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수
공연예술 작품이 막강한 힘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이 ‘힘’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권위’란 단어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막강한 권위를 가진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근래에 상연되는 ‘고전’의 사례를 생각해보았을 때 잘 드러난다. 먼저 관객은 극장을 찾기 전부터 관극 경험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작품의 힘이 세니, 적어도 아주 망작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 말이다. 또 하나, 관객은 암묵적으로 약속된 관람 태도가 정해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서적으로든 인지적으로든 이런 장면은 이렇게, 저런 장면은 저렇게 받아들이고 반응해야만 한다는 느낌. 약속되어 있는 것과 다른 관극 경험은 (예를 들어 감동을 받아야 할 장면에서 아무 감흥이 없다거나) 공연 탓이 아니라, 철저히 ‘이 작품을 잘은 모르는 관객인 나 개인의 문제’가 된다. 이렇듯 관객은 권위 있는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뭘 좀 알아야’ 겨우 입을 뗄 수 있는 입장이 된다. 꼭 ‘고전’이 아니더라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 받으며 10년 이상 장기 공연을 해 온 작품도 그렇다. ‘뭘 모르는’ 관객은 오랜 기간 그 작품을 사랑한 수많은 관객들과, 오랜 기간 같은 작품을 상연한 제작진 및 배우들 앞에서 감히 무어라 말하기 어려워진다.
뮤지컬 <빨래>를 보고 온 나의 입장이 지금 그러하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졸업공연으로 시작하여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상업 작품으로 정식 초연된 이래로 오픈 런에 가깝게 공연 중이며,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상 및 극본상,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 작곡상 및 극본상을 수상했고, 하는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정보는 어렴풋이 알고, 오랜 공연 기간을 걸쳐 생겼을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와 추억 등등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공연장을 찾았던 나는, 지금 입을 다물어야 한다. 십여 년 째 꾸준히 극장을 찾는, 또는 다양한 캐스팅 조합 별로 같은 차수 공연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그래서 어떤 자리를 예매해야 공연 도중 남자 주인공의 사인을 받기 쉬운지 등을 너무도 잘 아는 <빨래> 팬들 앞에서 나 같은 ‘빨래 초짜 관객’의 불평은 그 자체로 예의가 없는 짓이 된다. 그런 것들이 이미 창작 뮤지컬 <빨래>의 ‘힘’, 권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허락된 관람 평은 “좋았어요.” “감동 받았어요.” “노래들이 귀에 계속 맴돌아요.” “배우들이 멋져요.” 정도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한마디 하려고 드는 것은 현재 이 작품이 가진 결함 때문이다. 이 글은 공연이 가진 젠더 이슈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이것이 어떻게 작품 전체의 구성을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부디 이 쓴소리, 아니 어쩌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헛소리가, 뮤지컬 <빨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아프게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빨래>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강조된 서사는 몽골 노동이주청년 ‘솔롱고’와 강원도 여자 ‘나영’의 러브라인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나영은 끊임없이 대상화된 여성으로만 그려지면서 나영은 하나의 인물로서 주체성을 갖지 못한다. 솔롱고와 나영의 ‘사랑’은 줄곧 솔롱고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솔롱고에게 언제부터 호감을 가졌는지, 이 호감이 언제 이웃사람에 대한 친절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이 친절이 도대체 언제부터 ‘사랑’이 되었는지와 같은 감정의 변화에 대해 나영은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할/노래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두 사람이 상냥한 말을 주고받는 장면은 참 많이도 나오지만, 그 정도 상냥함이야 살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영의 직장동료가 “무슨 좋은 일 있냐. 얼굴이 좋아보인다.”라고 하는, ‘썸’이나 연애를 시작할 때 주변인물들이 하는 스테레오타입의 대사에도, 그것이 나영이가 솔롱고와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연결고리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관람한 날의 ‘나영’의 연기가 능숙하지 못해서 대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없지 않은, 그 섬세한 감정 변화가 충분히 표현되지 못했던 것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본 나영은 끝까지 솔롱고에게 ‘타인에 대한 친절’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옥상에서 함께 빨래를 널다가 솔롱고가 나영의 손을 덥썩 잡는 장면에서, 아 이제 따귀를 날리면 딱 좋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 주인공 솔롱고의 경우 배우 개인의 연기가 부족하더라도 <빨래>의 대표곡인 “참 예뻐요”를 솔로로 부르는 등 자기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는 반면, 나영에게는 그럴 솔로곡, 그럴 장면이 주어지지 않는다. 대사 처리를 어찌 하느냐에 따라 끝까지 상대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 몇 마디만을 가지고, 나영은 러브라인의 여자 주인공 자리를 지켜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곧이어 키스를 하더니 살림방을 합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솔롱고의 노래 “참 예뻐요” 장면은 나영에 대한 대상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나영이 이사를 오다가 떨어뜨린 책을 솔롱고가 주워주었을 때 한 번, 옥상에서 빨래를 널며 인사를 했을 때 한 번 만나고 나서 그들이 세 번째로 마주치는 장면에서, 솔롱고는 공장장, 또 다른 이주 청년 ‘마이클’과 함께 슈퍼 앞에서 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무대 한켠에서 이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무대 다른 쪽에서 나영이 슈퍼에 가기 위해 등장한다. 나영이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슈퍼에 들어갔다 나오고, 그곳에 놓고 간 책을 슈퍼 주인으로부터 넘겨받는 그 시간동안 솔롱고, 마이클, 공장장은 나영을 빤히 쳐다본다. 여기까지야 나영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고, 그러므로 그건 칭찬이고, 이 정도면 시선 강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시선 강간은 단순히 음흉한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훑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은, 사람은 ‘꽃’이 아니기 때문에 이유를 막론하고 충분히 가깝지 않은 타인을 대놓고 쳐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무례한 행동이다. 이 무례함을 무례함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여기에 젠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후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철저하고 명백하게 나영에 대한 대상화가 이뤄진다.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진다. 주변은 모두 어두워지고 무대 한쪽 구석의 솔롱고와, 막 집에 가던 중인, 그래서 무대 한가운데에 있는 나영에게만 국부조명이 떨어진다. 시간이 멈춘다. 음악이 시작된다. 솔롱고가 노래를 시작하며 홀로 움직인다. 나영은 동작이 멈춰진 채로 환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 중앙에 ‘놓여있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솔롱고 뿐이니 동작이 멈춰진 사람은 나영 혼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마치 실험대에 올려진 것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 타의(솔롱고의 의도)에 의해 고정되어 전시되는 것은 나영 뿐이다. 노래를 부르며 서서히 나영에게 다가가는 솔롱고는, 남성의 시선에서는 사랑하지만 가 닿을 수 없는 이를 향한 간절함을 표현한 것일 수 있지만, 여성의 시선에서는 폭력 그 자체이다. 몇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 나를 해부용 실험동물처럼 속박하고 전시하더니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만지기라도 하려는 걸까. 마침내 그의 손이 거의 나영의 손에 닿을 때 쯤, 나영을 강조하던 조명은 꺼지고 나영이 먼저 솔롱고의 손을 잡는다. 솔롱고의 환상 속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영의 움직임과 말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나영의 말과 행동이 솔롱고의 기대일 뿐임을 안다. 이제 나영은 고정된 객체에서 남성의 환상대로 반응해주기까지 하는 (그것도 아주 ‘주체적으로’ 데이트를 이끄는 것으로 그려지는) 객체가 된다.
작품의 큰 소재 줄기인 연애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여자 주인공 나영의 입지는 자연스레 작품 내에서도 애매모호해진다. 아무리 직장에서 불의에 맞서려 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려 해도, 귀가만 하면 솔롱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 인물이 사용하는 동선 등을 보면 나영이 주인공임이 확실한데도, 과연 이 역을 주연이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영이 지워진 자리, 즉 주연이라는 자리에는 주인 할매, 희정 엄마, 그리고 솔롱고가 남는다. 그리고 이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조합은 상당히 이상하다. 차라리 솔롱고까지 사라져버렸다면 ‘참 열심히 사는 두 여자와, 그들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이렇게 되면 나영과 솔롱고는 조연이 됨), 작품에서 솔롱고의 자리는 여전히 견고하다. 연애라는 작품의 큰 줄거리의 유일한 적극적 주체이자, 이 감정을 솔로곡인 동시에 작품의 대표곡을 부르며 이끌어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인 할매의 장애를 가진 딸이 한밤중에 많이 아팠을 때, 나는 당연히 솔롱고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야 중심인물인 세 사람 간의 끈끈한 관계 형성이 비로소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정말로,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할매의 딸을 들쳐 업고 새벽을 달려 병원에 간 것은 희정 엄마였다. 솔롱고는? 철저히 대상화된 나영을 ‘얻는 데’ 성공할 뿐이다.
왜 나영 없이 솔롱고의 자리만 견고한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남은 솔롱고가 다른 주연들과 어떠한 관계인 건지 작품이 섬세히 그려내지도 않기 때문이다. 솔롱고는 그저 주인 할매, 희정 엄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사이, 그들로부터 나영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얻는 데 도움을 받는 정도의 얕은 관계만을 유지한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굴곡진 인생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는 주인 할매와 희정 엄마 사이 어디 즈음에 위치시켜야하는지, 이 셋의 관계는 서로 어떻게 얽혀있는 것인지 <빨래>는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솔롱고가 나영이를 ‘데리고 살게 되는’ 얘기(두 사람이 방을 합치는 것은 나영이가 솔롱고의 방으로 이사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상하다, 나영은 어쨌든 파주 공장으로 일을 나가고, 솔롱고는 또 임금을 떼먹혔댔는데... 솔롱고의 방이 더 넓은거겠지. 그래, 그런 것이어야만 하겠지, 하는 추측은, 무지한 관객인 나만의 몫으로 남는다)랑, 저 두 여인의 기구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작품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나영이 지워지고 솔롱고-주인 할매-희정 엄마라는 ‘연결고리가 미약한 조합’이 중심이 되어버린 <빨래>는 정리되지 못한 산발된 에피소드의 나열이 되어버린다. 관객이 이 서로 관계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봐야 할 이유가, 그것도 결코 안락하다고 할 수 없는 의자에 160분 동안이나 앉아서 봐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로 <빨래>에 대해 무지한 관객이지만,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작사를 한 사람, 이번 시즌에도 연출을 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안다. 그에게 작품을 통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선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성 연극인의 작/연출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대상화된 시선 때문에 작품의 구성이 위태롭게 여겨지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여성 관객으로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후, 약간의 조사를 통해 이 작품이 2003년 이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분이었던 공연 길이는 160분으로, 삽입곡은 7곡에서 18곡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변화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상업화’ 과정에서의 러브라인 강화, 이로 인한 솔롱고 비중의 강화 등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슬펐다. 더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작품을 다듬는 과정에서 고려된 그 ‘많은 관객’이, 소위 ‘뮤덕’이라 불리며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는 20-30대 여성 관객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 서나영을 지워버린 것은 여성 연극인 추민주 혼자가 아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는 헛소리에 가까울 관람평을 굳이 작성하고 굳이 게재하는 이유이다. 나는, 뮤지컬 <빨래>는 심각한 젠더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으며, 주요 인물 구성의 측면에 미숙함이 있어서 작품의 서사 구조의 안정성마저 떨어지는, 그래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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