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다른 배우가 공연 당일 대본을 받고 무대에 선다는 신선한 설정과 초호화 캐스팅*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낫심>에 쏟아졌다. 정시에 티켓팅에 참여했지만 오류 경고만 몇 번 만나고 예매하지 못했다. 아이돌 공연도 아닌, 두산 인문극장 시리즈를 예매하지 못하다니, 처음 경험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나중에 두산이 패키지 구매자를 대상으로 추가 예매를 열어준 덕에 겨우 류덕환 배우 회차 한 장을 손에 넣었다.
** 김선영 전석호 한예리 이석준 우미화 김꽃비 손상규 권해효 진선규 박해수 문소리 나경민 김소진 전박찬 고수희 오만석 구교환 유준상 이화룡 류덕환 이자람 (매회 다른 배우, 출연일순)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호평보다는 혹평이 눈에 띄었다. 당일 대본을 받는 배우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즉흥적인 연기 등을 기대한 사람들은 도무지 배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다소 실망했다. 게다가 작가가 배우를 압도해버리는 대부분의 순간들 때문에 생소한 이란 작가 낫심 술리만푸어보다 (내) 배우를 기다린 관객들에게 적잖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 같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2017년 SPAF 초청작 <하얀 토끼 빨간 토끼>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나 역시 배우의 즉흥적인 연기를 기대하며 작품을 예매했지만, 작가는 배우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읽어주는, 작가와 관객을 이어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듯 했으며, 작가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싶어 했다. 몇몇 문장에 감정을 넣어, 배우답게 읽어주는 것 외에는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대본을 읽는 중간 중간 왜 이런 말/행동을 시키는지 불평(?)하기도 했지만 대본을 집어 던지고 나가는 배우는 없었고, 작가가 시키는 대로, 대본 그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인 이유로 이란을 떠나지 못한다는 작가는 답답하겠지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반복해서 말하게 하면서 메일을 보내달라 요구하는 작가에게 공감이나 연민, 그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하얀 토끼 빨간 토끼>를 보고 나와서는 작가를 ‘배우와 관객을 다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는 심술궂은 사람’ 정도로 판단하고 그런 태도에 대해 투덜거렸다. ‘이럴 거면 대본이 아니라 소설을 쓸 것이지.’ 다만 즉흥적인 상황을 대면한 배우들이 각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순간들에 감동하고, 공연 후 배우와 관객이 나눈 짧은 대화들 때문에 <하얀 토끼 빨간 토끼>를 즐겁게 기억하고 있다.
<낫심>에서도 역시 배우가 텍스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자유는 없었다. 배우는 대본에 있는 글자를 남김없이 읽으면서 작가의 질문, 지시, 요구에 응해야 한다. 무대 뒤에서 실시간으로 대본을 넘겨주고 있는 작가는 배우가 다 읽지 않으면 다음 장으로 넘기지 않거나, 잘못 읽으면 X표시를 했다. 게다가 <낫심>은 그야말로 작가 낫심의 이야기였다. 엄마와 이란어를 배우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고국에 가지 못하는 이방인의 심정을 토로한다. 또 낫심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배우가 그의 어머니에게 이란어로 동화를 읽어주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 훌륭한 배우를 소비할 뿐이라고 불평했다. 누군가는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받는 어머니의 존재와 그 순간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하지만 배우가 당일 대본을 받는다는 설정을 잠시 제쳐둔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작가의 강력한 욕망, 텍스트를 충실히 따르는 배우, 어머니 역으로 섭외된 누군가, 이 모든 것은 공연 <낫심>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대는 아무리 진짜처럼 보여도 언제나 가짜였다.
그러나 몇몇 순간들이 “진짜”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진정성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가능하다. <낫심>은 어쩌면 단순히 연극, 혹은 공연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와 배우, 관객의 만남, 친교, 경청의 순간들로 80분이 채웠졌다. 낫심은 세련된 한국어와 욕을 묻고 그 단어들을 수첩에 적었으며 배우와 이란 풍습대로 차를 마셨다. 배우는 눈시울을 붉히고 때로 울먹이고 말을 잇지 못하면서 낫심의 어린 시절과 현재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었다. 또 낫심은 우리에게 예크부드 예크나부드(옛날 옛날에), 머먼(엄마), 델람탕쇼테(마음이 구깃구깃해요, 보고 싶어요) 같은 몇몇 이란어를 가르쳐 주었고, 우리는 한국어로 표기된 이란어들을 더듬더듬 읽었다.
이란 사람 낫심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낫심은 외국인들의 이란어를 들을 때, 마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이 말은 배우를 통해 한국어로 전해졌다. “이상하다” 란 한국어로 표현한 낫심의 마음들을 상상해본다. 어떤 사람은 놀이처럼, 어떤 사람은 그저 공연의 지시사항이기에 스크린의 글자를 따라 읽은 것뿐인데. 어디서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그에게 이런 순간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니 그의 외로움이 새삼 실감된다. “잠시 동안 아무도 이방인이 아니었다.”는 말을 이란어로 들었을 때 마침내 그를 훨씬 더 이해하게 되었다. 차근차근 여기까지 왔다.
그 “진짜” 순간들 때문에 <낫심>과 낫심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들을 돌아본다. 때로 우리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 만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국어로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주 외로움을 느끼고,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만남과 이해가 가능했던 것은 일부 오늘의 배우 덕분이다. 스크린을 보고 대본을 읽느라 자주 객석과 등져야 했지만, 배우는 최선을 다해 관객과 눈을 맞추고, 관객을 살폈다. 작가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텍스트에 압도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을 드러내며, 작가와 관객을 열심히 만났다. 처음 마주하는 즉흥의 상황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배우의 결. 그의 다정함 덕분에 나도 낫심에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낫심>을 연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 깊은 이해, 이런 것들이 연극을 연극답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