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사라진 무엇

임승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원작 권여선
각색/연출 박해성
출연 신사랑, 황은후, 노기용, 우정원, 신지우
2017.11.23-12.03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연극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동명 제목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적절한 신체와 음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원작 소설의 서술 방식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서스펜스는 아쉽게도 사라져야 했다. 권여선의 원작은 각 소절이 서로 다른 1인칭 화자에 의해 서술됨으로 인해 독자가 해당 소절을 읽을 때 이번에는 누가 서술자인지를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가 주어진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독자에게 일정한 긴장감과 능동적 참여를 허락한다.

이 두 가지는 두 형식이 가진 특성을 서로 맞바꾼 것이니 얻은 만큼 잃었고, 잃은 만큼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성에 있어서 발생한 변화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무대 버전에서는 이야기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이야기 하나가 생략되어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공연을 보고 난 이후 소설을 통해 그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이 이야기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을 영화나 연극으로 각색할 경우 생략은 불가피하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일야화’처럼 어떤 이야기가 길게 길게 지속되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연극은 한두 시간, 길어도 서너 시간 안에 끝마칠 수 있도록 신속히 핵심 사건에 접근하고  신속히 결말에 도달해야 한다. 따라서 소설의 연극화는 기본적으로 압축을 전제하는 작업이므로 단순히 어떤 장면이 생략되는 것이 불만스러운 사람은 그냥 서재에 머무르는 것이 더 행복하리라.

하지만 이번 각색에서 윤태림의 딸 실종 사건이 원작만큼 충분히 다뤄지지 않은 것은 소설 각색의 일상 다반사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이 문제가 작품의 제목 혹은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은 누가복음 23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에서 왔다. 작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해언의 동생 다언의 입을 빌어 이 말을 다시 쓴다. 아니 정말 알지 못하는 건 신 당신이라고. 인간들이 도무지 뜻모를 고통 속에서 죽고 사는데 어떻게 우리가 섭리를 믿을 수 있겠냐고. 오히려 이 모든 게 당신의 무지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다언과 상희의 대화 속에서 신의 섭리는 부정되는 반면 시에 대한 믿음은 재확인된다. 신은 믿을 수 없지만 시는 믿자는 그들의 대화는 연극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실종된 태림의 딸이 ‘혜은’이 되어 다언의 엄마 품에 있다는 이야기를 포함할 때와 하지 않을 때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신의 무지를 선언하고 섭리를 부정하는 말이 다언의 입에서 나올 때, 독자나 관객은 그녀의 고통을 알기에 그 말에 공감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겪은 고통에 대한 절규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자가 영아 납치 사건의 주범 혹은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반응은 같을 수 없다. 이럴 경우 다언과 그녀의 어머니가 벌인 일을 우리가 한편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으로 신의 섭리를 말하는 순간 우리의 도덕 감정은 선뜻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피해자가 신의 섭리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정의를 실현—그것이 정의 실현이든, 복수이든, 아니면 단순히 결핍에 대한 보상 심리이든—하게 함으로써 작가는 결정적으로 다언과 독자의 거리를 벌려 놓는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신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작가의 결정적 고안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다언의 결정적 행동을 삭제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가족을 잃는 불행 앞에서 한 인물이 신적 섭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만들었다. 원작의 경우 정의에 대한 갈망, 섭리에 대한 회의, 그러면서 동시에 자의적 정의의 실현 또한 대안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각색은 결론에서 온전히 섭리에 대한 불신이 제시되고, 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낭만적 전망을 내어 놓는다. 이 소설에서 섭리에 대한 고민이 영(Wm. Paul Young)의 <오두막>(The Shack)이나, 엔도 슈샤쿠(遠藤 周作)의 <침묵> 만큼 심화되지 않는 만큼 주인공이 섭리를 문제 삼는 것으로 끝맺는 각색은 결코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선 공교롭게도 신과 시가 서로 경쟁한다. 주인공은 신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음을 고발하면서 그 대안을 시에서 찾는다. 하지만 시를 믿는 자들이 보여주는 행동 역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기에 작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신적 섭리에 일정부분 의구심을 드러내지만 섭리를 부정하고 신이 아닌 시를 믿는 자(들)의 행동 역시 대안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윤태림을 통해 신앙의 언어가 위선이 될 때 그것이 얼마나 역겨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만, 위선이란 신을 믿는 자 뿐만 아니라 시를 믿는 자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음을 경고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연극에서의 각색은 작가가 취하고자 했던 윤리적 긴장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고, 그로인해 시를 우상의 위치에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연극 태교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예은

  열 달 동안 태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찾다보니 태교에 좋은 예술 작품을 찾는 일이란 무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특히 태교에 좋은 연극을 찾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임신 기간 동안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20세기까지 연극사 강의를 해야 했던 터라 시대별 주요 희곡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씩 통독해야만 했는데, 시대를 불문하고 태교에 좋은 연극 작품을 찾아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복수의 심연을 거슬러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고 그 한계성 속에서 단지 신의 필요를 호소하는 아이스퀼로스, 혹은 그 한계성 속에서 철저히 인간의 파멸을 욕망하는 에우리피데스에게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한계성으로부터 신과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피는 소포클레스에게서마저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생명체와 연결 지어 줄 만한 적당한 지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저열한 욕망이나 교조적인 도덕으로 점철된 로마 비극은 물론이고 와 닿지 않는 관념들의 나열인 중세 종교극에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생명체에게 전해 줄 에너지를 찾기는 힘들었고. 진실은 지금-여기의 현실에 있지 않고 인공적으로 구축된 어떠한 숭고한 체계 속에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세상을 훈계하려 드는 라신의 고정관념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이분법적인 가치들을 혐오하면서도 그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무시할 수 없어 작품의 배경에 넌지시 깔아 놓고는 그 중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점점 미쳐가는 햄릿, 맥베스, 리어, 오셀로의 침잠으로부터도 태교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로 다른 이유와 형태로 시종 죽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죽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극복한 대신 세상을 전면적으로 훈계하려 들거나 세상을 불신해버리는 20세기 이후의 작가들. 무엇이 되었든 그 무언가와 화해하지 못한 수많은 인간들을 창조해내며 존재를 세상과 구분 지으려 하거나 존재를 자체적으로 분열시키려 하는 현대 작가들에게서 태교의 단서를 찾기란 더욱 만무했다. 이 모든 회의감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관조적이지만은 않은 시력을 가진 체홉에게서도, 현실과 이상 사이의 연결에 고군분투하는 내 사랑 괴테에게서조차도 태교의 수준까지를 바랄 수는 없었다.

  왜? 왜일까? 왜 연극은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들까?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태교란 당연히 목적성이 뚜렷한 교훈이랄지 환상적인 해피 바이러스를 좇는 동화 속 서사 같은 것으로 충족되는 태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좋은’ 태교가 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다르게 말한다면, 이제 막 탄생기에 접어든 생명체와 예술이 접점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순간이란 연극에서 왜 이토록 만들어지기가 어려운가라는 질문 정도가 될 것 같다. 쉽게 말하면 대충 이런 말이다. 연극에서는 왜 그리 ‘기쁨’이라는 걸 만나기가 힘들까? 무턱대고 향해가는 기쁨이 아니라 자기 성찰적이면서도 분명하게 맺혀지는 기쁨 같은 것 말이다. 대상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파해내면서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할 수 없이 따뜻하게 터져 나오거나 흔들림 없이 신뢰를 주는 아주 실제적인 기쁨 같은 것. 복잡하고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것들의 층위가 두텁게 첩첩 쌓인 어떤 고지대 위에서 비로소 터뜨릴 수 있는 희망이나 떨림 같은 것.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가능성을 경험하면서 존재와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단지 태교의 마음만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을 이어내어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하는 인간 보편의 소망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교에 좋은 예술이란 곧 인간에게 좋은 예술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태교라는 barometer가 들어 선 이후 예술의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 보며 이 글을 쓰게 된 것인데, 사실 내가 만난 연극 중에서 태교에 좋은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이 없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베케트와 프리엘의 작품들이 그렇다. 두 작가의 일부 작품들만큼은 “티끌만큼의 의심도 들지 않을 만큼 존재와 세상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그와 동시에 흔들림 없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는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지점이 있다. 더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 본다면 콜린 히긴스의 작품 <해롤드 & 모드>에서 노년의 죽음을 눈앞에 둔 모드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청년 해롤드에게 “그래도 우리에겐 친구가 있잖아”라고 말하자 해롤드가 “누구요?”라고 물으니 다시 모드가 “인.류”라고 분명하게 발음하던 순간 같은 것도 내가 경험한 태교에 좋은 순간이다. 어딘가에는 분명 내가 미쳐 만나본 적 없는 태교에 좋은, 아니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연극들이 무궁무진하리라 믿는다. 다만 나의 어마어마한 무지가 문제일 뿐.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다. 분명히 어딘가에는 우르르 쏟아져 나올 만큼 무수히 존재할 그 작품들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항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고프다. 그 풍성한 세계와 이 빈약한 세계 사이에는 늘 거대한 간극이 있다.

2017년 11월 4일 토요일

다큐라는 형식을 이용한 자기 옹호식의 일기,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예은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형식을 따라 이 글도 1부와 2부로 구성하였다. 감정적인 크리틱 1부와 관찰자적인 크리틱 2부로 이 글을 구성한 것은 파렴치한 감정 선과 자기 냉소적 관찰 선을 모순적으로 공존케 하는 영화의 형식을 따르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작 이 글의 방향성은 에필로그에 있다. 

크리틱 1부


나의 존재함이 섬세한 만큼 타인의 존재함도 섬세하게 다루어지고, 타인의 존재함이 거친 만큼 나의 존재함도 거칠게 다루어지는 시선. 그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어떠한 세계가 창조되는 것. 작가가 어떠한 서사를 통해 발휘할 수 있는 진실의 비밀은 여기에 숨어 있다. 극적인 서사이든 다큐적인 서사이든, 무대 위의 서사이든 영상 안의 서사이든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타인의 감정과 존재는 ‘남의 것’이라 쉽게 비웃으면서 자신의 감정과 존재는 지독히 세심하게 천착하는 형식을 따라간다. 이를테면 명수(정재영 분)의 여자 친구를 ‘여편네’의 전형으로 전락시켜 ‘그런’ 여자들과 사는 ‘그런’ 남자들을 허식적이고 피곤한 존재들로 유형화한다. 그렇게 유형화시킨 인물들을 한 데 잡아 ‘너희들’이라고 지시하며-‘나’는 ‘나’로 표현되지만, ‘너’는 ‘너’라는 개인이 아니라 ‘너희들’이라는 무리로 표현된다- ‘너희들’과 다른 ‘나’의 섬세한 정체성에 함몰되어 세상을 ‘나 vs 너희들’로 이분한다. 하여 ‘너희들’과 달리 최소한 분노할 줄 아는 개인인 ‘나’는 숭고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영화는 시종 분노를 터뜨린다. 1부 술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영희(김민희 분)의 모습은 이 영화가 드러내는 끔찍하리만치 편파적이고 피상적인 시선이 극단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여기에는 나와 너 사이의 어떠한 가능함도 없다. 현실에서는 이원화되어 있던 ‘나와 너’가 ‘나를 넘어선 나’와 ‘너를 넘어선 너’가 되어 영화 안에서 만나 현실을 초월한 어떤 시선을, 어떤 인물을, 어떤 가능함을, 어떤 세상을 만드는 가능성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풍랑이 지나간 후 고요만 남은 듯한 김민희의 선(禪)적인 연기 스타일로 진행되어 따분하리만치 차분한 듯하지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매친 분노에 도달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관객 역시 자연스레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그 분노는 영화 속에 배치된 철저히 ‘나’를 옹호하는 분노에 동조하는 분노도 아니고, 당연히 홍상수-김민희의 리얼한 관계가 자극하는 어떤 지점과도 전혀 상관없는 분노이다. 관객의 일인으로서 내가 느낀 분노는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표면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서 스스로가 욕지거리를 해대는 이 영화의 태도에 대한 분노이다. 영화로써 현실의 ‘나’를 옹호하려는 ‘나’, 고작 인터넷 기사에나 대응하려고 만든 정도에 지나지 않는 피상적인 ‘나’만 있을 뿐 영화로 인해 무언가를 향해 보다 확장된 나, 보다 가능한 나, 그리하여 보다 정확해진 나란 찾을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가 시종 담아내고 있는 것은 제목 그대로 ‘밤 (유예된 시간의 저편 속)’의 ‘해변 (유예된 공간의 저편 속)’에서 ‘혼자’뿐이다. 현실과 관계 맺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 속에 함몰된 이 영화는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가능한 일들을 오로지 ‘나 혼자’라는 비좁은 영토 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작품으로부터 관객을 배제시킨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형식은 ‘너희들’ 모두로부터 단지 ‘혼자’가 되기 위한 ‘나’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영화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되어 역시 ‘혼자’가 되어버린 관객 1人인 나는 이 영화의 형식이 의도한 바를 더 없이 충실하게 따라간 것일지도.

크리틱 2부


그러나 거기, ‘밤의 해변’에는 결국 아무도 없다. ‘혼자’라고 표현된 ‘나’ 자신조차도 말이다.   이 작품은 영화를 통해 현실의 ‘나’를 옹호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여기에서의 ‘나’는 영화와 현실 그 사이 어디에도 없는 그저 ‘나일뿐인 나’ 밖에는 없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토록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한 ‘나’ 자신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영희라는 인물을 시종 자취 없이 사그라지기를 바라며 이방의 도시들을 유령처럼 떠도는 인물로 만든 이유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존재로서도 그녀는 부재하고 말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러한 암시는 1부의 마지막 장면, 해변에 혼자 서 있던 영희가 급작스럽게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되는 장면으로 시각화된다. (이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끌어내는 배우는 상징적이게도 영화의 실제 카메라 감독인 박홍열씨이다.) 결국에는 혼자 남았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는 장면이다. 시종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검게 늘어뜨린 긴 머리를 한 여인의 이미지로 영희를 그려낸 것도 시종일관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는 혹은 그녀가 따라다니고 있는 죽음의 욕망, 부재하고 싶어 하는 끈질긴 욕망의 투사이다. 2부에서 해변가 호텔에 들어가자 1부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를 프레임 바깥으로 제거시킨 사내가 저승사자처럼 등장하여 열심히 창문을 닦는 행위를 하는 것 또한 아무도 아는 척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 영희는 열렬히 이곳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호소한다.


이 지점에 들어서자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판단이 전환된다. 이 작품이 그토록 ‘너희들’과 ‘나’를 이분하면서도 더 나아가서는 ‘나’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하고 마는 것이라면, 영화는 자신이 구사하고 있는 형식 자체를 냉소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의 사이를 그토록 조야하게 비하시켜 놓고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만든 그 형식을 비웃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다시금 한 줄기 의혹스러운 희망이 생긴다. 현실의 프레임을 영화의 형식으로 이용하면서 그 프레임 안에서 너와 나를 구분하고 거기에서 모자라 ‘나’를 옹호하는 문법은 다큐인 척 하는 그러나 사실은 채 현실을 보조해주기 급급한 현실미만의 치졸한 것들이 저지를 수 있는 극단의 파렴치함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반전은 그 파렴치함을 펼쳐놓고는 스스로가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히 변태적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현실과 영화, 현실과 예술이라는 경계 위에서 다큐라는 흥미로운 방식을 다시금 새로이 접하게 한다. 이제까지의 홍상수가 저지른 적 없었던 끔찍함이자 그 끔찍함에 대한 졸렬한 자조이다. 하여 이 텍스트는 홍상수라는 인물 전체를 근원적으로 회의하게 만듦과 동시에 언짢은 기분으로 다시금 관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민희와 홍상수의 리얼한 관계에는 관심 없고,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가 자기 형식을 끔찍이 이용해 먹고 있는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이 시종 실망스러웠음과 동시에 그 실망스러움을 스스로가 전시하고 있는 그의 태도가 다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홍상수의 다큐’라는 형식이다. 단지 영화라는 형식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이용해서 현실에 대고 편파적인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정체성이면서 그와 동시에 현실을 이용하고 마는 이 영화를 작가 스스로가 비웃고 있는 것이 또한 이 영화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정체성이다. 이 지점에서 다큐와 극 사이를 어슴푸레 오고 가며 다큐도 극도 되기를 거부했던 기존의 홍상수는 사라졌다. 아울러 다큐와 극 사이를 망연히 오고 가기 위해 홍상수가 친히 사용해 왔던 반복적인 형식들-꿈 기운과 술기운에 의존한 기묘한 반복적 장면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등-도 사라졌다. 대신 다큐도 이용하고 극도 이용하면서 관객 따위는 됐고 심지어는 영화 따위도 됐다고 선언하며 단지 ‘혼자’가 되고 싶어 사투를 벌이는 홍상수가 새로이 출현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며 자조하고 등지는, 그래서 이제까지 반복적으로 지속시켜 온 숱한 그의 영화적 형식들을 다 내던지고 터럭 하나 걸친 것 없이 혼자가 된 홍상수의 뒤태가 이제까지의 홍상수를 가장 강인하게 드러내주는 본태 같은 것으로 보였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그러나 영화 전반을 놓고 본다면 영화의 몸체는 양의 비중으로서나 질의 비중으로서나 자기의 형식을 자조하는 관찰 선보다는 자기 형식에 스스로 함몰된 감정 선에 더욱 치중해 있다. 아니 이 둘은 비교의 차원이 되지 못할 정도로 영화는 감정 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 내 건 관찰 선은 사실 이 모든 감정 선을 다 말해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꿈’이라는 프레임을 덧입었을 뿐 영희와 영화감독(문성근 분) 사이의 사랑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뜨거운 술자리나, ‘죽음’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덧입었을 뿐 시종 ‘나’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성난 눈을 치뜬 채 세상을 치받고 싶어 하는 기운은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적 외피를 온전히 압도한다. 즉 ‘꿈’이나 ‘죽음’이라는 형식은 작품의 에너지로 전혀 승화되지 못한 채 작품으로부터 이용당할 뿐이며 영화의 내용과 질은 전적으로 ‘너희들’과 분리된 ‘나’의 옹호로 가득 채워져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도 홍상수의 기존 작품들에서처럼 어김없이 술이, 그리고 술을 마시고 취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술은 기존 홍상수 작품에서의 술과는 완연히 다른 기제이다. 이 작품에서의 술은 ‘꿈’, ‘죽음’과 마찬가지로 인물에게 내던져진 것이기는 하나 결코 인물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이 영화의 영희는 결코 <하하하>와 <북촌방향>의 유준상처럼, <우리 선희>의 이선균처럼 술이라는 장치에 압도당해 끌려 다니지 않는다.      

영화 배후의 사건인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이미 전해 들어 알고 있는 대중의 일원인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시종 이 영화가 제발, 부디, 김민희-홍상수의 관계를 넘어서는 영화이기를 열렬히 바랐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를 관찰하는 영화적 시선을 형식으로 활용할 뿐 결국 ‘나’를 호소하는 현실적 감정을 텍스트 내용의 요체로 만드는 자기 옹호식의 일기에 지나지 않았다. 영희의 꿈 속 술자리에서 직접 발화되고 있듯이, 우리는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만을 늘어놓는 이 영화의 어디로부터 가치(?-가치라는 단어가 이 영화의 리뷰 중간에 개입되는 것이 생경하기는 하지만)를 찾아야 하는지 실로 의문스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의문이 새로이 제기되는 이유는 영화에 내재된 그토록 개인적인 일기에 지나지 않는 진실은 이제까지 홍상수가 보듬어 낸 일기적 가치와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속의 일기는 자기 질문이 아닌 자기 옹호로 가득 차 있는 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지점에서만큼 홍상수의 다큐는 이 작품으로 인해 한걸음 퇴보하였다. (평단에서는 이 영화로 인해 홍상수의 형식이 한걸음 진보하였다고 입을 모으지만 말이다.) 자기를 질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저 편과 맞닿을 수 있으나 자기를 옹호하는 개인의 나약함은 세상의 어느 곳과도 맞닿을 수 없다. 다큐에서든 극에서든. 아니 현실에서든 예술에서든.    

결국 이 글은 가치니 성찰이니 초월이니 관찰 선이니 하며 작품을 훈계하는 평면적인 글로 읽혀질 것만 같아 씁쓸하다. 영화를 경험하는 과정과 글을 써 가는 과정에서 정리되지 않았던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질문들이 기어이 일목요연한 방향성을 틀어 이 글을 만들게 된 것은, 어쩌면 “결코 재현될 수 없는, 그러나 내 속에서 촉발되지 않은 것은 없는” 영화라고 이 작품을 소개한 홍상수가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기어이 확고한 하나의 방향으로 영화를 틀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이리라. 이 작품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은 현실과 예술, 그 사이를 운신하는 다큐라는 형식에 대해 가지는 양가적 감정이다. 현실과 최대한 맞닿아 있으면서 바로, 그 맞닿아 있음으로 인하여 현실을 다시금 바라보게끔 만들어 주는 어떤 예술의 가능성. 하여 현실과 예술 사이의 경계성보다는 현실과 예술 사이의 가능성, 그것이 다큐라는 형식의 미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2017년 9월 22일 금요일

‘간혹’ 가능한 것들을 향한 믿음: 극단 풍경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원작, 브라이언 프리엘 ⟪Faith Healer⟫에 대하여


이예은

  언젠가 드라마-인에 김현탁 연출의 작품을 드라마투르기하면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작품 비평문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이 글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맥락의 글이다. 최근에 번역 및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한 공연을 통해 역으로 공연 작품의 원작에 대해 새로이 발견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이다. 희곡을 공연으로 세우는 과정 안에서 경험했던 자기 반성적 질문들과 그 질문들을 통해 다시금 발견한 희곡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을 정리하며. 

  비평할 작품은 극단 풍경의 박정희 연출이 각색한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의 원작인 브라이언 프리엘의 ⟪Faith Healer⟫이다. 프리엘의 작품은 진실과 허구, 그 사이 어딘가 쯤에서 각자 웅크리고 앉아서는 한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움직이지 않는 시선들로 가득하다. 특히 ⟪Faith Healer⟫는 이렇게 각자의 작은 무덤들 속에 고여서 나름의 구원을 내다보는 세 인물의 입김과 체온이 섞여 이러 저러한 파문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Faith Healer⟫는 동일한 현실을 공유한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세 인물이 그 현실을 서로 다른 무게 중심을 지닌 기억들로 재편해 가는 과정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소재만 동일할 뿐 그 크기와 질감, 온도, 앵글은 제각기 다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무대 위에 세운다면 무대는 아마도 기형적인 그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프리엘은 이 세 명의 이야기를 각기 홀로 등장케 하는 형식을 택한다. 원작은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 프랭크의 순서로 각각의 인물이 홀로 등장하여 자신의 기억을 발화하는 장면으로 연쇄된다. 하나의 무대 위에서는 함께 지속될 수 없는 저마다의 균열된 이야기일 것이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허락된 고독한 무대 공간 위에서 이들 각자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고백적 양식으로 관객에게 자신의 진실성을 호소한다. 우리가 믿는 모든 진실이란 한 데 모아 놓고 보면 이토록 기형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각자가 호소하지만 전모를 들여다보면 기형적인 것이 되는 진실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진실의 본성 혹은 진실의 존재 여부를 질문케 하며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진실보다는 균열이다. 그러나 균열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 작품이 정작 질문코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진실의 영역이다. 허구적 기억이 가진 진실의 가치에 주목하며 프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을 발설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렇게 발설된 진실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 (공연 전단 드라마투르그의 글에서)

  이 세 인물은 어쩌면 끝내 한 곳에 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평생을 산다. 그러나 이 세 인물이 결국에는 가 닿아 보려고 힘을 다해 쏟아내는 믿음, 그 지향의 강도는 팽팽하다. 이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믿음의 방향은 상이하지만 그 지향의 강도는 동일하기에 결국 이 세 인물은 한 보도 나아갈 수 없는 곳에 머무르고 만다. 그렇다, 이들은 철저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평생을 고군분투한다. 지극히 가까운 동반자의 지향이 나의 그것과 다른 방향에 있을 때, 그러나 그와 나는 헤어질 수 없는 애착의 관계에 있을 때 우리는 마치 한 보도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서로를 욕망함과 동시에 자아를 꿈꾸게 되는 상태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들은 평생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유랑하지만 결국 꿈쩍 않고 부동하는 시간대를 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프랭크와 신의 관계, 그리고 그레이시와 프랭크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프랭크는 신을 좇아 유랑하고, 그레이시는 프랭크를 좇아 유랑하지만 결국 이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정박 당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원작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은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힘들의 팽배하는 운동성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세계는 서로 다른 힘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전모가 기형적으로 보이나, 그와 동시에 그 힘들은 서로 다른 힘들이기에 또한 서로를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그 전모가 기형으로 판명되는 것은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이상적인 화합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우리의 순수한 기대 탓이리라.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며-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를 반사하고 나의 믿음이 너의 믿음을 반사하며- 만들어내는 다면적인 입체 조형이 우리라는 ‘예기치 못한’ 한(≠‘기형적인’)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구성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게 깔려 있는 힘이 발견될 때, 혹은 보이는 것 너머의 힘이 발견될 때 비로소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진실이라면, 진실은 허구와 대립하는 항목이 될 수 없다. 허구와 허구 사이의 균열들 그 너머에 있는 것, 혹은 그 아래에 깔려 있는 것, 혹은 그 전체를 감싼 것. 물질이나 언어로는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이상 혹은 이면의 것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 

  원작 ⟪Faith Healer⟫는 아닌 척 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faith', 즉 신 혹은 신적인 것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들 사이의 허구와 허구와 허구를 바라보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을 바라본다. 프랭크가 자기 자신에게 기대했던 것, 그레이스가 프랭크에게 기대했던 것은 모두 인간과 인간 그 이상의 차원에서 가능한 어떤 진실이었다. 독백으로 진행되는 프랭크, 그레이스, 테디의 균열된 이야기들을 소환하여 결국에는 그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려 하는 이 작품의 구조(형식)는 결국 인간의 가시 영역을 넘어서 어떠한 다른 차원에 다다르고자 하는 이 작품의 주제와 합치된다.     

  공연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은 원작을 ‘개별적 기억들의 균열’에 의거한 ‘총체적 진실의 부재’로 읽는 것에 집중한다. ‘각자는 자신의 뇌의 편향성에 따른 기억에 의존하여 산다’ 고로 ‘기억을 담보로 한 존재들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고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결론으로부터 시작된 연습 과정에서 진실과 허구는 양분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는 논리를 가지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진실과 허구는 대립 항이 아니라 서로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상호적이고 연쇄적이며 개방적이고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화두들이기에 논리를 빌린 언어 구조로는 호소력 있게 설명될 수 없다. 진실과 허구는 끊임없이 상이하면서도 지침 없이 서로를 포섭하는 예기치 않은 관계인 것이다. 

  연출자와 함께 원작의 제목을 ‘간혹,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수정하며 무엇보다 ‘간혹’이라는 단어에 맺힌 절묘함에 기뻐했던 그 순간에는 돌이켜보니 그러한 기대감이 있었다. ‘간혹’ 어떠한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빗겨가지만은 않으며 그 순간이 ‘간혹’ 있는 이상 많은 순간에는 진실과 허구가,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어떠한 식으로든 서로를 욕망하거나 체념하리라는 이 모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간혹’이라는 단어에는 어느 것도 편들지 않는 무심함이 있어서 좋았다. 알 수 없는 미래가 비로소 과거가 된 이후에나 말해질 수 있는 겸허한 회고의 무심함. 사실 이 ‘간혹’이라는 화두 안에 깔린 것들, 상이한 것들이 부딪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대한 고요한 믿음, 그 믿음을 가능케 하는 기다림과 고독, 그리고 겸허함과 항구함은 내가 요즘 가장 치중하고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연극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예술을 전하는 강의와 논문이 만들 수 있는 진실, 나아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존재가 만들 수 있는 진실, 진실이 만들 수 있는 진실. 이러한 것들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고작 (혹은 무려) ‘간혹’ 실현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나오며 바로 그러한 세밀한 맥락에서 나는 ‘진실’이라는 단어를 단단하게 발음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가, 글은 다 끝나가지만 이 글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진실이란 왜 발설되기 어려운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발설되기 어려운 진실을 발설하는 일에 대해서. 아니 그 일의 효력에 대해서. 사실 이 질문은 작품을 읽고 바라보고 세워내려 하던 과정에서 독자로서 관객으로서 드라마투르그로서 고뇌한 것이지만 동시에 작품 안에서 프랭크와 그레이시가 고뇌한 질문과 동일하다. ‘간혹’ 존재할 수 있는 진실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효력은 진실의 편을 옹호하는 호소력이나 진실의 편을 부정하는 폭력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단지, 간혹 깊어질 수 있는 개별자들의 내면과 만나는 질문의 형태로 공유될 뿐이다. ‘간혹’ 가능하기도 한 것이라는 진실의 정체성이 곧 그 효력을 발생시키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의 정체성이 진실 나름의 형식으로 공유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프랭크의 신을 향한 믿음이기도 했고, 그레이스의 프랭크를 향한 믿음이기도 했던 그것-이 바로 원작의 제목에 놓여진 'faith'의 의미이다. 프리엘의 ⟪Faith Healer⟫는 진실이 가진 가냘픈 내면과 형식의 흐름을 조용히 따라가는 가운데 그 주변을 유랑하는 이들의 애타는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진실을 호소하는 힘도, 진실을 부정하는 힘도 없다. 단지 어떠한 가녀린 가능성에 대한 지향이 있을 뿐이며, 그 가능성을 향한 마음이 끔찍이도 열렬할 뿐이다. 

2017년 6월 11일 일요일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임승태

희곡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름난 작품들도 막상 책을 펼치면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좋은 소설은 ‘단숨에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라는 독자들의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희곡은 그렇지 않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도 명성 있는 작품이라 마냥 안 읽고 버틸 수 없어서 드디어 책을 펼쳤다가 1막을 겨우 읽고 서둘러 인터미션을 가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플롯이 복잡할수록 이런 문제는 심각해진다. 소설도 희곡도 모두 작가의 머리 속에서 구상한 결과이지만, 소설가가 서술자를 통해 인물의 겉과 속을 두루 우리에게 알려주는 반면, 극작가는 철저히 인물의 겉만 다룬다. 우리는 희곡을 읽을 때 인물이 내뱉는 말을 통해 각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욕망을 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야 하는데,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이 작업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기 십상이다. 심지어 누가 누구인지조차 입력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셰익스피어의 사극이나 체홉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처럼 등장인물 목록(dramatis personae)에 쓰여진 이름과 장면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제각각일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게 희곡이다. 웬만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번에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어쩌면 처음 읽었을 때 다 파악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곡은 많은 것이 비워져 있고, 또 감춰져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희곡의 활자는 매번 배우들의 말과 몸짓을 통해 독특하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곡을 쉽게 읽는 비법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지금껏 내 경험상 희곡은 소설이나 영화와는 달리 스포일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재탕 삼탕에서 진정한 맛과 멋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식스 센스>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극장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결말을 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면 결말을 다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거나 희곡은 이런 점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 한번 읽고 좋지 않은 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좋은 시를 한번만 읽지는 않는다. 좋은 희곡은 줄거리, 플롯, 인물, 결말 등을 다 알고서 읽어도 흥미롭다. 아니 알고 봐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물이 내뱉는 대사의 적절성과 탁월함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리허설은 수개월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는 작업이라서 그런지 한창 리허설 중인 배우들은 그 희곡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매료되고 공연이 끝나고 한참 지난 후에도 예전에 했던 공연의 대사 한 토막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읽고 또 읽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초행길에는 가이드가 함께 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위대한 작가의 대표작이 한눈에 펼쳐진다”는 말을 제법 실현하고 있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적 배경, 작가의 전기 및 당시 공연장 환경 등 셰익스피어를 읽는 데 유용한 기본 정보를 시작으로 그의 주요 작품을 역사극, 비극, 희극 순으로 소개한다. 개별 작품으로 들어가면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한 다음,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깨알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제시된다. 그림책의 특성상 이 책은 어린이 청소년용으로 분류되겠지만, 이 정도 내용이면 대학생이나 성인 독자들에게도 꽤 유용할 것 같다. 이 책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를 제외하면 책 좀 읽는 독자들이라도 이런 다이제스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읽다보면 의외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세부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무대 밖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다보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설명들도 있다. (그럴 때에라도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 이야기>보다는 원작에 가깝다.) 예를 들어 <리어 왕> 항목에서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된다”는 문장은 오독의 소지가 있다. 한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쓰겠다. “코딜리어는 감옥에서 몰래 처형된다.”  

여전히 더 좋은 셰익스피어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급증한 번역서의 양과 질을 고려한다면 이제는 이런 입문서가 더 확충될 차례가 온 것 같다. 다른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 책의 저자 카롤린 기요(Caroline Guillot)가 올해 동일한 컨셉으로 <몰리에르 일러스트 소극장>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고 하니, 이 또한 우리 서점에서 보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셰익스피어 일러스트 소극장>
카롤린 기요 지음, 김자연 옮김, 클, 2017.




덧붙임) 출판사에서 출간 기념으로 종이 인형을 부록으로 끼워준다.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러스트 종이 인형을 무대에 직접 세워볼 수 있고, 다른 작품 속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도 있는 흥미로운 선물이다. 다만 기왕 무대에 세울 수 있도록 하려면 삽화 중 글로브 극장 이미지를 함께 제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드윅 홀이 선택된 것은 아쉽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

용비어천가

이예은

뉴욕 링컨 센터에서 영진 리의 <We're gonna die>를 미국 관객들과 함께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미국이었고, 미국 관객들이 있었고, 미국에서 살아내고 있는 영진 리가 무대 위에 있었다. 2017년도 국립극단 제작 <용비어천가>는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한국에서, 한국 관객들 앞에서, 한국 배우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영진 리의 오리지널 버전 공연과 국립극단 제작 버전 공연 사이에 낀 애매함은 단지 이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지역성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애매함의 전부였을까?
     
사소한 외로움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늘 비극적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비극이 된 모든 사건이 응원 받는 이야기. 아프고도 즐거운 이야기, 신이 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는 결국 그녀 스스로에게서 모두 응원 받는다. 영진 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는 마치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양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위로한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을 들으면서 ‘참 강건하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나와 너를 깊은 곳까지 끌고 가서 기어이 나의 깊이와 너의 깊이를 만나게 한다. 그래서 특정한 인간의 특수한 고통처럼 보이는 것을 인간 보편의 만연한 애잔함으로 만든다. 나와 너를 연결하고 고통과 응원을 연결하는 이러한 시선은 내게 강건함으로 와 닿았다. 이것은 또한 그녀가 살아 온 인생에서 빚어진 힘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구별과 차별, 다름과 억압, 분노와 부당함을 온 몸으로 껴안고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 가능성과 상상을 끈질기게 붙잡고 살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보다 깊은 차원의 힘. 흔히 ‘히스테릭’이라는 단어와 ‘코미디’라는 단어를 합쳐서 ‘히스테릭 코미디’라는 단어로 그녀의 작품을 수식하고는 하는데, 사실 그녀의 스토리텔링은 히스테릭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니고 히스테릭과 코미디를 단지 결합한 무엇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히스테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씁쓸함만 있는 것도,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출되고 다듬어진 공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살아내고 있음이, 그리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삶을 무대 위에서 다시 살아내고 있음이 느껴졌기에, 그래서 강건했다. 비록 미국인 관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인 내가 영진 리의 공연을 보고 있었지만, 나는 결코 미국인 관객들과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 공간에는 미국인과 한국인을 넘어선 ‘살아남은 인간’의 온기가 있었고 우리 모두가 울고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쳐들고 팔목이 떨어져라 박수를 보낸 이유는, 미국계 한국인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을 응원하는 열렬함 때문이었다.    

<We're gonna die>에서도 일부분은 인종 차별을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관심을 두고 있던 것은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종 차별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우리 각자가 삶을 살고 있지만 사는 동안에는 ‘삶’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고 그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하여 그녀는 결코 현실을 고발하지도 토해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며 그 과정에서 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의 전체에 'We're gonna die'라는 제목을 붙인 것인지 모른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순간의 살아있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죽을 것이기에 살아남아야 하는 몫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올해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이라는 기획 타이틀의 한 프로그램으로 섭외된 순간부터 영진 리의 공연은 ‘미국계 한국인’의 공연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온몸에 걸쳐 입게 되었다. 비한국과 한국 사이의 경계 지대에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공연을 기획한다는 취지로 붙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에는 ‘디아스포라’라는 정의내릴 수 없는 내면의 영역을 전면적으로 선 보이겠노라는 다소 민망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온전히 영진 리의 것은 아닐지라도 공연의 어느 틈새에는 영진 리의 강건함이 있겠지 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김신록 배우가 영진 리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모습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공연은 시종 ‘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인, 그리고 그 시선에 대해 ‘한국’인이 가지는 감정을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한국인과 미국인, 그 사이의 균열에 집중하는 이 공연은 급기야 그 많은 한국인 관객들로 하여금 짠 내 나는 눈물을 몇 번씩 뽑아내고 말았다. 사실 나도 몇 차례 울었다. 울면서도 궁금했다. 영진 리의 강건함을 한국인의 아픔으로 만든 이유는 무얼까?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연출자에게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지만, 대화가 시작되고 연출자가 한 말을 듣고는 그냥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연출자는 원작을 해석하지 않고 오로지 ‘재연’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해석이 없었다는 공표에 할 말이 없어진 것도 잠시, 그가 말한 재연의 대상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영진 리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사건, 공기의 겉면을 재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면 과연 이 공연은 원작 공연을 재연한 것일까? 어떠한 삶이 몇 몇의 코드가 될 때, 삶의 진행이 무언가의 고발로 치환되고 전시될 때 실체는 너무도 당연스럽게 껍데기로 왜곡된다.  

지금 여기의 이들의 공연이 아닌 누군가(영진 리)의 이름을 빌린 공연. 창작자들이 작품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이 느껴지는 기획‘된’ 공연. 나 역시 기획자로서나 드라마투르그로서 그러한 상황에 끼어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야 했던 숱한 경험들이 있으니… 아쉬움을 느끼기에 앞서 지금 이곳 내가 속한 곳에서 연극‘함’의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타이틀 그 이상이 되지 못한 기획의 폭과 질문이 부재한 연출의 아쉬움이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 선 배우, 배우들의 사투는 눈물을 쏙 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진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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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 중(中) <용비어천가>,
영진 리 작, 오동식 연출,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2016. 6. 3.

2017년 6월 9일 금요일

<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이예은

2001년 아룽구지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고 16년이 지났다. 이 공연도 16년을 더 살았고 나도 16년을 더 살았다. 16년 전에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되는 일. 작품과 나 사이에 낀 긴 시간이 어지럽고 부끄럽다. 그 동안 연극의 힘을 부정만 해 왔던 나의 소란스럽고 편협한 관심사가 모조리 부끄러워지던 시간. 연극에 대한 모든 편견이 0점이 되어 연극을 ‘구경’하는 순진한 관객이 될 수 있었던 시간.

성씨로 바뀐 가문, 저잣거리 놀이로 바뀐 대결, 잔치로 바뀐 파티, 춤꾼의 흥으로 바뀐 머큐쇼의 활기, 육담으로 바뀐 성적 지향, 그럼에도 끈기 있게 살아 냄으로 바뀐 희극에서 비극으로의 전환점, 골계미로 바뀐 철학, 재담으로 바뀐 시, 운동으로 바뀐 긴장, 생명으로 바뀐 초월.

특히 긴장감과 화해, 사랑과 고통이라는 이분화된 갈등 구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시켜 내려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관절이 오태석의 공연으로 와서는 시종 끊어지지 않고 매끈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열기로 승화된다. 오프닝 잔치 씬에서부터 놀이가 곧 싸움이고 싸움이 곧 놀이인 역동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 전통의 정서 속에 생존하던 힘이고 오태석이 우리 연극의 정신을 껴안으려 한 그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문과 가문이 대결하고, 사랑과 고통이 대결하는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은 0이다. 대신 긴장감을 대체하는 역동과 힘이 있는데, 바로 그 힘 속에 모든 감정이 한 데 녹아있다. 이분화의 초월이라는 셰익스피어적 철학이 역동 속에 공존하는 그 모든 삶과 죽음의 힘으로써 새로이 약동한다. 기쁨과 분노도, 슬픔과 환희도, 화해와 대결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탄성 속에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박력 있게 체감케 하는 음악적 리듬감과 움직임의 활력. 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전통의 정신 속에서 바로 이러한 긍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순간마다에서 그 오랜 시간 동안 무대에서 여태, 아니 점점 더 강하게 살아남아서 관객에게 이 힘을 발견케 한 오태석의 숨소리를 만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로미오가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hug)를 주는 장면은 화해와 대결의 구분이 초월적 고뇌로 승화되는 원작의 지점을 넘어 아예 화해와 대결이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으로 이해하고 있던 초월적 기지가 단지 깊은 아름다움이기보다 자연스러운 정신처럼 작품 속을 파고든다. 하여 장면 장면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셰익스피어의 고뇌와 질문이 불거져 나오는 고결한 장면들로서가 아니라 작품 너머에 있는 더욱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을 한 데 껴안는 정신이 발현되는 장면들로 지속된다.
 
머큐쇼의 죽음 장면에서는 해학과 박력이 넘쳐난다. 이 장면에서 특히 웃음과 고통이 극렬히 공존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사건으로 희극과 비극이, 무언가를 믿을 수 있던 힘과 무언가를 믿을 수 없는 힘이 뜨겁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이 지점에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랑과 고통, 화해와 대결의 이분법이 초월의 가능성에서 시작되어 다시 초월의 불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인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티볼트에게 칼 대신 허그를 주었던 로미오가 머큐쇼가 죽고 허그 대신 칼을 물리는데, 공연의 이 장면에서 탄생한 급박하면서도 어지러운 운동감은 셰익스피어의 초월적 기지를 넘어서는 짠 내 나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기쁨만을 믿으며 화해도 쉽게 꿈꾸던 로미오가 고통과 맞물린 사랑의 실체를 대면하며 기쁨 속에는 고통이, 가능성 속에는 불가능성이 한 데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그러면서 보다 한 차원 깊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죽음이 뒤따를 사랑을 그럼에도 감행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죽음 같은 이별을 하게 되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하려고 죽음을 모의한다. 그러나 모의된 죽음은 정말로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서 사랑하고 싶었으나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사랑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역시 새삼 깨닫는다. 이것은 모든 미숙한 첫 사랑의 극단화된 비극이자 죽음과 사랑의 선을 초월할 수 있는 첫 사랑의 극단화된 진실성이라는 사실도.

살아있고, 살아있고, 살아있다.
부러 무얼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발현해내는 일, 작품은 그것을 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고, 어느 것 하나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나요- 하고 외치는 숨소리.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억지 해석을 하거나 과장 찬미를 할 필요도 없이 공연의 생명 그 자체를 관객의 피부로 흡수하게 하는 힘.
거기에는 셰익스피어를 오롯이 오태석의 것으로 살아내게 한 힘이 있다.
해석도 재해석도 재창작도 아닌 살아내게 한 힘.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관절 마디마디에 묻힌 뜻이 오태석의 숨소리로 체감되고 그래서 이 작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태석의 것이 된 것, 그 이상이 있다. 원작도 오태석도 그 이상의 것도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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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오태석 연출, 명동예술극장
2017. 6. 7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오태석의 우리식 번역 ≪로미오와 줄리엣≫

임승태

전반부는 흡사 민속촌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잘 맞아떨어진다기 보다는 다양한 잔기술이 쉴새없이 전개되는 게 다소 부담스럽다. 일차적으로 나의 무지 때문이다. 다양한 전통 예술을 즐길 만큼의 지식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쫓아가기 바쁘다. 아마 나 같이 전통에 무지한 관객들이 많다는 걸 알기에 더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결말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적폐청산이다. 원작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오랜 두 원수 집안이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오태석은 그런 화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붉은 색 거대한 천이 미리 바닥에 미리 깔린 것이 이유가 있었다.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반전이었던 터라 허공을 가르는 칼놀림이 흡사 <킬빌>이나 <자토이치>에서 피가 튀고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 죽이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커튼 콜을 하는 호방함이란.

큰 틀에서 보면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반목과 복수가 두 인물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두 주인공이 이승에서 다시 만날 수 없게된 결정적 원인은 연극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배달사고 때문이다. 로렌스 수사의 원래 계획은 줄리엣이 자기가 만들어준 물약을 마시고 잠들어 있는 동안 로미오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린다는 것이었지만, 편지는 마침 발발한 전염병 때문에 로미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1592년에 창궐했던 흑사병은 94년까지 계속되었고, 런던 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사망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흑사병으로 인해 폐쇄되었던 극장이 재개장한 직후에 공연되었다.)

그런데 오태석이 페스트를 ‘메르스’로 바꿔 읽는 순간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페스트를 나와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장면을 오태석처럼 무대 위에서 보여주지 않고 무대 밖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한 것 역시 당시 관객들이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메르스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전염병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이름이지만,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지기에 적잖이  불편하다. 가장 서글픈 상황에서도 웃을 거리를 던져주는 오태석의 연출은 대체로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 장면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극장 하우스 매니저나 국립극단 관계자에게 묻고 싶다. 최근 어느 극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커튼콜에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이때 찍은 사진을 저마다의 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공연 홍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극장에선 ‘커튼콜에만’ 촬영을 허락했으나, 관객들은 ‘커튼콜부터’ 찍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어셔들도 이런 오해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커튼콜이  끝나자 마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사진 찍지 마시라고 크게 외친다. 방금 피바다를 이루며 다 허물어진 무대를 굳이 사진으로 남겨서 뭘 하겠느냐마는, 그걸 기어코 제지하고자 객석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비좁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어셔들의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이 극장의 방침인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게 그렇게 큰 소리와 빠른 동작으로 제지해야 할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호들갑인가?  만약 저작권 보호 때문이라면 커튼콜에선 왜 또 허용하는가? 최소한 극장 문을 나설 때까지는 관객이 공연에서 얻은 정서와 질문들을 정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셔의 임무가 아닐까? 국립극단은 자신들을 소개하는 글 말미에 “그 땀과 열정의 무대가 관객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진한 감동으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극장 환경을 조성해주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6월 2일 금요일

답을 찾아 떠난 사람의 이야기, ≪생각은 자유≫


 박종주

1년. 그가 한국을 떠나 있었던 시간이다. “질문만 던지는 연극을 만드는 데에 질린” 그는 무언가 답을 찾기를 기대하며 독일행을 택한다. 150편이 넘는 연극을 보고, 독일, 일본, 한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며 그는 그 1년을 보낸다. 무언가 답을 주는 연극을 그는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은 자유〉(김재엽 작, 연출)은 그 1년의 성과 ― 인터뷰, 사진, 영상, 연극 리플렛까지 ― 를 모아 만든 연극이다. 두산아트센터 인문극장 “갈등” 시리즈의 하나로 상연되고 있다.
어떤 연극인의 (특별한) 일상에 관한 연극이므로 〈생각은 자유〉는 자연스레 연극에 대한 연극이 된다. 연극의 도시 베를린에서 연극이 하고 있는 일들을 보여주고, 베를린의 연극인들이 가진 생각을 들려주고, 그것들을 보고 듣는 한국의 연극인이 하는 고민을 풀어 놓는 그런 연극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연극인 동시에, 작가가 본 여러 연극들, 그리고 그가 만든 여러 연극들에 대한 연극적 비평이다.
〈생각은 자유〉를 이끄는 것은 거의가 주인공의 방백이다. 그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일상을 읊는다. 그러고 나면 그 구체적인 상황이 배우들의 연기로 재현된다. 그렇다 보니 무대 전환이 빠르고 배우들이 일인다역을 맡는 일도 많다. 때로는 관객 일부를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다소간 산만한 가운데, 적지 않은 이야기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

시작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세월호다. 그가 베를린으로 떠난 2015년의 사회적 화두였고 따라서 연극적 화두였던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며 이 연극은 연극의 사회적 소명을,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세월호만은 아니다. 전작의 소재였던 용산 참사나 민중총궐기를 주최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수감 소식 (마침 5월의 마지막날 그의 형이 확정되었다. 징역 3년, 벌금 50만원.) 등 몇 가지 사회적 이슈들이 언급된다.
공공극장에서의 작품 검열이 있는 나라에서 연극을 해 온, 용산 참사를 “그저 소재로 가져다” 연극을 만들었던 그에게 베를린의 연극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공극장 예술감독이 정부에 대한 항의시위를 기획하는 모습도, 이주니 제 3세대니 하는 사회적 이슈들이 극장에서 직접, 그것도 당사자들에 의해 다루어지는 모습도 말이다. 〈생각은 자유〉는 그런 모습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에 1차적인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했다. 한국의 관객들에게, 정확히는 ‘연극인’인 관객들에게 말이다. (전혀 우습지 않은 장면들에서 웃었던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 배우나 언급되는 연출가를 알고 있는 연극인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해외의 연극을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혹은 한국의 연극 이상의 것을 상상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새로웠을지 모르겠다. 무대에서 반복되는 대사 중에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밖에 있으니 보인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그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되물음이 필요해 보인다. 물론 그 관심을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여행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물리적인 ‘밖에 있음’을 요구하는 어떤 것은 아닐 터이다.
그의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것을 “이주Migration”라고 표현한다. 돌아갈 곳과 돌아갈 날을 정해 둔 이에게 어울리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이주민”의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시각에서부터 그는 “세계시민”의 시각을 또한 배운다. 그러나 나는 의심한다. 그의 시각이란,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관객의 시각이었던 것은 아닐까. 안내서 한 권을 들고 극장을 찾아 골목골목을 돌아 다니는, 적은 노력으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남이 찾은 답을 얻어 가기 위해 극장을 찾은 그런 관객 말이다.

극장과 광장

『연극과 정치』였던가, 그가 읽은 책은 그에게 고대 그리스 시민들에게 극장에 가는 일은 의무였다고, 이행하지 않으면 벌금을 무는 그런 의무였다고 알려 준다. 극장이란 곧 국가의 대소사를 논하는 광장이요 토론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극장 정신이 오늘날 베를린에 살아 있음을 본다. 사회적 이슈들을 토론하는 곳으로서의 극장, 낯 모르는 이들이 말을 나누는 곳으로서의 극장을 그는 그곳에서 체험하고 돌아 왔다.
귀국을 앞두고 짐을 싸는 그에게 아내는 묻는다. 새로운 연극이 무대에 올라야 할 곳이 극장일지 광장일지를 말이다. 그의 답은 단순하다. 극장을 광장으로, 광장을 극장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연극이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라면,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그가 출국 전에 품었던 ‘답을 주는 연극’에 대한 꿈을 접지 않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소위 선진국의 사례를 알리는 이 연극은, 관객을 무대에 올리고서도 그들에게 자리를 채우는 것 이상의 역할을, 그 이외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껏 제도화된 극장 안에서 이 연극이 만드는 공간은 광장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교실에 가깝다. 아는 (것으로 전제된) 사람이 모르는 (것으로 전제된) 사람을 상대로 혼자서 내내 이야기하는 그런 교실 말이다.
글쎄, 나는 그의 전작들을 보지 못했고 그가 얼마나 달라져서 돌아온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 확인한 점이 있다면 한 장면 정도를 빼고는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내내 엄마의 역할이었다는 점 정도다. 그 1년간 그가 연극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가 과연 충분히 경험하고 충분히 고민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연극만 따로 떼어 고민하는 것으로는 ― 연극과 이어질 삶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 충분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종류의 광장을 열 준비가 되어 돌아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연극이 그러하듯, 광장은 연극이 끝난 이후에 열릴 것이다. 극장 바깥에서 대화를 나누는 관객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 광장을, 책 한 권 (그가 읽은 『연극과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 이상을 하지 않은 채 끝나 버리는 (그 정보들을 물론 연극은 일종의 현장성을 갖고서 전하지만) 이 연극이 연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한 광장을 여는 것은 연극인들이 아니라 늘 관객들이었다. (그는 예술가들이 최초로 정부를 상대로 싸웠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

한국 바깥에서 살아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극장 바깥에 있으니 보이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극장으로서의 광장, 광장으로서의 극장을 운운하지 않아도 이미 곳곳에 광장이 있다는 사실이라든가 하는 점들 말이다. (어느 정도는 겸손이겠지만) 그 스스로 그저 소재로 삼았을 뿐이라고 고백하는 용산 참사를 갖고서 거리에서 싸우고 토론하고 노래하고 시를 읊었던 사람들이 있었듯 말이다.
극장이 광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교실의 꼴을 벗어나는 일일 터이다. 작가나 연출이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공간이 아니라면, 극장에서 ‘가르침’은 일방향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혹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극장에 모인다고 생각하고서 만들 때에야 연극이 광장을 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을 던지는 연극을 만들고자 하든, 답을 주는 연극을 만들고자 하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관객들이 해 본 적 없을 질문, 관객들이 갖지 못한 답이라는 믿음은 극장을 지루한 교실로 만들 뿐이다. 광장이라는 수사가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평등한 이들이 자신의 관점을 내세우고 서로를 설득하는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극장이 광장이 되기 위해 우선 필요한 점은 그러한 평등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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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작/연출
〈생각은 자유〉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2017.05.23.-06.17.
5월 30일 관람.


2017년 6월 1일 목요일

리어왕, 누가 왕을 가장 사랑하는가

임승태

1.
등장인물과 플롯에서 몇 가지 주요한 변경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너릴과 리건의 남편인 올버니와 콘월 공작, 그리고 글로스터의 장남 에드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에드거가 배제됨으로써 몇 가지 사건의 변화가 불가피했다. 두 눈을 잃은 글로스터는 도버 해협에서 리어와 만나고, 곧 절벽에 몸을 던진다. 에드거가 눈먼 아버지의 자살을 막고자 거짓말하는 장면을 해석적 입장에 따라 부차적으로 취급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충성스런 신하인 글로스터가 왕의 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광대가 더는 익살을 부리지 않고 진지해지는 것 역시 아마도 등장인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으나 광대 본연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측면에서 이질적이다. 마지막 장면은 에드거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 에드먼드가 전투에서 패배한 코딜리어를 곧장 칼로 찔러 죽이고 이어 켄트는 활로 에드먼드, 거너릴을 차례로 쏴 죽인다.
한편 다른 배역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에드먼드가 더 많은 역할을 흡수했다. 서두에서 에드먼드는 원작의 버건디 공작을 대신하여 코딜리어의 구혼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바로 직전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버지 글로스터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 터라, 그가 리어가 가장 사랑했던 딸인 코딜리어의 구혼자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인다.

2.
이러한 시도가 더 많아져 마침내 국악에서도 바그너와 같은 거대한 종합예술작품이 등장하는 날을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각의 요소를 안배하고 완급을 조절할 연출가와 프로덕션에 맞춤하게 드라마를 다듬어줄 드라마터그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하겠다. 지금은 프로덕션을 받치고 있는 각 바퀴가 제각기 움직이는 바람에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한다고 말하긴 어려운 형편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국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축약되고 각색된 <리어>는 원작의 응집력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연희를 연결해주지도 못했다. 음악이나 소리는 전문적이었으나 드라마와 동떨어져 있거나, 없으면 더 좋았을 법할 때에도 배경으로 깔린다. 풍물을 통해 전투 장면을 표현한다는 취지는 좋았고 연희단의 공연도 흥겨웠다. 하지만 풍물 공연이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의미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직 스크린에 비친 영상과 전쟁 효과음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는데, 때로는 풍물 소리와 뒤섞여 없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임현빈이 맡은 소리는 애초 이러한 유형의 공연에 대해 내가 기대했던 바이지만, 그가 등장하는 소수의 대목에서만 셰익스피어와 국악이 직접 만날 뿐이라는 게 아쉬웠다. 나머지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TV 사극을 생각나게 했고, 대사나 몸짓에서 국악과 어울리는 측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종일관 사용되는 영상은 비단 이 공연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셰익스피어를 공연할 경우 재고해야 할 일이다. 영화가 아닌 이상 셰익스피어를 사실적으로 접근해서는 본전을 찾기 어렵다. 빈 무대나 자연광, 변장 등 한국 연극 전통과 맥이 닿아 있는 셰익스피어 본연의 요소들을 이러한 성격의 공연에서 버려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2017년 5월 31일 이화여대 삼성홀
주최: 문화가있는날, 문화체육관광부
작곡 및 음악감독: 박경훈, 이아람
작창 및 소리광대: 임현빈
연주: 박경훈, 이아람, 성시영, 이정석, 전계열, 최태영
안무: 박준희, 소광웅
무용: 소광웅, 이세미, 유지희, 김병훈, 김우정, 조연정
풍물: 평택연희단
배우: 손성호, 남성진, 신현종, 윤상호, 이영숙, 김지은, 원종철, 윤도훈, 김진영, 김성진

2017년 5월 25일 목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의 찝찝함

임승태

나는 이 연극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켄터키주 맥도날드 장난전화 사건”은 이미 나무위키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2012년 “Compliance”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된 꽤나 유명한 사건이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적어도 나 같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사건을 단순히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초연이 2014년이었다는 점이나 연출의 변에 언급된 내용을 볼 때, 이 연극을 세월호, 특히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가만히 있으라”가 남긴 상처는 우리 사회에 여전하기에 이 말이 연극이나 영화에서 변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제 검열관이 사라졌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에 대한 반응으로서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어딘가 고약한 데가 있다. 연출가나 배우들은 이 작품을 통해 가만히 있지 않음, 혹은 말 잘 듣지 않음을 실천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관객은 가만히 잘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각하지 말라는 담탱이의 조회 시간 잔소리는 매번 제 시간에 온 학생들이 듣게 마련이다. 과거 어느 공연에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는 순간 한 관객이 일어나 오셀로를 권총으로 쏴버렸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일반적인 관객은 그 사람보다 정의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무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재미나 감동과 같은 반대 급부를 얻기 위한 유보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끝까지 봐도 도무지 즐겁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말 잘 듣는 게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만히 있었던 학생들, 시키는 대로 옷을 벗었던 루이스 오그본(Louise Ogborn) 혹은 차예슬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일차적 책임은 선장과 선원, 해경, 대통령에게 있고, 형사를 사칭했던 데이비드 스튜어트(David Stuart) 혹은 최대한과 같이 시킨, 혹은 마땅히 시켜야 할 일도 시키지 않은, 사람에게 있다. 커튼 콜 당시 내 뒤의 한 관객은 웃음 지으며 퇴장하는 최대한을 향해 “나쁜 새끼”라고 외쳤다. 비록 이 말이 내가 관람한 저녁에 나온 관객 반응의 최대치였지만, 점잖은 관객들도 속으로는 그 이상을 외쳤을 것이다.

얼마 전 지인이 보이스 피싱에 당해 삼천만원을 잃었다. 옆에서 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보이스 피싱이 퍽치기 강도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나면 핸드폰을 보조 배터리에 연결해서 여섯 시간씩 범죄자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을 잘 들어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리에게 당하는 양의 약함을 문제삼는 것과 흡사하다. 비극이 주인공의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아고의 악함을 문제삼지 않고, 오셀로의 귀 얇음과 데스데모나의 지나친 친절을 문제삼는다. 이아고나 최대한은 수퍼 빌런이지, 간단히 헤치울 수 있는 조무라기 악당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오그본/차예슬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야 말로 이 사건/연극에서 주목할 문제이다.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이들이야 말로 관객이 동일시하게 되는 비극적 인물들이다. 박종주의 표현대로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하는 이 연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볼 가치가 있다면, 그건 스튜어트/최대한의 사악함이나 오그본/차예슬의 불쌍함 때문도 아니고, 바로 그 중간에서 이 끔찍한 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지극한 평범성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은 하루의 삶 속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것보다 내게 손해가 없기를 바라며, 내게 이익이 된다면 정의를 잠시 외면할 준비도 되어 있다. 이 연극을 보고 있기 불편한 것은 바로 나의 비열함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관객은 이 연극을 끝까지 참고 봄으로써 카타르시스 없는 불편함을 얻게 된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이러한 사건에 연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공포와 (부)매니저 도나 서머스(Donna Summers)/김미옥과 그의 배우자 월터 닉스(Walter Nix Jr.)/강성기를 비난하면서도 일말의 연민을 거둘 수 없는 어정쩡함이 주는 불편함은 배우들이 단체로 펠라치오 시늉을 하는 것을 강제로 훔쳐봐야 하는 순간 정점에 이른다. 이 사건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85분에서 90분간 극장에 앉아서 그것을 접하는 것 만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전혀 즐겁지 않은 사건에 무언의 배우로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의 사도/마조키즘 성향을 활성화 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한국의 시공간으로 옮겨 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김수정의 저자권(authorship)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Compliance 와의 관계를 조금 더 분명히, 선제적으로 밝히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은 Compliance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자가 후자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가? 몇몇 대사를 비롯하여 몇가지 설정—Compliance의 금발 머리, 치킨 샌드위치 가게와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노란 머리, 삼계탕 집—상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에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2017년 5월 24일 수요일

〈말 잘 듣는 사람들〉과 말 잘 듣는 관객들


 박종주

90분간, 말 잘 듣는 사람들

직원 열 명이 채 안 되는 어느 식당에 의문의 전화가 걸려 온다. 스스로를 서울지방경찰청 강남 경찰서 강력한 형사라고 밝힌 남자. 그는 가게에서 지갑을 도난 당했다는 신고가 들어 왔다며 매니저에게 협조를 구한다. 그가 원하는 협조란 놀랍게도 포천에서 서울로 돌아 오고 있는 자신을 대신해 수사를 진행해 달라는 것, 정확히는 용의자에 대한 심문을 대신해 달라는 것이다.
용의자는 2주 전부터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상고 출신의 노란 머리 — 피할 수 없는 용의자의 표식이다 — 여성이다. 잠깐 저어하던 매니저는 형사의 설득에 이 이에 대한 심문과 조사를 실시한다. 사장에게 책을 잡히고 싶지 않은 매니저의 욕망과 자기 사건을 다른 형사에게 넘기고 싶지 않은 형사의 욕망이 교차하며 사건의 발단이 된다.
심문은 평범하게 소지품 검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훔친 지갑도 그 속의 돈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형사의 요구는 몸 수색으로, 이어서 알몸 수색으로, 조금씩 과감해 진다. 삼계탕을 파는 이 식당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복날, 손님들도 다른 직원들도 모르는 가운데, 직원 대기실에서는 이런 사건이 펼쳐진다.
형사는 종종 언성을 높인다. 매니저가, 혹은 매니저를 대신해 심문을 이어가는 다른 직원이 종종 협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성이 높아지기만 하면 협조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 매니저의 남편이 심문을 이어가면서 그 수위는 극에 다다른다. 바닥을 개처럼 기게 하기, 질 속을 검사하기, 구강 성교 강요하기 — 어느새 심문의 목표는 용의자에게 수치심을 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매니저의 남편은 시킨 것 이상을 해 내고, 형사는 기분이 좋아진다.
90분간 작은 방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을 통해 〈말 잘 듣는 사람들〉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 권력의 요구에 부응해 불의마저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가를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어떤 조건들이 맞아떨어졌을 때 사람이 어디까지 추락하는지를 — 얼마나 말을 잘 듣게 되고 마는지를 가늠하는 사고 실험 말이다.

게으른 실험

84분. 이것은 내가 연극을 관람한 시간이다. 그러니까 짧으면 2, 3분, 길면 8, 9분쯤 되었을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니,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결말은 대강 이렇다. 저녁 시간이 되어 손님이 빠져 나가고 조금 한가해 진 주방장이 이 밀실에서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자조치종을 들은 그는 대노한다. 수사는 형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 전화 너머 목소리의 주인이 형사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하필 형사의 명령을 조금이나마 거부했던 한 사람이, 그리고 형사를 믿지 않은 또 한 사람이, 둘 다 남성이었던 것은 우연이라고 해 두자.)
그제야 상황을 의심하게 된, 그러나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화를 걸어 그의 정체를 확인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의문의 주인공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이전까지는 매직 미러 너머로 희미하게 상반신만을 내어 보이고 있던 그는) 와이셔츠에 팬티바람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극단적으로 통제된 변수들 — 바쁜 하루, 폐쇄된 방, 위압적인 공권력, 임금노동자라는 위치 등의 ― 속에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내어 보일 수 있는지를, 평소에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 감추어져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2004년 미국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기도 하다.
얼마만큼이 실제 사건을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브라와 팬티만 입은 채 방치되는 용의자, 팬티 속에 손을 넣어 확인하는 부매니저, 속옷마저 벗기고 질 속을 확인하는 매니저의 남편, 수 시간째 갇혀 있다 결국 오줌을 싸고 마는 용의자, 이 모든 것이 이미 현실에서 실험된 바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17년 어느 낮에 극장에서 감행하기에, 이는 너무나도 게으른 실험이다. 원하는 결과가 이미 나온 바 있는 어느 실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변수들이 너무도 통제되어 있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지는 실험, 그러나 자극적인 어느 실험의 재현일 뿐이기에 말이다.
가벽을 세우고 온갖 상자들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모자라 거울에 “증” 마크까지 새겨 놓은, 식당의 직원 대기실을 성실하게 재현한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연극적 실험은 없을 것임을, 오줌을 싸는 장면에서는 무대에 정말로 물이 흐르게 하는 것 이외의 연출을 알지 못하는 연극임을 알리는 복선 말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사건을 불필요하게 자극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오히려 질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말 잘 듣는 사람들’의 문제를 생각하며 극장에 모인 이들에게 당신도 말 잘 듣는 사람은 아닌가를 물을 절호의 기회를 말이다. 끔찍한 장면에서 탄식을 내뱉던 관객들은 우스운 장면에서 금세 폭소를 터뜨린다.

말 잘 듣는 관객들

이 연극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어느 관객의 리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보다는 이 연극이 덜 게으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보지 않은 6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라고도 믿기지 않는다.
내가 극장에 앉아 있었던 84분 내내 여기저기서 괴로움의 탄식이 들렸지만, 관객들이 줄이어 자리를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두 명쯤 조용히 나갔을는지는 모르지만.) 84분 째에 내가 자리를 뜨자 그 뒤로 두어 명이 따라 나왔다. 나머지는 아마도 끝까지 연극을 관람했을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웃으며 커튼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관객됨’에 대해 생각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이 보기 싫어도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은 돈을 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끝까지 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돈을 냈기 때문, 이라면 슬픈 일이다. 자신의 시간보다, 자신의 정신보다, 돈을 더 아까워 해야 한다는 상황이 말이다. 혹은 관객으로서의 권리가 소비자로서의 권리로 축소되는 상황이 말이다. 다른 관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대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기껏 관객‘들’이 모이는 극장이란 장소에서, 관객으로서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라면 말이다.
말 걸어 오는 사람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미 탓에 나도 84분을 버티고야 말았지만,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끝까지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연극을 준비하며 이 사건을 계속해서 생각했을 제작진과 출연진에게서, 우리는 어떤 성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자신들이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어도 좋았던 것일까?
‘연극됨’에 대해 생각한다. 연극과 관객이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뿐이다. 텅 빈 도화지 같은 관객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는 연극과 연극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할 일은 얌전히 앉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 관객이 만날 때 말이다.

〈말 잘 듣는 사람들〉
김수정 연출, 극단 신세계 제작.
2017.05.18-05.28. 알과핵 소극장.
5월 20일 관람.


2017년 5월 17일 수요일

하극상 없는 상황실, 반전 없는 인생 ― 새 세계를 위하여


박종주

1.
등장인물은 셋이다. 대장과 부관과 연락병. 아니, 인물이라고 하기는 곤란할지도 모르겠다. 뇌의 각 기능을 의인화한 것이니 말이다. 대장은 이성적 판단을, 부관은 기억을, 연락병은 ‘마음부’ 및 ‘신체부’와의 연락을 담당한다. 이들은 무대엔 등장하지 않는 ‘나’의 뇌 속에서 작동하는 기능들이다. 그렇다. 무대는 바로 ‘나’의 뇌 속이다. 이들은 결국 ‘나’들이다. 서로 반목하는, ‘나’들 말이다.
대장은 기억들을 자료 삼아, 그러니까 부관과의 논의를 통해 ‘나’의 할 일을 결정하고 연락병이 이를 마음과 신체에 전달한다. 대장은 요즘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나’를  취업 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 영단어를 외울 용량이 부족하므로 ― 좋은 기억을 지우고 때로는 ― 지난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지금은 사치일 뿐이므로 ― 뛰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대장이 잠깐 쉬고 있는 사이, 그러니까 지친 이성의 끈을 잠시 내려 놓은 사이 ‘나’가 자위를 하는 장면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옛 연인을 생각하며 욕망을 해소하는 ‘나’의 모습에 대장은 분노한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므로. 대장의 휴식은 이것으로 끝이다. ‘나’를 이성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대장은 이제 바삐 움직이며 명령을 내린다. 우리가 이 연극을 보는 것은 그 명령들이 종종 거부 당하기 때문이다. 이성이 통제에 성공했더라면 ‘나'에게는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등장인물은 ‘나’ 하나이므로 이렇다 할 갈등은 없다. 대장과 부관이 이따금 다투지만,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뇌부의 통제를 받는 동안 ‘나’는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때로 손발이 절로 떨리기도 하고 때로 맘이 절로 울적해지기도 한다.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날 때가 있는 것이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두뇌부와 마음부 사이에 있다. 두뇌부가 어떻게든 미루고자 하는 갈등이 말이다.
이런 사정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나’가 평면적으로 묘사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작금의 청년들이 모든 내적 갈등을 억압하고 보류하며 ‘평평한 사람’이 되어 생존 투쟁에만 집중해야 함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주기엔 ‘나’의 삶을 표현하는 키워드들 ― 무급 인턴에서부터 ‘혼밥’까지 ― 도 다소 진부하다. 스토리를 생각하자면, ‘요즘 청년들 삶이 참 팍팍하다더라’ 하는 수준의 무심한 공감 이상을 끌어내기 어렵다.

2.
대신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연극의 요소들이다. 〈브레인 컨트롤〉은 관객들을 무대 곁으로 불러들인다. 흰 선으로 표시된 무대의 삼 면을 스물 몇 개의 의자가 둘러 싼다. 극장에 일찍 온 관객들은 객석 대신 이 의자에 앉아 보다 가까이서 무대를 지켜본다. 배우와의 소통이라든가 하는 참여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가까이서 지켜볼 뿐이다.
의자는 흰 선 바깥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객이 있는 곳은 여전히 무대 밖인 셈이다. 관객들은 왜 이리로 불려 온 것일까? ‘나’의 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마도 관객의 뇌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을, 일들을 보다 가까이서 관찰하라는 연출의 배려 정도로 생각하자. 어쩌면 정말로 좋은 자리는 그 의자들 뒤에 있는 원래의 객석일지도 모른다. ‘나’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는 스물 몇 명의 ‘나’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자리 말이다.
무대 뒤의 스크린에는 이따금 관객들을 위한 정보들이 표시된다. 두뇌부의 요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안내가 나오거나 ‘나’가 보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식이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연극”이라는 단어다. 스크린은 연극을 “가상 시뮬레이션”의 동의어로 정의한다.
극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힘든 현실에 지친 ‘나’가 ― 정확히는 두뇌부의 통제를 벗어난 ‘나’의 마음이 ― 죽음을 향해 달려 갈 때 연락병은 묻는다. “이거 다 연극이죠?” 따라 붙는 대답은 “이건 실제상황이야!”이지만, 우리 관객들은 알고 있다. 이것이 연극임을 말이다.
이것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그리고 극의 정조대로 지친 죽음이 피해야 할 결말이라 할 때, 이것은 관객들이 그러한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사고실험일 것이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것인지, ‘나’처럼 살게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인지를, 혹은 그렇게 살지 않거나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3.
또한 몇 가지 균열들이, 운이 좋다면, 관객들을 사유의 확장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남성이다. 그리고 대장, 부관, 연락병은 아마도 여성이다. (지난 시즌까지는 남성 배우들이 연기했다.)  ‘청년’이 대개 ‘남성청년’과 동치되는 한국사회에서, 이 크로스젠더 캐스팅이 관객들에게 청년층 여성의 존재를 떠오르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70분 남짓의 짧고 급박한 공연에서 충분한 맥락을 갖고 설명되지는 않지만, 대장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하는 ‘어린 여성에 대한 혐오’라는 전략 또한 같이 생각되면 좋겠다.
두뇌부는 쉼없이 마음부를 다잡고 억누르지만, 그리고 그 끝에서 파국에 이르지만, 〈브레인 컨트롤〉은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두뇌부의 대장은, 후손을 낳아 번성하라는 ‘생의 목적’을 알면서도 DNA에 각인된 정보에 의지해 살아남기를 저어한다. 이 두 방향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다면 〈브레인 컨트롤〉이 모종의 문명을, 그러나 지금의 것과는 다른 어떤 문명을 요구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지만, 이 상황실에는, 자신의 직분을 벗어나려 드는 인물들이 있다. 대장에게 반말로 반대 의견을 말하는 부관, “외람되지만” 끊임 없이 무언가를 묻는 연락병. 이들은 끝내 대장을 이기지 못해 ‘나’의 파국을 막지 못한다. 마지막에는 대장과 합심해 ‘나’를 살리고자 한다. 그러나 〈브레인 컨트롤〉이 연극이라면, “가상 시뮬레이션”이라면 이들의 출연을 통해 무언가를 관객은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스스로에게 반기를 드는 법을 말이다.

4.
나는 돌이다.
더이상 떨지 않는다.
돌은 물속에 천천히 가라앉는다.
물에서 나는 영원토록 숨을 죽인다.

‘나’는 연극의 처음과 끝에 이런 시를 읊는다. 대장과 부관에 따르면, 인생의 시가 완성될 때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 이 시를 완성한 후 ‘나’는 죽음을 택한다.) 삶이 그 시를 위한 시어를 찾는 과정이라면, 무대 밖 ‘나’들의 삶에는 조금은 다른 시어들이 나올,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를.



〈브레인 컨트롤(Brain Control)〉
정진새 작/연출
극단 문 제작
2017.05.09 ~ 2017.05.14 CKL 스테이지
2017.05.14. 관람

2017년 5월 2일 화요일

세 시간, 나는 왜 그곳에 있었나

박종주

0.
티켓박스에서 표를 찾는데, 매표원이 물어 왔다. “무대에 앉아서 음식을 먹으면서 보실 수 있는 자리가 있는데, 그리로 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무대가 비어서야 곤란하므로, 네, 하고 답했다. 이쯤에서 나는 약간의 긴장을 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 옆에 앉는다는 것, 그것은 배우들이 말을 걸어오는 일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니 말이다.
시작 시각은 여덟 시였다. 그러나 일곱 시 사십 분이 되고 오십 분이 되도록 극장 입구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로비에서, 분장을 한 누군가가, 여기저기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문에 붙어서는 입김으로 이것저것을 그렸다. 그림을 다 그리면 문을 두드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극장 입구는 여덟 시가 되어서야 열렸다. 무대 위에 놓인 한 의자로 안내 받았다. 무대에는 디귿 자 모양으로 개인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뚫린 한 변에는 의자만이 놓여 있었고 그 의자에 배우들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무대에는 미음 자로 사람들이 가득 앉았다. 배우들이 앉은 맞은편 변 뒤로는, 또 다른 배우 하나가 벽을 보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연극 〈2017 애국가〉(즉각반응 제작)는 이렇게 시작한다. 마이클 마르마리노스(Michael Marmarinos)의 구상을 토대로 스물한 명의 배우와 스태프가 공동창작한 작품이다. “함께함에 대한 하나의 공식”이라는 슬로건이 붙은 연극이다.

1.
이런저런 안내방송이 나오고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런웨이 모양의 조명이 들어온다. 배우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따라 걷고 그 끝에서 각자의 포즈를 취한다. 그 다음에는 무대 외곽을 따라 돈다. 차례로 일어선 배우들이 모두 자리를 떠난 즈음이면 대사가 시작된다. 한쪽에서 연도를 외친다. 예컨대 1997년, 한국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해다. 혹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해.
시작은 2017년이었던 것 같다. 배우들은 박근혜 파면을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주문을 외친다. 해가 바뀔 때마다 굵직한 사건들, 그러니까 성수대교 붕괴라든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같은 것들이 호명된다. 중간중간 인물들 각각의 개인적인 사건들이 함께 이야기된다. 세월호에 대해서는 외치는 대신 입을 막았다 ― 이것이 세월호 사건의 재현불가능성에 관한 것인지 검열에 관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역사는 일어난다, 여기저기서”라고 배우들은 외친다. 그들이 외치는 ‘역사’는 모두 대한민국의 사건들이다. 개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사건들의 배경으로서 국가는 호명된다. 한참을 외친 후 배우들은 의자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먼저 앉아 있던 관객들의 사이사이다. 빠짐 없이 사람이 앉은, 디귿 자로 배열된 테이블과 의자들은 이제 토론장이 된다.
테이블들 위에는 물컵과 와인잔, 그리고 빈 접시가 놓여 있다. 잠시 후면 와인잔에 와인이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또 잠시 후면 접시 위에 빵이며 과일이며가 놓일 것이다. 모두 같은 구성의 테이블들 사이에 하나 눈에 띄는 테이블이 있다. 마이크가 놓인 테이블이다. 이 자리에 앉는 배우는 이 토론장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

2.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질문은 이런 식이다. “당신에게 국가國家란 무엇입니까?” 배우들은, 혹은 인물들은, 제각기의 생각을 말한다. “질문하는 것도 하나의 권력이네요”, 대답을 거부하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에 대한 대답들이 이어진다. 국가란 삶의 배경, 권력의 장치, 어떤 장벽 ― 모두에게 다른 의미다.
그러고보니 연극 제목에 등장하는 ‘애국가’도 국가國歌다. “당신은 애국가를 적절하게 부를 수 있습니까?” 적절하다는 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또 토론한다. 누군가는 한 소절을 몇 번이고 불러보기도 한다. 국가가 어떤 분위기여야 하는지, 새로운 국가가 필요한 시점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도시에 대한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질문들은 여러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토론은 때로 열기를 띠고 때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소재가 변하고 분위기가 변하는 가운데 변함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무대 위의 자리로 안내 받은 관객들이다. 약간의 긴장감과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토론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나는 왜 여기 앉아 있을까, 내게 질문하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3.
십오 분의 인터미션이 끝나면 제 2막이 시작된다. 1막이 진행되는 동안 물컵이며 와인잔이며가 바닥을 드러낸 것, 그리고 테이블 몇 개가 치워진 것을 빼면 무대에는 큰 변화가 없다. 배우들은 테이블 위의 접시들에 먹을 것을 서빙한다. 그 다음에 배우들은 제자리에 앉기도 하고 자리 앞에 눕기도 한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온다. 그는 다른 이들을 차례로 불러내 역할을 맡긴다. 누군가는 1인 시위를 하고 누군가는 구걸을 한다. “공이 굴러가면” 이들은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박근혜의 얼굴이 그려진 공이다. 일곱 살 아이가 도로변에서 갖고 놀던 공이다. “공이 굴러간다.” 사람들이 자신의 배역을 펼칠 틈도 없이 장면이 전환된다.
공이 차도로 굴러가고, 아이는 달리는 차 앞으로 나오려 한다. 예의 그 한 사람은 아이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실은 아직인, 결혼식을 떠올린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된다. 전애인에서부터 시부모까지, 사람들은 하객들이 된다.
제 1막이 진지한 토론이었다면 제 2막은 어째선지 가벼운 희극 같은 분위기다. 결혼식 이후에도 제 1막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 각각이 자신에 대해, 자신의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긴 하지만 말이다. 결혼식, 근대식으로 말하자면 최소 단위의 공동체인 가정의 구성을 알리는 행사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몇 가지 억지스런 유머를 짜내기 위한 도구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는 듯해 보였다.

4.
〈2017 애국가〉는 국가란 무엇인지, 공동체란 무엇인지, 개인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자폐 노총각”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어느 노숙인의 하지마비를 웃음을 위해 소비하기도 한다. 하나로 모아지지 않은 여러가지 대답들을 끊임 없이 내어 놓으며 〈2017 애국가〉는 이 소극장 속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듯 보인다.
제 2막을 이끌던 예의 그 한 사람은 연극의 마무리까지도 맡는다. 건배사다. 이야기하고 이야기했지만 국가가 무엇인지 공동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거창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그는 되묻는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한 가지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래서 인물들은 무수한 이들에게 헌사를 바친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건배에서부터 옆집의 아무개를 위한 건배까지가 이어진다. 각자의 자리에 살아 있는, 죽음을 향해 감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그렇게 함께 하자는 메시지쯤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함께함에 대한 하나의 공식은 없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 있을 뿐이다. 미지수에 상수를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그런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공동체란 것은 말이다. 조사도 술어도 없이 단속적으로 이어진 고유명사들, 그렇게 제시된 완성되지 않은 문장, 그것이 이들이 알아낸 공동체인 모양이다.

5.
다른 배우 한 사람이 무대 중앙으로 나오면서 연극은 끝을 향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는 외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웃통을 벗고,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는다. “나는 더, 더, 더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여기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연극의 마지막은 연극이라는 장소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거나 혹은 선언인 듯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연극밖에 없어 연극으로 소통하고자 한다는 겸허한 제스쳐였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오히려 헛된 자기 도취로 보였다. 세 시간, 나를 무대에 앉혀 놓은 그 시간동안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공동체에 대해 묻고자 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도 찾지 못했다. 사람은 다 다른 거야, 술자리에서 흔히 들리는 말 이상을 그들은 하지 못했다. 관객의 위치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했지만 그들은 관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관객에게 말을 거는 법을 몰랐다. (관객들과 함께 춤추는 대목이 한 번 있긴 했지만.)
실패한 실험이길 바란다. 실패한 실험은 다음 번의 실험을 요구한다. 다음 번의 실험이 또한 있기를 바란다. 토론장의 모습을 갖춘 무대를, 토론장의 내용을 갖춘 곳으로 또 한 번 변화시킬 다음이. 무대에 불려 온 관객들이 세 시간 내내 그저 관객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또 한 번 변화시킬 다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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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애국가〉
즉각반응 제작, 마이클 마르마리노스 구상, 공동창작.
2017.4.27.-5.7.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4월 27일 관람


2017년 3월 31일 금요일

두 가지 복수, 다른 모습

산책

  얼마 전 (또) 한 대학의 남학생들이 단체 채팅방에서 성차별과 성희롱에 해당하는 대화들을 주고받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중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지 왜 대학에 왔냐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특히 이 내용이 기억에 남은 것은 나 역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무렵, 이제는 대기업의 대리인가 차장이 된 옛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여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어려운데, 입시 경쟁만 더 치열하게 하면서 꼭 대학을 가야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따져 묻고 기 막혀 했으나, 그 친구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전히 여학생들은 집에서 국이나 끓이라니, 이렇게 빠르게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부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유난히 민감한 젠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이런 저런 일들에 다 불편해 하는 프로불편러(혹은 불편충)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이런 불평등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연극계에서도.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런 불편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2월과 3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연출)과 <메디아>(로버트 알폴디 연출)를 연이어 관극했다. <조씨고아>는 원나라 이야기이고, <메디아>는 그리스 신화이니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작품이지만 두 작품은 모두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각기 다른 복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복수하는 사람의 성별과 관계된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민감한 것일까?

  먼저 <조씨고아> 이야기를 해보자. 도안고의 계략 때문에 조순을 비롯하여 조씨 집안 일족이 몰살당한다. 이때 조삭(조순의 아들)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도안고는 출산 후 이 아이마저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삭의 아내를 감금했으나, 그녀는 복수의 씨앗이 될 아이만을 살리기 위해 시골 의원 정영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영은 평소 조순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 이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이를 숨겨 달아난다. 이때 정영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아이를 살리는 것이 분명 후일 복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정영이 아기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아의 어머니가 자결하고,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 장군도 정영과 아기를 도망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도안고가 고아를 추적하고, 그를 찾지 못하면 또래인 모든 아기들을 죽이겠다고 하자, 정영은 고아 대신 자신의 아들을 내어 놓는다. 공손저구 역시 목숨을 걸고 이 계획에 가담한다.

  아기를 빼앗긴 정영 부인의 애 닳는 울음이 아직도 생각난다. 왜 자기 아들이 죽어야 하냐고 울부짖는 어미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사지로 데려가는 정영의 모습도 떠오른다. 죽음을 선택한 공주와 장군, 공손저구,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이고 20년간 고아를 키운 정영의 모습은 분명 숭고한 희생처럼 그려졌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아이를 살려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악인에게 걸맞는 최후를  위한 고귀한 복수. 조씨고아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그 복수의 씨앗으로 자라게 된 것이다. 물론 도안고 집안을 멸족함으로써 복수는 성공한다. 20년간 고아를 키우며 복수의 날을 기다려온 정영의 얼굴에서 모든 일을 이루었다는 안도와 허무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어쨌든, <조씨고아>에서 복수는 고귀한 것, 권선징악의 아름다운 결말을 완성하는 것이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더 익숙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여자, 그녀가 바로 메디아다. <메디아>의 줄거리는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메디아의 복수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메디아가 자식들을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설들이 많은 것도 이 이야기를 치정극,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타국, 코린토스로 왔으나 남편은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바람이 나고, 곧 결혼을 한단다. 메디아 자신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고, 아이들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이 순간, 메디아는 공주와 왕을 죽이고,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이아손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다소 길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의 장면을 아래에 인용해보자.


메데이아 나는 내 자식들을 죽일 거예요.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이아손의 집을 송두리째 허물 것이며,
가장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나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죽인 죄를 피해 이 나라를 떠날 거예요.
원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친구들이여!
그래야만 해요. 내가 살아서 뭘 해요?
내게는 조국도 집도 불행의 대피처도 없어요.
내가 한 헬라스 남자의 감언이설을 믿고
선조들의 집을 떠났을 때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던 거예요.
그러나 그 자도 이제 신의 도움으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그 자는 앞으로 내가 낳아 준 자식들이 살아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고, 새 신부도 내 독에 의하여
고약한 여인으로서 고약한 죽음을 당해야 하니
그 자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할 테니까 말예요.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역, 791행 ~ 806행)

 자식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메디아의 여러 감정이나 이유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둘지는 연출의 마음이지만, 알폴디는 메디아를 ‘이기적인 여자’로 그러니 (과장일지 모르겠지만) ‘죽어 마땅한 여자’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여자의 선택”이라는 부제를 달고서는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다니. 메디아는 남편을, 이아손은 새 신부를 잃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자식을 잃었다. 그런데 메디아만이 죽음으로 처벌당한다. 자식을 죽인 어머니이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하는가? 결혼을 앞둔 이아손이 자식들을 본체만체 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없는가? 메디아가 어머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성에 대한 환상이거나, 혹은 굴레일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단지 달라진 결말에서만 느껴진 것은 아니다. <메디아>의 코러스들은 모두 여자배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메디아가 등장하기 전, 첫 장면에서 그녀들이 보여준 모습은 메디아에 대한 질투, 그리고 험담이었다. 코러스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끝까지 지속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것일까.) 이혜영 배우가 분한 메디아의 강렬함이 연일 찬사를 받고 있는데, 무대 위의 메디아는 그저 “나쁜 여자” 그래서 “벌 받은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고 후회할지,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지는 모를 일이다. 알폴디는 메디아에게 속죄할 기회도, 악녀의 이미지도 빼앗아 버렸다. 메디아는 이기적인 여자, 그 이상도 아니기에 자식까지 죽이는 선택을 하고서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고 속죄할리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면서도 마차타고 유유히 떠나는 메디아가 두려웠던 것일까?

  복수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옳고, 메디아의 복수는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정영도 메디아처럼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영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나?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을 상상하고, 헤아려야만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택한 태도는 매우 다르다. 정영과 조씨고아의 복수는 아름답게 그려졌다. 복수를 완성한 그들은 선을 이루었고, 이제 자신을 위해 목숨 내어 준 사람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정영은 죽는 날까지 아들과 아내에게 속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디아의 복수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매력적이지만, 신경질적이고, 악한 여자. 자신이 가질 수 없기에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자일 뿐이었다. 결국 메디아는 죽음으로 처벌당해야 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곱씹어 볼 기회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홀로 남은 이아손은 이제 어떻게 될까? 이런 끔찍한 결말을 맺게 된 것에 대해 후회할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게 될까? 그렇다면 알폴디는 복수의 (그나마) 고귀한 면을 이아손에게만 준 것이다. 알폴디의 결말은 어쩌면 새로워보이지만, 악녀 메디아를 처벌하는 오래된 남성적 위계를 반복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과, 불편함을 남긴다.

2017년 3월 18일 토요일

창작 뮤지컬 제19차 <빨래> 관람 후기

성지수

공연예술 작품이 막강한 힘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이 ‘힘’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권위’란 단어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막강한 권위를 가진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근래에 상연되는 ‘고전’의 사례를 생각해보았을 때 잘 드러난다. 먼저 관객은 극장을 찾기 전부터 관극 경험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작품의 힘이 세니, 적어도 아주 망작은 아니겠지, 하는 기대 말이다. 또 하나, 관객은 암묵적으로 약속된 관람 태도가 정해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정서적으로든 인지적으로든 이런 장면은 이렇게, 저런 장면은 저렇게 받아들이고 반응해야만 한다는 느낌. 약속되어 있는 것과 다른 관극 경험은 (예를 들어 감동을 받아야 할 장면에서 아무 감흥이 없다거나) 공연 탓이 아니라, 철저히 ‘이 작품을 잘은 모르는 관객인 나 개인의 문제’가 된다. 이렇듯 관객은 권위 있는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뭘 좀 알아야’ 겨우 입을 뗄 수 있는 입장이 된다. 꼭 ‘고전’이 아니더라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 받으며 10년 이상 장기 공연을 해 온 작품도 그렇다. ‘뭘 모르는’ 관객은 오랜 기간 그 작품을 사랑한 수많은 관객들과, 오랜 기간 같은 작품을 상연한 제작진 및 배우들 앞에서 감히 무어라 말하기 어려워진다.

뮤지컬 <빨래>를 보고 온 나의 입장이 지금 그러하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의 졸업공연으로 시작하여 2005년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상업 작품으로 정식 초연된 이래로 오픈 런에 가깝게 공연 중이며,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상 및 극본상, 제4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 작곡상 및 극본상을 수상했고, 하는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정보는 어렴풋이 알고, 오랜 공연 기간을 걸쳐 생겼을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와 추억 등등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공연장을 찾았던 나는, 지금 입을 다물어야 한다. 십여 년 째 꾸준히 극장을 찾는, 또는 다양한 캐스팅 조합 별로 같은 차수 공연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그래서 어떤 자리를 예매해야 공연 도중 남자 주인공의 사인을 받기 쉬운지 등을 너무도 잘 아는 <빨래> 팬들 앞에서 나 같은 ‘빨래 초짜 관객’의 불평은 그 자체로 예의가 없는 짓이 된다. 그런 것들이 이미 창작 뮤지컬 <빨래>의 ‘힘’, 권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게 허락된 관람 평은 “좋았어요.” “감동 받았어요.” “노래들이 귀에 계속 맴돌아요.” “배우들이 멋져요.” 정도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한마디 하려고 드는 것은 현재 이 작품이 가진 결함 때문이다. 이 글은 공연이 가진 젠더 이슈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이것이 어떻게 작품 전체의 구성을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부디 이 쓴소리, 아니 어쩌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는 헛소리가, 뮤지컬 <빨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아프게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빨래>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강조된 서사는 몽골 노동이주청년 ‘솔롱고’와 강원도 여자 ‘나영’의 러브라인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나영은 끊임없이 대상화된 여성으로만 그려지면서 나영은 하나의 인물로서 주체성을 갖지 못한다. 솔롱고와 나영의 ‘사랑’은 줄곧 솔롱고의 시각에서 그려진다. 솔롱고에게 언제부터 호감을 가졌는지, 이 호감이 언제 이웃사람에 대한 친절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이 친절이 도대체 언제부터 ‘사랑’이 되었는지와 같은 감정의 변화에 대해 나영은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할/노래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두 사람이 상냥한 말을 주고받는 장면은 참 많이도 나오지만, 그 정도 상냥함이야 살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영의 직장동료가 “무슨 좋은 일 있냐. 얼굴이 좋아보인다.”라고 하는, ‘썸’이나 연애를 시작할 때 주변인물들이 하는 스테레오타입의 대사에도, 그것이 나영이가 솔롱고와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연결고리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관람한 날의 ‘나영’의 연기가 능숙하지 못해서 대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없지 않은, 그 섬세한 감정 변화가 충분히 표현되지 못했던 것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본 나영은 끝까지 솔롱고에게 ‘타인에 대한 친절’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니 옥상에서 함께 빨래를 널다가 솔롱고가 나영의 손을 덥썩 잡는 장면에서, 아 이제 따귀를 날리면 딱 좋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 주인공 솔롱고의 경우 배우 개인의 연기가 부족하더라도 <빨래>의 대표곡인 “참 예뻐요”를 솔로로 부르는 등 자기 감정을 표현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는 반면, 나영에게는 그럴 솔로곡, 그럴 장면이 주어지지 않는다. 대사 처리를 어찌 하느냐에 따라 끝까지 상대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 몇 마디만을 가지고, 나영은 러브라인의 여자 주인공 자리를 지켜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그러니 두 사람이 곧이어 키스를 하더니 살림방을 합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솔롱고의 노래 “참 예뻐요” 장면은 나영에 대한 대상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나영이 이사를 오다가 떨어뜨린 책을 솔롱고가 주워주었을 때 한 번, 옥상에서 빨래를 널며 인사를 했을 때 한 번 만나고 나서 그들이 세 번째로 마주치는 장면에서, 솔롱고는 공장장, 또 다른 이주 청년 ‘마이클’과 함께 슈퍼 앞에서 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무대 한켠에서 이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무대 다른 쪽에서 나영이 슈퍼에 가기 위해 등장한다. 나영이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슈퍼에 들어갔다 나오고, 그곳에 놓고 간 책을 슈퍼 주인으로부터 넘겨받는 그 시간동안 솔롱고, 마이클, 공장장은 나영을 빤히 쳐다본다. 여기까지야 나영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고, 그러므로 그건 칭찬이고, 이 정도면 시선 강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시선 강간은 단순히 음흉한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상대를 훑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은, 사람은 ‘꽃’이 아니기 때문에 이유를 막론하고 충분히 가깝지 않은 타인을 대놓고 쳐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무례한 행동이다. 이 무례함을 무례함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여기에 젠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후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철저하고 명백하게 나영에 대한 대상화가 이뤄진다.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진다. 주변은 모두 어두워지고 무대 한쪽 구석의 솔롱고와, 막 집에 가던 중인, 그래서 무대 한가운데에 있는 나영에게만 국부조명이 떨어진다. 시간이 멈춘다. 음악이 시작된다. 솔롱고가 노래를 시작하며 홀로 움직인다. 나영은 동작이 멈춰진 채로 환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 중앙에 ‘놓여있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은 솔롱고 뿐이니 동작이 멈춰진 사람은 나영 혼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마치 실험대에 올려진 것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 타의(솔롱고의 의도)에 의해 고정되어 전시되는 것은 나영 뿐이다. 노래를 부르며 서서히 나영에게 다가가는 솔롱고는, 남성의 시선에서는 사랑하지만 가 닿을 수 없는 이를 향한 간절함을 표현한 것일 수 있지만, 여성의 시선에서는 폭력 그 자체이다. 몇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 나를 해부용 실험동물처럼 속박하고 전시하더니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만지기라도 하려는 걸까. 마침내 그의 손이 거의 나영의 손에 닿을 때 쯤, 나영을 강조하던 조명은 꺼지고 나영이 먼저 솔롱고의 손을 잡는다. 솔롱고의 환상 속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영의 움직임과 말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나영의 말과 행동이 솔롱고의 기대일 뿐임을 안다. 이제 나영은 고정된 객체에서 남성의 환상대로 반응해주기까지 하는 (그것도 아주 ‘주체적으로’ 데이트를 이끄는 것으로 그려지는) 객체가 된다.

작품의 큰 소재 줄기인 연애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여자 주인공 나영의 입지는 자연스레 작품 내에서도 애매모호해진다. 아무리 직장에서 불의에 맞서려 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려 해도, 귀가만 하면 솔롱고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 인물이 사용하는 동선 등을 보면 나영이 주인공임이 확실한데도, 과연 이 역을 주연이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나영이 지워진 자리, 즉 주연이라는 자리에는 주인 할매, 희정 엄마, 그리고 솔롱고가 남는다. 그리고 이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조합은 상당히 이상하다. 차라리 솔롱고까지 사라져버렸다면 ‘참 열심히 사는 두 여자와, 그들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이렇게 되면 나영과 솔롱고는 조연이 됨), 작품에서 솔롱고의 자리는 여전히 견고하다. 연애라는 작품의 큰 줄거리의 유일한 적극적 주체이자, 이 감정을 솔로곡인 동시에 작품의 대표곡을 부르며 이끌어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인 할매의 장애를 가진 딸이 한밤중에 많이 아팠을 때, 나는 당연히 솔롱고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야 중심인물인 세 사람 간의 끈끈한 관계 형성이 비로소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정말로,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할매의 딸을 들쳐 업고 새벽을 달려 병원에 간 것은 희정 엄마였다. 솔롱고는? 철저히 대상화된 나영을 ‘얻는 데’ 성공할 뿐이다.

왜 나영 없이 솔롱고의 자리만 견고한 것이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남은 솔롱고가 다른 주연들과 어떠한 관계인 건지 작품이 섬세히 그려내지도 않기 때문이다. 솔롱고는 그저 주인 할매, 희정 엄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 사이, 그들로부터 나영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얻는 데 도움을 받는 정도의 얕은 관계만을 유지한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굴곡진 인생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는 주인 할매와 희정 엄마 사이 어디 즈음에 위치시켜야하는지, 이 셋의 관계는 서로 어떻게 얽혀있는 것인지 <빨래>는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솔롱고가 나영이를 ‘데리고 살게 되는’ 얘기(두 사람이 방을 합치는 것은 나영이가 솔롱고의 방으로 이사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상하다, 나영은 어쨌든 파주 공장으로 일을 나가고, 솔롱고는 또 임금을 떼먹혔댔는데... 솔롱고의 방이 더 넓은거겠지. 그래, 그런 것이어야만 하겠지, 하는 추측은, 무지한 관객인 나만의 몫으로 남는다)랑, 저 두 여인의 기구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작품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나영이 지워지고 솔롱고-주인 할매-희정 엄마라는 ‘연결고리가 미약한 조합’이 중심이 되어버린 <빨래>는 정리되지 못한 산발된 에피소드의 나열이 되어버린다. 관객이  이 서로 관계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봐야 할 이유가, 그것도 결코 안락하다고 할 수 없는 의자에 160분 동안이나 앉아서 봐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말로 <빨래>에 대해 무지한 관객이지만, 이 작품의 대본을 쓰고 작사를 한 사람, 이번 시즌에도 연출을 한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안다. 그에게 작품을 통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선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성 연극인의 작/연출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대상화된 시선 때문에 작품의 구성이 위태롭게 여겨지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은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여성 관객으로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후, 약간의 조사를 통해 이 작품이 2003년 이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분이었던 공연 길이는 160분으로, 삽입곡은 7곡에서 18곡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 변화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상업화’ 과정에서의 러브라인 강화, 이로 인한 솔롱고 비중의 강화 등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슬펐다. 더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작품을 다듬는 과정에서 고려된 그 ‘많은 관객’이, 소위 ‘뮤덕’이라 불리며 흥행의 열쇠를 쥐고 있는 20-30대 여성 관객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 서나영을 지워버린 것은 여성 연극인 추민주 혼자가 아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는 헛소리에 가까울 관람평을 굳이 작성하고 굳이 게재하는 이유이다. 나는, 뮤지컬 <빨래>는 심각한 젠더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으며, 주요 인물 구성의 측면에 미숙함이 있어서 작품의 서사 구조의 안정성마저 떨어지는, 그래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2017년 3월 4일 토요일

이토록 망가진 메데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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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메데이아(a.k.a. 메데아, 메디아)가 이아손의 손에 죽는 게 현실적이겠지요. 맞아요. 갑자기 하늘에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나타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해요. 이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냐고요. 그런데 현실적인 것을 찾으려면 애당초 2500년 전 이야기를 뭐하러 다시 해요? 게다가 요즘 국립극단은 지금 이곳의 현실, 여기 우리 사는 얘기 하는 거 불편해하잖아요? 아리스토파네스로 입장 곤란해진 거 알아요. 그렇다고 에우리피데스를 가져와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요? 쫄아 있는 게 너무 보이잖아요. 아직도 쫄아 있으면 어떡해요. 블랙리스트 다 드러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당신이 마지 못해서 그런 거라 누가 믿겠어요? 정치극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굳이 리얼한 치정극을 할 건 또 뭐에요? 리얼한 거 좋지요. 그런데 현실을 외면하면서 리얼하려니 스텝이 꼬이잖아요. 아무리 한남충이 득시글거리는 나라라지만 이아손 같은 찌질남이 메데이아를 죽이는 꼴을 왜 무대에서 봐야할까요? 메데이아가 자기 아이들을 칼로 찌르고 피 흘리며 죽는 건 또 왜 봐야 하나요? 여혐이라 욕먹는 에우리피데스도 그건 안 했다고요.

아녜요. 메데이아가 살아서 떠나는 게 더 슬프잖아요. 그게 진짜 비극이잖아요. 그래야 살아 있는 동안 아이들을 죽인 자기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테니까요. 아이게우스에게서 낳은 아이를 볼 때마다 자기가 죽인 아이들이 생각날 테니까요. 메데이아 스스로 그러잖아요. 그날 하루만 잊고 평생 울어야 한다고요. 자기도 감당 못 할 잘못을 저지르고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고요. 해결되면 안 되는 고통이라고요. 살아있는 게 지옥이라고요. 그런데 한 날 한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냐고요. 아무리 황당해도 용수레 타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유유히 사라져야 한다고요. 관객들이 좋아서 손뼉 치는 거 아니라는 거 아시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투명 실린더는 괜찮고, 용수레는 왜 안되는데요?

이아손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선 안 돼요. 찌질한 놈이라 그럴 자격도 없는 데다가, 눈앞에서 새신부도 장인도 두 아들도 다 잃었잖아요. 그럼 그 모든 걸 복수할 기회도 잃어야죠. 그래야 아찔하잖아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볼 거 아녜요. 이아손에게 허락된 건 통곡이지 메데이아를 죽이는 손쉬운 분풀이가 아니에요. 뭐 잘했다고 이아손의 소망이 이뤄져야 하나요? 메데이아를 이토록 망가뜨리면 어쩌란 말이에요.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어떤 자기반영을 읽기

박종주

그런 사람들이 있다. 시인에 관한 시를 쓰고, 영화감독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가수에 관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서투른 상상으로 남의 삶을, 자신이 모르는 삶을 지어내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다.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예술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비평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바른 일이기도 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하루를 다룬 창작 집단 뒹굴의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가 그런 작업에 속한다.
배경은 어느 반지하 작업실, 여섯 명의 젊은 예술가 ― (이렇게 분류해도 좋다면) 사진가, 연극배우, 웹툰 작가, 그래피티 화가, 개념미술 퍼포머, (のう[能]) 배우 ― 가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래피티 화가는 물을 담은 스프레이로 벽화를 그리고 있고 퍼포머는 기이한 체위들로 몸을 풀고 있다. 소파에 가로 누운 배우는 붉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래피티 화가의 첫 획이 말라 사라질 즈음, 극이 시작된다.
시작은 역시 가난이다. 사진가가 사들고 온 귤, 모두들 오랜만에 먹는 과일이다. 춤이 나올 만큼 기쁜 일이다. 오천 원짜리를 흥정해 삼천 원에 사온 참이다. 주스로는 비타민 공급이 충분치 않더라며, 이들은 신이 나서 귤을 깐다.

본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그래피티 화가에게 온 문자 한 통. 멋대로 여섯 명 전원의 이름을 적어 넣은 젊은 예술가 지원 사업의 합격 통보다. 잠시 모두들 들뜨지만, 지원금은 고작 이십만 원. 각자에게 필요한 것 중 최소한 ― 물론 그 최소한이란 각자의 예술가적 자존심이 허락하는 한에서의 최소한이다 ― 만을 구비하려 해도 모자란 액수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요새의 트렌드를 좇아 시행된 사업인 융복합 예술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업을 구상할 것, 그리고 이십만 원이라는 제한 내에서 자신에게 최대한의 예산을 확보할 것. 이 두 가지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 극의 전부를 이룬다. 뒹굴의 이 작업 또한 모 기관의 지원금을 받은 것이므로, 아마도 익숙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십만 원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 작가들의 크고 작은 소망은 쓴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미치를 설치하는 데에 오만 원이 필요하다.[1] 사진가는 시간의 물성을 표현하기 위해 예순 장의 폴라로이드 필름을 쓰고 싶다.[2] 무위의 퍼포먼스를 하려는,[3] 예술은 개념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퍼포머는 자신의 개념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름값’을 필요로 한다. 수작업한 그림을 스캔해 작품을 만들려는 웹툰 작가는 모나미 리미티드 에디션 볼펜 세트를, 자신의 몸만을 쓰는 연극배우는 자신이 먹을 초밥을 필요로 한다. 평소엔 수돗물로 그림을 그리던 그래피티 화가는 이번만큼은 에비앙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아리수와 프랑스제 고급 생수는 느낌이 다르니까.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소재로 삼는 것을 자기반영이라고 칭한다면, 이 자기반영에서는 두 가지의 거울상이 포함된다. 하나는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작가가 처한 사회적 현실이다. 여기서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료들을 얻고자 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작업의 최소한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욕심이,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금 없이는 작업을 하기 조차 힘든 ― 결국 지원 제도에 종속되어 가는 예술가들의 현실이 비추어진다. 전자가 강조된다면 자아비판이 될 것이고 후자가 강조된다면 사회비판이 될 것이다. 그 둘이 분리가능하다면 말이다.
뒹굴이 무엇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극은 뜬금없는 춤과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유머들로 파편화된다. 작가들의 욕망만큼이나, 그들의 구상만큼이나, 극은 파편적이다. 사회비판을 무거운 일이라고 한다면 ― 꼭 사회비판이 무겁고 자아비판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 이 가벼운 블랙코미디는 아마도 자아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서로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없이 표면만의 존중을 내세우는, 끝없이 싸우면서도 균열을 견디지 못하는,[4]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은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며 좋아하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에 가까울 것이다.
둘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마 ‘예술계’에 대한 비판으로서 자아비판인 동시에 사회비판일 것이다. 굳이 작업실을 공유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조합이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예술계의 축소판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극은 자립적인 생태계를 구성하지도, 서로를 건전하게 비판하지도 못하는 예술계의 실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5] 이렇게 자기비하적인 에피소드들을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다는, 어떤 자만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가들의 태도와 (예술을 대하는) 사회의 현실 모두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비판하고 있지만 초점을 잡기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자기반영이라곤 해도 이것이 구체적인 개인들로서의 자기를 반영하는 것인지 집단으로서의 예술가들을 반영하는 것인지 관객으로서는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균열의 끝에 이 작가들은 허위의 결과 보고서를 만드는 것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를 한다. 공간을 갖고 있으니 공간을 보는 일 자체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로 삼기로 한다. 결단을 내린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객석의 뒤에 서서, 관객들과 함께 무대를 바라본다. 아니, 함께 바라본다는 것은 틀린 말일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관객은 또 하나의 고민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뒤에서 무언가 할지도 모를 배우들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배우들의 부재라는 무대의 상황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이 두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무대는 어두워진다.



[1] 〈연기의 해로움에 대하여〉 극중에서 노 배우는 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는 가로세로 3미터 가량의 독립된 공간과 그곳으로의 입장로 하나미치(はなみち[花道])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미치는 일본의 또 다른 전통극 가부키(かぶき[歌舞伎])의 무대 요소 중 하나로, 객석 사이로 길게 뻗은 통로를 가리킨다. “꽃길”이라는 뜻 그대로, 처음에는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로 나아가 꽃을 받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뒹굴의 얕은 지식이 드러나는 대목인지 하이개그인지는 불분명하다.
[2] 연습에 열 장, 작업에 쉰 장이 필요하다. 쉰 장 중 일부는 관객에게 배포되고 일부는 전시될 것이다.
[3] 다른 성원들은 이를 무이의 퍼포먼스, 무의의 퍼포먼스 등으로 잘못 알아듣는다. 퍼포머의 설명에 따르면 무위의 퍼포먼스란 부재의 현전을 내어 보이는 퍼포먼스이며, 다른 이들의 이해에 따르면 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름만 올리는 일이다. 무위(無爲)에 대해서는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참고하라.
[4] “얘들아, 지금 싸우는 거 아니지?”라는 대사가 반복된다.
[5] 이는 뒹굴의 전작 〈바로 그 얘기〉가 연극계의 관행을 비판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과도 상통한다.

2017년 1월 1일 일요일

취지와 치료를 넘어: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을 작품으로 보기


성지수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 논하기의 어려움


(1) “세월호 참사를 겪은 단원고 피해(희생, 생존) 학생 엄마들이 세상과 소통의 폭을 넓히고자 극단을 만들어...”
(2) “웃음을 잃었던 엄마들 파안대소...”

위의 두 인용문은 극단 노란리본1)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을 소개하는 기사들의 표제와 부제다.2) 프로그램 북에도 배우들이 “세월호 가족들”이란 사실이 표지에 명시되어 있으며, 공연 시작 전 무대에 오른 연출은 모든 배우가 ‘연극을 처음 해보는 세월호 엄마들’임을 밝힌다. 공연이 끝나면 “끝까지 밝혀줄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나온 배우들이 한 명 한 명 “0반 00엄마”로 자신을 직접 소개한다. 그러니까, 외부의 시선으로 보나 내부의 시선으로 보나 이 연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면서 가장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세월호 엄마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다’는 것에 있다. 희곡 <그와 그녀의 옷장>은 세월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참사 전에 창작된 작품이지만,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은 반박할 여지없이 ‘세월호 연극’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직접 당사자들인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을 본 후 그 기획 취지나 당사자들에게 미친 긍정적 심리치료 효과 이외의 것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물론 세월호 사건이 아직 종료(철저한 진상규명부터 책임자 처벌, 적절한 보상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까지)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이 연극을 ‘날카로운 관객의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을 이념 선전도구나 치료 프로그램 정도에 머무르지 않게 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서, 이 연극을 다른 공연예술과 동등하게 비평하는 것을, 하나의 개별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는 것을 시도하려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연극 작품으로서 극단 노란리본의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 주목할 지점을 정리하였다.


1. 어색함을 스타일화하기


배우들의 연기는 아주 잘 한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어색한 연기가 부족함이 아닌 예술적 선택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은 참고 보아줘야 하는 것이 아닌 즐길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우선 읽기만 해도 재미있는 대본이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에 큰 힘이 되었다.3) 웃음을 주기 위한 대사와 설정이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처음에는 웃지 않았던 관객들도 어느 순간에는 어이없어서라도 받아들이고 웃게 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호남의 부탁에 순심은 관객 ‘정수기’에게 다가가 물을 뜬다. 이 관객은 극이 끝날 때까지 호남이 출퇴근하면서 수차례 말을 거는 ‘정숙이’로, 집회 현장에 나온 ‘정숙이 위원장’으로 불려 웃음을 자아낸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 방향이 관객을 향하고 사투리 등 특정 억양을 과장하여 살리는 양식적인 연기를 선택한 것도 좋은 지점이었다. 소위 말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하였다면 더 크게 느껴졌을 연기 경험의 부족(대사 전달 실패나 ‘발이 바닥에 붙지 않는 것,’ 즉 부산스러운 몸놀림)이 많은 부분 노출되지 않았다. 배우들은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사 전달을 정확히 했다. 처음 해 보는 분들 치고 잘했다, 보다 더 좋은 찬사를 들을 실력이었고, 이는 적절한 대본과 알맞은 연극적 선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2. 취지와 표현 양식의 연관성


이 작품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은 배우들의 도전 취지이자 연출의도인 “세월호 엄마들이 배우가 되어 관객 앞에 선다”일 것이다.4) 이것이 실제 연극과 동떨어진 취지가 되었다면 연극은 그 의도와 달리 교조적이고 불편한 자리가 되었을 것이며, 관객은 ‘엄마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은 양식화된 연기,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 장면, 관객의 직접 호응을 유도하는 장면, 메타극적 대사 등 연극적 표현 양식을 통해 이를 작품 속에 효과적으로 구현해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배우들은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배우들이 상대 배우를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에 빠져 익살스러운 장면에 웃을 때는 크게 인식하지 못하다가 배우들이 시종일관 관객들을 마주하고 섰던 것을 상기하면 그들이 ‘세월호 엄마’이며, 정치적 주체로서도 사회가 강요하는 희생자 정체성에 스스로를 묶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주도해 나아왔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남성 배역임에도 여성임을 숨기지 않았던 점, 옷이 중요한 연극에서 팔찌, 손수건, 배지 등으로 세월호 표식을 한 것은 이 상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박수와 함성처럼 관객들의 직접적인 호응을 유도하거나, ‘정수기-정숙이’를 관객으로 설정하여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희곡의 메타극적 대사들도 “관객 앞에 선 세월호 엄마들”을 잘 구현한 장치가 되었다. 순애에게 사랑에 빠져 매일같이 집회에 참석하는 수일을 보여준 후 “5분 만에 노동자 의식이 성장했구나! 이 연극은 뭐 이리 진도가 빨라!” 한다던가, 5번 이상 반복/변주되는 상황이 마무리될 때 “잠깐,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하는 대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사실주의 연극처럼 관객들에게 극중 상황에 몰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것들이 ‘연극’임을 환기하는 효과를 가진다.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는 이것이 모든 연기자가 ‘세월호 엄마들’이라는 사실과 만나면서 ‘세월호 엄마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배우로서 그 대사를 발화한 세월호 엄마들’의 실존이 부각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3. 시선의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


연극은 불균형한 바라보기가 극대화된 형태의 예술형식이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배우를 훔쳐본다. 관객에게 허용된 극장의 언어는 박수와 환호, 웃음뿐이다. 배우들이 ‘세월호 엄마들’일 때 이 불균형은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낳는다. 세월호 가족들의 다양한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볼 때면 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문구로 약속했던 것을 과연 내가 잘 지키고 있는가,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가에 대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천일이 가까워지도록 자신의 아픔을 입증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의 고통과 재난은 비극적인 일인 동시에 관음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죄책감, 그 어쩔 수 없는 감정이 해소되는 시선의 역전 순간이 있었다. 세 개의 옴니버스 극이 모두 마무리되고 피켓을 든 배우들이 무대 위로 나와 인사를 한 후, 연출까지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였다. 관객에게 함께 부르자고 청하는 노래는 민중가수 윤민석이 작사, 작곡한 <약속해>다. 관객들에게 가사를 띄워주는데, 그 처음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쉽게 부를 수는 없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잊지 않겠다,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참사를 당한 아이들의 가족이라는 선언(가족이 되겠다, 가 아니라)은 가사를 보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들었다.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은 순간, 이는 불편함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곧 자발적으로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관객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준 배우들이 불 켜진 객석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반 동안 관객을 즐겁게 해 준 배우들에게 박수나 환호성 이상의 것으로 보답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 그리고 성공적으로 좋은 공연을 보여준 배우들이 커튼콜 후 “0반 00엄마 000”로서 인사를 하고 소감을 밝힘으로서 ‘세월호 엄마들’로 사람들 앞에 선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작은 다짐을 담아 노래한다. ‘세월호 엄마들’이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본다는 이 바라봄이 역전되는 순간은 또한 연극을 ‘보면서’ 순간순간 느꼈던 시선 불균형의 죄책감까지 덜어주었다.


취지와 치료 너머를 바라보자, 취지와 치료의 성공이 보이다


글의 처음을 열었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 살펴보면, (1)은 이 연극이 ‘예술의 사회적 소통 기능’에 주안점을 두었음을 보여준다. “집회, 간담회, 단식, 삭발까지 해 봤지만, 한계를 느껴 더 자연스럽고 쉽게 국민에게 다가가 소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창작한 연극이라는 이어진 소개는 이를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시민들이 재미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세월호 사건에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연극의 주된 취지이다.

이어서 (2)는 (‘배우’가 느낄 수 있는) 연극의 심리치유 효과가 이 연극에서 작용했다는 것을 말한다. 스브스 카드뉴스5)
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 연극에도 도전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극에 나오는 여러 감정을 표현하면서 내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연출가는 프로그램 북에서 연출의 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월호 가족들에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피해 가족들이 억눌리고 외면당해왔던 수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상대 배우와, 관객과 나누는 과정에서 예술의 치료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이 작품의 큰 의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극단 노란리본의 <그와 그녀의 옷장>의 기획의도이자 가장 큰 의의 앞에서, 세월호 사건의 직접 피해자가 아닌 시민(더 솔직해지자면, 참사 규명을 위해 아주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못했던 나약한 소시민)인 관객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이 연극을 보면서 눈물 끝에 웃음을 보여주시는 ‘엄마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용기를 내 준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연극을 본 후에 ‘세월호 엄마들’만이 아니라 공연 전반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가질 수 있을까.

첫 번째 의문점은 관람자가 상연자를 희생자 정체성으로만 규정해버릴 위험에 대한 염려를 담는다. 상연 전 연출가가 직접 관객들에게 곧 무대에 오를 분들 모두가 연극을 처음 해 보시는 분들이다, 작품 연습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코미디 연극이니 많은 웃음을 부탁한다 등(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많이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 주세요.’)의 멘트를 했을 때 이 염려는 증폭된다. 분명 그 분들의 용기는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이 그 용기로 들고 나온 것이 연극 작품이라면 이를 관람한 관객이 그들을 배우로 보아야 하고, 용기뿐 아니라 연극 자체에 대해 논해야 한다. 무대에 오를 사람들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 혹은 기특한 마음만을 가지는 관객은 실제 작품의 가치와 상관없이 무대를 학예회로 전락시킨다. 때문에 그들의 용기에만 집중하고 용기만을 평가하는 것은 그 평가가 아무리 긍정적일지라도 명백한 폭력이다. 배우로 선 사람들을 배우로 이야기해야 하지, 불쌍하고 기특한 사람들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의문은 창작자에 대한 선입견에 갇혀 창작물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이다. 예를 들어 정의신의 작품을 보며 재일조선인으로서 겪은 그의 개인적인 아픔만을 느끼고 돌아간다면 이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을 평가 절하하는 태도일 것이다. 누군가 애써 차려준 밥상 앞에서도 그 맛과 행복감은 표현하지 않고 계속해서 차린 이의 정성만을 논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정성을 폄하하는 일이 된다. 또한 극장을 넘어서는 특정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연극작품들이 놓치고 있는 것, 즉 취지만 좋다고 좋은 연극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미학적 의의가 있어야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원래의 취지 달성도 실패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창작자의 희생자 정체성만을 내세운 엉성한 작품을 통해 교조적으로 관객을 가르치려고 들거나 슬픔, 분노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관객과 연극의 의도 양쪽을 고립시키는 일이라는 것 역시 지적하고 싶다.

때문에 연극의 사회적 소통 기능이나 심리 치유 효과는 연극의 미적 가치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즉 비-세월호 가족 관객(‘일반’ 관객이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 ‘세월호 엄마’를 한 명의 배우로, 이 연극을 개별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을 때, 좀 더 편안하게 소통하고자 했던 시도도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다. 윤리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창작자-수용자 간 관계의 문제는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모인 사람들(창작자와 수용자, 직접 피해자와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새로운 담론의 장을 형성하여 사회에 파급효과를 내고자 하는 연극들의 성패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무시되는 문제이기에 주요하게 다뤄야 한다.

극단 노란리본의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은 작품의 의도가 형식으로 잘 녹아들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배우로 선 ‘세월호 엄마들’과 관객으로 찾아 온 사람들이 마주보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느낌으로써 평등한 관계가 구축될 수 있고, 때문에 진정한 심리치료가 가능한 장이기도 하다. 공연을 본 후 연극의 부족함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취지나 노력만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연극 작품을 본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떤 사명감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들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관객들도 마주보고 함께 다짐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2017년 새해에 성미산 마을극장을 시작으로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이 작품이, 배우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수일에게 예쁜 목도리 선물을 받은 순애는 밤에 혼자 찾아 온 용역 깡패에게 밀쳐지고 물도 맞는다. 강한 여자와 심약한 남성의 연애 스토리의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따르는 셈인데, (장르를 불사하고 여성은 이전에 강인한 캐릭터가 본격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이 되면 갑자기 다른 남성에게 억울하게 봉변을 당하며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야기가 끝나가는 지점에 뜬금없이 등장해서 조금 황당하게 느껴진다. ‘여성성’의 부각, 맞서 싸우는 것의 어려움을 보여줘야 할 필요성, 혹은 그저 둘이 한층 가까워질 계기가 필요했을지 몰라도 불필요한 전개다. 극단 노란리본이 현재로서는 세월호 ‘엄마’들의 극단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굳이 극의 말미에 와서 그녀들이 ‘관객 앞에 배우로 당당히 선 여성들’이라는 점을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작 오세혁 연출 김태현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
2016년 12월 29일 19시 관람, 서울혁신센터 다목적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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