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9일 수요일

빛의 제국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는 직사각형의 테이블, 의자 8개, 소파 하나, 여성용 핸드백 하나, 스탠드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다. 커다란 스크린이 정면에 하나, 무대 오른쪽에 하나 설치되어 있다. 테이블 위에는 마이크가 두 개, 배우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연극의 원작인 <빛의 제국> 소설책이 여러 권, 종이와 연필도 있다. 배우들은 이미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데, 연필로 무언가를 쓰기도 하고, 서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며, 중간 중간 서로를 바라보며 웃기도 한다. 관객을 등지고 앉은 배우는 조용히 기타를 연주하며 흥얼거린다. 일찌감치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웅성거리며 공연에 대한 기대를 나누거나, 인사하는 일도 적었다. 나는 지금 그들이 배우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등장 인물로 무대에 앉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인물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관람시 유의사항을 안내해준다. 가까운 비상구로 탈출하라는 그 말이 심싱치 않아서 나도 모르게 비상구를 한 번 쳐다 보았다. 같은 옷을 맞추어 입은 두 남자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는다. 무대 위의 인물들이 모두 두 남자를 응시하면서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관습적인 연극이 아니라더니, 역시 암전 없이 공연이 시작되었다.

충돌들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는 140여분의 공연 내내 나는 여러 가지의 충돌들(혹은 혼란들)을 경험했다. 그 중 일부는 연출가와 배우들이 의도한 것일테고, 어떤 것은 내가(김영하 작가를 좋아하고,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으며, 그래서 어떤 기대 지평을 구축한 내가) 만들어 낸 혼란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관객들도 명쾌하거나, 쉽게 이 작품을 관극하지 못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연이 끝난 직후,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서로 작품이 이해되었는지 물었고, 예술가와의 대화(3월 6일 진행)에서도 관객들이 연출가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질문들은 “왜”, 혹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원작 소설 <빛의 제국>과 연극 <빛의 제국>


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은 391페이지의 꽤 두꺼운 볼륨을 자랑한다. 아침 7시, 기영의 집에서 시작되어 다음 날 아침 7시 기영의 집 거실에서 끝이 난다. 10년간 소식이 없던 북에서 갑자기 송환 명령을 보내와 기영은 혼란스러운 24시간을 보내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그 실체는 여간해서 포착되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는 더 혼란스러운 진실을 알게 된다. 그의 부인 마리와 딸 현미까지도 어제와는 매우 다른, 이상한 하루를 경험한다.
이상한 하루,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어떤 함정에 빠져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느낌,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똑같아 보이는, 그러나 많은 것이 달라진 새로운 하루가 어이없이 시작되던 아침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2006년 원작 소설을 읽고, 나는 우리 주변에 정말 간첩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물들어 권태를 느끼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신용카드와 전화 사용으로 나의 움직임이 손쉽게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렇게 긴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조각내게 되고, 어떤 장면들을 선택하게 된다. 프랑스인인 연출가는 분단 상황, 그것이 사람들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사랑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상황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태도가 신기하다고도 했다. 각색가와 연출, 배우가 읽은 <빛의 제국>은 내가 읽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작품의 흐름이나 의도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분단된 상황이 기영과 마리를 헤어지게 한다고 했지만, 그둘은 헤어질 수도 없을 뿐더러, 사랑보다는 절망, 무력한 인간이 보내는 하루의 인상이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보는 분단 사황은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상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장면들은 소설의 내용을 흥미롭게 재현했지만, 어떤 에피소드는 촘촘한 맥락이 사라지고 그 일부만 끼어들어 그 재미를 모두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세금 무서운 줄 알라는 마리 아버지의 유언이나, 위 절제 수술을 해서 계속 먹어 줘야 한다는 정팀장의 대사같은 것은 더 웃음을 줄 수 있었을텐데, 서둘러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 의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 같다.


여러가지 표현 양식들


이 작품에는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극 초반에는 다소 혼란스럽고, 의아했다. 인물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과거를 회상하며 낭독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연기와 양식적인 연기가 혼재되어 있다. 기영과 마리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의 개인적인 ‘북한에 대한 기억과 체험’이 마이크를 통해 관객에게 직접 전해지기도 한다. 영상도 빈번하게,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여러 표현 방식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각각의 표현 방식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열심히 메모를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하나 밝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어떤 의도에 따라 분석하기 보다는, 서로 섞여 있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같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하루도, 북한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도, 원하는 대로 삶이 나아갈거라고, 하루 하루 똑같은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확실하지 않다는 것, 어느 순간에는 확실해 보이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너무 낯선 것이 삶이라는 것. 혼재된 표현 양식들의 의도를 포착하기 어렵지만, 그런 다양한 층위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이, 우리의 하루도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니까.

영상과 무대


그래도 영상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자. <빛의 제국>에는 정말 많은 영상이 사용된다. 이것들은 배경이나 무대를 보충하는 것 그 이상이다. 영상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이다. 극 초반 양치하는 김기영(지현준 분), 장마리(문소리 분)의 맨 얼굴, 마리의 담배 피는 모습, 마리와 고성욱 사이의 카톡 대화 장면 등은 마치 영화같다. 반면 무대 위의 연기는 (사실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같은 영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주로 마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무대 위에 앉아 있는 다른 인물들에게, 또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친구가 죽은 이야기, 자신의 가족 이야기 등을 건네고 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낭독은 영상에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영상 속에서 너무나 사실적으로 샤워를 하던 두 남자가 무대 위에서 양식적으로, 마치 제의에 참여하는 신도처럼 움직이며, 마리와의 쓰리썸 장면을 표현할 때도 어떤 기이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서도) 이러한 느낌은 끝까지 계속된다. 영상 속에서는 그냥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던 선생님 소지현(양영미 분)이 무대 위에서 말을 시작하니, 어딘가 낯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로 보인다. 기영이 그녀의 말을 대신하며 그녀를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런 낯선 느낌은 마리와 기영의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폭발했다. 영상 속의 두 남녀는 당황하고, 절망하고, 답답해하고, 울고, 체념한다. 그러나 무대 앞쪽에 선 기영와 마리의 대화는 너무 건조하다. 마리는 지난 15년간, 기영이 바뀔 거라 생각하고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서야 기영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억울하고 화도 났을 것이다. 영상 속의 그녀는 한숨도 쉬고, 울고 기영을 외면한다. 무대 위의 마리는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기영은 지워진 존재이니, 자신의 비밀도 담담하게 털어 놓을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북으로 가기 직전, 아내를 찾아와 마리가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라면서 목소리에 아무런 욕망을 담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남고 싶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해도, 북으로 가라는 아내의 말에도 그의 목소리는 건조할 뿐이다. 이 순간 기영은 울고 있었지만, 무대 가까이 앉은 관객이 아니고서야 그의 눈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상 속의 기영은 먼산을 바라보고 때로는 한숨을 쉬었다. 무대 위의 기영와 마리는 가만히 서서, 최대한 건조한 체하며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인지 모를만큼 아쉬운 장면이었다.
예술가와의 대화 때, 어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몰입할 수 없음을 당당히 이야기했고(많은 관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혹시 그렇게 장면을 연출한 이유를 물었다. 연출가는 자신의 의도에 대해 길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클로즈업과 같이 무대 앞쪽에 선 인물의 위치, 마지막 순간까지 담담할 수 밖에 없는 두 인물의 성격, 그래서 소리치고 화내는 식의 감정적 표현을 지양한 이유 등, 말로 들은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으나, 무대 위에서 그것이 정말 표현되었는지 궁금하다. (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연출의 의도를 느꼈을까) 소리치거나 따귀를 때리지 않는다 해도, 감정이 섞인 목소리의 냉담함, 애절함은 느껴질 것이라고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관객의 부질없는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 그 이후


북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기영이 집으로 들어가 누운 뒤, 무대와 객석 조명이 모두 꺼졌다. 아연실색하는 마리의 표정을 기대했으나, 그 표정과 감정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졌다. 다른 관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앞서 밝힌 것처럼 조금 혼란스러웠고, 당황했다. 프로그램북을 꺼내 뒤적였는데, 어떤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공연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 친절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내 선입견때문일지 모른다. “연극은 진실과 거짓, 실재와 환영 사이에 놓여 있는 모호한 공간(프로그램북, 15쪽)”이라고 말한 연출이 모호한 연극을 보여주었을지도 모르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많은 이야기와 질문이 떠오르도록 관객에게 여러 방면으로 자극했다는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이 서로 다른 느낌과 결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말고,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미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충분히 마음을 열고 다른 이야기로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펜을 내려 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관극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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