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은 어디에 있고,
열정은 어디에서 오나?
- 丙 소사이어티 × 극단 배우들
丙 소사이어티와 극단 배우들(이하 배우들)은 청년연극인들을 종종, 아니 꽤 자주 후려치곤 하는 어떤 언어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팀들이다. 현재 호명되고 있는 청년 세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청년연극인들은 착취적인 환경에 대해 점점 예민해지는 감각과 변하는 것이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사회에 진입한 청년들에 대한 착취는 비단 임금 체불이나 신체적 폭력 같은 물리적인 측면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어떤 기만적인 논리가 위아래를 순환하며 작동하고 있다. 기성이 되어가는 연극인들은 자기들도 가진 게 없다고 주장하며, 연극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너희들도 무언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일까?
병소는 그 물음의 진위에 진정성에 대한 요구가 깔려 있다고 본다. 진정성은 정의하기 쉬운 개념은 아니다. 병소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성인지는 몰라도 진정성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러니까 뭔지는 몰라도 요구할 수는 있는 것이 진정성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대한 대답도, 그것이 대체 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난망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프린지 페스티벌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던 병소는 2014년 아오병잉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된다. 아오병잉은 아시아+오프+병맛+잉여를 줄인 말로, 병맛 감수성이 인터넷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형성되고 있던 시점에 연극도 잉여성이나 무용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열린 축제였다. 병소는 적절한 판이 깔린 만큼 제대로 되지 않은, 한 마디로 진정성이란 걸 갖추지 않은 연극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한테 왜 그러세요>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사람들을 던져놓았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3부작 꽁트였다.
1부에서는 강의실에서 볼 수 있는 일체형 책상의 앞뒤를 돌려 뒷사람이 앞사람의 책상을 써야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앞사람이 움직이면 뒷사람이 글씨가 자꾸 삐뚤어지는 식이었다. 2부에서는 차분한 요가 교실에 뽁뽁이를 깔아놓은 상황을, 3부에서는 좁디좁은 입시 무용학원에서 아이들이 발레 연습을 하는 상황을 보여줬다. 한 마디로 주어진 시추에이션 탓에 자꾸 억울해지는 사람들을 코믹하게 보여주는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메시지를 주려는 강박 없이, 자꾸 망하고 어긋나는 병맛스러운 상황만을 보여주고 거기에 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여본 것이다. 병소는 그것이 진정성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 없이 연극을 만들어보았던 초기의 시도 중 하나라고 회상한다. 이때 진정성은 예술을 대하는 예술가의 미적/윤리적 태도로서의 진지함, 또는 심각함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열정과 진정성은 예술가에게 내장되어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상상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병소는 한국에서 진정성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진실된 마음을 뜻하는 Sincerity와 진품인 것을 뜻하는 Authenticity가 결합된 상태로 통용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한테 너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너는 텅 빈 가짜일 것이다, 라는 논리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말하는 열정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열정과 진정성은 평가 권력을 지닌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할 자기증명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서 내가 열정이 있는지 없는지,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나를 지켜보고 평가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면, 열정과 진정성은 처음부터 내 안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또 저기에 있음을, 혹은 잠시나마 여기를 저기로서 경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게 이 연극이라는 가상이 아닐까?”- 2018년〈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공연 대사 중
그러면 이 익숙하고 기묘한 단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병소는 진정성이 구성되거나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 보여주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생기는 어떤 가상적 효과로서 진정성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책상을 무대로 썼던 <꼬마 짱꼴라>(2015)에서 인간을 말로 다룬 <노동집약적 유희>,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에 나오는 빈 의자들의 사물성을 차용한 <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사물과 신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만났을 때 발생하는 독특한 효과들을 탐구해온 병소는, 이제 진정성 또한 그러한 효과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는지를 실험해보고자 하는 듯하다.
우리가 가부장 없이
협력하려면
- 극단 배우들 × 극단 Y
극단 배우들과 극단 Y(이하 Y)는 작업 환경 내에 존재해온 권위주의와 수직적인 위계의 문제를 직시하고 대안을 모색 중인 팀들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얼핏 보면 연습실은 평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집단으로 분류되는 팀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계와 불평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역할과 보직에 따라, 나이와 서열에 따라, 소속과 성별에 따라…… 함께 작업을 하다가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작업 환경 내의 위계와 불평등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를 인간적으로 쇼부 쳐서 해결하는 식 말고, 구조적 대안을 고민하는 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은 말 그대로 배우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2017~2018년경에는 ‘창작집단 위선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팀이지만 2019년에 이르러 스스로의 정체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극단 배우들’로 개칭했다. 연출이나 기술 스탭 등의 보직을 한 사람이 고정적으로 맡지 않고 매 공연마다 상의를 통해 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화를 통한 공동창작을 기본 베이스로 한다는 점도 이 팀이 멤버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집마차>(2018)는 멤버들 각자의 에피소드를 모아 풀어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배우들은 연출자나 대표자에게 위계적인 중심을 부여하는 대신 배우 간의 평등한 소통을 중시하며 작업을 해온 것처럼 보인다.
Y가 이야기하는 가부장제, 혹은 가부장성의 문제는 연출 중심주의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현재 연극계에서 하나의 팀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대부분 연출이다. 연출은 공연의 미학적 완성도를 책임지고 감독할 뿐만 아니라 작업에 있어서의 의사결정과정을 이끄는 직책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모든 결정권은 연출에게로 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권한이 막대한 만큼 책임도 막대하다. 마치 가장이라 불리는 존재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가부장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하는 연극 사회 내에서 연출직을 맡는 사람은 한 팀을 책임질 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강윤지 연출은 나이가 어린 + 여성 연출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연습실에서 엄격하고 냉정하고 잔인하게 디렉션을 하는 편이 유리할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Y는 2018년 11월 평등한 제작환경을 위해 「작업에 앞서, 권리장전」을 작성한 바 있다. 가부장성으로 대표되는 작업 내 위계폭력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구성원들 각자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들의 세목을 명시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세상에 완전히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직적인 위계, 서열, 권위의식이 거의 자연화되어 있는 이 연극판에서 대안적인 모델을 찾고자 하는 두 팀의 시도는 귀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부장 없이도 되던데? 라고 쿨하게 대꾸할 수 있는 팀들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하는 일들을 사랑하는 것이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저희끼리 있으면 기본적으로 즐겁긴 해요. 포지션 상 동등하고, 서로의 어려운 점을 잘 알고 있어요. 다른 팀에서 할 때에는 연출부와 배우진 사이의 마찰이 있거나 선이 있게 마련인데, 저희 팀에서는 그 선 자체가 둥글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관계성이 편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무국 × 극단 배우들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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