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은
언젠가 드라마-인에 김현탁 연출의 작품을 드라마투르기하면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작품 비평문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 글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맥락의 글이다. 최근에 번역 및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한 공연을 통해 역으로 공연 작품의 원작에 대해 새로이 발견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이다. 희곡을 공연으로 세우는 과정 안에서 경험했던 자기 반성적 질문들과 그 질문들을 통해 다시금 발견한 희곡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을 정리하며.
비평할 작품은 극단 풍경의 박정희 연출이 각색한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원작인 브라이언 프리엘의 ⟪Faith Healer⟫이다. 프리엘의 작품은 진실과 허구, 그 사이 어딘가 쯤에서 각자 웅크리고 앉아서는 한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움직이지 않는 시선들로 가득하다. 특히 ⟪Faith Healer⟫는 이렇게 각자의 작은 무덤들 속에 고여서 나름의 구원을 내다보는 세 인물의 입김과 체온이 섞여 이러 저러한 파문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Faith Healer⟫는 동일한 현실을 공유한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세 인물이 그 현실을 서로 다른 무게 중심을 지닌 기억들로 재편해 가는 과정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소재만 동일할 뿐 그 크기와 질감, 온도, 앵글은 제각기 다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무대 위에 세운다면 무대는 아마도 기형적인 그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프리엘은 이 세 명의 이야기를 각기 홀로 등장케 하는 형식을 택한다. 원작은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프랭크의 순서로 각각의 인물이 홀로 등장하여 자신의 기억을 발화하는 장면으로 연쇄된다. 하나의 무대 위에서는 함께 지속될 수 없는 저마다의 균열된 이야기일 것이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허락된 고독한 무대 공간 위에서 이들 각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고백적 양식으로 관객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호소한다. 우리가 믿는 모든 진실이란 한 데 모아 놓고 보면 이토록 기형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각자가 호소하지만 전모를 들여다보면 기형적인 것이 되는 진실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진실의 본성 혹은 진실의 존재 여부를 질문케 하며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진실보다는 균열이다. 그러나 균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 작품이 정작 질문코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진실의 영역이다. 허구적 기억이 가진 진실의 가치에 주목하며 프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을 발설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렇게 발설된 진실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 (공연 전단 드라마투르그의 글에서)
이 세 인물은 어쩌면 끝내 한 곳에 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평생을 산다. 그러나 이 세 인물이 결국에는 가 닿아 보려고 힘을 다해 쏟아내는 믿음, 그 지향의 강도는 팽팽하다. 이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믿음의 방향은 상이하지만 그 지향의 강도는 동일하기에 결국 이 세 인물은 한 보도 나아갈 수 없는 곳에 머무르고 만다. 그렇다, 이들은 철저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평생을 고군분투한다. 지극히 가까운 동반자의 지향이 나의 그것과 다른 방향에 있을 때, 그러나 그와 나는 헤어질 수 없는 애착의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마치 한 보도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서로를 욕망함과 동시에 자아를 꿈꾸게 되는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들은 평생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유랑하지만 결국 꿈쩍 않고 부동하는 시간대를 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프랭크와 신의 관계, 그리고 그레이시와 프랭크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프랭크는 신을 좇아 유랑하고, 그레이시는 프랭크를 좇아 유랑하지만 결국 이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정박 당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원작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은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힘들의 팽배하는 운동성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세계는 서로 다른 힘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모가 기형적으로 보이나, 그와 동시에 그 힘들은 서로 다른 힘들이기에 또한 서로를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그 전모가 기형으로 판명되는 것은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이상적인 화합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순수한 기대 탓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며-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를 반사하고 나의 믿음이 너의 믿음을 반사하며- 만들어내는 다면적인 입체 조형이 우리라는 ‘예기치 못한’ 한(≠‘기형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구성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게 깔려 있는 힘이 발견될 때, 혹은 보이는 것 너머의 힘이 발견될 때 비로소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진실은 허구와 대립하는 항목이 될 수 없다. 허구와 허구 사이의 균열들 그 너머에 있는 것, 혹은 그 아래에 깔려 있는 것, 혹은 그 전체를 감싼 것. 물질이나 언어로는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이상 혹은 이면의 것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
원작 ⟪Faith Healer⟫는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faith', 즉 신 혹은 신적인 것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들 사이의 허구와 허구와 허구를 바라보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을 바라본다. 프랭크가 자기 자신에게 기대했던 것, 그레이스가 프랭크에게 기대했던 것은 모두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이었다. 독백으로 진행되는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의 균열된 이야기들을 소환하여 결국에는 그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려 하는 이 작품의 구조(형식)는 결국 인간의 가시 영역을 넘어서 어떠한 다른 차원에 다다르고자 하는 이 작품의 주제와 합치된다.
공연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원작을 ‘개별적 기억들의 균열’에 의거한 ‘총체적 진실의 부재’로 읽는 것에 집중한다. ‘각자는 자신의 뇌의 편향성에 따른 기억에 의존하여 산다’ 고로 ‘기억을 담보로 한 존재들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고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결론으로부터 시작된 연습 과정에서 진실과 허구는 양분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는 논리를 가지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진실과 허구는 대립 항이 아니라 서로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상호적이고 연쇄적이며 개방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화두들이기에 논리를 빌린 언어 구조로는 호소력 있게 설명될 수 없다. 진실과 허구는 끊임없이 상이하면서도 지침 없이 서로를 포섭하는 예기치 않은 관계인 것이다.
연출자와 함께 원작의 제목을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수정하며 무엇보다 ‘간혹’이라는 단어에 맺힌 절묘함에 기뻐했던 그 순간에는 돌이켜보니 그러한 기대감이 있었다. ‘간혹’ 어떠한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빗겨가지만은 않으며 그 순간이 ‘간혹’ 있는 이상 많은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어떠한 식으로든 서로를 욕망하거나 체념하리라는 이 모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간혹’이라는 단어에는 어느 것도 편들지 않는 무심함이 있어서 좋았다. 알 수 없는 미래가 비로소 과거가 된 이후에나 말해질 수 있는 겸허한 회고의 무심함. 사실 이 ‘간혹’이라는 화두 안에 깔린 것들, 상이한 것들이 부딪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대한 고요한 믿음, 그 믿음을 가능케 하는 기다림과 고독, 그리고 겸허함과 항구함은 내가 요즘 가장 치중하고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연극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을 전하는 강의와 논문이 만들 수 있는 진실, 나아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존재가 만들 수 있는 진실, 진실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이러한 것들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고작 (혹은 무려) ‘간혹’ 실현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나오며 바로 그러한 세밀한 맥락에서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단단하게 발음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가, 글은 다 끝나가지만 이 글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진실이란 왜 발설되기 어려운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발설되기 어려운 진실을 발설하는 일에 대해서. 아니 그 일의 효력에 대해서. 사실 이 질문은 작품을 읽고 바라보고 세워내려 하던 과정에서 독자로서 관객으로서 드라마투르그로서 고뇌한 것이지만 동시에 작품 안에서 프랭크와 그레이시가 고뇌한 질문과 동일하다. ‘간혹’ 존재할 수 있는 진실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효력은 진실의 편을 옹호하는 호소력이나 진실의 편을 부정하는 폭력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단지, 간혹 깊어질 수 있는 개별자들의 내면과 만나는 질문의 형태로 공유될 뿐이다. ‘간혹’ 가능하기도 한 것이라는 진실의 정체성이 곧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의 정체성이 진실 나름의 형식으로 공유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프랭크의 신을 향한 믿음이기도 했고, 그레이스의 프랭크를 향한 믿음이기도 했던 그것-이 바로 원작의 제목에 놓여진 'faith'의 의미이다. 프리엘의 ⟪Faith Healer⟫는 진실이 가진 가냘픈 내면과 형식의 흐름을 조용히 따라가는 가운데 그 주변을 유랑하는 이들의 애타는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진실을 호소하는 힘도, 진실을 부정하는 힘도 없다. 단지 어떠한 가녀린 가능성에 대한 지향이 있을 뿐이며, 그 가능성을 향한 마음이 끔찍이도 열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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