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은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형식을 따라 이 글도 1부와 2부로 구성하였다. 감정적인 크리틱 1부와 관찰자적인 크리틱 2부로 이 글을 구성한 것은 파렴치한 감정 선과 자기 냉소적 관찰 선을 모순적으로 공존케 하는 영화의 형식을 따르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의 방향성은 에필로그에 있다.
크리틱 1부
나의 존재함이 섬세한 만큼 타인의 존재함도 섬세하게 다루어지고, 타인의 존재함이 거친 만큼 나의 존재함도 거칠게 다루어지는 시선. 그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어떠한 세계가 창조되는 것. 작가가 어떠한 서사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진실의 비밀은 여기에 숨어 있다. 극적인 서사이든 다큐적인 서사이든, 무대 위의 서사이든 영상 안의 서사이든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타인의 감정과 존재는 ‘남의 것’이라 쉽게 비웃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존재는 지독히 세심하게 천착하는 형식을 따라간다. 이를테면 명수(정재영 분)의 여자 친구를 ‘여편네’의 전형으로 전락시켜 ‘그런’ 여자들과 사는 ‘그런’ 남자들을 허식적이고 피곤한 존재들로 유형화한다. 그렇게 유형화시킨 인물들을 한 데 잡아 ‘너희들’이라고 지시하며-‘나’는 ‘나’로 표현되지만, ‘너’는 ‘너’라는 개인이 아니라 ‘너희들’이라는 무리로 표현된다- ‘너희들’과 다른 ‘나’의 섬세한 정체성에 함몰되어 세상을 ‘나 vs 너희들’로 이분한다. 하여 ‘너희들’과 달리 최소한 분노할 줄 아는 개인인 ‘나’는 숭고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영화는 시종 분노를 터뜨린다. 1부 술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영희(김민희 분)의 모습은 이 영화가 드러내는 끔찍하리만치 편파적이고 피상적인 시선이 극단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여기에는 나와 너 사이의 어떠한 가능함도 없다. 현실에서는 이원화되어 있던 ‘나와 너’가 ‘나를 넘어선 나’와 ‘너를 넘어선 너’가 되어 영화 안에서 만나 현실을 초월한 어떤 시선을, 어떤 인물을, 어떤 가능함을, 어떤 세상을 만드는 가능성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풍랑이 지나간 후 고요만 남은 듯한 김민희의 선(禪)적인 연기 스타일로 진행되어 따분하리만치 차분한 듯하지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매친 분노에 도달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관객 역시 자연스레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그 분노는 영화 속에 배치된 철저히 ‘나’를 옹호하는 분노에 동조하는 분노도 아니고, 당연히 홍상수-김민희의 리얼한 관계가 자극하는 어떤 지점과도 전혀 상관없는 분노이다. 관객의 일인으로서 내가 느낀 분노는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표면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서 스스로가 욕지거리를 해대는 이 영화의 태도에 대한 분노이다. 영화로써 현실의 ‘나’를 옹호하려는 ‘나’, 고작 인터넷 기사에나 대응하려고 만든 정도에 지나지 않는 피상적인 ‘나’만 있을 뿐 영화로 인해 무언가를 향해 보다 확장된 나, 보다 가능한 나, 그리하여 보다 정확해진 나란 찾을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가 시종 담아내고 있는 것은 제목 그대로 ‘밤 (유예된 시간의 저편 속)’의 ‘해변 (유예된 공간의 저편 속)’에서 ‘혼자’뿐이다. 현실과 관계 맺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 속에 함몰된 이 영화는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가능한 일들을 오로지 ‘나 혼자’라는 비좁은 영토 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작품으로부터 관객을 배제시킨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형식은 ‘너희들’ 모두로부터 단지 ‘혼자’가 되기 위한 ‘나’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영화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어 역시 ‘혼자’가 되어버린 관객 1人인 나는 이 영화의 형식이 의도한 바를 더 없이 충실하게 따라간 것일지도.
크리틱 2부
그러나 거기, ‘밤의 해변’에는 결국 아무도 없다. ‘혼자’라고 표현된 ‘나’ 자신조차도 말이다. 이 작품은 영화를 통해 현실의 ‘나’를 옹호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여기에서의 ‘나’는 영화와 현실 그 사이 어디에도 없는 그저 ‘나일뿐인 나’ 밖에는 없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토록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나’ 자신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영희라는 인물을 시종 자취 없이 사그라지기를 바라며 이방의 도시들을 유령처럼 떠도는 인물로 만든 이유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존재로서도 그녀는 부재하고 말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러한 암시는 1부의 마지막 장면, 해변에 혼자 서 있던 영희가 급작스럽게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되는 장면으로 시각화된다. (이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끌어내는 배우는 상징적이게도 영화의 실제 카메라 감독인 박홍열씨이다.) 결국에는 혼자 남았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는 장면이다. 시종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검게 늘어뜨린 긴 머리를 한 여인의 이미지로 영희를 그려낸 것도 시종일관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는 혹은 그녀가 따라다니고 있는 죽음의 욕망, 부재하고 싶어 하는 끈질긴 욕망의 투사이다. 2부에서 해변가 호텔에 들어가자 1부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시킨 사내가 저승사자처럼 등장하여 열심히 창문을 닦는 행위를 하는 것 또한 아무도 아는 척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 영희는 열렬히 이곳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호소한다.
이 지점에 들어서자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판단이 전환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너희들’과 ‘나’를 이분하면서도 더 나아가서는 ‘나’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하고 마는 것이라면, 영화는 자신이 구사하고 있는 형식 자체를 냉소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의 사이를 그토록 조야하게 비하시켜 놓고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만든 그 형식을 비웃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금 한 줄기 의혹스러운 희망이 생긴다.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형식으로 이용하면서 그 프레임 안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고 거기에서 모자라 ‘나’를 옹호하는 문법은 다큐인 척 하는 그러나 사실은 채 현실을 보조해주기 급급한 현실미만의 치졸한 것들이 저지를 수 있는 극단의 파렴치함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반전은 그 파렴치함을 펼쳐놓고는 스스로가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히 변태적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현실과 영화, 현실과 예술이라는 경계 위에서 다큐라는 흥미로운 방식을 다시금 새로이 접하게 한다. 이제까지의 홍상수가 저지른 적 없었던 끔찍함이자 그 끔찍함에 대한 졸렬한 자조이다. 하여 이 텍스트는 홍상수라는 인물 전체를 근원적으로 회의하게 만듦과 동시에 언짢은 기분으로 다시금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민희와 홍상수의 리얼한 관계에는 관심 없고,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가 자기 형식을 끔찍이 이용해 먹고 있는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이 시종 실망스러웠음과 동시에 그 실망스러움을 스스로가 전시하고 있는 그의 태도가 다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홍상수의 다큐’라는 형식이다. 단지 영화라는 형식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이용해서 현실에 대고 편파적인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정체성이면서 그와 동시에 현실을 이용하고 마는 이 영화를 작가 스스로가 비웃고 있는 것이 또한 이 영화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정체성이다. 이 지점에서 다큐와 극 사이를 어슴푸레 오고 가며 다큐도 극도 되기를 거부했던 기존의 홍상수는 사라졌다. 아울러 다큐와 극 사이를 망연히 오고 가기 위해 홍상수가 친히 사용해 왔던 반복적인 형식들-꿈 기운과 술기운에 의존한 기묘한 반복적 장면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도 사라졌다. 대신 다큐도 이용하고 극도 이용하면서 관객 따위는 됐고 심지어는 영화 따위도 됐다고 선언하며 단지 ‘혼자’가 되고 싶어 사투를 벌이는 홍상수가 새로이 출현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며 자조하고 등지는, 그래서 이제까지 반복적으로 지속시켜 온 숱한 그의 영화적 형식들을 다 내던지고 터럭 하나 걸친 것 없이 혼자가 된 홍상수의 뒤태가 이제까지의 홍상수를 가장 강인하게 드러내주는 본태 같은 것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그러나 영화 전반을 놓고 본다면 영화의 몸체는 양의 비중으로서나 질의 비중으로서나 자기의 형식을 자조하는 관찰 선보다는 자기 형식에 스스로 함몰된 감정 선에 더욱 치중해 있다. 아니 이 둘은 비교의 차원이 되지 못할 정도로 영화는 감정 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 내 건 관찰 선은 사실 이 모든 감정 선을 다 말해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꿈’이라는 프레임을 덧입었을 뿐 영희와 영화감독(문성근 분) 사이의 사랑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뜨거운 술자리나, ‘죽음’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덧입었을 뿐 시종 ‘나’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성난 눈을 치뜬 채 세상을 치받고 싶어 하는 기운은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적 외피를 온전히 압도한다. 즉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은 작품의 에너지로 전혀 승화되지 못한 채 작품으로부터 이용당할 뿐이며 영화의 내용과 질은 전적으로 ‘너희들’과 분리된 ‘나’의 옹호로 가득 채워져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도 홍상수의 기존 작품들에서처럼 어김없이 술이, 그리고 술을 마시고 취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술은 기존 홍상수 작품에서의 술과는 완연히 다른 기제이다. 이 작품에서의 술은 ‘꿈’,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물에게 내던져진 것이기는 하나 결코 인물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의 영희는 결코 <하하하>와 <북촌방향>의 유준상처럼, <우리 선희>의 이선균처럼 술이라는 장치에 압도당해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영화 배후의 사건인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대중의 일원인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시종 이 영화가 제발, 부디,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넘어서는 영화이기를 열렬히 바랐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를 관찰하는 영화적 시선을 형식으로 활용할 뿐 결국 ‘나’를 호소하는 현실적 감정을 텍스트 내용의 요체로 만드는 자기 옹호식의 일기에 지나지 않았다. 영희의 꿈 속 술자리에서 직접 발화되고 있듯이, 우리는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만을 늘어놓는 이 영화의 어디로부터 가치(?-가치라는 단어가 이 영화의 리뷰 중간에 개입되는 것이 생경하기는 하지만)를 찾아야 하는지 실로 의문스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의문이 새로이 제기되는 이유는 영화에 내재된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에 지나지 않는 진실은 이제까지 홍상수가 보듬어 낸 일기적 가치와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의 일기는 자기 질문이 아닌 자기 옹호로 가득 차 있는 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지점에서만큼 홍상수의 다큐는 이 작품으로 인해 한걸음 퇴보하였다. (평단에서는 이 영화로 인해 홍상수의 형식이 한걸음 진보하였다고 입을 모으지만 말이다.) 자기를 질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저 편과 맞닿을 수 있으나 자기를 옹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곳과도 맞닿을 수 없다. 다큐에서든 극에서든. 아니 현실에서든 예술에서든.
결국 이 글은 가치니 성찰이니 초월이니 관찰 선이니 하며 작품을 훈계하는 평면적인 글로 읽혀질 것만 같아 씁쓸하다. 영화를 경험하는 과정과 글을 써 가는 과정에서 정리되지 않았던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질문들이 기어이 일목요연한 방향성을 틀어 이 글을 만들게 된 것은, 어쩌면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그러나 내 속에서 촉발되지 않은 것은 없는” 영화라고 이 작품을 소개한 홍상수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기어이 확고한 하나의 방향으로 영화를 틀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이리라. 이 작품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은 현실과 예술, 그 사이를 운신하는 다큐라는 형식에 대해 가지는 양가적 감정이다. 현실과 최대한 맞닿아 있으면서 바로, 그 맞닿아 있음으로 인하여 현실을 다시금 바라보게끔 만들어 주는 어떤 예술의 가능성. 하여 현실과 예술 사이의 경계성보다는 현실과 예술 사이의 가능성, 그것이 다큐라는 형식의 미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