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어느 반지하 작업실, 여섯 명의 젊은 예술가 ― (이렇게 분류해도 좋다면) 사진가, 연극배우, 웹툰 작가, 그래피티 화가, 개념미술 퍼포머, 노(のう[能]) 배우 ― 가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래피티 화가는 물을 담은 스프레이로 벽화를 그리고 있고 퍼포머는 기이한 체위들로 몸을 풀고 있다. 소파에 가로 누운 배우는 붉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래피티 화가의 첫 획이 말라 사라질 즈음, 극이 시작된다.
시작은 역시 가난이다. 사진가가 사들고 온 귤, 모두들 오랜만에 먹는 과일이다. 춤이 나올 만큼 기쁜 일이다. 오천 원짜리를 흥정해 삼천 원에 사온 참이다. 주스로는 비타민 공급이 충분치 않더라며, 이들은 신이 나서 귤을 깐다.
본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그래피티 화가에게 온 문자 한 통. 멋대로 여섯 명 전원의 이름을 적어 넣은 젊은 예술가 지원 사업의 합격 통보다. 잠시 모두들 들뜨지만, 지원금은 고작 이십만 원. 각자에게 필요한 것 중 최소한 ― 물론 그 최소한이란 각자의 예술가적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최소한이다 ― 만을 구비하려 해도 모자란 액수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요새의 트렌드를 좇아 시행된 사업인 융복합 예술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업을 구상할 것, 그리고 이십만 원이라는 제한 내에서 자신에게 최대한의 예산을 확보할 것. 이 두 가지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 극의 전부를 이룬다. 뒹굴의 이 작업 또한 모 기관의 지원금을 받은 것이므로, 아마도 익숙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십만 원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 작가들의 크고 작은 소망은 쓴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미치를 설치하는 데에 오만 원이 필요하다.[1] 사진가는 시간의 물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순 장의 폴라로이드 필름을 쓰고 싶다.[2] 무위의 퍼포먼스를 하려는,[3] 예술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퍼포머는 자신의 개념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름값’을 필요로 한다. 수작업한 그림을 스캔해 작품을 만들려는 웹툰 작가는 모나미 리미티드 에디션 볼펜 세트를, 자신의 몸만을 쓰는 연극배우는 자신이 먹을 초밥을 필요로 한다. 평소엔 수돗물로 그림을 그리던 그래피티 화가는 이번만큼은 에비앙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리수와 프랑스제 고급 생수는 느낌이 다르니까.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소재로 삼는 것을 자기반영이라고 칭한다면, 이 자기반영에서는 두 가지의 거울상이 포함된다. 하나는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작가가 처한 사회적 현실이다. 여기서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료들을 얻고자 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작업의 최소한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욕심이,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금 없이는 작업을 하기 조차 힘든 ― 결국 지원 제도에 종속되어 가는 예술가들의 현실이 비추어진다. 전자가 강조된다면 자아비판이 될 것이고 후자가 강조된다면 사회비판이 될 것이다. 그 둘이 분리가능하다면 말이다.
뒹굴이 무엇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극은 뜬금없는 춤과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유머들로 파편화된다. 작가들의 욕망만큼이나, 그들의 구상만큼이나, 극은 파편적이다. 사회비판을 무거운 일이라고 한다면 ― 꼭 사회비판이 무겁고 자아비판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 이 가벼운 블랙코미디는 아마도 자아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없이 표면만의 존중을 내세우는, 끝없이 싸우면서도 균열을 견디지 못하는,[4]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은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며 좋아하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둘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마 ‘예술계’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아비판인 동시에 사회비판일 것이다. 굳이 작업실을 공유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조합이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예술계의 축소판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극은 자립적인 생태계를 구성하지도, 서로를 건전하게 비판하지도 못하는 예술계의 실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5] 이렇게 자기비하적인 에피소드들을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다는, 어떤 자만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가들의 태도와 (예술을 대하는) 사회의 현실 모두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비판하고 있지만 초점을 잡기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자기반영이라곤 해도 이것이 구체적인 개인들로서의 자기를 반영하는 것인지 집단으로서의 예술가들을 반영하는 것인지 관객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균열의 끝에 이 작가들은 허위의 결과 보고서를 만드는 것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를 한다. 공간을 갖고 있으니 공간을 보는 일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로 한다. 결단을 내린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의 뒤에 서서, 관객들과 함께 무대를 바라본다. 아니,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틀린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관객은 또 하나의 고민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무언가 할지도 모를 배우들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배우들의 부재라는 무대의 상황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이 두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무대는 어두워진다.
[1]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극중에서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는 가로세로 3미터 가량의 독립된 공간과 그곳으로의 입장로 하나미치(はなみち[花道])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미치는 일본의 또 다른 전통극 가부키(かぶき[歌舞伎])의 무대 요소 중 하나로, 객석 사이로 길게 뻗은 통로를 가리킨다. “꽃길”이라는 뜻 그대로, 처음에는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로 나아가 꽃을 받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뒹굴의 얕은 지식이 드러나는 대목인지 하이개그인지는 불분명하다.
[2] 연습에 열 장, 작업에 쉰 장이 필요하다. 쉰 장 중 일부는 관객에게 배포되고 일부는 전시될 것이다.
[3] 다른 성원들은 이를 무이의 퍼포먼스, 무의의 퍼포먼스 등으로 잘못 알아듣는다. 퍼포머의 설명에 따르면 무위의 퍼포먼스란 부재의 현전을 내어 보이는 퍼포먼스이며, 다른 이들의 이해에 따르면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름만 올리는 일이다. 무위(無爲)에 대해서는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참고하라.
[4] “얘들아, 지금 싸우는 거 아니지?”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5] 이는 뒹굴의 전작 〈바로 그 얘기〉가 연극계의 관행을 비판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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