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9일 일요일

가공되지 않은 드라마를 꾸려가는 힘의 진실함

<말뫼의 눈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김수희 작/연출 
2017/04/06

시작은 오해 

  두 여배우가 억지스러운 고등학생 분장을 하고 등장하여 둘만이 아는 암호 동작을 과장되게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대사로 나누는 첫 장면을 대했을 때 작위적인 드라마가 시작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조선소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 다음 버스 정류장 앞에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제시되는데, 이 장면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한 명 씩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이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듯 쉴 틈이 없었다. 첫 공연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미리 계산된 분주함으로 이곳저곳에 배치된 설정들을 정신없이 보여주는데 이러한 떠들썩함은 조금의 침묵도 어색해서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의 인상으로 다가왔다. 많은 정보들을 인물들의 대사와 행위 곳곳에 알차게 설정시켜 놓고 가는 작품의 시작부는 전체적으로 차분하지 못했고, 꽤나 계산된 드라마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인상이었다.

신뢰의 끈   

  그러나 간이식당에서 룸펜으로 나왔던 여자가 맨 앞 장면에 등장했던 수현이었음을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 20대 초반의 나이가 된 수현과 미숙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이 두 인물의 달콤하지만은 않은 우정이 감지되면서 일단 이 드라마에 몰입하기로 한다. 이 장면에서 작품을 달리 볼 수 있는 것은, 수현과 미숙이 오프닝에서 설정되었던 느낌으로 성장하기는 하였으나 어떠한 전형성도 탈피한 인물로 컸다는 사실이다. 시골 마을에 들어 선 조선소 따위에는 세상 관심이 없다는 듯 현실에 냉소적이고, 아니 세상살이에 냉소적이며,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수현은 어정쩡한 조건부를 단 성인으로 크고 있었고, 어린 시절 크레인 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 보겠다던 미숙은 돈 잘 버는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이 되어 (기껏해야 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자신의 포부를 (이십대 초반의 그것이었겠지만) 세파를 끌어안는 힘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 대목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싶어 마음이 열린 이유를 말하자면 이 두 인물이 전형성을 탈피한 인물들일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도 작품이 이 두 인물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질타를 하거나 편들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면서도 이 두 인물을 나란히 애착 어린 시선으로 추적해 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감은 점점 더 실제적인 것이 되어 커다란 신뢰로 바뀌었고 극은 결국 나의 깊은 내면과 손을 맞잡았다. 알고 보니 작품은 이 두 여자만의 드라마가 아니었고,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아버지 빽으로 조선소 하청업체 직원으로 취업한 진수, 그리고 시종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 크레인이 들어 온 후 마을을 드나드는 사모님들을 보고 인생의 비애를 느낀 은옥, 마을에 돈이 돌자 어떻게든 기회 삼아 돈을 벌어보려는 은옥의 남편 등-의 동등한 드라마를 두루 살피며 참 착하게도 여러 고통과 여러 열망, 아니 고통과 열망이 채 되기도 전에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여러 당연함들-녹록치 않은 삶에서 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그 당연함-을 어떠한 폐쇄적인 주장 없이 평등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시종 작품 속 그 어느 인물의 드라마에도 작가는 편을 들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이의 드라마에 정성을 쏟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어려운 삶의 몫이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작품을 만나가는 과정 안에서 흔쾌히 체감된다. 명백한 드라마를 구축하면서도 관객에게 어떠한 드라마도 주입시키지 않는 태도는 일종의 산뜻함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태도는 외면할 수 없는 세계이기는 하나 검은 먹물 같은 인물과 사건, 드라마, 작가의 할 말에 관객을 전부 가두어 놓고 질식케 하는 기존 드라마 연극의 태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이렇게 산뜻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동일인이기는 하지만) 작가와 연출자가 연극을 넘어 삶을 응시하는 진지한 노력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즐겁다    

  그리고 즐겁다. 우선 작품은 탄력적인 연극성을 구사하며 즐거움을 자극한다. 작품 초반에 옆에 앉은 관객과 손을 잡으라고 했던 과감한(!) 제안, 은옥의 스토리텔링-은옥은 그 추레한 얼굴에 걸맞지 않는 과도한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핀 조명을 받으며 자기 고백을 하는데, 이 장면은 그 어느 장면보다 호소력이 짙다. 그 이유는 점층적으로 강렬해지는 핀 조명과 스토리텔링이라는 형식이 가진 고백적 권위도 있겠지만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지닌 생생함의 파장 덕분이다. 호미로 밭을 매다가 시내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타게 된 경위를 서술하는 이 장면에는 한 개인이 바라 본 한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두 번 명시된 뮤지컬적인 장면 연출-이 작품에는 은옥이 댄스홀에서 남편을 마주쳤을 때와 할매가 죽었을 때 뮤지컬적인 장면이 개입되는데 이 두 장면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처럼 가장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살맛나는 상상으로 제시된다.-, 버스 씬-은옥, 할매, 수현과 미숙이 하나의 프레임에 잡히는 버스 씬. 버스 씬에서 조각된 여자들의 풍경을 보며 이 연극은 진정 아무럴 것 없는 남루한 여자 인물들의 돋보임이라고 생각한다.-이 연극적인 의미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연극적 즐거움은 정형화된 드라마를 따르는 척하면서 결코 정형화되지 못하는 생의 균열들에 힘을 모으고 있는 지점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사의 점핑-미숙의 남편이 죽었다는 대사와 함께 붙는 다음 장면은 그 말을 한 할머니의 장례 장면이었던 것-, 구조의 컨트라스트-미숙과 수현의 관계는 기승전결로 완결되지만 작품의 전체 드라마는 결코 정박자로 굴러가지 않는 것-, 작품의 결말까지 발설되지 않는 비밀을 하나쯤 품고 있는 것-은옥의 행방-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가장 주인공 같은 인물을 가장 설득력 없는 인물로 설정한 것이 작품 속의 드라마에 균열을 가한다. 작가 자신을 모델로 삼은 수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가장 잘 모르는 불투명한 인물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지 않으며 극의 처음에서 끝까지 가장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제시된다. 얼핏 보면 작품의 서사적 화자 기능을 하는 듯한,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 인물이 전체 극에서 가장 희미한 아웃사이더로 밀려 나 있는 설정은 작품을 구태여 만들어진 극에 순응시키지 않으려는 신중함으로 비쳐진다. 
  이토록 뚜렷한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만들어내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천착하는 힘으로부터 신중함과 따뜻함을 넘어서 절실함 마저 느낀다. 탄력적인 연극성으로 즐거움을 주는 노력 너머에는 오롯이 사람,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내려 하는 마음이 만져진다. 특히 남미정 배우가 연기한 할매의 모든 순간들이 그렇다. 버스 정류장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할매는 이곳에서 스치듯 만나 빚어지는 사람들 간의 소소하고 거대한 싸움들, 저마다 절실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 빚어내는 그 숱한 싸움의 순간들마다 막간처럼 개입한다. 드라마가 누군가의 혹은 어딘가의 우물에 함몰되려 할 때마다 빠짐없이 개입되어 허투루 내뱉는 듯 하는 할매의 대사는 매 번 웃기지만 그 어느 정식 대사들보다도 진실하고 진지하다. 누구에게도 진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누구의 곁에도 에둘러 가 앉아 주고, 그러면서 또 이기적인 그녀는 결코 추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작품 전체를 떠받든다. 

작품의 선함에 대하여

  악인은 아무도 없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모든 삶의 선함을 믿는다. 작품이 직시하는 것은 오로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라는 악한일 뿐이다. 무대 위에는 제각기 이질적인 인물 군상이 한 데 공존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결국 삶을 잘 살아내 보려 하는 마음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이기적인 계산도 아니고 현실적인 치열함도 아닌 공동의 선함으로 비쳐진다. 모든 진정한 것들은 보편적이고 순수하다. 이를테면 사랑이나 잘 살아보려는 마음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며 순수한 감각치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동의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질적인 사람들이 지닌 개개의 선함에 대해서. 커튼콜을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저 한 사람, 한 사람이 내일을 잘 살아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삶과 연극의 경계 위에 서서 박수를 쳐 본다. 

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처의 감각, 연극의 감각

이예은, "깨어나 살아있는 ‘연극의 감각’에 대해서"

<처의 감각>
고연옥 작
김 정 연출
남산예술센터
2018년 4월 13일

친화력 

  신화적이거나 상징적인 서사로 난해함이 개입될 줄 알았는데 작품은 시작부터 끊임없이 다방면의 친화력을 발산한다.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한 공간 속 관객들의 마음이 열릴까 궁금해 하며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이 합심하여 시종 열심히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작품이 집중하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연 프로그램북에는 ‘약자’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으나 더욱 정확히는 ‘생명체’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작품이다. 작품은 ‘곰’이라는 동물의 상징성에 국한되어 민족적인 정서를 그려내지 않고 그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응시하면서 진정 살아 있는 호흡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명상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에 끌려 다니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감각의 이야기를 채워낸다. 근원적인 생명성에 대한 명상을 지향하지만 정작 작품의 주된 내용은 각자 다른 곳에 이상을 품은 채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 현실을 얼떨결에 (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맞이하게 된 남녀가, 그 이상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부차적인 현실을 부단히 열심히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한 부부의 공허와 열심. 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가능한 세계상을 아주 단순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예상된 틀 없이 풀어낸다. 이를테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어떠한 삶도 흘려버릴 수 있는 여자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현실도 참아내야만 하는 남자가 서로 다른 지위에서 가족-됨을 풀어내는데, 이러한 시선이 매우 보편적인 서사의 미덕을 획득한다.
  또한 이 작품은 어떠한 순간에도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어떠한 담론으로도 환원하지 않으려는 정성을 보여준다. 비록 엔딩에서 남자는 이상을 향해 떠나가고 남겨진 여자 역시 자신이 속해 있던 곳으로 떠나가기 위해 아이까지 죽이는 뚜렷한 결론을 보여주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결말은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서 그다지 확고한 지위를 가지지는 못한다. 작품의 전반은 그럼에도 열심이었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생이었거나 그 생 안에 들어 차 있던 공허와 어려움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결코 존재들을 무언가로 환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응시하려는 정성은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그려내는 시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생명을 상징하는 여자를 현실을 상징하는 남자보다 우위에 두지 않고 이 두 존재에게 동등한 정성을 부여한다.

남자

  여자와 남자에게 부여되는 정성은 동등하나 이 둘에 부여된 서사의 결은 다르다. 정작 이 작품에서 생생하게 살아 피어오르는 인물은 작품의 제목(‘처’)으로 내세워진 여자가 아닌 남자이다. 마음에 품은 이상은 삶과는 전혀 다른 어떤 곳에 있으나 구차하고 치열하게 살아내 보려는 남자(백석광 배우 分). 그가 갖지 못한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은 비현실적인 분장과 액팅으로 치장된 코러스 중의 한 명으로 설정되었기에 비록 그것이 진실한 생의 갈망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가 품은 미지의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보여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극명하리만치 생생하게 제시된다. 그 생생함은 작품의 결말부에 터져 나오는 그의 독백 장면에서 돋보인다. 이 장면에서 남자는 동굴에서부터 서서히 세상 밖을 향해 나오는 동선을 보여주듯, 칠흑처럼 까만 조명 에어리어(area)에서 서서히 밝아져 오는 공간으로 진입하며 폭발적으로 “도망 칠거야”라고 외친다. 이 한 마디의 대사에는 그가 상실한 어떤 다른 곳에 있을 진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 그럼에도 살아내 보려 하는 초미시적인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허하고 지루하고 당연하게 반복되는 부부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이 모두 한꺼번에 전달된다.
  남자의 생생한 묘사는 최순진 배우 分의 경우에도 돋보였다. 가련하리만큼 끔찍한 인간의 외로움에서부터 맹렬한 욕구의 포악함까지, 푸념에서 애원에서 폭력으로 발전, 아니 변질, 아니 폭로되는 그 전부가 한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진실임을 보여주는 그의 스펙트럼. 이것 역시 한 절망적인 인간의 생생함을 엿보게 한다. 그의 장면을 도사리는 한 인간의 파장은 버릴 것이 없다. 이 장면은 인간의 생생함이란 동물의 생명성과는 달리 이리도 교묘하고 책략적인 잔혹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

  여자는 살아있는 인물도, 그렇다고 상징화된 어떤 의미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이미지로 감각된다.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는 경험치인 곰과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 곰과의 재회를 생의 간절한 열망으로 품은 채 산다는 점에서 그녀는 비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후 남자 인간과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살고, 또 다른 남자 인간에게 겁탈을 당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큰 흔들림 없이 곰과의 사랑을, 곰과의 사랑에서 얻은 반인반수의 아이를 상실한 기억을 생의 중심에 두며 그 부재감을 대체해 줄 존재를 찾는다. 그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남자 인간에게서 낳은 다른 아이이며, 이 아이를 양육하며 살아가는 일로써 자신의 모든 생 의미를 충족시키려 한다. (어떻게 보면 남자-백석광 배우 分-는 이 여자의 현실화된 버전의 인물이다. 그는 곰과의 사랑이 어떤 다른 인간 여자와의 사랑으로 대치된 이 여자의 또 다른 버전일 것이다. 이 작품은 보다 현실적인 남자의 서사를 통해 여자의 서사를 관객에게 체감될 수 있는 것으로 병행시킨다.)
  여자에게서 감각되는 것을 굳이 단어로 설명하면 희미하지만 인간과 인간 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강렬하고 은밀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대인 모성일 것이다. (작품에는 이 여자를 모성의 상징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시각들도 존재한다. 여자는 공연 내내 시종 한 명의 딸로서 호명되기를 강요당하는 것, 정작 그녀의 어머니는 초자아적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제시되는 것이 그 경우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보듬고 있는 모성이란 종국에까지 가서 살아남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능적인 버팀목으로 주제화되지도 않고, 신화적으로 비약되지도 않는다. 단지 동물적인 숨과 피처럼 공연의 전반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특정한 주제나 상징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외려 공연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그릇처럼, 하나의 공간처럼, 하나의 숨결처럼. 여자는 물처럼 어떤 공간 속의 공기를, 인물과 인물 사이의 어떤 마음을, 혹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어떤 갈피를 떠돌며 흘러가듯 존재하여서 극을 보는 내내 잡혀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여자는 관객에게 공감되거나 심지어 낯설어지지도 않는데, 이는 인물의 의도적인 공백화 혹은 부재화라고 감각된다. 여기에는 무용수로서만 무대에 서 온 윤가연 배우의 관습화되지 않은 모든 몸짓과 표현의 몫도 분명히 있었다. 이 배우의 가다듬어지지 않은 몸짓과 발성과 표현들은 ‘연극’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곧잘 설명이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마는 관습적 표현들을 거세시켜버린다. 작품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정작 빼곡하게 들어 차 있던 남자 캐릭터들과 장면마다 생생하게 들어 차 있던 작품의 골격들은 희미해지고 텅 비어있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이 기억을 장악하게 된다. 그 공간 같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여자의 존재 자체이다. 실로 작품에서 ‘처’는 부재하며 오로지 ‘처’를 향하는 모든 뜨거움들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재하는 ‘처’의 감각이 공연의 전반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공연을 다 보고 난 이후에는 무엇으로도 주제화되거나 신비화되거나 상징화되지 않은, 그래서 추앙되지도 강조되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존재했던 것이 조용히 바라다 보인다. 공연을 다 보고 난 후 작품 어딘가에 무언가 바라다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작은 위안을 준다.

공간성

  동굴에서 만나 산장에서 잠자리를 가진 남녀가 이제는 집이라는 현실 공간으로 내려 와 부부 생활을 시작할 때 텅 빈 무대 위에는 거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무대 바닥의 한 가운데가 전체적으로 들어 올려진다. 이제 안과 바깥으로 구분된 제도 안으로 들어 온 두 남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돈을 벌러 나가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며 아기를 돌보는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설화적 현실 무대가 공연의 무대 위에 들어차는 것이다. 경계 없던 땅에 구획선이 생기자 고작 선 하나 그어졌을 뿐인데 전체의 땅은 힘을 잃고 그저 구획선만이 삶의 근거가 되는 이 헛헛한 삶의 사실이 설명되는 것 같다. 또 이런 구획선이 생기자 배우들이 객석 안으로 난입하거나 무대 가장자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선이 더욱 명확한 도발로 보이기도 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상처럼 구획선 안에서 벌어졌던 삶을 자연의 힘으로 깔아뭉개듯 다시 무대는 육중하게 하강한다. 흙에서 난 인간이 다시 흙이 되어 돌아가는 순간이다. 재에서 재로. 이 인간 보편의 신화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한 번의 무대의 상승과 하강만으로 거대한 세계를 열고 닫는 박력 있는 무대 연출이다. 그 거대한 판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과정 동안의 시간, 그리고 잡음 섞인 움직임의 사운드가 많은 서사를 대신한다.
  장면들을 만들 때 남산예술센터 특유의 공간성이 빛을 발한 대목이 있다.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성이라 한다면 객석 어느 곳에 앉아 있어도 모든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데 쉽게 바라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는 아무리 객석이 만석이 되어 관객들이 빼곡히 차 앉아 있다 하더라도 내가 아는 지인들의 얼굴이 몇 초 만에 낱낱이 발견된다는 특이점이 있다. 이렇게 객석에서 객석이 잘 들여다보이는 시각성 덕에 남산예술센터의 공간에서 배우가 무대에서 객석의 공간으로 진입을 하는 순간에는, 여느 극장에서라면 단지 일차원적인 경계 넘기에 머무를 이 동선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최순진 배우가 객석으로 돌진하여 객석 한 가운데의 열을 휘젓고 다니면서 ‘정말 외로워 죽겠다’는 몸부림을 칠 때에는 정말이지 이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멸할 것만 같이 외로운 한 개인의 사투를 보여주는 듯했고(심지어 리어왕의 미친 외로움이 보이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의식하면서 무대의 끝과 끝에서 대화를 나누는 백석광과 그의 옛 여인 장면에서는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라는 환상적인 모티프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 밖에도 잦은 조명의 변화로 무대와 객석이 율동감 있게 하나가 되었다가 서서히 분리되는 숱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 속에서 두 시간 동안의 관극을 하자니 한낮의 운동장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기분을 느꼈다. 극장이 지닐 수 있는 공공성, 그 역동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한다.

젊음

  작품은 결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서사를 두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이지만 끊임없이 쇄도하는 코러스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 배치된 정형화된 극 구조를 구태여 에피소드 식으로 교란시키려 노력한다. 각 챕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하고 시작케 하는 코러스의 재기발랄함과 챕터와 챕터 사이의 입체적인 전환들. 코러스들은 드라마적 구조를 나열적 구조로 해빙시키고 다시 나열적 구조를 드라마적으로 몰입케 하는 흔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인물과 내레이터는 물론이고 한 배우의 몸체들이 되기도 하고, 공간과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연극 바깥으로 나와 연극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가 연극 자체가 되기도 하는 이 풍부한 코러스들! (17년 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보았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었던, 늙지 않는 이수미 배우의 기개에 박수를 보낸다.) 텅 빈 무대 공간을 현란하고 소란하리만치 가득 채운 음악과 조명과 코러스들의 무용적 합(合)은 몇 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상상력이 낭자함에도 모든 표현들이 닫혀 있지 않고 개방성과 건강함과 귀여움을 내포할 수 있는 힘. 작품을 받아들이기 쉽게, 즐기기 쉽게, 응원하기 쉽게, 신뢰하기 쉽게, 사랑하기 쉽게 만드는 이러한 힘은 많은 부분 코러스들이 만들고 있다.
  실로 이 공연은 무용적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 이유는 율동감 있게 공간을 연출해서만도 아니고, 오프닝과 엔딩을 포함해서 윤가연 배우와 백석광 배우가 코러스들과 함께 연극임에도 무용에 더욱 가까울 정도의 완성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용적이라는 인상은 연출자의 열려 있는 상상력 덕분이다. 연극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연극성에 매몰되어 있지 않은 개방성이 돋보이는 연출. 과도한 연극성을 추구하는 연출자들이 흔히 범하고 마는 배타적 숭고함이 없다. 나는 이것이 젊음의 탄력성으로 느껴졌다. 튕겨져 나올 것 같이 기운차고 기분 좋은 표현과 표현력. 그렇다고 빤히 ‘나 젊다’ 식의 선언을 함으로써 자칫 ‘어쩔래’ 식의 도발적 표어를 내거는 것도 아니다. 으스대지도 않고 과시하지도 않으며 숭고한 가름막을 쳐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치 보지도 않는 이 상큼함. 아니 이 솔직함. 아니 진솔함. 젊은이다운 기상으로 감각되는 이 진솔함.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가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 들어 차 있는 명랑하고 성긴 기운들. 오색 미러볼이 만드는 바닥의 문양과 예쁘게 반짝거리는 빨간 알전구 등, 기분 좋은 취기를 머금은 듯한 재미있는 음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 가는 두 남녀. 사랑도 당위도 책임감도 없이 취해버리는 그 밤의 현실을 이토록 귀여운 환상으로 접근하다니. 생각해 보면 이토록 귀엽고 무의미한 순간으로 인해 그토록 녹록치 않은 현실을 길게 길게 살아내야만 했던 것은 참으로 어이없지만 또한 이러한 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럴 법하다. 술이 깨고 바로 다음 날 장면에 객석까지 환하게 들어 온 째한 조명은 정말이지 바로 ‘술 깬 다음 날’ 기분을 이 공간에 들어차게 한다.

‘연극의 감각’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끝이 보이는, 심지어는 이미 끝을 내린 채로 극이 시작되는 숱한 연극 작품들에 지쳐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면에 있어서나 작품을 풀어내는 태도에 있어서 말이다. 작품이 도달할 수 없는 결론에 섣불리 도달해 버린 채로 극을 진행하며 관객에게 어떠한 단단한 틀 안에서 관극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게 하는 숱한 연극 작품들. 그 작품들이 극복하지 못한 성급한 폐쇄성을 이 작품은 차고 넘치는 풍부함으로 대신한다. 이것은 배우가 만들고 또 연출이 만들고 그 안에 작가가 존재하고, 이 모든 것을 휘어 감싸는 무용과 젊음이 있었기에, 아니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한 건강한 개방성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연극의 힘을 다시 한 번 믿게 하는 이토록 소박한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