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박종주
0.
의아했다. 이런 주제로 무슨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 뻔한 고통의 나열이 아닌, 무엇이 가능할까. 궁금했다. 그래서 연극의 1부는 참신했다. 1부 내내 배우들이 하는 일이라곤 무대를 이리 저리 뛰고 걷고 기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국경을 넘고 중국과 베트남과 태국을 거쳐,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기까지, 배우들은 움직이다가, 숨었다가, 또 움직였다. 무리를 이끄는 이는 이따금 외국어로 협상을 했다. 그 동안 무리는 숨을 죽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움직이기만 할 것인가 싶을 때까지,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1.
극장 입구를 통과하자 무대의 뒤가 나왔다. 덧마루를 쌓아 만든 더미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돌 더미 같기도 했고 참호 같기도 했고 끊어진 도로 같기도 했다. 무대를 가로질러 객석을 향했다. 잠시 후 불이 꺼지고, 어슴푸레한 무대 뒤편의 높은 곳에서 수상스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허리를 숙인 채 걷거나 뛰는 배우들, 계단인지 비탈인지를 내려와 무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배우들. 무대가 밝아지고, 누군가 허공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무리는 따라서 허우적허우적,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소리는 뒤늦게 흘러 나왔다. 첨벙거리는 물소리.
몇 번인가 총소리가 울렸다. 총소리가 울리면 무리는 몸을 낮추었지만, 결국 누군가는 총에 맞고 말았다. 팔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무리는, 여러 개의 국경을 넘었다. 끊임 없이 숨고 도망치는 여정이지만, 사람들은 할 일이 많았다. 몰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었다. 짐을 버릴 수도 없었다. 총에 맞은 팔을, 결국 도끼로 잘라내는 순간에, 누군가는 똥을 누었다. 그렇게 살아 남은 이들이, 마지막 국경을 넘었다.
누군가는 만둣집을 차릴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노래를 할 것이라고, 누군가는 춤을 출 것이라고 했다. 꿈을 안고, 국경을 넘었다. 가족을 두고, 고향을 벗어났다. 팔을 잃고, 희망을 구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다. 남한이라는 땅은.
2.
2부가 시작되고, 드디어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뻔한 고통의 나열이 아닌, 무엇이 가능할까. 작가에게도 연출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얽혔다. 만둣집을 열어 자리를 잡은 부부의 이야기와, 그 만둣집에서 서빙을 하며 쌍꺼풀 수술비를 모으는 이의 이야기와, 밤무대에서 돈을 벌어 북에 남은 가족의 치료비를 대고 학비를 저축하는 자매의 이야기와, 그 중 하나를 좋아하는 택시기사의 이야기와, 북한에서 전사를 했던 총잡이 실력으로 주유기를 잡고 싶었지만 일을 구하지 못한 이의 이야기가 얽혔다. 만둣집 주인 쯤의 삶은 넉넉했던 모양이지만, 다른 삶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하고, 남한 물정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사기를 당하고,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임금을 삭감 당하고, 남한에서 달리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장의 폭언을 듣고, 이런 이야기들이 얽혔다. 산만하다는 점만이 참신했을 뿐, 상상했던 그대로의, 우려했던 그대로의 고통의 나열이 무대 위에 펼쳐졌다. 그들은 말했다. 남한에서 쉬운 일이라곤 숨쉬기 뿐이라고. 뿌연 서울 하늘을 생각하면 숨쉬기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딱 그 정도였다.
“사선을 넘어 우리나라에 새로 터잡은 북한이탈주민. 생존을 위해 넘어왔지만 또 다른 생존과 싸워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라는 공연 소개를 읽었다면, 그리고 티비에서 한 번쯤 탈북 주민들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면, 2부는, 산만하다는 점을 빼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3.
나는 중국어도, 베트남어도, 태국어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 있다면, 무리들이 국경들을 넘는 동안 등장했던 중국인과 베트남인과 태국인의 입에서 나온 그들의 언어가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 정도다. 중국인들은 청대의 모자 같은 것을 쓰고 판관 포청천 주제가를 불렀다. 베트남인은 알 수 없는 짧은 문장을 반복했고, 태국인은 코꾼 깝 똠얌꿍이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탈북 주민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연출은 중국인과 베트남인과 태국인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던가, 얼마나 두려웠던가, 얼마나 급박했던가 ― 무대에서 이루 재현하기 힘든 격렬한 정동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이유로 일부로 삐걱거리고 산만한 서사를 구성했는지도 모른다. 이 연극을 관람한 후에도 당사자의 감정은 여전히 알 수 없도록, 알량한 간접 체험 같은 것은 할 수 없도록,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들 가운데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조각난 서사들 사이사이에는 쉽사리 하나로 이어지는 뻔한 고통의 서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맥락 없는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만 표현할 수 있었을 리는 없다는 점이다.
4.
뻔하게도, 재앙은 여성들에게 돌아간다. 만둣집을 운영하는 부부, 남편은 함께 사선을 넘은 동료들을 믿고 돈을 척척 빌려주는 호인이다. 종업원으로 일하는 이들의 임금을 올려주마는 약속도 한다. 가계를 걱정하는 것은 부인의 일이다. 악역을 자처하며, 삶을 견디는 것이 그의 업이다. 팔을 잃은 남편을 위해 성매매를 하던 이는 임신을 하고 만다. 사기를 당하는 것은 꿈을 품었던 자매 중의 한 명이다. 이 사기는, 자신의 자매를 배신하는 일과 동시에 벌어진다. 뻔하게도, 그들은 밤무대 가수 일을 잃고서 ‘2차’를 하는 가게로 넘어간다. 가장 비참할 수 있도록, 옷을 갈아 입는 것은 텅 빈 무대 위에서다. 이들은 표현할 틈조차 없었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자매 중 한 명을 사랑했던 택시 기사다.
극이 끝나갈 무렵, 자매는 서로에게 묻는다. 괜찮으냐고. 자매는 서로에게 답한다. 괜찮다고. 택시 기사는 마음에 없던 다른 이와 결혼한 후다. 그가 맡는 일은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걱정하는 정도다. 괜찮은, 괜찮아야만 하는, 그래야 슬픈 자매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관객들의 감정을, 뻔하게나마, 움직이는 일은 그들에게 맡겨진다. 풍금을 치던 이는 손을 떨게 된다. 포주는 새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말한다. 무대는 텅 비고 만다.
이 삶들이 바닥에 가까운 곳에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 또한 고르지는 않다. 팔을 잃은 전사가 의수를 얻는 동안, 전사의 친구가 그 의수를 선물할 만큼의 돈을 버는 동안, 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기로 잃었던 돈을 메우는 정도다. 그 돈으로 데려 오고 싶었던 아비는 이미 죽은 뒤다. 쌍꺼풀 수술만 하면 정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 믿었던 이는,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택시 기사의 아내가 되었다.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키우는 일이 누구의 몫이 될지,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5.
의아했다. 어디가 파격적이고 어디가 실험적인지, 나로서는 알기 어려웠다. 1부는 연극에 서사를 가진 재현적 연극에 익숙한 내겐 참신했지만, 어떤 이들에겐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지난한 탈주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 지난함이 와 닿은 것은 아니었다. 재현 불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면 받아 칠 말은 따로 없지만, 재현불가능성을 잘 지시하고 있지조차 않았다. 적어도 하나의 실험인 1부와, 단순하고 뻔한 고통의 나열인 2부가, 어떻게 하나로 묶여있는지, 무대에서 펼쳐지는 일들만 보고서는, 알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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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날숨의 시간〉
박찬규 작, 고선웅 연출
2016.12.09. ~ 12.25. 국립극장 KB청소년극장
2016.12.18. 15시 공연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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