경민은 어머니께 쓴 편지를 읽는다. 이것은 바로 삶이라는 세월 가운데 만들어진 경계를 넘기 위한 용기다. 제 4의 벽을 사이에 두고 배우와 관객으로 만났던 모자 관계를 허물고 비대면의 시대에서 어떻게 아들을 만나고 계실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경민은 작은 용기를 낸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비록 자기 이야기이며 공연이란 허구일지라도 라이브 스트리밍의 시대에서 얼굴도 모를 관객들에게 어머니를 위한 편지를 읽는 행위는 결코 작은 용기가 아니다.
 
다시 질문한다. 점점 질문들의 범위가 국가적 차원이라기보다는 보다 사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고향이라는 단어의 의미?" "너를 다른 사람과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오롯이 너로서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질문 후 우쿨렐레 연주와 노래가 시작된다. 어두운 밤 아래의 호박색 빛 터널이 등장하고, 터널 안을 걷는 인물의 뒷모습이 보인다. <보더라인>의 경계선 걷기에서는 뒷모습이 자주 연출되었다. 쓸쓸하게 긴 길을 얼굴 없이 걷는 그 모습들, 동그란 지구에서 지중해라는 망망대해를 건너는 NN들을 상기시킨다. No Name, 이름 없는 그들은 사뭇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해방된 관객』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의 서술과 맞닿는다.
 
우리가 화면에서 고통 받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보는 경우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름 없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우리가 그것들에 보낸 시선을 우리에게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말의 대상이 될 뿐 스스로는 말을 갖지 않은 신체들을 너무 많이 본다. (중략) 이 이미지들에 고유한 정치는 아무나 보고 말할 수는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해방된 관객』, 137~138 면.

 
이름없는 신체들 요컨대, 용납 될 수 없는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말 할 수 없는 NN들에 대하여 <보더라인>은 그 말 할 수 없음의 위치를 전복시키고자 한다. 끊임없이 거부되고 그저 말의 대상이었던 그들을 돌에 새김으로써 그 존재가 다시금 각인된다.
 
다시 서울의 어느 카페, 그레이스가 등장한다. "내가 그냥 나라고 말하는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이것은 인터뷰어에게 하는 질문같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유학 생활 때 지은 이름인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레이스일 때 좀 더 외향적이고, 쿨하고, 시크한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태어난게 죄도 아니고 나는 '나'라기보다는 언제나 남들에게는 '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보더라인, 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왔음에도 결코 넘지 못하는 또 다른 편견이라는 보더라인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곧이어 환대(Hospitality)에 대한 사유가 이어진다. "한국사회에서 저도 누군가를 환영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환대란 주인이 손님에게 행하는 일종의 권력구조가 작용하는 행위라는 점을 그레이스는 꼬집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은 언제나 '탈북인'으로서 한국에서 환대받고 베품받는 존재였지 누군가를 진정으로 환대할 수 있는 환대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한다.
 
<보더라인>에서 가장 눈 여겨보아야 할 점은 국가, 분단, 난민 등의 사회적 차원부터 개인적 차원으로 질문이 이동성한다는 점이다. "하루의 몇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가?" "동독 출신인게 자랑스럽니?" "그 어떤 곳도 내 고향이 되어주지 못했어." 그러면서 야르가 베그샤이드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뜀뛰기 했던 날을 현재로 복귀시킨다. 한국 배우들 또한 경계 뜀뛰기를 한다. 한국-뮌헨에서 모든 배우들은 자유롭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넘고 야르는 잠시 멈춰서 한국의 영상을 바라보며 퇴장한다. 영상 속에서 야르가 등장한다. 영상 속 공간은 청계광장으로 확장된다. 시민들이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잠수교 횡단보도 한복판에서 배우들은 뜀뛰기를 해보고, 북한과의 경계가 합성되어 뜀뛰기 해보고, 다시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리는 한강다리 위에서도 뛰어본다.  뜀을 멈추며 모든 배우들은 제자리에 선다. 거친 심호흡이 전달된다. 그들이 정면을 바라보며 <보더라인>은 막을 내린다. 마치 이 공연과 함께한 모든 NN들을 응시하는 듯하다. 

 

2. 비대면 시대에서 신체를 감각하기 - 황수현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제19회 서울변방연극제(2019)의 참가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는 흰 의자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어있고 퍼포머들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려놓은 채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다. ‘음- 음- 음- 음-' 반복되는 소리에 맞춰 발로 그 리듬을 감각하며 공연은 시작된다. 그들은 코를 내민 채 킁킁거리며 냄새를 감각하기도 하고, 자신의 귓볼을 건드리며 귀의 라인을 감각하기도하며, '휘이- 휘이 휘이 휘익' 하는 소리 등에 맞춰 신체를 변화시킨다. 공연의 끝자락에서는 퍼포머들이 웃으며 퇴장하고 빈 의자들만이 남는다. 퍼포머들의 느낌을 생각해줄 수많은 빈자리들이 가상 너머로 채워지며 블랙미러 앞에 남아있는 '나'라는 감각의 전염체를 마주한다. 이러한 신체감각적 실험은 올해 SPAF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작년에 선보였던 것과 어떤 지점이 달라졌을까?
 
원형으로 빙 둘러진 접이의자에 퍼포머와 관객이 뒤섞여 앉아있었던 변방연극제와 달리, 이번 2020 SPAF에서는 관객과의 공동현존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되었다. 과연 비대면을 통해 관객이 실재하는 퍼포머의 몸을 느낄 수 있을까? 역으로 퍼포머가 실재하는 관객의 몸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비대면을 통해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 할 수 있을까? 비대면으로 인해 이번 SPAF에서 가장 아쉬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공연은 진행되어야 한다. 비대면의 겹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느꼈는가를 소통하는 것이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피드백이 될 것 같다. 또한 관객과의 신체적 공동현존이 없이 세 퍼포머들의 상호작용과 미니멀한 무대가 주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겠다. 관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아래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관객은 객석의 안전지대 속에서 관찰자의 역할만을 수행할 듯하지만, 퍼포먼스의 직간접적 자극의 대상이 됨에 따라 그들 역시 감각적, 심리적, 신체적 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비록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지 않지만, <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에서 관객은 객석과 무대가 구분되지 않는 원형의 공간에서 퍼포머를 포함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시선을 교환하고 때마다 반응하고 그래서 다른 반응을 유발하는 유동적 존재로서 공연의 또 다른 동력의 지점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퍼포머에게나 관객에게나 수행성은 익숙하고 낯선 몸의 교차점이 된다." 출처: https://indienbob.tistory.com/1141?category=226688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유동적 존재로서의 관객은 퍼포먼스라는 사건 속에서 참여―비록 그 참여의 정도에 상관없이―에 가담하고 감응함으로써 또다른 수행적 이벤트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공동의 신체감각을 형성하려는 실험에 비대면이라는 장벽이 생김으로써 실험의 포커스가 어디로 향해야할지 거대한 물음을 남기게 된다. 비록 물리적 공동현존이 배제되었지만 펜데믹 시대에서 스마트폰, PC, 태블릿 기기가 발생시키는 전자의 향연을 통해 어떻게 퍼포머의 신체를 감각해야하는지 또한 공동현존의 개념을 미디어의 영역까지 확장할 이론의 필요성을 제고하고, 그 감상 방식―극장이라는 같은 세계가 아닌 전자세계라는 경계를 거친 신체를 감각하기―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예견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비록 지금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고, 답을 찾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퍼포먼스의 지평이 변화될지 미지수지만 말이다.

 

3. 세대간의 이해 할 수 없는 삶의 방식 - 쇼빌컴퍼니 <딸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는 기성세대로 대변되는 '엄마'가 딸 '그린'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엄마는 부디 딸이 평범하게,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린은 엄마의 바람을 쉬이 수용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평범하게 보일 수 없는 성적지향에 대해서 그 누구도 아닌 소중한 엄마(가족)에게 만큼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린, 그리고 엄마의 집에 돈을 내며 동거를 하기 시작한 그린의 동성연인 '레인'은 엄마에게 존재를 거부당할지라도 자신이 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렇게 타인의 정죄어린 잣대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을 스스로 만큼은 해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시간강사로 근무하는 그린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내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해고까지 당한다. 그녀는 레인과 함께 불의한 세상 속에서 꿋꿋하게 부당함을 외치고 자신의 일과 삶을 지키려고 시위까지한다. 그러나 우연히 그 모습을 엄마가 보게되고, 엄마는 조용하게 넘어가는 삶,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라며 절절하게 딸을 위한 마음으로 애원해보지만 서로의 인생에서 절대 이해 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또 한명의 이해 되기 힘든 삶의 방식을 가진 인물이 극 중에 존재한다. 바로 치매로 인해 노인요양병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 '젠'이다. 한때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였던 ‘젠’은 이제 치매로인해 자신이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에게 젊은 남성이 와서 인터뷰를 시도하지만 그는 결국 극복 될 수 없는 불통으로 인해 인터뷰를 포기한다. 여기서 남성 인터뷰어는 '일반인'으로 대변된다. 성인, 남성, 직장인은 인간 중 가장 '보편'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가? 보편으로서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고 살아가는 그와는 달리 '젠'은 죽음을 앞둔 여성으로서 잊혀지고, 지워지기 쉬운 누군가에겐 '불편'한 존재가 되기 쉽상이다.
 
'젠'을 통해 떠오르는 필자의 사담을 나누고싶다. 누구나 길거리를 걷다가 요양병원 근처를 지나가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 요양병원 안에 들어가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모습은 다른 건물과 다름없지만, 그 안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 '내 세계'와는 분명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없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들은 노년이든 청년이든 누군가에게 사랑받았고, 인식되었고, 또는 가정과 직장이 있었고 분명 자기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 나이가 들고 병이 들수록 가정이 아닌 다른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야되고 병원이라는 다른 공간으로 가서 '생명력 있는' 사람들과 격리되게끔 한다. 사라지게 한다. 오로지 그들에 대해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늙음, 병 그리고 병상에 붙여진 이름 세 글자 뿐일 수도 있다. 필자는 외할아버지께서 노환으로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고 요양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경험했다. 죽음의 순간조차도 가족과 격리되어서 맞이해야 하고 오로지 마지막으로 고인을 볼 수 있는 순간은 입관식 때였다. 필자의 경험상 요양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 폴리글로브와 비닐 앞치마를 끼고 들어가 누워계신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기도해드리는 일 밖에 없었다. 모르는 분이지만 인사를 건네면 그것을 인지하고 인사를 받아주는 분도 계셨다. 현실은 가족조차 매순간 곁을 지킬 수 없어 요양보호사를 고용해야하고,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병원비를 마련하기위해 밤낮으로 일 해야하는 가족 구성원이 존재함에 분명하고, 장례의 순간조차 산사람들을 위해 편리하게 요양병원 한 귀퉁이에는 장례식장까지 마련되어있는 현실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분명 죽음은 멀리 존재하는게 아니구나." "아, 결코 죽음을 지워내지 말리라."
 
세대간에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지만, <딸에 대하여>에서는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특정 주인공이 한 명 있는 것처럼 인물들이 그려지는 게 아니라 각자가 마치 주인공인것처럼 캐릭터들의 생명력이 두드러진다.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자기 삶에서 만큼은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 입장이 있고 갈등 가운데 그런 입장차들을 멀리 벌려놓기도 하고 좁혀가기도 하며 이해받고싶은 욕구들이 분명 존재하는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점을 네 명의 여성 캐릭터들을 통해 상기시킨다.

 

4. 덧없는 몸짓을 덧있는 현재(現在)로  - 안은미컴퍼니 <나는 스무살입니다>

 
<나는 스무살입니다>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색채 그리고 한국적인 요소들이 가미된 무용 퍼포먼스다. 신명나는 안은미컴퍼니만의 개성이 돋보인다. '신명'은 다른 서구의 퍼포먼스에서 발견되지 않는 한국적 정서와 매우 밀접한 감흥의 표현이다. 동시대 연극학자들은 동양연극과 특히 우리나라의 '굿'에 주목하여 '신명'과 같은 특성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한다. 신명에는 정형화되지 않고, 특정한 서사가 있다기보다는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어떠한 기(氣)가 느껴진다. 이런 신명적 특성을 가진 <나는 스무살입니다>에서는 비록 명확한 의미가 발견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SPAF 20주년을 축하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SPAF의 시작부터 20년이라는 세월이 덧 없이 흘러갔을지라도 지금 여기(Here and Now) 우리의 몸짓은 덧있다. 우리의 삶은 덧있다. '덧'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이 공연에서의 40분은 꽤 덧스럽게 흘러간다. <나는 스무살입니다>를 통해 SPAF의 역사를 되짚으며 현재를 소환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게 봤던 장면은 무대를 떠나 객석에 퍼포머들이 앉아서 마스크를 쓴 채 영상을 보고 있을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 때였다. 퍼포머들 마저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현실이 공연에 삽입되면서 관객들은 현재에 대해 순간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극장에 가는 게 위험하므로 방에 앉아 공연을 관람해야하는 현실, 마스크의 일상화, 그럼에도 진행되는 2020 SPAF, 어떤 형식으로든 관객과 만나고 싶어하는 퍼포머들의 의지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쉴새없이 펼쳐지는 역동적인 몸짓 중간에 객석에 앉아 건네는 인사 그 '덧'같은 장면을 통해 퍼포먼스의 미래가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희망마저 들게한다. 퍼포머와 관객이 계속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소멸되지 않는 한.

 

5. 무대 위 춤추기의 조건 허물기 -  제롬 벨 <갈라>

 
<갈라>에서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위해 전문가/비전문가의 조건을 과감히 허문다. 필자는 이 글에서 <갈라>  공연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내용이 중요하기보다는 무대 위에 등장한 퍼포머들의 현존으로 가득 찬 공연이기때문이다. 총 20명으로 구성된 퍼포머들은 어떤 이는 춤을 전문적으로 추는 무용수 같고, 어떤 이는 다른 영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 온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즉, '일상의 전문가'들이 퍼포머로 등장한 공연으로 볼 수 있다. 일상의 전문가란 전문 퍼포머가 아닌 개인의 일상을 살아온 자기 일상의 전문가를 일컫는다. 각자의 삶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살다 온 자기 인생의 퍼포머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대변 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몸이 무대 위에 서게 되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표현하는 퍼포머로 거듭난다. 또한 팔, 다리를 자유롭게 가눌 수 없는 아기가 아닌 이상 의식적으로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 할 수 있고 스스로 사고 할 수 있는 어린이 퍼포머들의 존재 또한 돋보인다. 장애로 인해 휠체어를 운전하며 동작을 수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녀는 '단체단체' 장면에서 '나 가거든'을 선곡하며 무대 한 곳에 멈춰 세워놓은 휠체어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며 춤을 추기도 하고, 휠체어를 벗어나 바닥을 구르기도 하며 어떠한 슬픔과 한을 창출해냈다. 또한 다른 외형으로 드러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피부색이 다른 백인과 흑인도 있고, 어쩌면, 필자와 같은 동양인이라 겉모습만으로는 국적은 구분 할 수 없지만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도 존재 할 수도 있다. 또한 육안으로는 포착 될 수 없는 개인이 가진 고유한 성적지향,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존재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갈라>에서는 개인의 고유한 몸과 그들의 기호가 드러나는 것 같은 선곡이 도드라진다. 전문가/비전문가의 영역을 해체하면서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 개인이 존재하며, 무대 위에서 춤을 추면서 삶/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삶과 예술의 붕괴되는 경계, 이를 감각하는 퍼포머와 관객이 함께 문지방과 같은 사이에 위치하기는 포스트모더니즘 공연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바이다. <갈라>에서 가장 눈여겨본 점은 '단체단체'에서 각자 한 명씩 무대 중앙으로 나오고, 동작을 이끌며 나머지 19명의 퍼포머들이 리드 퍼포머의 동작을 따라하며 그의 동작 혹은 삶에 동화되고 가닿으려고 하는 노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문가/비전문가의 경계 뛰어넘기와 더불어 개인/개인의 삶의 경계 뛰어넘기로 나아간다.
 

이상으로 2020 SPAF 참가작 <보더라인>, <나는 당신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딸에대하여>, <나는 스무살입니다> 그리고 <갈라>에 대한 글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전 지구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때야말로 퍼포먼스 예술을 통해 인류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겠고 익숙하게만 느껴졌던 '극장 가기'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앞으로 어쩌면 '극장 가기'마저 하나의 사건이 되고 퍼포먼스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포먼스는 계속되어야 한다. 퍼포먼스는 작업이기 전에 사람들의 모임이다. 모임으로 인해 만들어질 수 있는 진정한 인류의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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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7일 목요일

[#fair_play] 창작은혁명 <호라이즌>팀 평등한 공연제작을 위한 작업 수칙

 

드라마인은 연극계의 공정하고 평등한 제작 문화 수립을 위해 해시태그 #fair_play 캠페인을 진행하며, 그 일환으로 그동안 개별 극단과 단체에서 도출한 작업 수칙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전체 연재 목록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동참을 원하시는 단체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편집부

창작은혁명

<호라이즌>팀 평등한 공연제작을 위한 작업 수칙

2020년 진행하는 창작은혁명 프로젝트 연극 <호라이즌>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은 작업 수칙을 수용하고 작업 과정에 적용하기로 한다. 모든 구성원은 작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며 계약서에는 작업 수칙에 대한 내용이 명시되어야 한다. 첫 연습을 들어가기 전, 모든 구성원이 모인 자리에서 작업 수칙을 낭독하고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새로운 구성원이 참여하는 첫 날, 마찬가지로 모든 구성원이 모인 자리에서 작업 수칙을 낭독하고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작업 수칙은 연습실에 항상 1부 비치되어 있다. 구성원 모두에게 PDF파일을 제공한다.


작업 수칙에 대하여

창작환경이 안전하지 못할 때, 예술가와 예술, 두 가지 모두가 위태로워진다. 창작은혁명은 자유롭고 안전한 창작환경을 지향하는 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해 작업 수칙을 만들고 실천한다. 아래 내용은 활발한 의사소통, 안전, 존중, 책임에 기반한다.


목적

공연에 있어서 무엇보다 사람이 우선한다.

연극 작업 과정에서 마주할 수 있는 차별, 혐오, 착취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기준, 근거로 삼는다.

서로에 대한 존중, 배려를 바탕으로 신뢰를 지킬 수 있다.


우리의 권리, 우리의 약속, 우리의 책임

하나, 상호 존중을 위해 존댓말 사용을 기본으로 한다.

하나, 모든 일정은 사전에 공지하고, 정해진 시간을 지킨다.

하나, 계약서는 무조건 작성하여 기획팀이 한 부, 각 개인이 한 부 갖는다.

하나,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고, 새로운 실패를 할 권리가 있다.

하나, 언제라도, 누구든지(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도) 불편함을 표현할 수 있다.

하나,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동의 없는 조언은 하지 않는다.

하나, 다른 구성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시간 약속 지키기, 나쁜 감정 해소하지 않기, 원치 않는 신체 접촉 하지 않기 등)를 지킨다.

하나, 타인을 공격하거나 웃음거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하나, 각자의 공간을 인지하고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 정리는 다 같이 한다.

하나, 경청한다.

하나, 적어도 2주에 한 번 다 같이 모여, 있었던 일을 돌아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를 기록으로 남긴다.

하나, 작업 과정에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하나, 민감한 장면은 미리 관객에게 고지하고, 합의되지 않은 부분을 공연 직전/ 공연 중 결정/ 진행하지 않는다.

하나, 극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명심하고 모든 구성원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자치규약에 첨삭 등 수정의 필요성이 있을 경우 구성원 전원의 합의를 통해 결정한다.

누군가 위 수칙을 잊었을 경우, 그것을 상기시킬 의무가 모두에게 있음.

대응매뉴얼

1. 안전하지 않은 연습과 공연 중단 건
2. 반추시간에 대한 건
3. 딩동
: 실시간 부정적인 코멘트나 행동을 다루는 방법

화자A는 너무 열심히 웃기려고 애를 쓴 나머지, 생각 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화자B가 “딩동”합니다. 이것은 화자A에게 ‘재미로 하는 말이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알게 하는 신호가 됩니다. 화자A는 상황을 파악했고 후회한다는 의미로 사과합니다.

이 순간 대화가 필요한지 아닌지는 “딩동”을 던진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관련한 내용을 더 이야기 할 수도 있고 원래 나누던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도 있는데, 이 결정은 “딩동”한 사람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 공간에 있는 누구든지 “딩동”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주세요. “딩동”은 이야기의 내용이 당신을 향하지 않았더라도 할 수 있습니다.

불편함에 대해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긍정적이고 존중이 있는 공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미 잊었거나 잊고 싶은 말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서로에게 약속해 주세요. 동의한다면 “약속하겠습니다.”라고 해주세요.

얼마든지 더 좋은 방법, 방향으로 수칙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고

- 2020년 창작은혁명 <안전한 창작환경 만들기> 워크숍

- <우리가 고아였을 때> 제작팀, 평등한 공연 제작을 위한 작업 수칙

- 극단문, 성평등 및 바람직한 연극문화를 위한 프로덕션 생활수칙

- 극단Y,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 페미씨어터,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 평등한 연극 제작문화를 향한 질문/ 제안/ 다짐/ 규칙

- 시카고씨어터스탠다드, NotInOurHouse

2020년 6월 10일 수요일

[괄괄×괄괄 인터뷰 ②] 도은×신효진 - 극작가 동인 ‘괄호’와 창단 공연에 대한 수다

※ [괄괄×괄괄 인터뷰]는 극작가 동인 ‘괄호’ 멤버들 간의 내부 인터뷰를 기록한 시리즈입니다. ①편에는 김진희 작가와 이소연 작가의 이야기를, ②편에는 도은 작가와 신효진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인터뷰의 기획 및 진행은 ‘괄호’의 드라마투르그 김민조가 맡았습니다. 

<괄괄괄괄>을 올리기까지 


민조: 이번 ‘괄호’ 창단 공연에 도은 작가님은 <프란시스 맥도먼드에게 전화걸기 위해서는>라는 작품으로 참여하시고, 효진 작가님은 <송>이라는 작품으로 참여하시죠. 저희가 처음에 창단 공연의 콘셉트를 어떻게 잡을지 고민을 많이 했잖아요. 그러다가 글쓰기 규칙을 정해서 네 개의 작품을 하나의 공연으로 엮어내자는 결론을 냈고요. 그 이후에 작가님들이 글쓰기 규칙에 맞는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낼 것인지 고민하셨을 것 같은데, 그 과정에 대해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도은: 제가 가진 현재진행형의 고민과 엮어서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극작가가 나오는 작품을 써본 적이 없어서, 극작가인 나의 고민과 맞물려 있는 이야기를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원래는 남자가 나오는 연극을 쓰려 했어요. 제가 전에 쓴 작품들 중에는 남자가 죽거나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남혐 작가 아니면 메갈이다’ 라는 소리까지 들었거든요. (웃음) 그래서 이번에는 죽임을 당한 남자가 작가를 찾아오는 얘기를 쓸까 했는데, 쓰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안 써져요. 남성 인물이 찾아와서 작가에게 말을 건다면 결국에는 그걸 쓰는 제가 그 남성 인물의 말을 듣고 싶거나 그 사람이 무슨 논리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야 하는데…

민조: 궁금하지가 않으셨군요. (모두 웃음)

도은: 네, 쥐어짜도 나오지가 않고, 관객들도 보면서 괴로울 거라는 감각이 있어서 그런지 이야기가 더 나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남성 인물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 남자 인물을 죽이는 여성 인물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저의 본질적인 고민에 가깝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과적으로는 여성 인물 두 명이 나오는 작품으로 안착된 것 같아요. 

효진: 저는 2월에 올렸던 <글쎄 어찌나 사소하고 어찌나 안 궁금한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 공연에서 제가 극작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얘기를 다 했거든요. (웃음) 억울함도 표시를 했고, 소외당한다는 얘기도 했고, 제가 당한 실제 사례들도 다 보여줬고, 어쩌다 희곡을 쓰게 됐는지도 얘기했고요. 그래서 솔직히 처음에는 ‘아, 극작가 얘기 또 해야 돼?’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데… 그러다가 어떻게 하면 등장인물을 만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어렵지 않게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어요. 극작가의 이야기가 극작가에만 머물지 않고 확장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소망도 있었고요. 
그러기 위해서 ‘친구’라는 친밀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대를 불러내는 방식을 떠올리게 됐어요. 예전에는 제가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납득한 것만 글감으로 채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해한 걸 쓰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고 써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제게도 이해할 수 없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를 극작가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만나 이해해보려 하는 이야기를 쓰면 좀 더 쉽게 전달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민조: 효진님이 맨 처음에 가져오신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잖아요. 정신분석의와 내담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인물 관계였던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이야기를 교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효진: 그 이야기도 골자는 결국 ‘이해해보려’ 하는 것이었어요. 그와 함께 등장인물을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대상화가 아닐까 하는 저의 고민이 들어갔던 작품이었는데, 왜 교체하게 됐냐면 일단 글에 너무 허세가 많았고 (웃음) 승모근에 힘주고 쓴 것 같다는 스스로의 판단이 있었거든요. 보다 친밀하고 확장성 있는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송>으로 전환하게 된 것 같아요.

민조: 확실히 관객들 중에서도 <송>을 보며 자신의 친구나 주변인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도은님의 <프란시스>를 보며 자신이 동경하거나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을 것 같고요.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극작가가 인물을 만나는 과정 


민조: 저는 개인적으로 극작가들이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궁금했거든요. 인물의 이름이 어느 순간 벼락처럼 오는 것인지, 사흘밤낮을 고민해서 지어내는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효진님이 쓰신 <밤에 먹는 무화과>의 주인공 ‘윤숙’의 경우에도 작품의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다들 어떻게 그런 이름을 지으시는 건가요.       

효진: 이름 지을 때가 항상 머리가 터지더라고요. 저는 이름보다는 이야기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그 속에서 의미를 조합해 이름을 짓는 편이에요. <밤에 먹는 무화과>의 경우에도 주인공 ‘윤숙’을 제외하면 모두 이름이 없는 인물로 채워져 있거든요. 지나가는 인물들이 특별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거죠. 

도은: 저도 이야기가 먼저 나오긴 하는데, 모든 인물의 이름이 특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있어요. 아니면 아예 익명성이 확 느껴지게 짓거나.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톤으로 갈 지 빨리 결정되는 편인 것 같아요. 톤이 먼저 결정되면 그걸 의식하면서 의미와 맞는 인물의 이름을 찾아가게 돼요.

민조: 도은님의 <냉장고로 들어온 아이>에 나오는 ‘모’라는 주인공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를 상기시키는 이름인데 17세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재미있고요. 

도은: 그 작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 이름이 모두 한 글자로 되어 있어요. 작품을 구상할 때 이름이 한 글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모’라는 인물은 냉장고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엄마 같은 역할을 하는 순간들도 있는데, 익숙한 모습의 엄마는 또 아닌 인물이에요. 그래서 그 이름이 빨리 떠오른 것 같아요.

효진: 가끔 인물이 먼저 오고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아, 이런 인물을 써야겠다’, ‘얘 이름은 이런 느낌이겠다’가 먼저 오고, 그 인물을 어떤 이야기 속에 넣을지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죠. 

민조: 인물의 캐릭터성을 어떻게 구축하시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타인의 말투나 문체상의 특징을 포착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인물을 만드실 때 실제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가 반영되는 경우도 있나요? 

도은: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꽂히는 편이에요. 현실에서는 ‘저 사람은 왜 저러지?’ 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하잖아요. 하지만 집에 가서는 계속 생각해보는 거죠.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현실에서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효진: 저는 사람을 나노 단위로 잘 보거든요. 주변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덕질을 하는 스타일인데, 그 사람만의 귀여운 순간들이 있어요. 그 순간들을 잘 기억하려 노력하고 그게 왜 귀여웠는지 생각해보는 편이에요. 도은님이 아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꽂힌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래요. 어딜 갈 때도 귀가 항상 열려 있어서 옆 테이블에서 나누는 이야기도 귀에 잘 들어오고,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이야기를 할까 항상 궁금해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저는 택시기사님께도 말을 많이 거는데요, 그분들이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TMI를 털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아, 인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런 사람이 희곡에 나오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궁금해지고요. 그런데 오히려 주변 인물이 이야기의 재료가 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저는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는 편인데, 거기에 나오는 특이한 심리나 철학 사상 같은 것들이 어떻게 인간에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어요. 그 형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볼  때도 있고요.  


그간의 작품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민조: 작가님들이 그간에 쓰신 작품들을 읽어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물형이나 모티브가 있더라고요. 효진님의 경우에는 역시 인간이 아닌 존재들, ‘비인간’으로 통칭할 수 있는 존재들이 나타난다는 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탈피>에서도 ‘뱀’이 아주 멋있게 긴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2월에 하셨던 <글쎄 어찌나 사소하고 어찌나 안 궁금한지> 공연에서도 이 ‘뱀’이라는 인물을 구현하기 어렵다고 투덜대는 연출이 모습이 나왔던 것 같고요. 다른 한편으로 이번 <송>은 내 곁을 떠난 친구를 다시 불러내는 이야기이고, <밤에 먹는 무화과>도 죽음에 가까이 있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인데요. 죽음이라는 테마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계신 건가요?

효진: 음… 중2병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건가. (웃음) 우리 모두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는 ‘끝’에 대한 직감을 갖고 있잖아요. 죽음이 커 보이지만, 실은 내가 싸우고 영영 보지 않게 되는 친구도 제게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관계의 끝이랄까요? 그게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고유한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게 무섭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런 게 없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해요.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영원하다면 기록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특히 희곡을 쓰는 행위에 중요한 것은 순간을 잡아두는 것이고, 연극 자체도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가는 이야기이죠. 그런 게 죽음의 이미지와 잘 연결이 되는 듯 해요. 그렇지만 죽음을 단지 두려운 것으로만 묘사하고 싶지는 않은 것도 있고요. 

민조: 효진님이 ‘사라짐’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도은님 작품에서도 유사한 테마가 보이는 것 같아요. <사라져, 사라지지마>에 나오는 사라진 아이, <냉장고로 들어간 아이>에 나오는 사라진 여자들이 그렇죠. 도은님에게는 사라짐에 대한 테마가 어떤 것인지 여쭤보고 싶어요.

도은: 저는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지’가 궁금해요. 누구에게나 자기 곁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있잖아요. 희곡에서는 그 사람들을 무대 위에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자꾸 불러내게 되는 것 같아요. 만약 불러낸다면 어떻게 불러내야 하고, 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지가 항상 궁금해요.  

민조: <프란시스>의 경우 작품 뒷부분에 작가와 인물이 ‘그 여자는 어떤 여자여야 하나’에 대한 대화를 나누잖아요. 최종고에서 “여자는 그 여자가 그립다. / 왜 그립지? / 떠났으니까.” 라는 대사로 확정되는 걸 보고 개인적으로 좀 먹먹한 느낌이 있었데, 방금 해주신 말씀을 듣고 보니 어떻게 보면 도은님의 오래된 테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네요. 제가 작가님들 각각의 연습실을 부엉이처럼 날아다니다 보면 기분이 이상할 때가 있는데요.

효진: 부엉이 잘 어울려요. (웃음)

민조: 뭐라고요? (웃음) <프란시스>에 ‘두 여자가 아주 친했는데 멀어졌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게 <송>의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들리는 순간이 있거든요. 진희님과 소연님 작품 도 대사를 통해 서로 링크되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님들이 공간을 쓰는 방식에 대해서도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도은님의 경우 전작들을 보면 일상적인 공간들이 나오는 것 같고 인물들도 구어체의 통통 튀는 대사들을 많이 구사하고 있는데, 무대지시문들을 보면 오브제만 몇 개 놓여 있는 빈 무대를 쓰시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전환이 자유로운 세팅을 선호하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도은: 아무것도 없는데, 약속을 해서 공간이 성립되는 순간들이 너무 재미있어요. 그래서 진짜 같은 세트를 만들기 보다는 최대한 무대를 상상으로 채워넣을 수 있기를 바라곤 해요. 그리고 제가 희곡을 쓰다 보면 공간 자체가 많아지더라고요. 그 공간들을 실질적으로 구현하지 않고 오브제만 딱딱 넣어놓으면 무대화하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낼 거 아니에요. 저는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는 것 같아요.     
 
민조: 그래서 도은님 희곡을 읽으면 기본적으로 ‘시원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공간이 시원하게 열려 있는 느낌이고, <프란시스>에서 그런 점이 트램펄린의 활용으로 집약되지 않았나… (웃음) 저는 효진님의 <밤에 먹는 무화과>를 희곡집 『여자는 울지 않는다』(제철소, 2019)에서 처음으로 읽었는데요, 그때 ‘호텔 뤽상부르’라는 공간의 강렬하고 구체적인 질감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더불어 이국적인 느낌도 많이 받았는데, <탈피>의 경우에도 배경이 파충류 동물원이잖아요. 주제적인 면과 공간 활용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효진: 제가 비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기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데, 저는 최근에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일상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구체적인 공간을 소환하려 노력을 하는 것 같아요. <밤에 먹는 무화과>의 경우 ‘이윤숙’이라는 인물이 곧 호텔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썼어요. 저는 어느 순간 무대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타협적으로 쓰는 게 싫어졌어요. 예를 들어 호텔이나 동물원 공간에 대한 지시문을 구체적으로 쓰면 쓸수록 제 안에서도 ‘이게 될까?’, ‘이걸 누가 구현하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럴 때 타협을 좀 안 해봐야겠다,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읽을 때 재미가 있고 이 이야기에 의미를 주는 공간이라면 쓰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민조; 학교에서 맨날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는 글이라고 가르치죠. 저도 예전에는 연극을 위한 스크립트로서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요새는 희곡과 무대 사이의 긴장과 간극이 있는 작품이 더 즐겁게 읽힐 때가 있어요.


‘괄호’다운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


민조: 두 분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이제는 <괄괄괄괄>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볼게요. 이번 프로덕션이 연출가를 거치지 않고 작가님들이 배우님들과 직접 접촉해서 공연을 만들어나가는 형태잖아요. 이런 형태의 프로덕션을 경험해보신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해요.

효진: 저는 되게 좋았어요. 제가 원하는 이미지를 바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요. 물론 연출적인 테크닉이 부족하고, 배우의 언어를 잘 모르다보니 기술적으로 조금 딸리는 면이 있긴 했죠. 그렇지만 제 텍스트를 육화시키는 과정에 배우님들과 함께 참여하다 보니 인물을 이해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인물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를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거든요. 대부분 연출님들이 해석해서 전달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2인극의 형식이라서 더 그런 측면이 있겠지만 인물 자체에 집중하는 작업을 해보게 된 것 같아요. 이번 <괄괄괄괄>의 콘셉트도 작가가 인물을 만난다는 것인데, 뭔가 메타의 메타를 경험했달까… (웃음)

도은: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괄괄괄괄>이 연출 위주의 작업 환경에 대한 항의 같은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고요. (웃음) 연출의 역할을 겸하는 것인지, 그냥 작가로서 과정 안에 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프로덕션을 진행하면서도 내가 어떤 상태로 들어와 있는 걸까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작/연출을 해본 적은 없고, 이번에는 연출도 아니고 작가긴 한데 완전히 작가만 하는 건 아닌… 중간적인 무언가였던 것 같아요. 이런 작업이 많이 반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또 하나는, 아무래도 저희가 극작가 동인이라는 것을 배우님들이 의식하셔서 그런지 대사에 신경을 많이 쓰신다는 감각도 있었어요. 

효진: 맞아요. 대사를 토씨 하나 안 틀리려고 하세요. 그런 걸로 뭐라고 안 하는데 틀리면 괜히 눈치 보시고… (모두 웃음) 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편하게 하시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아예 대사 순서를 바꿔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또 이 대본을 인터넷에 올릴 거다, 그러니 조금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웃음) 

민조: 말이 나온 김에 연습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해서 좀 더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곤란했던 순간, 재미있던 순간, 신기했던 순간 등등이 있으셨나요?

도은: 저는 연습실에 오는 사람들이 오늘 무엇을 할지 알고 오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일일계획표를 세우고 첫 연습 때 전부 공유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 <프란시스> 팀은 인원이 적고 작가랑 배우들이랑 나이대도 전부 비슷해요. 그러다보니 수다를 정말 많이 떨게 되는 거예요. 다섯 시간 연습이면 두 시간 수다를 떨고 세 시간 바짝 하자, 는 식이 되기도 하고요. 작품과 아무 상관없는 연애 이야기를 꽃피우기도 하고. 그게 가능한 환경이 신기했어요. 

효진: 저희도 그래요. 네 시간 연습인데 한 시간 떠들고 한 시간 근황토크하고… (웃음) 보통 연출 역할을 맡은 사람이 조바심을 내게 되잖아요. 저는 연출님들이 공연이 임박해오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하호호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번에도 제가 되게 태평하더라고요? 저는 도은님처럼 계획을 짜서 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오늘은 뭐 할까요?’ 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그러니까 배우님들이 오히려 불안해서 추가 연습을 하자고 하시고, 저는 ‘저희 다 됐는데 왜 그러세요’ 그러고. (웃음) 저도 동년배 세 명이서 연습을 하니까 너무 돈독해지고 좋더라고요. <송>은 90년대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이라 그 시절 얘기로 또 꽃피우고, 그런 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 에피소드라면 ‘햄스터 난입 사건’도 있었잖아요?

민조: 햄스터 난입 사건*은 제가 각주를 통해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웃음) 이번 창단 공연은 네 명의 동인이 독립적인 단막극을 연달아서 올린다는 특징도 갖고 있잖아요. ‘괄호’ 동인의 이름으로 처음 시도해본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어떠셨나요? 그리고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지도 궁금해요. 

효진: 이번 공연도 매우 의미 깊고 좋은 시도였지만, 개별적으로 연습이 돌아가다 보니 극작가들끼리 뭔가를 한다는 느낌은 조금 부족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극작가 네 명이 복작복작 벌이는 어떤 일을 해보고 싶어요. 스터디도 하고 싶고요. 서로 관심사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걸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꾸준하게 스터디를 했으면 좋겠다는 게 첫 번째 바람이에요. 두 번째 바람은 극작가로서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저희 공연 풀네임이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잖아요. 정말 그 제목에 어울리는 모색을 해보고 싶은 거죠. 세 번째로는 동인들이 서로의 희곡을 봐주고 이야기를 많이 나눴으면 좋겠어요. 내 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괄호’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지지해주는 동료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도은: 지원 사업 되고 나서 저희들이 같이 희곡을 쓰기 시작했잖아요. 저는 그런 경험이 흔치 않거든요. 내 희곡이 언제 공연될지 모르는 상태로 쓰지, 공연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쓴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동인들이 동시에 희곡을 쓰기 시작하고 회의 자리에 모여서 그 희곡에 대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감각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프로덕션 내에 글을 쓰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좋았고, 연출이나 배우의 피드백과 다른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피드백을 준다는 것도 좋았어요. 그게 초반에 작품을 다듬을 때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고요. 앞으로도 그런 작업을 팀 내에서 꾸준히 잘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저는 공동창작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요. 저희들처럼 여성 극작가들이 모인 ‘글과 무대’ 팀의 공연을 봤는데, 그 공연은 아마도 작가들이 함께 스토리라인을 짜고 인물을 만든 것 같았어요. 저희도 그렇게 하나의 주요 스토리를 만들고 동인들이 공동 작업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물론 힘든 작업이겠지만요. 마지막으로 ‘과정 안에서 극작가가 뭘까’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나갔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너무 소외되어 있다는 결론 말고, 앞으로 우리가 과정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효진: ‘괄호’ 희곡집도 내고 싶어요. 저는 제 희곡을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줄 지가 항상 어려웠거든요. 공연화되지 않더라도 희곡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뭔가를 해보면 좋겠어요. 희곡만 있는 게 아니라 일러스트 작가를 섭외해서 희곡의 장면을 삽화로 넣어볼 수도 있고요. 좀 더 가독성 있고 독자가 상상을 하기 편한 희곡집을 만들면 누군가에게는 읽히지 않을까요? 

민조: 돌이켜보면 저희가 창단하자마자 공연을 올리는 무모한(?) 시도를 한 것인데요, 오히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극작가 중심 프로덕션을 굴려보는 소중한 경험을 얻은 것 같기도 해요. 그 경험을 가지고 다시 ‘괄호’로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다음 스텝을 구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

* 수유동 연습실 햄스터 난입 사건: 2020년 5월 22일 수유동에 소재한 쿵짝프로젝트 연습실에 햄스터 한 마리가 난입한 사건. 1층에서 연습실 현관으로 난데없이 떨어진 햄스터를 작가 도은이 최초 목격하였고, 곧장 연습실 난입을 감행한 햄스터를 드라마투르그 김민조 등이 저지하였다. 햄스터는 쿵짝프로젝트 연습실에서 1박 2일을 보낸 뒤 입양 의사를 밝혀온 연극인의 품에 안겨 유유히 사라졌다. 
  

도은
2018 <사라져, 사라지지마>
2019 <냉장고로 들어온 아이>
2019 <아무튼 살아남기>
2019 <아빠 안영호 죽이기>
2020 <프란시스 맥도먼드에게 전화걸기 위해서는>

신효진
2018 <아웃스포큰>
2018 <삼일로창고극장 봉헌예배>
2019 <탈피>
2019 <디디의 우산>
2019 <밤에 먹는 무화과>
2020 <글쎄 어찌나 사소하고 어찌나 안 궁금한지>
2020 <송>


 

2020년 6월 9일 화요일

[괄괄×괄괄 인터뷰 ①] 김진희×이소연 - 극작가 동인 ‘괄호’와 창단 공연에 대한 수다


※ [괄괄×괄괄 인터뷰]는 극작가 동인 ‘괄호’ 멤버들 간의 내부 인터뷰를 기록한 시리즈입니다. ①편에는 김진희 작가와 이소연 작가의 이야기를, ②편에는 도은 작가와 신효진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인터뷰의 기획 및 진행은 ‘괄호’의 드라마투르그 김민조가 맡았습니다. 


<괄괄괄괄>을 올리기까지 


민조: ‘괄호’ 창단 공연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이하 <괄괄괄괄>)에서 진희 작가님은 <DELETE>라는 작품을, 소연 작가님은 <조약돌은 상상한다>라는 작품을 각각 올리시잖아요. 처음에 네 개의 작품을 어떻게 하나의 공연으로 엮어낼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저희가 글쓰기 규칙이라는 것을 정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작가님들이 이 규칙에 맞는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낼 것인지 각자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그 과정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진희: 제가 극작을 할 때 책상 앞에 앉아서 아무것도 못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착착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진도가 못 나가고 있는 것 같고, 쉽게 쓰면 되는데 왜 쓰지 못할까 스스로를 비난하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작가 역’과 ‘인물 역’이 등장한다는 글쓰기 규칙이 정해졌을 때 자연스럽게 제가 자기검열을 통해서 지워버렸던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사람과 만나는 순간을 이야기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워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거죠.

민조: <DELETE>에 ‘영기 할매’를 비롯해서 지워진 인물들이 여러 명 거론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쓰셨던 인물들의 이름인가요?

진희: 완전히 똑같은 이름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휴지통에 모여 있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실제로 ‘성진’ 역의 정대경 배우님이 휴지통 안에 모여 있는 친구들을 가지고 <DELETE 2>를 만들어도 재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태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이야기로 확장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민조: 소연님이 올해 2월달에 올린 <희곡상을 위한 희곡쓰기> 공연에서도 극작가가 타이핑한 글자들을 모두 선택 > 삭제해버리는 퍼포먼스가 있었잖아요. 글을 쓰다가 지워버리는 작가적 노동의 피곤함이 <DELETE>에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요. 

소연: 저는 제가 글을 왜 쓸까, 생각해보면 결국 ‘이상형’을 만나기 위해서 쓰는 것 같아요. 저는 글을 쓸 때 출발하는 지점이 늘 인물이거든요.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며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부딪힘이 생길 때 제가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많이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조약돌은 상상한다>도 거기서 출발했던 것 같아요.

민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면서 부딪혔던 암초 같은 게 있을까요? 작가님들이 초고, 수정본, 최종본, 최최최종본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웃음) 그 과정에서 경로 변경이 조금 있었죠?  

진희: 초고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인물 역의 ‘성진’ 캐릭터예요. 초고의 ‘성진’은 신적이고 초월적인 존재, 작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었어요. 수정 과정에서 보다 ‘등장인물’이 된 것 같아요. 작가 역과 상호작용하는 존재로 바뀐 거죠. 이 이야기가 나 혼자만의 징징거림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 작품이 과연 객관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우려가 들기도 해서 배우님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초반에 동인 기획회의를 할 때도 극작가의 이야기를 하되 극작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는 말자고 했잖아요. 그 고민이 제일 컸어요. 

민조: 네, 저희가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죠. 연극계에서 극작가가 얼마나 왕따인지를 보여줄 수도 있지만, (웃음) 한편으로는 관객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이길 바란다는 결론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소연님도 비슷한 고민을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연: 네. 저도 초고 때는 좀 더 극작가 이소연에 집중하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 했어요. 이상형이라는 존재가 출현하게 되는 계기 자체가 ‘나랑 맞는 연출이 없어서’였던 거죠. 내 작품을 제일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연출해줄 파트너를 찾는 과정에서 이상형이 만들어지는 얘기였는데, 진희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나라는 존재가 극작가 정체성만으로 이루진 것은 아니잖아요. 차라리 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가야 극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동시대적 고민들을 조금 더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은 연출이 아니라 나를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내 삶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상형을 찾는 이야기로 바뀌게 된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진희님과 정반대일 수도 있는데, 초고 때는 ‘이상형’이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로 쓰여 있지 않았어요. 수정 과정에서 ‘이상형’이 보다 주체적으로 ‘이소연’과 상호작용을 주고받게 되었죠. 그래놓고 보니 ‘이상형’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이상형’ 역을 맡은 배우가 과연 어떤 상태로 과연 무대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어떤 상태로 이 극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제일 많이 하고 있어요. 

민조: 두 분 다 상호작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셔서 흥미롭네요. 작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인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점. 어쩌면 이번 <괄괄괄괄> 작품들은 모두 ‘주고받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네요.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포스터
극작가 동인 괄호, 
<괄호는 괄호와 괄호 사이 괄호가 될 수 있을까>(2020)


극작가가 인물을 만나는 과정 


민조: 자연스럽게 인물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극작가는 인물을 계속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잖아요. 개인적으로는 늘 궁금했던 점이 있었어요. ‘극작가는 이름을 어떻게 짓지?’ (웃음) 인물 이름이 불현듯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사흘밤낮을 고민해서 지어내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진희: 개인적으로 소연님이 이름을 정말 잘 짓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이름 짓는 걸 되게 좋아하고… 

소연: 맞아요. 좋아해요. (웃음) 

진희: 반대로 저는 이름 짓는 걸 힘들어하는 타입이에요. 이름에는 나름대로 인물의 성격이나 특성이 반영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는 과정이 어려워서 보통은 이름 없는 역할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예전에 효진님, 소연님과 학교에서 같이 공연을 올렸던 적이 있었는데, 저는 남자 두 명이 나오는 2인극을 썼고 거기에 이번 공연의 ‘성진’과 비슷한 인물이 있었어요. 이름은 따로 짓지 않고 배우의 성씨로 대체했었죠. 설명충에다가 오타쿠 기질이 있고 혼자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캐릭터. 그런데 제가 써온 작품들을 생각해봤을 때, 그런 캐릭터가 꼭 한 명씩 있었던 것 같아요. 성진이라는 인물이 그들의 결정체가 아닐까 해요. 

민조: 저는 진희님이 쓰셨던 <그 어딘가의 영주>에서 주인공 ‘영주’의 이름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라진 딸을 찾아 도시의 공장, 마트, 원형의 도로 등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인물인데 이름이 ‘영주권’ 할 때의 영주잖아요. 아이러니한 작명이라 생각했어요. 

진희; 그런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웃음) 그 나이대의 여성에 대해 생각했을 때 ‘영주’라는 이름이 떠올라서 그렇게 지었던 것 같아요.

민조: 사람의 이름이라는 게, 이름에 담긴 의미보다 글자 자체가 갖고 있는 느낌이나 뉘앙스가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최근의 예술작품에서 ‘영지’라는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한 시대의 언어망 속에서 각각의 글자가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영주’의 경우에도 그런 위치성이 확 다가오는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소연님은 아까 이름 짓기를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이름이 빨리 떠오르는 편이신가요?

소연: 그런 편이에요. 인물을 생각하면 무조건 이름부터 짓고 시작해요. (웃음) 보통은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 떠오르거나 내용과 의미적으로 연결되는 이름을 짓게 돼요. 나만 알 수 있는 의미라 할지라도 그걸 이름에 심어놓는 것도 좋아하고요.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무래도 등단작이었던 <마트료시카>의 ‘윤경’이에요. 캐릭터 자체도 저희 엄마한테서 영감을 받았고 이름도 엄마의 성함에서 성만 바꿔서 그대로 갖다 썼어요. 2018년도에는 ‘상아’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43kg만큼의 상아>라는 작품을 공연했는데, 작중에 코끼리와 이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상아’라는 이름을 짓고 나서 코끼리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거든요. 저는 그런 식으로 인물과 이름이 딱 매치되는 걸 좋아해요. 

민조: 제가 이번에 4개 팀 연습실 사이를 날아다니는 호그와트 부엉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잖아요. (웃음) 도은님 연습에 가보니 ‘배우는 인물과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 작업을 지켜보다가 극작가에게는 인물이 어떻게 오는지가 거꾸로 궁금해졌어요. 

진희: 극작과 수업에 들어가보면 정말 인물의 전사(前史)를 A4 몇 장에 걸쳐서 세세하게 짜는 분들이 계세요. 저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몇 번 시도해봤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일단 작품 내에 인물을 등장시키면 어떻게든 성격이 구체화된다고 해야 하나,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인물들이 알아서 반응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거죠.

소연: 저는 정해놓고 쓰는 편이거든요. 대부분 인물을 먼저 정한 다음에 인물이 겪게 될 주요 사건을 짜놓고 시작해요.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서 인상 깊게 느꼈던 면을 많이 가져오는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혼자 생각해보는 걸 좋아하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인물을 만드는 방식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를 먼저 정한 뒤에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하고 반추하며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 같아요.

민조: 관찰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작가님들은 평소에 사람들을 관찰할 때 유심히 보시는 포인트가 있나요? 

진희: 저는 행동이나 습관 같은 걸 보게 돼요. 눈을 자꾸 깜빡거리면서 얘기를 한다거나, 말 사이에 자꾸 기침을 자주 한다거나. 

민조: 진희님 전작인 <EXIT>나 <그 어딘가의 영주>를 보면서도 느낀 건데, 진희님 작품에는 ‘손사래 치며’라는 지시문이 유독 자주 나오더라고요? 이번 <DELETE>에서도 나왔던 것 같은데… (웃음) 소연님은 어떠세요?

소연: 저는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좀 변태 같지만… (웃음) 보통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거나 다른 일을 하잖아요. 그럴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왜일까 생각해보니,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는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날 때라 그런 것 같더라고요. 관심을 안 가지면서 가지는 척을 하고 있다거나, 말로는 리액션을 하면서 딴짓을 하고 있다거나. 또 저하고 얘기할 때 말고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어떤 모습인지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제게 가장 큰 원천이 되는 건 연애 이야기인 것 같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연애 이야기를 늘 예민하게 듣게 되는 것 같아요. 연애하는 스타일이 각자 너무 다르잖아요. 연애에 대한 사소한 말 한 마디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싸울 때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 등등. 사람들이 열렬한 감정으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고 거기에 영감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그간의 작품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민조: 자연스럽게 인물형(形)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 같네요. 소연님 작품을 보면 사랑이나 소유의 문제, 관계의 딜레마로 인해 시달리는 인물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나 <라고, 누가, 말을, 했던가>의 경우에도 그렇고요. <조약돌은 상상한다>에 나오는 대사이지만 “짜장 맛이 나는 짬뽕”을 동시에 원하기에 번민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런 인물형을 만들어 낼 때 에너지가 소모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은 없나요? 

소연: 그런 이야기를 많이 쓰는 건 저 또한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인 거잖아요. 저랑 가까이 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쓰고 나면 오히려 속이 시원하거나 해소감을 느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민조: 제가 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생각했냐면, 소연님 작품에서는 연애 관계에 있는 두 인물 중 어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았거든요. 누가 상처 입히고 누가 상처받는 식으로 원사이드하게 전개하기보다는 ‘사랑의 회전문’ 같은  관계의 구조 전체를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양쪽의 입장을 종합적으로 본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니까요. 그런데 도리어 후련하다고 하시니… (웃음) 
한편 진희님 작품을 보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좁은 공간에 혼자 있는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느낌이었어요. <EXIT>는 전면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그 어딘가의 영주>도 기본적으로는 영주가 여러 공간을 돌아다니지만, 외롭게 외따로 있는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잖아요. ‘작가의 방’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는 이번 <DELETE>도 마찬가지고요. 

진희: 저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혼자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희곡을 썼던 적도 있어요. 사람들은 왜 혼자 있기를 싫어하면서 자꾸 고독을 즐긴다는 말을 할까.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걸 싫어하는데 왜 그 과정에서 외로움을 느낄까에 대해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한적인 공간에 대해 쓰게 되고, 전부 다른 공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공간으로 연결되는 이미지가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민조: 개인적으로는 진희님의 <EXIT>를 읽다가 “문이 안에서 안으로 통한다” 라는 대사에 꽂혔던 적이 있어요. 문은 당연히 안에서 밖으로 나가게 해주는 매개라고 생각해왔는데, 안에서 안으로 통한다는 대사 때문에 문 밖으로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 하는 선택을 스스로 감당하는 인물들의 모습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 같아요. 
진희님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으니 말인데, 소연님 작품에는 ‘바다’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하잖아요. 비 오고 번개 치고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웃음)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는 배경 자체가 한적한 바닷가로 설정되어 있었고, 이번 <조약돌은 상상한다>도 바다와 조약돌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했죠. 

소연: 바다도 있지만, 요즘에 많이 꽂혀 있는 공간은 황야예요. 인간을 압도시키는 자연의 모습으로부터 제가 느끼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아득한 공간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사색하게 되잖아요. 작품 속에 그런 공간들을 넣어놓으면 제 머릿속에서 이미지들이 많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인물의 경우에도 저는 대부분 바다나 황야, 공터, 들판 같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의 이미지로 많이 다가오곤 하고요. 



‘괄호’다운 프로덕션에 대한 이야기


민조: 이제 <괄괄괄괄> 프로덕션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요? 이번에 극작가가 배우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프로덕션을 경험하게 되셨는데, 어떠셨어요? 

진희: 저는 예전에 스탭으로 공연에 참여했을 때나 작가로서 참여했을 때나 연습실을 자주 찾아가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예전에 제가 연습실에 가서 할 수 있는 건 주로 연습을 보거나, 제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말하는 것뿐이었어요. 제 의견이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어렵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에 작/연출을 해보면서는 제가 생각했던 그림을 배우들에게 바로바로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물론 배우님들은 보통 연출의 언어를 들으면서 작업을 해오셨으니까 제 말이 바로 전달되기가 힘든 것도 있었죠. 저는 연출의 언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이런 느낌으로 해주세요’, ‘여기서는 이런 감정이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요. 그런 과정이 힘든 것도 있었지만, 배우님들이 제가 의견을 드리면 바로 시도를 해주셨기 때문에  ‘아, 내가 생각했던 게 이런 거였지’, ‘이 그림으로 갑시다’ 하고 픽스를 할 수 있었어요. 이래서 많은 극작가들이 작/연출을 하는 거구나… (웃음)

소연: 저는 반대인 것 같아요. (웃음) 일단 저는 원래 연습실에 잘 안 가는 작가였고, 이번 연습 과정에서는 종종 제가 쓴 텍스트라서 오히려 힘들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요. 아마 저는 명확하게 그림을 상상을 하면서 쓰는 편이 아닌가 봐요. 제게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에 글로 쓴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텍스트를 제가 장면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누군가를 설득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제게는 꽤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배우님들에게 명확하게 요구하거나 결정하기가 어려운 지점도 있었고요. 오히려 저는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연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민조: 연출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시는 건가요? (모두 웃음) 

소연: 아, 저 재미있는 에피소드 있어요. 저희 연극이 한 명은 상상을 하고 한 명은 그 상상 속의 인물로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얼마 전에 연습실에서 얘네가 어떤 식으로 상상을 하느냐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지켜보시던 무대감독님께서 웃으시더니 작품 속에 나오는 두 인물의 관계가 저와 배우님들의 관계처럼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랑 배우님들도 그 말을 듣고 순간 ‘그러네?’ 싶었어요.  

민조: 저도 사실 옆에서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웃음) 글쓰기 규칙이 그렇다 보니 작품과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메타적으로 겹쳐지더라고요. 아까 이야기했던 작가와 인물 사이의 ‘양방향적인 상호작용’이라는 것도 연습실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는 거잖아요. 진희님도 기억에 남는 연습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진희: 이게 작가의 이야기이다 보니, 배우님들이 이 작품 속에 제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갔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가끔씩 연습을 하다가 ‘진희야, 괜찮지?’ 하고 물어보세요. (웃음) 아니, 이거 전혀 제 이야기 아니고 상상해서 지은 거다, 라고 말씀드리고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어요. 배우님들은 조심스러워하시는데 저는 그 상황이 재미있는 거죠. 

소연: 신기한 순간은 그런 거예요. 제가 쓸 때는 몰랐던 것을 배우님들이 먼저 발견하는 경우. 제가 잊어버렸거나 놓치고 지나갔는데 배우님들이 먼저 이야기를 해주시는 순간 갑자기 ‘맞아, 나 이래서 이렇게 쓴 거였지’ 하고 떠오를 때가 있더라고요. 분명 제가 쓴 텍스트이지만 배우님들과 소통을 하다 보면 텍스트를 쓸 때와는 다른 플러스 알파가 발견될 때가 있어서 그게 가장 재미있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진희: <DELETE>에 나오는 작가의 마지막 대사가 원래는 이 작품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 번 더 짚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쓴 대사였어요. 그런데 ‘성진’ 역할의 정대경 배우가 이걸 다시 한 번 말해주는 게 설명적이지 않느냐고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저희가 다 웃었어요. 왜냐하면 이 작품은 ‘설명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지워져버린 ‘성진’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성진’ 역의 배우가 이 부분은 설명적이니까 끊는 게 좋지 않을까 제안하는 상황 자체가 재미있었던 거예요. 결론적으로 그 대사는 빠지게 되었지만, 제게는 뭔가 여러 차원의 인물이 오는 느낌이었어요. (웃음)

민조: 이번 공연은 동인 4명의 작품을 연달아서 올리는 준(準) 페스티벌의 형태를 띠고 있잖아요. 이번 창단 공연의 형태 자체에 대한 생각, 그리고 창단 공연 이후 ‘괄호’라는 플랫폼을 통해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진희: ‘괄호’의 이름으로 다시 공연을 올리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4명이 모두 대본을 써야 할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가 장기적으로 갈 수 있다면 동인 한 명이 대본을 쓰고 다른 동인들은 극작가의 역할을 내려놓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요. 함께 공연을 올리는 것에 의의를 두고, 다른 역할을 서로 해보는 거죠. 오히려 극작가 동인이라는 팀 안에 있으니까 조명이나 연출 같은 극작 이외의 요소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할 수 있더라고요. 

민조: 인상적이네요. 극작가들이 모인 팀이니까, 오히려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다른 역할을 맡아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해보게 된다는 거군요. 

소연: 제가 하고 싶은 건 일종의 극작 워크숍이에요. 배우님들은 워크숍을 많이 하잖아요. 여러 명의 극작가들을 모아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저는 오히려 연출이나 배우 친구들이 더 많고, 동료 극작가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이왕 극작가 팀을 만들었으니 이 팀을 통해 연극계에 별로 많지 않은 극작가들의 커뮤니티를 모색하거나 개발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민조: 저희가 ‘극작가들이 소외되지 않는 프로덕션’이라는 말을 창단 공연의 소개글에 내걸고 있잖아요. 진희님과 소연님 말씀을 들으니 생각보다 이 프로덕션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팀이 극작가가 다른 일에 도전해볼 수 있는 안전한 기반이 되어줄 수도 있고, 외부로 확장해나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번 공연 과정을 거치면서 창단 당시에는 다소 막연하게 느껴졌던 ‘괄호’의 가능성 자체가 좀 더 구체적으로 손에 잡혀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인터뷰 수고 많으셨습니다. 

김진희
2019 <EXIT: 탈출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2019 <그 어딘가의 영주>
2020 <DELETE>

이소연
2017 <마트료시카> 
2018 <43kg만큼의 상아> 
2018 <어제의 당신이 나를 가로지를 때> 
2019 <최후의 마녀가 우리의 생을 먹고 자라날 것이며> 
2019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 위해> 
2020 <희곡상을 위한 희곡쓰기> 
2020 <조약돌은 상상한다> 
   

2020년 3월 4일 수요일

극장을 닫아야 한다면

임승태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경제활동 전반이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행업계, 요식업계와 더불어 공연예술계도 아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공연 취소 결정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공연을 하더라도 개점 휴업에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관객 중 확진자가 발생한 것이다(http://naver.me/GjaByQ7M).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마스크를 착용하고서 공연을 관람하여 다른 관객들이 접촉자로 분류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극장이 새로운 감염 클러스터가 되는 일이 한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공연장 전체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Show must go on. 어떤 상황에서도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이 말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을 계속 해야 하는가, 잠시 멈춰야 하는가, 이 문제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결정해야 하는 걸까.
  공공극장은 대부분 공연 중단을 결정한 상황이지만, 민간극장에게 동일하게 요구할 수는 없는 문제다. 공연을 쉽게 중단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공연 주체들의 생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공연이 중단되고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가 취소되면서 여러 작업자들이 증상도 접촉도 없이 자가격리 중이다. 아르바이트 형태로 공연장의 여러 실무들을 맡고 있던 사람들의 생계도 막막한 상태다. 현재 대학로 공연 다수를 맡고 있는 기획사들은 진행하던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 손실을 그대로 안아야 하는 형편이라고 한다.
  연극계가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 마땅하지만, 그와 더불어 작업자들의 경제적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방법 마련이 시급하다. 필요하다면 공연장 전체를 일시적으로 닫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정부, 혹은 재단 관계자들은 그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하는 관계자들을 위한 구제책도 함께 제시해주길 바란다.
  소위 '연극의 해'에 찾아온 바이러스로 인해 연극계가 죽어가고 있다. 국립극단의 70주년을 기념하려 했으나, 연극하기 가장 어려웠던 전쟁통을 다시 경험하고 있다. '신연극 100년'을 기념하려 했으나, 그 즈음(1918년)에 범유행(pandemic)하여 한반도에서만 70만명이 감염되었다는 스페인 독감을 간접 경험하고 있다. 공연은 잠시 멈출지언정 공연계 종사자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더 열심히 찾아야 할 때다. 1592년 런던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영국 왕실은 런던을 중심으로 7마일 반경 안의 모든 극장 및 대중 오락 시설을 일시 중단시켰다. 이때 배우들은 지방으로 순회 공연을 떠났고, 셰익스피어는 런던에 머무르는 대신 <비너스와 아도니스>, <루크리스의 능욕>과 같은 시를 썼다. 우리는 현재 지방 공연을 추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모두가 셰익스피어처럼 시를 쓰고 있을 수도 없다. 5G 시대인 만큼 온라인을 이용한 무관객 공연이 시도되고 있다고 하고, 문예위에서는 네이버TV를 이용한 공연 생중계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무대와 관객을 현장에서 직접 만나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든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런 시도들이 다른 민간 공연에도 확대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연이 지속될 수 없는 시기에 할 수 있는 대안적 작업들을 개발해야 한다. 각 분야 종사자들이 각자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청회부터 필요하다. 코로나19는 곧 치료약이 나오겠지만, 머잖아 또 다른 바이러스가 찾아올 것이다.

2020년 2월 15일 토요일

믿음을 주입하는 사람, 믿음에 압도된 사람.



두산 아트랩 <앵커>, <양질의 단백질>

글쓴이_장영지

 

2020년 두산 아트랩 공연이 시작되었다. 꽤 오래 전부터 아트랩을 알고 있었으나 관극은 올해가 처음이다. ‘실험적인 시도’, ‘날 것의 쇼케이스는 궁금증을 자극하지만, 한편으로는 실망감만 안고 돌아올까 걱정하며 관극을 망설여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서정완 작, 연출의 <앵커>, 김연주 작, 연출의 <양질의 단백질> 두 작품을 관극했는데, 그간의 우려는 어느 정도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분명 흥미로운 점이 분명 있었고, 어떤 가능성도 엿보았다.

 

<앵커>는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몇몇 대사를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올 정도로 원작에 충실하다. 그러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앵커>는 피해자이자 살인자인 K(원작의 카타리나)보다 뉴스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과 그 과정에 주목한다. 뉴스 스튜디오를 무대 위에 구현했으며, 공연도 뉴스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뉴스 후 일기 예보까지 보여 준다) 이런 무대와 구성 덕에 뉴스가 만들어지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극장에서 늘상 접하는 뉴스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앵커> 무대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런데 <앵커> 속 뉴스는 현실적인듯 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앵커, 현장 연결, 짧은 리포팅에서 보여준 말투, 형식, 내용 모두 뉴스의 그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몇몇 설정이 무리하게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앵커가 피의자를 신문하고, 그것을 생방송으로 송출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다수의 종합편성 채널에서 보았던, 이것을 과연 뉴스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든 뉴스들이 분명 있으니 이런 구성도 어쩌면 사실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앵커(혹은 뉴스)는 한 여성의 사생활을 낱낱이 파헤쳐 그녀를 참고인에서, 공범으로, 공범에서 살인자로 만든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미명하에 그녀가 타고 다닌 차, 그녀가 살던 고가의 아파트, 그녀의 직업을 보도한다. 그녀의 전남편, 그녀를 잘 모르지만 이런 저런 소문을 주워섬기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사실인 듯, 사실이 아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들은 그녀에 대한 사실을 만들어 낸다. 이런 뉴스는 보다 유튜브를 통해 자극적인 가십으로 재생산된다. 뉴스 중간 중간 삽입되는 유튜브 영상은 현실의 그것과 너무나 닯아 있어 더욱 끔찍한 인상을 준다. <앵커>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만드는, 미디어의 힘, 믿음을 주입하는 그런 권력의 문제를 뉴스의 형식을 빌어 지적한다. "가짜 뉴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지금, <앵커>의 이런 문제 의식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앵커>, '용의자 얼굴을 막 공개하네요?'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반복되는 장면들은 분명 언론의 민낯을 보여주지만, 일방적인 문제제기에 그치고 만다.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관객은 그저 <앵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 되는가?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 인물만 제시되기 때문에 연극적인 재미가 떨어지는 문제도 있다.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럴듯하게 구현된 뉴스 현장, 영상을 보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 뿐이다. 극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지금의 미디어 현실,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의 태도를 성찰하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앵커>가 잘못된 믿음이 생산되고, 그것을 주입하는 상황을 문제 삼았다면, <양질의 단백질>은 잘못된 믿음에 압도된 아이들을 보여준다. 오디와 머루는 완벽한집에서 완벽한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오디와 머루는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접시에 예쁘게 담긴 무엇인가를 얌전하게 썰어 먹는다. 하지만 그녀들의 집은 완벽과 거리가 멀고, 그녀들이 먹고 있는 완벽한 단백질은 분홍색의 통조림 햄이다.

<양질의 단백질>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녀들의 이런 믿음은 점점 위태로워진다. 그녀들이 완벽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집에 바퀴벌레가 출몰하고,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온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는 불쾌한 냄새를 풍기고, 잘 생기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만을 먹일 뿐 아니라 거짓말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귀여운" 오디와 머루를 버리고 떠날 마음도 먹고 있다. 하지만 오디와 머루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규칙과 말에 압도되어 눈 앞의 현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

<양질의 단백질>,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뿐만 아니라 오디와 머루는 그녀들의 믿음을 가장 크게 훼손시킨 사람들, 아버지와 집주인을 제거한다. 예의바르게 햄을 썰어 먹던 그 칼로, 한 사람씩 사이좋게(?) 해치운 오디와 머루는 이제 어떻게 될까? 또 그녀들의 집은 계속 안전한 곳이 될 수 있을까? <양질의 단백질>은 이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극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아버지일 것으로 추측되는) 이제까지 먹던 것과 다른 고기를 먹고 오디와 머루는 훌쩍 컸다. 자란 만큼 의심도 커졌다. 하지만 아직 여전히 혼란스럽다.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 집은 안전하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계획대로 될 리가 없다.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가혹한 다이어트로 몸무게를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커버린 키를 줄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집에 남을 것인가? 굳건한 믿음을 유지할 것인가? 작가는 집에 남는 오디와 집을 떠나는 머루를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이제까지의 믿음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있냐고 말이다.

  물론 <양질의 단백질>이 믿음의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야깃거리도 많이 있다. 여성의 변화, 모순적인 상황이 만들어 내는 블랙 코미디의 특성들도 중요하게 다뤄볼 만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보다 정교화되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오디와 머루 외 다른 인물들은 보다 현실감을 지니면 어떨까? 모든 인물이 어딘가 이상해 보이니, 오디와 머루의 변화가 두드러지 않아 아쉬움이 있다. 배송 지연 사은품으로 퀵보드가 배달되는 설정은 탈출 장면을 위해 삽입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또 머루의 탈출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본 작품이 사실적인 재현에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머루의 탈출이 조금 더 진지하게 보여져야 여성의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또 필요한 것으로 느껴질 것 같다.


덧붙임_ 글을 완성한 후에야 두 작품을 믿음의 문제로 보려던 것이 무리한 기획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며칠 동안  나는 굶어죽어가며 집에 남은 "오디"였던것이다.


<앵커>, 서정완 작, 연출, 2020.1.30 - 2.1. 두산아트센터 Space 111
<양질의 단백질>, 김연주 작, 연출, 2020. 2.6-2.8. 두산아트센터 Space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