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오빠!’
‘오빠들’ 얘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물론 친오빠 얘긴 아니다. (친오빠 얘기였다면 ‘오빠 새끼’로 이 글을 열어야만 했겠지.) 누군가에게는 ‘서태지 오빠’이고 누군가에게는 ‘나보다 어린 여진구 오빠’인 그런 ‘오빠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유사어로는 ‘우리 애기들’이 있다.) 우린 각자의 ‘오빠’를 사모하고 동경하여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누비며 ‘오빠’를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들을 긁어모은다. 무대인사, 팬 사인회, 음악방송처럼 직접 볼 수 기회가 생기면 주저 없이 신청하고는 디데이 전후로 몇날 며칠을 설렌다. 지금은 이런 것들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너의 ‘오빠’는 누구였었니, 라고 물어보면 눈빛이 아득해지고 목소리가 아련해지면서 “내가 중학교 때 말이야...”라는 말로 썰을 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썰은 “그렇지만 이젠 다 졸업했어. 그땐 내가 왜 그랬나 몰라?” 따위의, 시크함을 보여줄 수 있는 대사로 끝이 나곤 한다.)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나를 건져 동화 속으로, 환상 속으로 날 이끌었던 ‘오빠’를 더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내 시간과 돈을 들이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돌 관련 상품을 사기 위해 몇 백 만원씩 쓰는 십대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어른들도 가만히 과거를 떠올려보면 ‘오빠들’의 노래 테이프를 사는 건 물론이거니와, 오빠들 사진이 붙었다는 것 외에는 별 특별할 것도 없지만 값은 훨씬 더 비싼 다이어리를 덜컥 사고, 멋진 사진을 찾아 컬러 프린트한 후 그걸 코팅까지 해서 간직했던 자신의 ‘흑역사’가 뇌리를 스치게 마련인 것 같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는 나의 ‘오빠들’을 중학생 때 만났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오빠들’이 내 인생을 “찾아왔다.” 내 십대 시절을 회상할 때 ‘오빠들’을 빼 놓고 얘기한다면 학교와 학원밖에 없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나날들뿐일 것이다. 나는 ‘오빠들’을 보러 갈 시간을 내기 위해 시간관리라는 걸 시작했고 ‘오빠들’을 한 번 더 보려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오빠들’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었다. 십대 때의 나의 영웅(!), 나의 ‘오빠들’은 뮤지컬 배우들이었다. 당시엔 뮤지컬이 지금만큼 보편화된 장르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뮤지컬은 ‘덕후’들의 세계이긴 하지만, 누군가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얘기를 듣던 그룹 중 한 두 명은 자기도 뮤지컬이 좋다고 맞장구를 치며 자기가 본 한 두 작품을 주워섬기는 근래와는 달리, 당시 열 서너 살인 내가 뮤지컬을 좋아해서 적어도 2주일에 1-2편은 꼭 보러간다고 말하면 다들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2주일에 1-2편!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공연장에 갔던 셈인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용돈을 많이 받았던 것도 아닌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짓이었다. 나는 사연이 채택되면 초대권을 주는 라디오에 열심히 사연을 써 댔고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갖가지 이벤트에도 응모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1등 하면 뮤지컬 두 개 보여주기,’ ‘3000제(가능한 경우의 수의 문제를 다 모아놓았다는, 악명 높은 수학 문제집)를 일주일 만에 다 풀면 R석 예매 허락해주기’ 같은, 엄마와의 약속을 걸기도 했다. (아 어머니, 불효녀는 웁니다!) 뮤지컬이나 뮤지컬 배우들의 매력이야 요즘은 여러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것 같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당시 나의 정신을 빼 놓은 요소 중 하나는 공연이 끝나면 ‘오빠들’을 만날 수 있는데다 심지어 ‘오빠들’이 나를 기억해주기까지 한다는 점이었다.
오빠들이 날 기억해준다! 나를 보면 반갑게 내 이름을 불러준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세계적으로 수억만 명의 팬이 있는 아이돌을 좋아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더더욱 그러했다. 한 친구가 자기 ‘오빠’의 생일을 맞아 정성스레 ‘오빠’ 사진에 왕관과 케이크를 그려 넣다가 갑자기 휙, 모든 걸 집어 던지면서 (욕설과 함께) “XX! 이 새낀 내가 존재하는 것도 모르는데!”했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내 맘속에서 ‘나의 오빠들의 특별함’을 부각시키는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나는 우리 ‘오빠’가 다른 팬에게 사인을 해 주느라 내게 자기 소지품을 잠시 들고 있으라고 맡겼던 어젯밤 일을 회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십 초도 지나지 않아 본인이 던졌던 것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았고, 자신의 더러운 성질 때문에 ‘우리 오빠’ 얼굴에 구김이 갔다며 아까보다 훨씬 더 슬퍼했다.)
고등학교를 입시 집중형 기숙학교로 가게 되면서 나의 팬질은 자연스레 끝이 났지만, 여전히 내 방 한켠 리빙박스 속에는 그 때 모았던 프로그램, 시디, 사인북, 팬 아트 등이 빼곡히 쌓여있다. 십 년 넘게 지속된 엄마의 ‘이제 필요 없으면 버려라!’ 공격을 뚫고 살아남은 나의 추억인 셈이다. 하지만 난 확실히 ‘뮤덕’을 ‘졸업했다.’ 뮤지컬을 본 지도 참 오래됐고, 요즘 ‘뮤덕’ 커뮤니티에서 만들어낸 용어들도 참 생소하다. 누가 나온다고 하면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같은 공연을 또 보았던 것과 달리 이젠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인터뷰 기사나 페이스북 광고 같은데서 우연히 그들을 마주치면 ‘여전히 잘 있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스레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그때 한창 애인에게 공개 프로포즈하는 걸 봤었는데, 벌써 애 아빠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강산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내게 ‘아련아련돋음’을 선물해주는 ‘그 때 그 오빠들’은, 참 어디 가서 얘기하기 쑥스럽고 민망하고 조금 창피하기도 하지만, 내게 참 소중한 존재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