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8일 토요일

휠+애인+산, 제물포 별곡

제물포 별곡: 조선판 베니스의 상인
오유아트홀 (도곡2 주민센터)
2015.8.7

글쓴이_임승태

극단 휠과 애인이 함께 <베니스의 상인>을 한다고 했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minority’였다. 이 드라마에는, 작가 자신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반유대주의 정서가 뚜렷이 드러난다. 반면, 이 극의 타이틀 롤인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친구 바사니오에 대한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할만한 근거는 다분하다. 아무튼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 안토니오와 샤일록이 채무관계로 얽히면서 이 극의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극의 결말은 한쪽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행복하게 해결된 코미디로 보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법관을 사칭한 채무자의 ‘제수씨’에 속아 재산을 몰수당하는 민족적 소수자의 서러움이 어려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원작이 1930년대 제물포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전환됨으로써 샤일록의 이름은 긴 다케시로 바뀌었다. 뚜렷한 친일행적을 보이지 않는 그의 이름을 굳이 일본식으로 개명시킨 것은 관객들이 마음 놓고 그를 미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실 극중 인물이 원작의 인물 성격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데, 새 한국식 이름을 암기하며 따라가려니 낯설고 불편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에게 더욱 얄미운 이름인 ‘긴 다케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샤일록이든 긴 다케시이든 그를 마음껏 미워하긴 힘들다. “제물포 별곡”이 마이너리티의 문제를 그들의 문제로 해석하는 것 또한 바로 긴 다케시를 통해서이다. 긴 다케시(백우람 分)는 구만석(안토니오, 호종민 分)의 부친에 의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고리대금업자가 돈을 마다하고 채무자의 살을 취하기 원하는 동기를 제공해준다. 그런데 "몸이 망가졌다"라는 말은 이 극에서 하나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전까지 관객이 배우의 핸디캡을 지우고 극적 가상에 몰입하려고 노력했다면, 배우가 이 대사를 반복해서 하는 순간 관객은 더이상 배우의 신체적 장애를 모른 척 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병신 취급”,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와 같은 대사 역시 단순히 극적 상황에 머무르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새삼스레 배우들의 몸을 지각하게 만든다. 긴 다케시의 대사는 그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게 어쩌면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일 수도 있다는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제물포 별곡”을 끝까지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온전히 배우들의 연기에 있다. 이들의 연기는 비장애인 배우들과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측면에서 장애인 배우는 무대 위에서 비장애인 배우를 압도한다. 장애인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은 배우 자신에 의해 완전히 제어되지 않지만, 관객들은 이점이 그들로서는 불가항력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그것을 문제삼기 보다는 매순간의 의외성에 경탄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비장애인의 연기는 발성이나 표정 등에서 예측가능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투적이라고 느껴진다. 무대 위의 환상을 배격하고 몸의 현존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극단 애인과 극단 휠이 풀어가야할 과제가 앞으로도 많이 있겠지만, 앞으로도 몸성(corporeality)이 관객을 매혹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재현과 현존을 오고가게 만드는 공연을 이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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