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해보기,
감각을 깨우기
- 극단 Y × 프로젝트 공공연희
극단 Y와 프로젝트 공공연희(이하 공공연희)는 작업자 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성에 대한 감각을 복구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거대한 도시의 사이클 속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관계들을 감당하며 살다 보면 온전한 나의 감각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몸의 예술을 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나에게 가장 편한 상태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린 채 흘러가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삶과 예술 사이의 괴리는 자꾸만 커지게 된다.
공공연희는 2018년 결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기획자 옥민아를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멤버들이 모여 2019년, 프로젝트 공공연희로 재탄생했다. 독특한 것은 연극하는 사람들 위주로 구성된 팀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팀이라는 점이다. 연기자, 작가, 음악인, 웹툰 작가, 디자이너, 영상 감독 등이 서로 교류하며 다원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연희는 하나의 집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기 보다는 함께 발굴한 이슈를 놓고 각자의 방식대로 콘텐츠를 만드는 방향을 지향한다. 옥민아 대표는 그것을 하나의 커다란 꾸러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표현한다. 하나로 뭉쳐진 덩어리가 아니라 개별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개체들이 커다란 매듭 속에 엮여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Y는 2018년 연극계 미투 운동을 전후로 불어온 새로운 페미니즘의 바람 속에서 개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사적 영역에 관련된 사항들을 다른 주체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얼핏 당연한 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는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매우 많은 부분들을 간섭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외모, 체형, 말투, 행동거지, 사생활 등등. Y는 불쾌하고 부당한 오지랖에 대해 페미니즘이 날카롭게 벼린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간섭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 발언해왔다. 탈코르셋을 다룬 <미의 기준>(2018)이 대표적인 예이다. 美의 기준을 me의 기준으로 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 나는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의문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는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 2018년 극단 Y가 작성한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 중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의 사이클에 들어간 예술인은 아직 뭔가를 만들기도 전에 무엇이 부족한지부터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사업지원서를 써본 사람들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이다. 내가 심의 기준에 얼마나 미달하는지, 그 기준을 넘기 위해서는 무엇을 극복하고 보완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이 미달태에 놓여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공공연희는 지원 사업에 떨어졌을 때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지원 사업은 창작을 시작하는 시점과 발표하는 시점을 결정해버림으로써 예술가들을 정해진 스케줄 속에 가두어버리는 측면이 있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연희는 기다리지 말고 그냥 시작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냥 하면 된다. Y의 맥락으로 오면 이 잠언(?)은 조금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2018)의 세 번째 단편인 <그냥요>에는 연습 후 회식 자리에 참석하기를 강요하는 선배에게 거절의 뜻을 밝히며 “그냥 술 마시기 싫어서요.” 라고 말하는 후배가 등장한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대신 “그냥 싫다” 라고 말하는 것은 꽤나 망설여지는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싫으니까 그냥 싫어, 라고 당당하게 대꾸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Y와 공공연희는 우리에게 온전한 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다리지도 눈치보지도 말고 그냥, 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건네주고 있는 듯하다.
예술가 비슷한 청년과
연극 비슷한 소통
- 프로젝트 공공연희 × 콜렉티브 뒹굴
프로젝트 공공연희와 콜렉티브 뒹굴은 이른바 예술하는 인간들의 존재론에 관심을 보이는 팀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존재론이라는 단어는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바꿔 말하자면 예술하는 인간들이 과연 어떤 인간들인지에 대한 탐구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술가 일반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과 닮아 있는 특정 세대의 예술가, 즉 청년예술가들이다.
청년예술가, 그들은 누구인가? 세대론의 종언이 운위되고 있는 시대니만큼 ‘청년’이라는 레떼르는 공연히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청년은 그저 담론의 산물이거나 공모행정의 용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청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그 논의들은 청년예술가가 누구인지를 사실적으로 설명해주기보다 청년예술가는 어때야 한다는 당위로서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청년예술가는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그 언어들로 인해 점점 지쳐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공연희는 그런 피로감을 가로질러 청년예술가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려 하는 듯이 보인다. 2018년 감각스트레칭 프로젝트를 통해 감각을 깨우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던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이번에는 영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고 말한다. 청년예술가의 영감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공공연희에 따르면 사실 감각과 영감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들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영감이 밖에서 번개처럼 찾아오는 것으로 상상하지만, 공공연희는 그것이 어딘가에 보이지 않은 채로 잘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워보고 있었다. 곧바로 눈에 띄진 않지만 내 눈이 밝아지면 찾아낼 수 있는 어떤 것.
공공연희가 꿈꾸고 있는 것은 청년예술가들이 영감을 발굴해내는 어떤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어떤 청년예술가로 가정된 사람의 방을 아주 디테일하게 구성해보고, 그 공간을 관객들에게 전시의 형태로 오픈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대담한 관객이라면 그 방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열어 아이디어를 끄적여 놓은 메모를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청년예술가의 일상적인 공간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거기에 깃들어 있는 틀 잡히지 않은 영감에 접촉해보는 것. 공공연희는 그러한 실험을 통해 청년예술가가 실제로 어떤 느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를 나름대로 규정해보고자 하는 듯 했다. 예술에 대한 영감을 향해 서서히 전도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청년. 공공연희가 들려준 구상 속에서 보이는 것은 그런 예술가 비슷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각자의 영감은 각자의 작업에 있고, 각자의 작업은 작업을 하는 테이블과 방과 집에 있다면, 굉장히 보통의 존재인 청년예술가 한 명의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사는지, 몇 평에 사는지, 뭘 입고 먹고 사는지, 한 달에 얼마를 벌고 사는지.”
- 사무국 × 프로젝트 공공연희 인터뷰 중
뒹굴의 경우에는 청년예술가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역으로 청년예술가-됨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작업들을 이어왔던 것 같다. <바로 그 얘기>(2016)는 지구가 멸망한 후 신인류가 구인류의 잘못에 대해 재판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연이었다고 한다. 1621번째 재판에 이르러 피고석에 선 것은 공연예술가였다. 판사는 지구가 망해가는 판국에 연극이나 올리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 연극이라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문한다. 공연예술가는 연극의 시대적 소명 내지는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을 항변의 근거로 삼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은 물론 연극을 기억하는 관객들도 극히 소수인 상황 때문에 그의 변론은 궁색해져간다. (이상의 내용 정리는 박종주가 drama-in.kr에 기고한 리뷰(🔗) 「어느 재판의 기록」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한편 <연기의 해로움에 관하여 1>(2016)은 연극에 재능이 없지만 지독하게 연극을 사랑하는 청년예술가들이 지원금 20만원을 놓고 싸우는 이야기였다고 전한다.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이 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뒹굴은 예술의 가치, 혹은 청년예술가들의 존재의미를 코믹하고 시니컬한 터치로 다루는 작업들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연극이라는 박스box의 효용성을 계속해서 문제 삼는 뒹굴의 작업에서는 메타연극 비슷한 효과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메타연극도 어쨌든 연극인지라, 연극도 아니고 연극이 아닌 것도 아닌 뒹굴의 공연 형식에 정확히 들어맞는 워딩이라 하기는 어렵다. 의외로 뒹굴의 공연 형식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은 그들의 초창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발견된다. <니나노 뒹굴>(2012)을 포함한 연극 비슷한 소통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뒹굴은 그 시절부터 연극 비슷한 것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연극을 왜 해야 하는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연극을 할 수 없다, 라는 골머리 아픈 숙제를 풀고 있었던 것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뒹굴의 역사는 그 숙제를 풀어가는 역사였다고 할 수도 있다. 예술하는 인간이라 자존하고 싶다면 우선 그 예술이라는 것의 가치를 찾아내고 증명해야만 한다는 것. 뒹굴에게 연극 비슷한 소통으로 표현되는 어떤 공연들은 그 증명의 수단이자, 증명의 결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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