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용비어천가

이예은

뉴욕 링컨 센터에서 영진 리의 <We're gonna die>를 미국 관객들과 함께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미국이었고, 미국 관객들이 있었고, 미국에서 살아내고 있는 영진 리가 무대 위에 있었다. 2017년도 국립극단 제작 <용비어천가>는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한국에서, 한국 관객들 앞에서, 한국 배우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영진 리의 오리지널 버전 공연과 국립극단 제작 버전 공연 사이에 낀 애매함은 단지 이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지역성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애매함의 전부였을까?
     
사소한 외로움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늘 비극적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비극이 된 모든 사건이 응원 받는 이야기. 아프고도 즐거운 이야기, 신이 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는 결국 그녀 스스로에게서 모두 응원 받는다. 영진 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마치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양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위로한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을 들으면서 ‘참 강건하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나와 너를 깊은 곳까지 끌고 가서 기어이 나의 깊이와 너의 깊이를 만나게 한다. 그래서 특정한 인간의 특수한 고통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보편의 만연한 애잔함으로 만든다. 나와 너를 연결하고 고통과 응원을 연결하는 이러한 시선은 내게 강건함으로 와 닿았다. 이것은 또한 그녀가 살아 온 인생에서 빚어진 힘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구별과 차별, 다름과 억압, 분노와 부당함을 온 몸으로 껴안고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 가능성과 상상을 끈질기게 붙잡고 살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보다 깊은 차원의 힘. 흔히 ‘히스테릭’이라는 단어와 ‘코미디’라는 단어를 합쳐서 ‘히스테릭 코미디’라는 단어로 그녀의 작품을 수식하고는 하는데, 사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은 히스테릭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니고 히스테릭과 코미디를 단지 결합한 무엇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히스테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씁쓸함만 있는 것도,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출되고 다듬어진 공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살아내고 있음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삶을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내고 있음이 느껴졌기에, 그래서 강건했다. 비록 미국인 관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인 내가 영진 리의 공연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미국인 관객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공간에는 미국인과 한국인을 넘어선 ‘살아남은 인간’의 온기가 있었고 우리 모두가 울고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고 팔목이 떨어져라 박수를 보낸 이유는, 미국계 한국인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을 응원하는 열렬함 때문이었다.    

<We're gonna die>에서도 일부분은 인종 차별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관심을 두고 있던 것은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종 차별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 각자가 삶을 살고 있지만 사는 동안에는 ‘삶’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고 그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하여 그녀는 결코 현실을 고발하지도 토해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며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의 전체에 'We're gonna die'라는 제목을 붙인 것인지 모른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순간의 살아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죽을 것이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몫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올해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이라는 기획 타이틀의 한 프로그램으로 섭외된 순간부터 영진 리의 공연은 ‘미국계 한국인’의 공연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온몸에 걸쳐 입게 되었다. 비한국과 한국 사이의 경계 지대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공연을 기획한다는 취지로 붙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정의내릴 수 없는 내면의 영역을 전면적으로 선 보이겠노라는 다소 민망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온전히 영진 리의 것은 아닐지라도 공연의 어느 틈새에는 영진 리의 강건함이 있겠지 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신록 배우가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모습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공연은 시종 ‘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인, 그리고 그 시선에 대해 ‘한국’인이 가지는 감정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한국인과 미국인, 그 사이의 균열에 집중하는 이 공연은 급기야 그 많은 한국인 관객들로 하여금 짠 내 나는 눈물을 몇 번씩 뽑아내고 말았다. 사실 나도 몇 차례 울었다. 울면서도 궁금했다. 영진 리의 강건함을 한국인의 아픔으로 만든 이유는 무얼까?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연출자에게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지만, 대화가 시작되고 연출자가 한 말을 듣고는 그냥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연출자는 원작을 해석하지 않고 오로지 ‘재연’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해석이 없었다는 공표에 할 말이 없어진 것도 잠시, 그가 말한 재연의 대상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영진 리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사건, 공기의 겉면을 재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면 과연 이 공연은 원작 공연을 재연한 것일까? 어떠한 삶이 몇 몇의 코드가 될 때, 삶의 진행이 무언가의 고발로 치환되고 전시될 때 실체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껍데기로 왜곡된다.  

지금 여기의 이들의 공연이 아닌 누군가(영진 리)의 이름을 빌린 공연. 창작자들이 작품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이 느껴지는 기획‘된’ 공연. 나 역시 기획자로서나 드라마투르그로서 그러한 상황에 끼어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야 했던 숱한 경험들이 있으니… 아쉬움을 느끼기에 앞서 지금 이곳 내가 속한 곳에서 연극‘함’의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타이틀 그 이상이 되지 못한 기획의 폭과 질문이 부재한 연출의 아쉬움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선 배우, 배우들의 사투는 눈물을 쏙 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진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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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 중(中) <용비어천가>,
영진 리 작, 오동식 연출,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2016. 6. 3.

2017년 6월 9일 금요일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이예은

2001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16년이 지났다. 이 공연도 16년을 더 살았고 나도 16년을 더 살았다. 16년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되는 일. 작품과 나 사이에 낀 긴 시간이 어지럽고 부끄럽다. 그 동안 연극의 힘을 부정만 해 왔던 나의 소란스럽고 편협한 관심사가 모조리 부끄러워지던 시간. 연극에 대한 모든 편견이 0점이 되어 연극을 ‘구경’하는 순진한 관객이 될 수 있었던 시간.

성씨로 바뀐 가문, 저잣거리 놀이로 바뀐 대결, 잔치로 바뀐 파티, 춤꾼의 흥으로 바뀐 머큐쇼의 활기, 육담으로 바뀐 성적 지향, 그럼에도 끈기 있게 살아 냄으로 바뀐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전환점, 골계미로 바뀐 철학, 재담으로 바뀐 시, 운동으로 바뀐 긴장, 생명으로 바뀐 초월.

특히 긴장감과 화해, 사랑과 고통이라는 이분화된 갈등 구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시켜 내려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관절이 오태석의 공연으로 와서는 시종 끊어지지 않고 매끈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열기로 승화된다. 오프닝 잔치 씬에서부터 놀이가 곧 싸움이고 싸움이 곧 놀이인 역동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정서 속에 생존하던 힘이고 오태석이 우리 연극의 정신을 껴안으려 한 그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문과 가문이 대결하고, 사랑과 고통이 대결하는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은 0이다. 대신 긴장감을 대체하는 역동과 힘이 있는데, 바로 그 힘 속에 모든 감정이 한 데 녹아있다. 이분화의 초월이라는 셰익스피어적 철학이 역동 속에 공존하는 그 모든 삶과 죽음의 힘으로써 새로이 약동한다. 기쁨과 분노도, 슬픔과 환희도, 화해와 대결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탄성 속에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박력 있게 체감케 하는 음악적 리듬감과 움직임의 활력. 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전통의 정신 속에서 바로 이러한 긍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순간마다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여태, 아니 점점 더 강하게 살아남아서 관객에게 이 힘을 발견케 한 오태석의 숨소리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로미오가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hug)를 주는 장면은 화해와 대결의 구분이 초월적 고뇌로 승화되는 원작의 지점을 넘어 아예 화해와 대결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월적 기지가 단지 깊은 아름다움이기보다 자연스러운 정신처럼 작품 속을 파고든다. 하여 장면 장면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셰익스피어의 고뇌와 질문이 불거져 나오는 고결한 장면들로서가 아니라 작품 너머에 있는 더욱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을 한 데 껴안는 정신이 발현되는 장면들로 지속된다.
 
머큐쇼의 죽음 장면에서는 해학과 박력이 넘쳐난다. 이 장면에서 특히 웃음과 고통이 극렬히 공존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사건으로 희극과 비극이, 무언가를 믿을 수 있던 힘과 무언가를 믿을 수 없는 힘이 뜨겁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이 지점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랑과 고통, 화해와 대결의 이분법이 초월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어 다시 초월의 불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를 주었던 로미오가 머큐쇼가 죽고 허그 대신 칼을 물리는데, 공연의 이 장면에서 탄생한 급박하면서도 어지러운 운동감은 셰익스피어의 초월적 기지를 넘어서는 짠 내 나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기쁨만을 믿으며 화해도 쉽게 꿈꾸던 로미오가 고통과 맞물린 사랑의 실체를 대면하며 기쁨 속에는 고통이, 가능성 속에는 불가능성이 한 데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그러면서 보다 한 차원 깊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음이 뒤따를 사랑을 그럼에도 감행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죽음 같은 이별을 하게 되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하려고 죽음을 모의한다. 그러나 모의된 죽음은 정말로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서 사랑하고 싶었으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사랑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역시 새삼 깨닫는다. 이것은 모든 미숙한 첫 사랑의 극단화된 비극이자 죽음과 사랑의 선을 초월할 수 있는 첫 사랑의 극단화된 진실성이라는 사실도.

살아있고, 살아있고, 살아있다.
부러 무얼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발현해내는 일, 작품은 그것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나요- 하고 외치는 숨소리.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억지 해석을 하거나 과장 찬미를 할 필요도 없이 공연의 생명 그 자체를 관객의 피부로 흡수하게 하는 힘.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를 오롯이 오태석의 것으로 살아내게 한 힘이 있다.
해석도 재해석도 재창작도 아닌 살아내게 한 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관절 마디마디에 묻힌 뜻이 오태석의 숨소리로 체감되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태석의 것이 된 것, 그 이상이 있다. 원작도 오태석도 그 이상의 것도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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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7. 6. 7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태석의 우리식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임승태

전반부는 흡사 민속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잘 맞아떨어진다기 보다는 다양한 잔기술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일차적으로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다양한 전통 예술을 즐길 만큼의 지식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쫓아가기 바쁘다. 아마 나 같이 전통에 무지한 관객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결말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청산이다. 원작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오랜 두 원수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오태석은 그런 화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붉은 색 거대한 천이 미리 바닥에 미리 깔린 것이 이유가 있었다.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전이었던 터라 허공을 가르는 칼놀림이 흡사 <킬빌>이나 <자토이치>에서 피가 튀고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커튼 콜을 하는 호방함이란.

큰 틀에서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반목과 복수가 두 인물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두 주인공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게된 결정적 원인은 연극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배달사고 때문이다. 로렌스 수사의 원래 계획은 줄리엣이 자기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로미오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편지는 마침 발발한 전염병 때문에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1592년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94년까지 계속되었고, 런던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흑사병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극장이 재개장한 직후에 공연되었다.)

그런데 오태석이 페스트를 ‘메르스’로 바꿔 읽는 순간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페스트를 나와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장면을 오태석처럼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고 무대 밖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한 것 역시 당시 관객들이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메르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이름이지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기에 적잖이  불편하다. 가장 서글픈 상황에서도 웃을 거리를 던져주는 오태석의 연출은 대체로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 장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극장 하우스 매니저나 국립극단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최근 어느 극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공연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극장에선 ‘커튼콜에만’ 촬영을 허락했으나, 관객들은 ‘커튼콜부터’ 찍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셔들도 이런 오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커튼콜이  끝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사진 찍지 마시라고 크게 외친다. 방금 피바다를 이루며 다 허물어진 무대를 굳이 사진으로 남겨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걸 기어코 제지하고자 객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비좁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셔들의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극장의 방침인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게 그렇게 큰 소리와 빠른 동작으로 제지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만약 저작권 보호 때문이라면 커튼콜에선 왜 또 허용하는가? 최소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는 관객이 공연에서 얻은 정서와 질문들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셔의 임무가 아닐까?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그 땀과 열정의 무대가 관객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극장 환경을 조성해주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6월 2일 금요일

답을 찾아 떠난 사람의 이야기, ≪생각은 자유≫


 박종주

1년. 그가 한국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다. “질문만 던지는 연극을 만드는 데에 질린” 그는 무언가 답을 찾기를 기대하며 독일행을 택한다. 150편이 넘는 연극을 보고, 독일, 일본, 한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그 1년을 보낸다. 무언가 답을 주는 연극을 그는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은 자유〉(김재엽 작, 연출)은 그 1년의 성과 ― 인터뷰, 사진, 영상, 연극 리플렛까지 ― 를 모아 만든 연극이다. 두산아트센터 인문극장 “갈등” 시리즈의 하나로 상연되고 있다.
어떤 연극인의 (특별한) 일상에 관한 연극이므로 〈생각은 자유〉는 자연스레 연극에 대한 연극이 된다. 연극의 도시 베를린에서 연극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보여주고, 베를린의 연극인들이 가진 생각을 들려주고, 그것들을 보고 듣는 한국의 연극인이 하는 고민을 풀어 놓는 그런 연극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연극인 동시에, 작가가 본 여러 연극들, 그리고 그가 만든 여러 연극들에 대한 연극적 비평이다.
〈생각은 자유〉를 이끄는 것은 거의가 주인공의 방백이다. 그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읊는다. 그러고 나면 그 구체적인 상황이 배우들의 연기로 재현된다. 그렇다 보니 무대 전환이 빠르고 배우들이 일인다역을 맡는 일도 많다. 때로는 관객 일부를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다소간 산만한 가운데, 적지 않은 이야기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

시작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세월호다. 그가 베를린으로 떠난 2015년의 사회적 화두였고 따라서 연극적 화두였던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며 이 연극은 연극의 사회적 소명을,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세월호만은 아니다. 전작의 소재였던 용산 참사나 민중총궐기를 주최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수감 소식 (마침 5월의 마지막날 그의 형이 확정되었다. 징역 3년, 벌금 50만원.) 등 몇 가지 사회적 이슈들이 언급된다.
공공극장에서의 작품 검열이 있는 나라에서 연극을 해 온, 용산 참사를 “그저 소재로 가져다” 연극을 만들었던 그에게 베를린의 연극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공극장 예술감독이 정부에 대한 항의시위를 기획하는 모습도, 이주니 제 3세대니 하는 사회적 이슈들이 극장에서 직접, 그것도 당사자들에 의해 다루어지는 모습도 말이다. 〈생각은 자유〉는 그런 모습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에 1차적인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했다. 한국의 관객들에게, 정확히는 ‘연극인’인 관객들에게 말이다. (전혀 우습지 않은 장면들에서 웃었던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 배우나 언급되는 연출가를 알고 있는 연극인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해외의 연극을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혹은 한국의 연극 이상의 것을 상상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새로웠을지 모르겠다. 무대에서 반복되는 대사 중에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밖에 있으니 보인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그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되물음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그 관심을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여행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물리적인 ‘밖에 있음’을 요구하는 어떤 것은 아닐 터이다.
그의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것을 “이주Migration”라고 표현한다. 돌아갈 곳과 돌아갈 날을 정해 둔 이에게 어울리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이주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시각에서부터 그는 “세계시민”의 시각을 또한 배운다. 그러나 나는 의심한다. 그의 시각이란,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관객의 시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안내서 한 권을 들고 극장을 찾아 골목골목을 돌아 다니는, 적은 노력으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남이 찾은 답을 얻어 가기 위해 극장을 찾은 그런 관객 말이다.

극장과 광장

『연극과 정치』였던가, 그가 읽은 책은 그에게 고대 그리스 시민들에게 극장에 가는 일은 의무였다고,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을 무는 그런 의무였다고 알려 준다. 극장이란 곧 국가의 대소사를 논하는 광장이요 토론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극장 정신이 오늘날 베를린에 살아 있음을 본다. 사회적 이슈들을 토론하는 곳으로서의 극장, 낯 모르는 이들이 말을 나누는 곳으로서의 극장을 그는 그곳에서 체험하고 돌아 왔다.
귀국을 앞두고 짐을 싸는 그에게 아내는 묻는다. 새로운 연극이 무대에 올라야 할 곳이 극장일지 광장일지를 말이다. 그의 답은 단순하다. 극장을 광장으로, 광장을 극장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연극이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가 출국 전에 품었던 ‘답을 주는 연극’에 대한 꿈을 접지 않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소위 선진국의 사례를 알리는 이 연극은, 관객을 무대에 올리고서도 그들에게 자리를 채우는 것 이상의 역할을, 그 이외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껏 제도화된 극장 안에서 이 연극이 만드는 공간은 광장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교실에 가깝다. 아는 (것으로 전제된) 사람이 모르는 (것으로 전제된) 사람을 상대로 혼자서 내내 이야기하는 그런 교실 말이다.
글쎄, 나는 그의 전작들을 보지 못했고 그가 얼마나 달라져서 돌아온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 확인한 점이 있다면 한 장면 정도를 빼고는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내내 엄마의 역할이었다는 점 정도다. 그 1년간 그가 연극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가 과연 충분히 경험하고 충분히 고민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연극만 따로 떼어 고민하는 것으로는 ― 연극과 이어질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 충분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종류의 광장을 열 준비가 되어 돌아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연극이 그러하듯, 광장은 연극이 끝난 이후에 열릴 것이다. 극장 바깥에서 대화를 나누는 관객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 광장을, 책 한 권 (그가 읽은 『연극과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 이상을 하지 않은 채 끝나 버리는 (그 정보들을 물론 연극은 일종의 현장성을 갖고서 전하지만) 이 연극이 연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광장을 여는 것은 연극인들이 아니라 늘 관객들이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최초로 정부를 상대로 싸웠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

한국 바깥에서 살아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극장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극장으로서의 광장, 광장으로서의 극장을 운운하지 않아도 이미 곳곳에 광장이 있다는 사실이라든가 하는 점들 말이다. (어느 정도는 겸손이겠지만) 그 스스로 그저 소재로 삼았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용산 참사를 갖고서 거리에서 싸우고 토론하고 노래하고 시를 읊었던 사람들이 있었듯 말이다.
극장이 광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교실의 꼴을 벗어나는 일일 터이다. 작가나 연출이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공간이 아니라면, 극장에서 ‘가르침’은 일방향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혹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극장에 모인다고 생각하고서 만들 때에야 연극이 광장을 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을 던지는 연극을 만들고자 하든, 답을 주는 연극을 만들고자 하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관객들이 해 본 적 없을 질문, 관객들이 갖지 못한 답이라는 믿음은 극장을 지루한 교실로 만들 뿐이다. 광장이라는 수사가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평등한 이들이 자신의 관점을 내세우고 서로를 설득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극장이 광장이 되기 위해 우선 필요한 점은 그러한 평등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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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작/연출
〈생각은 자유〉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2017.05.23.-06.17.
5월 30일 관람.


2017년 6월 1일 목요일

리어왕, 누가 왕을 가장 사랑하는가

임승태

1.
등장인물과 플롯에서 몇 가지 주요한 변경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너릴과 리건의 남편인 올버니와 콘월 공작, 그리고 글로스터의 장남 에드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에드거가 배제됨으로써 몇 가지 사건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두 눈을 잃은 글로스터는 도버 해협에서 리어와 만나고, 곧 절벽에 몸을 던진다. 에드거가 눈먼 아버지의 자살을 막고자 거짓말하는 장면을 해석적 입장에 따라 부차적으로 취급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충성스런 신하인 글로스터가 왕의 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광대가 더는 익살을 부리지 않고 진지해지는 것 역시 아마도 등장인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으나 광대 본연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측면에서 이질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에드거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 에드먼드가 전투에서 패배한 코딜리어를 곧장 칼로 찔러 죽이고 이어 켄트는 활로 에드먼드, 거너릴을 차례로 쏴 죽인다.
한편 다른 배역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에드먼드가 더 많은 역할을 흡수했다. 서두에서 에드먼드는 원작의 버건디 공작을 대신하여 코딜리어의 구혼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로 직전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버지 글로스터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 터라, 그가 리어가 가장 사랑했던 딸인 코딜리어의 구혼자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2.
이러한 시도가 더 많아져 마침내 국악에서도 바그너와 같은 거대한 종합예술작품이 등장하는 날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각의 요소를 안배하고 완급을 조절할 연출가와 프로덕션에 맞춤하게 드라마를 다듬어줄 드라마터그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하겠다. 지금은 프로덕션을 받치고 있는 각 바퀴가 제각기 움직이는 바람에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형편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국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축약되고 각색된 <리어>는 원작의 응집력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연희를 연결해주지도 못했다. 음악이나 소리는 전문적이었으나 드라마와 동떨어져 있거나, 없으면 더 좋았을 법할 때에도 배경으로 깔린다. 풍물을 통해 전투 장면을 표현한다는 취지는 좋았고 연희단의 공연도 흥겨웠다. 하지만 풍물 공연이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의미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직 스크린에 비친 영상과 전쟁 효과음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는데, 때로는 풍물 소리와 뒤섞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임현빈이 맡은 소리는 애초 이러한 유형의 공연에 대해 내가 기대했던 바이지만, 그가 등장하는 소수의 대목에서만 셰익스피어와 국악이 직접 만날 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TV 사극을 생각나게 했고, 대사나 몸짓에서 국악과 어울리는 측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종일관 사용되는 영상은 비단 이 공연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를 공연할 경우 재고해야 할 일이다. 영화가 아닌 이상 셰익스피어를 사실적으로 접근해서는 본전을 찾기 어렵다. 빈 무대나 자연광, 변장 등 한국 연극 전통과 맥이 닿아 있는 셰익스피어 본연의 요소들을 이러한 성격의 공연에서 버려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2017년 5월 31일 이화여대 삼성홀
주최: 문화가있는날, 문화체육관광부
작곡 및 음악감독: 박경훈, 이아람
작창 및 소리광대: 임현빈
연주: 박경훈, 이아람, 성시영, 이정석, 전계열, 최태영
안무: 박준희, 소광웅
무용: 소광웅, 이세미, 유지희, 김병훈, 김우정, 조연정
풍물: 평택연희단
배우: 손성호, 남성진, 신현종, 윤상호, 이영숙, 김지은, 원종철, 윤도훈, 김진영, 김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