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9일 금요일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이예은

2001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16년이 지났다. 이 공연도 16년을 더 살았고 나도 16년을 더 살았다. 16년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되는 일. 작품과 나 사이에 낀 긴 시간이 어지럽고 부끄럽다. 그 동안 연극의 힘을 부정만 해 왔던 나의 소란스럽고 편협한 관심사가 모조리 부끄러워지던 시간. 연극에 대한 모든 편견이 0점이 되어 연극을 ‘구경’하는 순진한 관객이 될 수 있었던 시간.

성씨로 바뀐 가문, 저잣거리 놀이로 바뀐 대결, 잔치로 바뀐 파티, 춤꾼의 흥으로 바뀐 머큐쇼의 활기, 육담으로 바뀐 성적 지향, 그럼에도 끈기 있게 살아 냄으로 바뀐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전환점, 골계미로 바뀐 철학, 재담으로 바뀐 시, 운동으로 바뀐 긴장, 생명으로 바뀐 초월.

특히 긴장감과 화해, 사랑과 고통이라는 이분화된 갈등 구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시켜 내려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관절이 오태석의 공연으로 와서는 시종 끊어지지 않고 매끈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열기로 승화된다. 오프닝 잔치 씬에서부터 놀이가 곧 싸움이고 싸움이 곧 놀이인 역동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정서 속에 생존하던 힘이고 오태석이 우리 연극의 정신을 껴안으려 한 그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문과 가문이 대결하고, 사랑과 고통이 대결하는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은 0이다. 대신 긴장감을 대체하는 역동과 힘이 있는데, 바로 그 힘 속에 모든 감정이 한 데 녹아있다. 이분화의 초월이라는 셰익스피어적 철학이 역동 속에 공존하는 그 모든 삶과 죽음의 힘으로써 새로이 약동한다. 기쁨과 분노도, 슬픔과 환희도, 화해와 대결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탄성 속에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박력 있게 체감케 하는 음악적 리듬감과 움직임의 활력. 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전통의 정신 속에서 바로 이러한 긍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순간마다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여태, 아니 점점 더 강하게 살아남아서 관객에게 이 힘을 발견케 한 오태석의 숨소리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로미오가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hug)를 주는 장면은 화해와 대결의 구분이 초월적 고뇌로 승화되는 원작의 지점을 넘어 아예 화해와 대결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월적 기지가 단지 깊은 아름다움이기보다 자연스러운 정신처럼 작품 속을 파고든다. 하여 장면 장면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셰익스피어의 고뇌와 질문이 불거져 나오는 고결한 장면들로서가 아니라 작품 너머에 있는 더욱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을 한 데 껴안는 정신이 발현되는 장면들로 지속된다.
 
머큐쇼의 죽음 장면에서는 해학과 박력이 넘쳐난다. 이 장면에서 특히 웃음과 고통이 극렬히 공존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사건으로 희극과 비극이, 무언가를 믿을 수 있던 힘과 무언가를 믿을 수 없는 힘이 뜨겁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이 지점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랑과 고통, 화해와 대결의 이분법이 초월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어 다시 초월의 불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를 주었던 로미오가 머큐쇼가 죽고 허그 대신 칼을 물리는데, 공연의 이 장면에서 탄생한 급박하면서도 어지러운 운동감은 셰익스피어의 초월적 기지를 넘어서는 짠 내 나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기쁨만을 믿으며 화해도 쉽게 꿈꾸던 로미오가 고통과 맞물린 사랑의 실체를 대면하며 기쁨 속에는 고통이, 가능성 속에는 불가능성이 한 데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그러면서 보다 한 차원 깊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음이 뒤따를 사랑을 그럼에도 감행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죽음 같은 이별을 하게 되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하려고 죽음을 모의한다. 그러나 모의된 죽음은 정말로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서 사랑하고 싶었으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사랑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역시 새삼 깨닫는다. 이것은 모든 미숙한 첫 사랑의 극단화된 비극이자 죽음과 사랑의 선을 초월할 수 있는 첫 사랑의 극단화된 진실성이라는 사실도.

살아있고, 살아있고, 살아있다.
부러 무얼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발현해내는 일, 작품은 그것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나요- 하고 외치는 숨소리.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억지 해석을 하거나 과장 찬미를 할 필요도 없이 공연의 생명 그 자체를 관객의 피부로 흡수하게 하는 힘.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를 오롯이 오태석의 것으로 살아내게 한 힘이 있다.
해석도 재해석도 재창작도 아닌 살아내게 한 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관절 마디마디에 묻힌 뜻이 오태석의 숨소리로 체감되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태석의 것이 된 것, 그 이상이 있다. 원작도 오태석도 그 이상의 것도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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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7.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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