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얼마 전 (또) 한 대학의 남학생들이 단체 채팅방에서 성차별과 성희롱에 해당하는 대화들을 주고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중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지 왜 대학에 왔냐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특히 이 내용이 기억에 남은 것은 나 역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이제는 대기업의 대리인가 차장이 된 옛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여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어려운데, 입시 경쟁만 더 치열하게 하면서 꼭 대학을 가야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 묻고 기 막혀 했으나, 그 친구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전히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라니, 이렇게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유난히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이런 저런 일들에 다 불편해 하는 프로불편러(혹은 불편충)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이런 불평등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연극계에서도.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런 불편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2월과 3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연출)과 <메디아>(로버트 알폴디 연출)를 연이어 관극했다. <조씨고아>는 원나라 이야기이고, <메디아>는 그리스 신화이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모두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복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복수하는 사람의 성별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민감한 것일까?
먼저 <조씨고아> 이야기를 해보자. 도안고의 계략 때문에 조순을 비롯하여 조씨 집안 일족이 몰살당한다. 이때 조삭(조순의 아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도안고는 출산 후 이 아이마저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삭의 아내를 감금했으나, 그녀는 복수의 씨앗이 될 아이만을 살리기 위해 시골 의원 정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영은 평소 조순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 이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이를 숨겨 달아난다. 이때 정영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아이를 살리는 것이 분명 후일 복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정영이 아기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아의 어머니가 자결하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장군도 정영과 아기를 도망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도안고가 고아를 추적하고, 그를 찾지 못하면 또래인 모든 아기들을 죽이겠다고 하자, 정영은 고아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어 놓는다. 공손저구 역시 목숨을 걸고 이 계획에 가담한다.
아기를 빼앗긴 정영 부인의 애 닳는 울음이 아직도 생각난다. 왜 자기 아들이 죽어야 하냐고 울부짖는 어미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사지로 데려가는 정영의 모습도 떠오른다. 죽음을 선택한 공주와 장군, 공손저구,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고 20년간 고아를 키운 정영의 모습은 분명 숭고한 희생처럼 그려졌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아이를 살려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인에게 걸맞는 최후를 위한 고귀한 복수. 조씨고아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그 복수의 씨앗으로 자라게 된 것이다. 물론 도안고 집안을 멸족함으로써 복수는 성공한다. 20년간 고아를 키우며 복수의 날을 기다려온 정영의 얼굴에서 모든 일을 이루었다는 안도와 허무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어쨌든, <조씨고아>에서 복수는 고귀한 것, 권선징악의 아름다운 결말을 완성하는 것이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더 익숙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여자, 그녀가 바로 메디아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메디아의 복수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메디아가 자식들을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들이 많은 것도 이 이야기를 치정극,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타국, 코린토스로 왔으나 남편은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바람이 나고, 곧 결혼을 한단다. 메디아 자신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고, 아이들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이 순간, 메디아는 공주와 왕을 죽이고,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다소 길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의 장면을 아래에 인용해보자.
메데이아 나는 내 자식들을 죽일 거예요.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이아손의 집을 송두리째 허물 것이며,
가장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나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인 죄를 피해 이 나라를 떠날 거예요.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친구들이여!
그래야만 해요. 내가 살아서 뭘 해요?
내게는 조국도 집도 불행의 대피처도 없어요.
내가 한 헬라스 남자의 감언이설을 믿고
선조들의 집을 떠났을 때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던 거예요.
그러나 그 자도 이제 신의 도움으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그 자는 앞으로 내가 낳아 준 자식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고, 새 신부도 내 독에 의하여
고약한 여인으로서 고약한 죽음을 당해야 하니
그 자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할 테니까 말예요.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역, 791행 ~ 806행)
자식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메디아의 여러 감정이나 이유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둘지는 연출의 마음이지만, 알폴디는 메디아를 ‘이기적인 여자’로 그러니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죽어 마땅한 여자’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여자의 선택”이라는 부제를 달고서는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다니. 메디아는 남편을, 이아손은 새 신부를 잃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식을 잃었다. 그런데 메디아만이 죽음으로 처벌당한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이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하는가? 결혼을 앞둔 이아손이 자식들을 본체만체 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는가? 메디아가 어머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성에 대한 환상이거나, 혹은 굴레일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단지 달라진 결말에서만 느껴진 것은 아니다. <메디아>의 코러스들은 모두 여자배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메디아가 등장하기 전, 첫 장면에서 그녀들이 보여준 모습은 메디아에 대한 질투, 그리고 험담이었다. 코러스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끝까지 지속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것일까.) 이혜영 배우가 분한 메디아의 강렬함이 연일 찬사를 받고 있는데, 무대 위의 메디아는 그저 “나쁜 여자” 그래서 “벌 받은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고 후회할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지는 모를 일이다. 알폴디는 메디아에게 속죄할 기회도, 악녀의 이미지도 빼앗아 버렸다. 메디아는 이기적인 여자, 그 이상도 아니기에 자식까지 죽이는 선택을 하고서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속죄할리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면서도 마차타고 유유히 떠나는 메디아가 두려웠던 것일까?
복수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옳고, 메디아의 복수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정영도 메디아처럼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영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상상하고, 헤아려야만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택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아름답게 그려졌다. 복수를 완성한 그들은 선을 이루었고, 이제 자신을 위해 목숨 내어 준 사람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정영은 죽는 날까지 아들과 아내에게 속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디아의 복수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매력적이지만, 신경질적이고, 악한 여자.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자일 뿐이었다. 결국 메디아는 죽음으로 처벌당해야 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곱씹어 볼 기회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홀로 남은 이아손은 이제 어떻게 될까? 이런 끔찍한 결말을 맺게 된 것에 대해 후회할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게 될까? 그렇다면 알폴디는 복수의 (그나마) 고귀한 면을 이아손에게만 준 것이다. 알폴디의 결말은 어쩌면 새로워보이지만, 악녀 메디아를 처벌하는 오래된 남성적 위계를 반복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과, 불편함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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