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주
90분간, 말 잘 듣는 사람들
직원 열 명이 채 안 되는 어느 식당에 의문의 전화가 걸려 온다. 스스로를 서울지방경찰청 강남 경찰서 강력한 형사라고 밝힌 남자. 그는 가게에서 지갑을 도난 당했다는 신고가 들어 왔다며 매니저에게 협조를 구한다. 그가 원하는 협조란 놀랍게도 포천에서 서울로 돌아 오고 있는 자신을 대신해 수사를 진행해 달라는 것, 정확히는 용의자에 대한 심문을 대신해 달라는 것이다.용의자는 2주 전부터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상고 출신의 노란 머리 — 피할 수 없는 용의자의 표식이다 — 여성이다. 잠깐 저어하던 매니저는 형사의 설득에 이 이에 대한 심문과 조사를 실시한다. 사장에게 책을 잡히고 싶지 않은 매니저의 욕망과 자기 사건을 다른 형사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 형사의 욕망이 교차하며 사건의 발단이 된다.
심문은 평범하게 소지품 검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훔친 지갑도 그 속의 돈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형사의 요구는 몸 수색으로, 이어서 알몸 수색으로, 조금씩 과감해 진다. 삼계탕을 파는 이 식당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복날, 손님들도 다른 직원들도 모르는 가운데, 직원 대기실에서는 이런 사건이 펼쳐진다.
형사는 종종 언성을 높인다. 매니저가, 혹은 매니저를 대신해 심문을 이어가는 다른 직원이 종종 협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성이 높아지기만 하면 협조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매니저의 남편이 심문을 이어가면서 그 수위는 극에 다다른다. 바닥을 개처럼 기게 하기, 질 속을 검사하기, 구강 성교 강요하기 — 어느새 심문의 목표는 용의자에게 수치심을 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매니저의 남편은 시킨 것 이상을 해 내고, 형사는 기분이 좋아진다.
90분간 작은 방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을 통해 〈말 잘 듣는 사람들〉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 권력의 요구에 부응해 불의마저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가를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어떤 조건들이 맞아떨어졌을 때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하는지를 — 얼마나 말을 잘 듣게 되고 마는지를 가늠하는 사고 실험 말이다.
게으른 실험
84분. 이것은 내가 연극을 관람한 시간이다. 그러니까 짧으면 2, 3분, 길면 8, 9분쯤 되었을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니,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말은 대강 이렇다. 저녁 시간이 되어 손님이 빠져 나가고 조금 한가해 진 주방장이 이 밀실에서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자조치종을 들은 그는 대노한다. 수사는 형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 전화 너머 목소리의 주인이 형사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필 형사의 명령을 조금이나마 거부했던 한 사람이, 그리고 형사를 믿지 않은 또 한 사람이, 둘 다 남성이었던 것은 우연이라고 해 두자.)그제야 상황을 의심하게 된, 그러나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 그의 정체를 확인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의문의 주인공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이전까지는 매직 미러 너머로 희미하게 상반신만을 내어 보이고 있던 그는) 와이셔츠에 팬티바람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극단적으로 통제된 변수들 — 바쁜 하루, 폐쇄된 방, 위압적인 공권력, 임금노동자라는 위치 등의 ― 속에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내어 보일 수 있는지를, 평소에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2004년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기도 하다.
얼마만큼이 실제 사건을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브라와 팬티만 입은 채 방치되는 용의자, 팬티 속에 손을 넣어 확인하는 부매니저, 속옷마저 벗기고 질 속을 확인하는 매니저의 남편, 수 시간째 갇혀 있다 결국 오줌을 싸고 마는 용의자, 이 모든 것이 이미 현실에서 실험된 바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17년 어느 낮에 극장에서 감행하기에, 이는 너무나도 게으른 실험이다. 원하는 결과가 이미 나온 바 있는 어느 실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변수들이 너무도 통제되어 있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지는 실험, 그러나 자극적인 어느 실험의 재현일 뿐이기에 말이다.
가벽을 세우고 온갖 상자들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모자라 거울에 “증” 마크까지 새겨 놓은, 식당의 직원 대기실을 성실하게 재현한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연극적 실험은 없을 것임을, 오줌을 싸는 장면에서는 무대에 정말로 물이 흐르게 하는 것 이외의 연출을 알지 못하는 연극임을 알리는 복선 말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오히려 질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하며 극장에 모인 이들에게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은 아닌가를 물을 절호의 기회를 말이다. 끔찍한 장면에서 탄식을 내뱉던 관객들은 우스운 장면에서 금세 폭소를 터뜨린다.
말 잘 듣는 관객들
이 연극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어느 관객의 리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보다는 이 연극이 덜 게으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보지 않은 6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도 믿기지 않는다.내가 극장에 앉아 있었던 84분 내내 여기저기서 괴로움의 탄식이 들렸지만, 관객들이 줄이어 자리를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두 명쯤 조용히 나갔을는지는 모르지만.) 84분 째에 내가 자리를 뜨자 그 뒤로 두어 명이 따라 나왔다. 나머지는 아마도 끝까지 연극을 관람했을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웃으며 커튼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관객됨’에 대해 생각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이 보기 싫어도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은 돈을 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끝까지 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돈을 냈기 때문, 이라면 슬픈 일이다. 자신의 시간보다, 자신의 정신보다, 돈을 더 아까워 해야 한다는 상황이 말이다. 혹은 관객으로서의 권리가 소비자로서의 권리로 축소되는 상황이 말이다.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대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기껏 관객‘들’이 모이는 극장이란 장소에서, 관객으로서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라면 말이다.
말 걸어 오는 사람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미 탓에 나도 84분을 버티고야 말았지만,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끝까지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연극을 준비하며 이 사건을 계속해서 생각했을 제작진과 출연진에게서, 우리는 어떤 성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자신들이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어도 좋았던 것일까?
‘연극됨’에 대해 생각한다. 연극과 관객이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뿐이다. 텅 빈 도화지 같은 관객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연극과 연극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할 일은 얌전히 앉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 관객이 만날 때 말이다.
〈말 잘 듣는 사람들〉
김수정 연출, 극단 신세계 제작.
2017.05.18-05.28. 알과핵 소극장.
5월 20일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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