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5일 목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의 찝찝함

임승태

나는 이 연극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켄터키주 맥도날드 장난전화 사건”은 이미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2012년 “Compliance”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된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 같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사건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초연이 2014년이었다는 점이나 연출의 변에 언급된 내용을 볼 때, 이 연극을 세월호, 특히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가만히 있으라”가 남긴 상처는 우리 사회에 여전하기에 이 말이 연극이나 영화에서 변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제 검열관이 사라졌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서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어딘가 고약한 데가 있다. 연출가나 배우들은 이 작품을 통해 가만히 있지 않음, 혹은 말 잘 듣지 않음을 실천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은 가만히 잘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각하지 말라는 담탱이의 조회 시간 잔소리는 매번 제 시간에 온 학생들이 듣게 마련이다. 과거 어느 공연에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는 순간 한 관객이 일어나 오셀로를 권총으로 쏴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객은 그 사람보다 정의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무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재미나 감동과 같은 반대 급부를 얻기 위한 유보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끝까지 봐도 도무지 즐겁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말 잘 듣는 게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만히 있었던 학생들,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던 루이스 오그본(Louise Ogborn) 혹은 차예슬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일차적 책임은 선장과 선원, 해경, 대통령에게 있고, 형사를 사칭했던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 혹은 최대한과 같이 시킨, 혹은 마땅히 시켜야 할 일도 시키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커튼 콜 당시 내 뒤의 한 관객은 웃음 지으며 퇴장하는 최대한을 향해 “나쁜 새끼”라고 외쳤다. 비록 이 말이 내가 관람한 저녁에 나온 관객 반응의 최대치였지만, 점잖은 관객들도 속으로는 그 이상을 외쳤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보이스 피싱에 당해 삼천만원을 잃었다. 옆에서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보이스 피싱이 퍽치기 강도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나면 핸드폰을 보조 배터리에 연결해서 여섯 시간씩 범죄자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을 잘 들어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리에게 당하는 양의 약함을 문제삼는 것과 흡사하다. 비극이 주인공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아고의 악함을 문제삼지 않고, 오셀로의 귀 얇음과 데스데모나의 지나친 친절을 문제삼는다. 이아고나 최대한은 수퍼 빌런이지, 간단히 헤치울 수 있는 조무라기 악당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오그본/차예슬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야 말로 이 사건/연극에서 주목할 문제이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이들이야 말로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박종주의 표현대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이 연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볼 가치가 있다면, 그건 스튜어트/최대한의 사악함이나 오그본/차예슬의 불쌍함 때문도 아니고, 바로 그 중간에서 이 끔찍한 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지극한 평범성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은 하루의 삶 속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것보다 내게 손해가 없기를 바라며, 내게 이익이 된다면 정의를 잠시 외면할 준비도 되어 있다. 이 연극을 보고 있기 불편한 것은 바로 나의 비열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관객은 이 연극을 끝까지 참고 봄으로써 카타르시스 없는 불편함을 얻게 된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이러한 사건에 연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와 (부)매니저 도나 서머스(Donna Summers)/김미옥과 그의 배우자 월터 닉스(Walter Nix Jr.)/강성기를 비난하면서도 일말의 연민을 거둘 수 없는 어정쩡함이 주는 불편함은 배우들이 단체로 펠라치오 시늉을 하는 것을 강제로 훔쳐봐야 하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85분에서 90분간 극장에 앉아서 그것을 접하는 것 만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전혀 즐겁지 않은 사건에 무언의 배우로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의 사도/마조키즘 성향을 활성화 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한국의 시공간으로 옮겨 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김수정의 저자권(authorship)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Compliance 와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히, 선제적으로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Compliance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자가 후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가? 몇몇 대사를 비롯하여 몇가지 설정—Compliance의 금발 머리, 치킨 샌드위치 가게와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노란 머리, 삼계탕 집—상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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