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7일 수요일

하극상 없는 상황실, 반전 없는 인생 ― 새 세계를 위하여


박종주

1.
등장인물은 셋이다. 대장과 부관과 연락병. 아니, 인물이라고 하기는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뇌의 각 기능을 의인화한 것이니 말이다. 대장은 이성적 판단을, 부관은 기억을, 연락병은 ‘마음부’ 및 ‘신체부’와의 연락을 담당한다. 이들은 무대엔 등장하지 않는 ‘나’의 뇌 속에서 작동하는 기능들이다. 그렇다. 무대는 바로 ‘나’의 뇌 속이다. 이들은 결국 ‘나’들이다. 서로 반목하는, ‘나’들 말이다.
대장은 기억들을 자료 삼아, 그러니까 부관과의 논의를 통해 ‘나’의 할 일을 결정하고 연락병이 이를 마음과 신체에 전달한다. 대장은 요즘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나’를  취업 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 영단어를 외울 용량이 부족하므로 ― 좋은 기억을 지우고 때로는 ― 지난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지금은 사치일 뿐이므로 ― 뛰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대장이 잠깐 쉬고 있는 사이, 그러니까 지친 이성의 끈을 잠시 내려 놓은 사이 ‘나’가 자위를 하는 장면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옛 연인을 생각하며 욕망을 해소하는 ‘나’의 모습에 대장은 분노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므로. 대장의 휴식은 이것으로 끝이다. ‘나’를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대장은 이제 바삐 움직이며 명령을 내린다. 우리가 이 연극을 보는 것은 그 명령들이 종종 거부 당하기 때문이다. 이성이 통제에 성공했더라면 ‘나'에게는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등장인물은 ‘나’ 하나이므로 이렇다 할 갈등은 없다. 대장과 부관이 이따금 다투지만,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뇌부의 통제를 받는 동안 ‘나’는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때로 손발이 절로 떨리기도 하고 때로 맘이 절로 울적해지기도 한다.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날 때가 있는 것이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두뇌부와 마음부 사이에 있다. 두뇌부가 어떻게든 미루고자 하는 갈등이 말이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나’가 평면적으로 묘사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작금의 청년들이 모든 내적 갈등을 억압하고 보류하며 ‘평평한 사람’이 되어 생존 투쟁에만 집중해야 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기엔 ‘나’의 삶을 표현하는 키워드들 ― 무급 인턴에서부터 ‘혼밥’까지 ― 도 다소 진부하다. 스토리를 생각하자면, ‘요즘 청년들 삶이 참 팍팍하다더라’ 하는 수준의 무심한 공감 이상을 끌어내기 어렵다.

2.
대신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연극의 요소들이다. 〈브레인 컨트롤〉은 관객들을 무대 곁으로 불러들인다. 흰 선으로 표시된 무대의 삼 면을 스물 몇 개의 의자가 둘러 싼다. 극장에 일찍 온 관객들은 객석 대신 이 의자에 앉아 보다 가까이서 무대를 지켜본다. 배우와의 소통이라든가 하는 참여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가까이서 지켜볼 뿐이다.
의자는 흰 선 바깥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객이 있는 곳은 여전히 무대 밖인 셈이다. 관객들은 왜 이리로 불려 온 것일까? ‘나’의 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마도 관객의 뇌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을, 일들을 보다 가까이서 관찰하라는 연출의 배려 정도로 생각하자. 어쩌면 정말로 좋은 자리는 그 의자들 뒤에 있는 원래의 객석일지도 모른다. ‘나’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는 스물 몇 명의 ‘나’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자리 말이다.
무대 뒤의 스크린에는 이따금 관객들을 위한 정보들이 표시된다. 두뇌부의 요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안내가 나오거나 ‘나’가 보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식이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극”이라는 단어다. 스크린은 연극을 “가상 시뮬레이션”의 동의어로 정의한다.
극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힘든 현실에 지친 ‘나’가 ― 정확히는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난 ‘나’의 마음이 ― 죽음을 향해 달려 갈 때 연락병은 묻는다. “이거 다 연극이죠?” 따라 붙는 대답은 “이건 실제상황이야!”이지만, 우리 관객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연극임을 말이다.
이것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그리고 극의 정조대로 지친 죽음이 피해야 할 결말이라 할 때, 이것은 관객들이 그러한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사고실험일 것이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것인지, ‘나’처럼 살게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인지를, 혹은 그렇게 살지 않거나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3.
또한 몇 가지 균열들이, 운이 좋다면, 관객들을 사유의 확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남성이다. 그리고 대장, 부관, 연락병은 아마도 여성이다. (지난 시즌까지는 남성 배우들이 연기했다.)  ‘청년’이 대개 ‘남성청년’과 동치되는 한국사회에서, 이 크로스젠더 캐스팅이 관객들에게 청년층 여성의 존재를 떠오르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70분 남짓의 짧고 급박한 공연에서 충분한 맥락을 갖고 설명되지는 않지만, 대장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하는 ‘어린 여성에 대한 혐오’라는 전략 또한 같이 생각되면 좋겠다.
두뇌부는 쉼없이 마음부를 다잡고 억누르지만, 그리고 그 끝에서 파국에 이르지만, 〈브레인 컨트롤〉은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두뇌부의 대장은, 후손을 낳아 번성하라는 ‘생의 목적’을 알면서도 DNA에 각인된 정보에 의지해 살아남기를 저어한다. 이 두 방향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다면 〈브레인 컨트롤〉이 모종의 문명을, 그러나 지금의 것과는 다른 어떤 문명을 요구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 상황실에는, 자신의 직분을 벗어나려 드는 인물들이 있다. 대장에게 반말로 반대 의견을 말하는 부관, “외람되지만” 끊임 없이 무언가를 묻는 연락병. 이들은 끝내 대장을 이기지 못해 ‘나’의 파국을 막지 못한다. 마지막에는 대장과 합심해 ‘나’를 살리고자 한다. 그러나 〈브레인 컨트롤〉이 연극이라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이들의 출연을 통해 무언가를 관객은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스스로에게 반기를 드는 법을 말이다.

4.
나는 돌이다.
더이상 떨지 않는다.
돌은 물속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물에서 나는 영원토록 숨을 죽인다.

‘나’는 연극의 처음과 끝에 이런 시를 읊는다. 대장과 부관에 따르면, 인생의 시가 완성될 때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 이 시를 완성한 후 ‘나’는 죽음을 택한다.) 삶이 그 시를 위한 시어를 찾는 과정이라면, 무대 밖 ‘나’들의 삶에는 조금은 다른 시어들이 나올,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를.



〈브레인 컨트롤(Brain Control)〉
정진새 작/연출
극단 문 제작
2017.05.09 ~ 2017.05.14 CKL 스테이지
2017.05.14.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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