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실체 없이 이름만 있는 그 무엇

글쓴이_산책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공연 내내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란 단어를 수없이 듣는다. 일반적이지 않게 긴 제목을 공연 제목으로 혹은 누군가를 부르는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그 집요함, 고의성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상한 제목이 귀에 딱 붙지 않아 어색하기도 하다. 뭔가 이상하다. 한편, 제목을 외칠 때마다, 지금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란 연극을 보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긴 제목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서두부터 오락가락하는 것은, 작품이, 또 작품을 본 감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 공연에 버무려져 있다. 하나씩 맛보았다면, 나름 맛있었을지도 모를 음식이 그야말로 잡탕이 되어, 어떤 맛이 나긴 하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맛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무대에 올라왔다. 짠 맛 좀 느껴보려고 하면, 매운 맛이 공격하고, 매운 맛을 느끼고 있자면, 시큼한 맛이 올라온다. 솔직한 심정은…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B급 코드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패러디 한 배달의 민족 광고
언제부터인가, B급 코드(혹은 병맛)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가수 크레용 팝이나, SNL 코리아, “강남 스타일”, 배달의 민족 광고, 가끔 동생이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마음의 소리>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킹스맨>도 그런 맥락 안에 있다. 이런 B급 코드의 효과는 꽤 높다. 대중들, 관객들이 B급 코드의 가벼움, 유머, 신선함에 반응하고 환호한다. 다른 사람이 뛰어다니며, 서로의 이름표 떼는 것을 왜 봐야하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젊고 어린 동생들은 병맛코드를 즐기지 못한다며 안쓰러워했다. 점잖은 체 하지 않는 B급 코드는 젊고, 신선한 것으로도 여겨지기도 한다.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이하 <소뿔>)은 포스터부터 B급 코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극중극 내의 감독은 우리 연극은 아무 생각없이 웃게 만들 것이라고 호언 장담을 하는데, 어떤 부분들은 실제로 그렇다. ‘싼마이 연기의 달인인 황백호의 연기와 대사는 기가막힐 정도로 저렴하며 가볍다. 극중 옹 순경과 황백호의 여자 친구(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하다니!)는 산티와 성적(sexual) 코드를 마음껏(?) 발산한다. “오빤 나의 핫도그야.”같은 성적 농담들도 군데 군데 심심치 않게 삽입되어 있다. 성적 코드는 1차적인 본능을 건드리며 사람들의 웃음을 유도하는 강력한 것이지만, 관객들의 공감을 얼마나 끌어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B급 코드 속에, 소고기 개방과 같은 정치 문제, 경찰 수사 문제, 혹은 갑질 문제, 연극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을 숨겨 두고 있으니,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진짜 작가나 연출의 속내, 그 의도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저 맥락없는 섹시 여 경찰은 웃으라고 끼워넣은 것인지, 젠더 문제까지 다루려고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녀들은 섹시미, 백치미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보여줄 뿐, 그것을 깰만큼 신선하지 않다. 그래서 웃음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판을 깔아 두고 마음껏 B급 코드를 보여주지도 않으면서(청소년 관람 불가 연극도 아니고), 이런 병맛 코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생각하고 성찰하게 해주지도 않는다. 극중극의 감독은 소떼 퍼포먼스, 소뿔 장례식, 사람들의 시위 장면, 등이 재미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맥락없이 끼어드는 장면에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될 뿐이다. 정부, 빨갱이, 민중과 같은 단어들을 외치지만, 그런 표현들을 굳이 가져다 쓰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vs 실체 없이 이름만 있는 

분명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형식을 통해 연극적 유희성을 획득”하겠다고 소개했다. 이 소갯말은 극중극의 감독의 입을 통해 한 번 더 공언된다. 공연을 보신 다른 관객들은 어떤 점에서 이런 면들을 발견하셨는지 무척 궁금하다. 필자는 만화나 영화를 즐기지 않아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 그래서 이 재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했다. 만화 캐릭터같은 인물들이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 것은 인정한다. 짧은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일진 여고생이라든가, 난데 없이 취조 중에 랩을 하는 인물이 있다. 이들은 B급 정서를 드러내면서, 전체 서사의 맥락을 끊어버려, 이야기를 말이 안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런 표현을 “만화같은”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같은”이란 수사에 대한 의문도 남아 있다. 극중극중극이 반복되면서 마치 플래쉬백이 되듯, 이미 본 장면을 반복하고, 관객에게 기시감을 제공하는 것이 영화같은 형식이라 여긴 것일까? 이 작품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극중극중극의 형식은 영화같다기 보다는 연극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극이 극중극이 되고, 여기에 때로 실제 현실—극장 밖에 폴리스 라인을 치라고 지시하는 것 같은—이 난입하면서 (많은 리뷰가 소개하듯이) 무엇이 연극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헷갈리게 하는 척한다. 그런데 마치 현실처럼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것도 실제처럼 보이는 허구일뿐이다. 남산드라마센터에 폴리스 라인이 둘러져 있다 해도, 어느 누가 이것을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무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 그것인 실제인 척 하는 허구, 자연인인척 하는 등장인물일 뿐이다. 현실과 공연이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고, 현실과 공연을 혼동하는 극중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반대로 그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애 쓰는 모습이 아쉽다. 진짜 B급 코드, 연극적 유희성을 달성하고자 했다면, 관객에게 그것을 애써 전하지 말고, 알아차려도 그만, 그 반대여도 그만이라는 대담한 태도를 보였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다만, 첫 번째 극이 극중극이었음을 알게 되고, 극 바깥의 현실(인척하는 극)이라고 생각했던 겹이 다시 계산된 극중극중극이었음을 알게 될 때, 관객들은 자신이 본 것이 몇 번째 층위에 있는 것인지 다시 따져봐야 하는 인식의 즐거움은 누릴 수 있다. 

첫 번째 보고 있던 극이 연출과 작가가, 수사관이 등장하면서 극중극의 구조가 된다. 3번 층위와 2번 층위가 서로 교차하며 서사가 진행되던 중, '진짜' 수사관이 등장하면서 (3)번과 (2)번을 모두 극중극중극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마지막에 끼어 든 층위도 현실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에 비유했으나, 이 작품은 열면 열수록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처럼 보이는 층위가 끼어들수록 그 구조가 점점 확장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연기도 못 바꾸는데 현실을 어떻게 바꿔?

공연 내내 갈피를 잡지 못했던 마음이 마지막 10여분 동안, 그 길을 찾았다. 다소 진부한 에필로그였으나, 작가의 속내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연기도 못 바꾸는데, 현실을 어떻게 바꾸냐는 한탄처럼 (내 글은 엉망이면서, 다른 작품에 대해서 뭐라 할 수 있겠냐는 지금의 내 심정처럼) 마지막 10분은 작가와 연출이 이 복잡한 구성, 구조, 인물들을 모두 빠져나오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 들려주고 싶었던 주제를 꺼내 놓았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당수로 소뿔을 자르고 도망간다는 기상천외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공연 중에 길을 잃었던 황백호는 길을 찾기 위해 공연장 밖으로 나간다. 그가 소뿔을 자르고 다니더라는 등의 소문만 무성하다. 사람들은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때로는 그것을 잡아 확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체가 없기 때문에 힘있는 어떤 사람들은 꾸며내서라도 그 무엇을 현실화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힘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것은 무대 위의 이야기지만 현실이다. 재미가 주제라거나, 머리를 텅 비우라는 말들은 사실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그래서 두려워하는 그 존재가 과연 관객에게는 어떤 것인지 물으며, 공연은 끝난다. 아니, 극중극중극에 충실하게 위해 이 모든 것을 공연 연습인양 마무리하며, 휴식 시간을 갖자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배우들은 휴식이 끝나면 다시 연습을 시작할 것이다. 극장 밖을 나서면 공연을 마친 배우들이 담소도 나누고, 담배도 피고 있다. 그 장면에서야 극중극중극중극의 재미가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 자연인으로 드라마센터 밖에 서 있는 것일까, 등장 인물로 서 있는 것일까. ㉦



2015년 3월 25일 수요일

비행위를 번역하다: 《레르몬토프 희곡 전집》 번역자 신영선 인터뷰

2015년 3월 18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내 한 카페에서

임승태: 신영선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신영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임: 자기소개는 신비주의를 위해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신: 아, 예.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시다는 거죠?
임: 책 표지에 나오기 때문에, 궁금하시는 분들은 서점에 가서 표지를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책!

임: 첫 번째 책이 무려 전집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엄청난 작업을 하시게 된 건가요?
신: 제가 봐도 좀 미련한 짓인 것 같구요.
임: ㅎㅎㅎ
신: 여기서 웃으시면 안되죠.
임: 볼드체로 해드리겠습니다.
신: 누난 지금 진지해요. 궁서체로 해주세요. … 논문을 쓰면서 어찌됐건 저는 텍스트를 수십번을 읽어야 했는데, 저는 외국어 텍스트를 그대로 분석하는 건 잘 못하구요. 일단 우리말로 코딩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우리말로 코딩을 한 이후에 분석을 했던 거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산출됐습니다. 어차피 한번 읽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다시 읽어야 해요. 그래서 경제성을 위해서 한 거구요. 읽으면서 제가 읽은 대로 번역을 한 것이고, 물론 이제 출판을 위해서는 조금 더 검증 작업을 거쳤습니다. ‘가장무도회’ 와 ‘두 형제’는 배우들의 리딩을 몇 번 거쳤어요. 기성배우들의 드라이 리딩을 몇 차례 거쳤습니다. 희곡 번역은 어디까지나 공연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에 공연이 가능한 텍스트를 뽑는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표현을 찾는 작업이 후반부에 들어갔습니다.


임: 죄송하지만, 레르몬토프는 저 또한 그렇고 많은 분들에게 생소한 작가잖아요? 물론 전집이 이제야 소개되었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데요. 레르몬토프는 어떤 극작가인지요? 역자 선생님의 박사 논문 제목이기도한 “비행위에서 반행위로”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아주 쉽게 설명해주신다면?
신: 레르몬토프는 러시아에서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고, 러시아에서도 극작가로 주로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는 소설의 저자로 국내엔 주로 알려져 있고, 시집은 절판이 돼서 거의 찾을 수가 없을 거예요. 희곡 번역은 제가 거의 처음이라 보시면 되고, 대표작인 ‘가장무도회’는 90년대에 번역된 게 있는데, 그 책도 절판되었습니다. 공연은 된 적이 없구요. 극작가로서의 퀄리티를 평가하자면, 초기작품은 16-7세에 나온 거예요. 사춘기의 소산, 사춘기에 연상의 여인들에게 구애했다가 차인 경험들이 대부분 반영되어 있고, 그래서 자기를 찬 여인들에 대한 복수심이 또 상당히 반영되어 있다는 게 저자에겐 미안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후기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21-2세 때 ‘가장무도회’와 ‘두 형제’가 나오는데요. 전기 작품과 후기 작품 사이에는 군대가 있습니다. 남성 작가들은 군대 전후로 해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의 의미는 상징계 진입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 전까지는 학생이죠. 구애했던 여성들도 작가를 어린애나 친구로 취급, 적어도 성인남성으로는 대접해주지 않았다고 하면, 2년의 사관학교 기간을 거치고 장교로 임관을 하고 뻬쩨르부르그 중앙 사교계에 장교복을 딱 갖춰 입고 진출을 하는 거죠. 무도회도 드나들고 유부녀들과 연애도 하고 이러면서 사교계에 정식으로 장교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진입을 하는 거에요. 그런 입장에서는 작가가 그린 주체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앞의 세 작품의 주체는 행위를 결행하지 못하는 사춘기적 주체입니다. 앞 작품에서는 계속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양부건 친부건 하여튼 자기를 먹여주고 길러준 양육자의 존재가 항상 있어서 그들의 요구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 반항해서 행위를 결행하고 싶은데 하면 후레자식이 되는 거에요. 그게 비행위에요. 할 수가 없는 거죠. 이렇게 나를 먹여주고 키워준 사람한테 반항해서까지 이 행위를 결행하기엔 내가 너무 고상한 존재란 자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내가 희생하고 말겠다, 그래서 자기 목표를 주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가 재귀적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그런 종류의 행위를 하는데, 이제 관객 입장에서는 그런 행위를 보면 미칠 것 같죠. ‘아니, 지금 저거 뭐하는 거야, 왜 죽여야지 안죽이고 니가 죽어?’라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행위가 비행위입니다. 있어야 할 게 없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비행위를 마이너스-액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행위에 특별히 주목한 건 우리 세대랑 많이 닮아 있어서에요. 그러니까 니가 취직을 못하는 건 니가 자기 관리 못하고 스펙이 부족하고 니가 노력을 덜해서야. ‘자소서 좀 더 잘 쓰고 플픽도 다시 찍고 실력도 쌓고 토익 점수 지금 900이 넘어도 좀 더 올려봐’라는 식의 주체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하고 많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학생들 봐도 그래요. 어떤 사회 시스템이나 부조리에 대해서 항의 한다기 보다는 제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죠 뭐. 더 잘해야죠. 연애도 외모를 좀 더 잘 가꾸고 스킬도 늘리고 좀 더 잘나고 매력적인 사람이 돼야 연애를 할 자격이나 가치가 생긴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그런 내향성, 자기 비난과 착취 그런 종류의 패턴을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보여주고 있고, 작가도 그런 종류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권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대신에 수동 공격이나 공격성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는 패턴. 그런데 이런 건 19세기 이전 문학에서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현대적인 현상인데 저는 근 200년 전에 이런 현상을 어떤 어린 천재가 포착해냈다는 것, 이런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현대적인 방법으로 연출한다면 굉장히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런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목하실만한 작품은 ‘이상한 사람’이란 작품인데요. 주인공은 천재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만, 주변사람은 그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그냥 이해 못할 이상한 사람일 뿐이다. 너 진짜 이상하다. 널 정말 이해 못하겠어”라고 하는. 근데 그렇게 이상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은 거죠. 저는 지금 우리 나라 20대의 40%가 그런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는데, 그 각자가 다 이상한 거예요. 그러면 그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들이 될 수 있겠죠.
임: 좀더 연령을 낮춰서 중2정도로 갈 수 있겠네요.
신: 그렇죠. 그러니까, 중2병이라는 건 결국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주체의 자기 정립을 위한 발버둥의 단계인건데, 독일로 치면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 질풍노도)식의 어떤 반항적이고 격렬하고 숨쉴 틈 조차 주지 않는 권위적인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을 통해서 자기를 형성하고 과정이라고 본다면, 자기 형성이라는 건 슈투름 운트 드랑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아니고 제 해석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극작가로서의 레르몬토프가 많이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쉴러 초기 희곡들이 슈트룸 운트 드랑에 해당하는데, 그를 포함한 쉴러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있어요. 그 시대에 해당하는 《간계와 사랑》 같은 작품들의 영향이 거의 직접적으로 들어옵니다. 이 영향의 의미는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독일이나 러시아의 상황에서 권위적인 정권에 불만을 품은 젊은 세대들이 정치적 행위로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문학적으로 자기를 형성하고 자의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소산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임: 신영선 선생님은 러시아 희곡 연구자이시면서, 동시에 등단한 극작가이시기도 합니다. 같은 극작가로서 레르몬토프의 장점이나 매력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그 반대도 좋구요.
신: 사실 저는 극작가로서의 저의 단점을 레르몬토프와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하하. 본인이 들으면 울컥하겠는데요? 저와 제 주인공들도 나름대로 개인적인 사유로 행위의 결행을 망설이는 편입니다. 욕망은 있어요. 다 죽이든가 저지르던가 하고 싶죠. 제 희곡은 대부분 죽어야 끝나는데, 그게 살인으로 못 끝나고 자살로 끝나요 대부분. 그게 뭐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비행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저를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은 제 희곡과 이 번역본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들 해요.
어찌됐건 레르몬토프의 희곡이 공연이 잘 되지 않았고, 러시아에서도 굉장히 다루기 까다로운 작가로 취급해요. 그게 바로 비행위 때문이거든요. 연출가가 다루고 배우가 작업할 수 있는 건 행위 뿐이에요. 비행위를 어떻게 작업하겠어요? 난감하거든요. 명쾌하게 해석되지 않는 이상 비행위는 무대에서 형상화하기가 어렵거든요. 갑갑하죠. 관객들도 저게 뭐야? 그냥 저질러.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냥 내가 희생할게. 라고 하면 관객들은 미치는 거죠. 그런 종류의 답답함. 클라이맥스에서 극단적인 행위에 대한 욕망은 있어요. 저지르고 싶고 터트리고 싶은 욕망이 젊은 작가들에게 있지요. 저도 희곡을 20대 초반부터 썼는데, 사회에 대한 복수심도 물론 있고 개인적인 욕망도 있는데 극단적인 행위를 저지르기엔 자의식적인 장애가 너무 많은 거죠. 비행위의 요인이 너무 많아서 주인공은 자기 파괴의 결론을 냅니다. 이 사회와 공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남을 해칠 수도 없어요. 그래서 비행위로 결론을 내는데, 이런 식으로 10년을 넘게 쓰다 보니까 아, 여기에 한번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겠다 생각하게 됐는데, 그런 지점에 제 박사 논문이 위치해 있구요.
장점에 있어서도 공유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말발이에요. 말발과 서정성. 인정하실지 모르겠는데, 제 희곡에는 내용은 잔혹하지만 표현은 상당히 서정적인 편입니다. 레르몬토프도 시인이기 때문에 어쨌든 화려한 말발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진 않거든요. 그 긴 독백을 듣고 있다 보면 빠져 들어가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제 경우엔 요즘 시대엔 그렇게 긴 독백을 많이 쓸 수는 없지만, 어쨌든 유려한 언어,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려니 굉장히 민망합니다, 그 실제로 구어적으로 배우들 사이에서 호흡을 주고받을 수 있는 단문의, 희랍비극에서 격행대화라고 하는 것 있잖아요. 반절씩 치고 받는 대화의 긴박감이라든가,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논리의 정연함이라든가, 한국어의 아름다움, 듣는 텍스트로서의 아름다움, 시극의 가능성, 낭송했을 때 들어줄만한 것인가, 소리로서도 들어줄 만한 것인가, 그런 측면들을 많이 고민합니다.


임: 그러면 행위가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 말이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치 《햄릿》에서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신: 죽일 듯 죽일 듯 죽이지 않는 ...
임: 하나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려면,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행위가 없으니 그 자리에 무언가 다른 게 채워져야 하는 그런 관계 ...
신: 어떻게 보면 지극히 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고대 비극은 그런 고민이 없어요. 저지르죠. 복수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의문의 대상이 되지 않거든요? 근대 비극 같은 경우는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라신 같은 경우도 순수한 복수극은 없어요. 말로 하죠. 그 정념을 말로 풀어내는 거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 대신에 내러티브의 정합성은 정밀하게 따지는 편입니다. 스토리는 진행이 되요. 긴박하게 진행되지만, 주인공이 메인 액션을 하는데 많이 주저하게 되는 거죠. 고대 비극이나 아니면 양식극, 이를테면 골도니 희극들의 주인공들은 망설임 없이 딱 저지르잖아요. 음모를 꾸미고 딱 실행하고 어떤 결론을 내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숙고가 들어가는 거죠.
임: 망설임이란 거 자체가 어떻게 보면 비극적인 어떤 것 아닐까요?
신: 비극적인 계기 ... 비극의 원인이 되죠.


임: 아무래도 일반적으로 체호프를 좀 더 익숙하게 생각할 텐데요. 비행위라고 하니까, 체호프의 작품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레르몬토프가 체호프에게 영향을 미친 게 있을까요? 《두 형제》와 《세 자매》와 무슨 관계가 있는 작품인가요?
신: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두 형제’는 러시아 문학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체호프가 레르몬토프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기는 했는데요. 그건 산문 작가로서였습니다.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시대의 영웅’에 보면 ‘따만’이라는 장이 있어요. 독립된 단편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인데, 구성이 굉장히 정교하고 문장이 아름다워요. 단편소설로 수준 높은 작품인데, 체호프는 그걸 높이 평가했습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이렇게 완벽한 단편 소설은 없었다. 그리고 체호프의 유명한 단편들이 레르몬토프를 모범으로 생각한다고 하는데, 영향을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긴 어려워요. 워낙 이 단편들이 미묘한 작품들이라서요. 극작가로서는 체호프가 레르몬토프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제가 알기로는, 나온 증거는 없어요. 러시아에서 레르몬토프는 워낙 많이 연구 대상이 된 고전 작가인데, 제가 연구사를 검토했을 때 레르몬토프 전체 연구 업적에서 희곡을 연구한 분량이 5%가 안 됩니다. 너무 분석하기 힘들어요. 알려져 있지 않은 탓도 있지만, 레르몬토프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애정이나 평가를 생각하면 조금은 더 있어야 되는데, 지나치게 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일차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텍스트를 소개하고, 기본적인 주석을 하고, 그리고 비행위와 반행위에 대한 저의 주장은 어찌 보면 그 다음 단계에서 해야 하는 작업이지만, 박사논문이 요구하는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저의 독자적인 작업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 세 가지 작업, 텍스트의 정밀한 독해와, 주석과, 적용 및 해석에 대한 부분까지 이것저것 다 하려다 보니까, 전부다 미비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웃음)
임: 좋게 말하면, 블루 오션을 찾으셨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거 같구요. 하지만, 햄릿이 말한 것처럼, 풀이 자라기 전에 말이 굶어 죽는다고…
신: 저는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임: 그전에 풀이 빨리 자라길 다 같이 기원하면서요. 이제 간단한 질문 두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러시아 희곡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호칭이 고약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누가 누구인지, 등장인물이 열 명이면 본문에는 한 삼십 명이 나오는 거 같아요. 그것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저만 하더라도 체호프를 두 번, 세 번 읽으니까 그제야 아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었구나.
신: 걔가 걔였든가, 이제
임: 초보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신: 러시아 인의 인명 체계는 러시아 문학에 들어가기 위한 첫번째 문지방인데, 그 문지방이 조금 높아요. 체계가 이렇습니다. 세례명-부칭-성 이에요. 그래서 체호프라고 하면요. 안톤-파블로비치-체호프이에요. 체호프는 성입니다. 안톤이 세례명이에요. 파블로비치 이게 이상한 건데, 아빠이름이 파벨이란 뜻입니다. 파벨의 아들 안톤이고 체호프 집안 사람이에요. 여자의 경우에는, 누구로 할까요? 궁금한 여자 있으세요?
임: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가져간 소트니코바?
신: 소트니코바 같은 경우엔 예시가 약간 비호감 아닌가요? 소트니코바는 성이죠…. 제가 그 친구 이름까지 알아야 하나요? 남성형은 소트니코프가 됩니다.


(질문자의 머리 속에 떠오른 또 하나의 이름은 샤라포바였다. 이 경우엔 세례명까진 꽤 알려져 있으나, 부칭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통과. 인터뷰를 끝내고 복습 삼아 소트니코바의 이름을 찾아 보았다. 아델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소트니코바, 다시 말해 소트니코프 집안의 드미트리의 딸 아델리나이다. 이분은 요즘 뭐하고 계시는지?)


신: 제가 많이 예로 드는 건 도스토예프스키 부부입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에요. 미하일 아들 표도르. 그리고 마누라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그러니까 그리고리의 딸이에요. 아빠이름이에요. 그다음에 스니트키나. 스니트킨 집안의 여자.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와 결혼했으니까 도스토예프스카야라고 해서 여성형 어미가 붙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에요. 표도르는 가족이나 친구, 가까운 사이에서 페쟈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안나 같은 경우는 아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에게 쓴 편지에 보면 아냐라고 호칭을 해요. 그리고 가장 마지막 단계인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이게 호칭입니다. 세례명하고 부칭을 붙인 게 정중한 호칭이에요. 이를테면 서로 인사를 할 때, 안녕하십니까, 전 OO입니다. 당신의 이름과 부칭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하면 저는 OO입니다가 되는 거죠. 지인들 사이에서 부르는 정중한 호칭이에요. 반말은 아니고, 그런데 부칭을 알고 있고 이름과 부칭을 붙여서 부른다는 건, 안면이 있는 사이란 뜻이에요. 그리고 성만 부른다는 건 중립적인 호칭이에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번에 새로운 소설을 냈다고 할 때는 그냥 성만 쓰는 거죠. 그런데 요즘 제가 러시아에 가서 상대방에게 부칭 물어보면, 질색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 그러세요. 그냥 세례명만 불러주세요. 이렇게 되더라구요. 세례명은 대부분 서양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성인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그럼 카츄샤 같은 경우는 뭐냐, 여러분이 괴로워하시는 <갈매기>의 주인공, 콘스탄틴, 코스쨔라고 부르죠. 이게 이 애칭이에요. 콘스탄틴 트레플레프에서 트레플레프가 성이구요. 니나 자레예치나야에서는 니나가 이름인데, 니나 자체가 애칭입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를 나스타샤, 나타샤 … 이렇게 점점 짧아지는 거죠. 그리고 애칭이 있고 비칭이 있어요. 약간 하대해서 부르는 건데요. 예까쩨리나 여제 아시죠? 예까쩨리나가 풀네임 세례명이고 까쩨리나, 까쨔 까지 줄어듭니다. 그리고는 카츄샤, 카첸까, 까찌까 이런 식으로 비칭 라인으로 쭉 가요.
임: 그럼 짧아지는 게 점점 ...
신: 격의가 없어지는 거죠. 그러니 몇 십 명 처럼 보이죠. 한 사람인데.
임: 그렇다면은 《갈매기》에서 콘스탄틴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고, 꼬스쨔라고 부르기도 하고 ...
신: 어머니는 꼬스쨔라고 부르죠.
임: 부르는 방식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신: 그렇죠. 우리는 《부활》에 나오는 그 인물을 카츄샤라고 기억하잖아요? 그건 그 인물의 신분이 낮다는 뜻이에요.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여주인공인데, “까쩨리나 이바노브나가 안에 계신가요?” 이렇게 물을 때 어감을 아시겠죠?
우리로 치면 존댓말에 해당하는, 하인들이 들어와서 “까쩨리나 이바노브나, 누가 오셨어요.” 이 정도의 어감인거죠.
임: 보통 공연할 때 보면, 이름이 너무 어려우니까 다 자르고 하나로 통일해서 사용하는데, 그걸 잘못 선택하게 되면, 이런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들었을 때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군요?
신: 그렇죠. 줄이는 건 좋은데, 원래 뜻이 무엇인지는 알고 줄이는 게 좋겠죠.
임: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신: 이것만 넘어 오시면 재미있는 게 많은데 ...
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아마도 이 문제 때문에 중간에 덮는 분들 많을 거에요.
신: 삼분의 일쯤에서 거의 낙오하시죠.


임: 마지막 질문은, 현재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로서 공연을 준비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준비 중인 공연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신: 지금 번역본에 수록된 작품 중 마지막에 《두 형제》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메인 캐릭터는 다섯 명, 하인 한명 해서 배우 여섯 명으로 하는 소극장 작품입니다. 내용은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첫사랑, 남편, 불륜남이 한 여자를 놓고 싸운다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첫사랑과 불륜남은 형제지간입니다. 이 두 사람이 ‘두 형제’구요. 이 형제의 아버지, 뒷목 잡으시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거의 아침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 이상의, 영원한 막장이 연출될 거구요. 근데 배우들하고 작업해보니 배우들이 “이건 내 얘기다. 난 이 역할은 정말 해봐야 겠다. 나 그거 뭔지 알아.” 이래서 연습실 상황은 거의 난장판입니다.
임: 이걸 안단 말이에요?
신: 저는 모르겠는데 이 친구들은 알겠다네요. 이 작품을 저희 극단의 첫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구요. 첫 작업으로는 작년 겨울에 라디오 드라마를 한 편 같이 녹음했습니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연기 톤을 서로 맞춰가는 상황입니다. 연출 컨셉은 현대적인 ‘당구장’입니다. 당구장에서 큐를 들고 벌이는 다섯 남녀의 자존심 싸움이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공감하시는 분 많을 거 같아요.
임: 언제쯤 공연을 생각하고 계신지?
신: 올해 하반기나 연말, 늦어지면 내년 초까지도 보고 있는데요. 그전에 여름엔 현대무용단하고의 협업을 구상하고 있어요. 작품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희곡인데요. 젊은 연출가 메이에르홀드에게 헌정되고 주연과 연출을 겸했던, 굉장히 과격한 실험극입니다. 저는 컨템포러리 댄스와 접점이 있다고 해서, 어떤 정형화된 춤이 아니라 신체의 자연적인 컨택, 접촉 즉흥(Contact Improvisation)이라고 부르는 건데요, 그런 기법을 써서 한 안무가와 공동연출을 계획하고 있어요. 그런 건 현대 무용이나 현대 연출의 실험적인 작업으로 재미있을 거 같아요.
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공연일정이 구체적으로 잡히면 그때 다시 한 번 인터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인터뷰, 그리고 러시아 문학 입문 원포인트 강의까지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신: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2015년 3월 16일 월요일

2015년 3월 장바구니

글쓴이_산책

설연휴, 지난 장바구니에서 소개한 대로 <해롤드&모드>와 <비극의 일인자>를 보았습니다. 새해는 시작하는 기분을 내고 싶었는데 죽음에 대한 연극을 하루 걸러 두 편 관극해서 그런지, 생이라는 것이 그저 허무하게, 연극의 허상이 그저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강하늘 배우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고, 박정자 배우는 정말 귀여운 팔십 노인 그 자체였으나, 죽기 딱 좋은 80세 생일 곱게 죽음을 맞는 모드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소년 해롤드의 이야기는 현실과 너무 먼 것이었습니다. 설 연휴에도 요양원에서, 혹은 홀로 집에서 지리한 생을 이어가는 노인들을 생각해봤습니다. 모드처럼 자유롭게, 세상의 질서나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노인들이 얼마나 될까. 모드처럼 자신의 죽음을 아름답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비극의 일인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고일봉이 죽은 아내로부터 전해 듣는 충격적인 두 가지 사실은 “자신이 죽는 것으로 썼던 극중 인물이 실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과 죽었다고 생각한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생각한 "고일봉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식스 센스 급 반전은 공연 중반 이후 지루하게 예측되었고, 특이하게 삽입된 연극적 표현들은 어떤 의미를 포험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툭툭 튀어나오며, 극에 몰입하는 것도 그런 장면을 통해 다른 무엇을 상상하는 것도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연극은 허구이지만,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면서 실제감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오로지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 작품이었습니다. 관객들은 그저 그들의 연기, 이야기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진 후 내쉰 한숨으로만 그 심정을 대변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꾸물거리다 3월 작품 예매가 늦었더니 보고 싶은 작품은 두 작품 뿐이네요. 부디 고르고 고른 이 작품들이 깨달음과 즐거움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뿔 자르고 주인 오기 전에 도망가 선생> 3월 12일 ~ 3월 29일,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정보 보기

남산 예술 센터의 2015년 첫 작품입니다. 포스터에서도 느껴지듯이 B급 정서를 오롯이 보여줄 것 같습니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 들며 극중극중극을 이어간다는 소개는 이제 익숙한 수사지만, 이 작품은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지(또 성공할지) 궁금합니다. “굉장히 유치하고, 과장된 새로운 장르”, “만화보다 더 만화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형식을 통해 연극적 유희성을 획득하는 한편, 관객들에게는 사유의 계기를 제공하고자”한다는 소개도 마음에 드네요.

<3>, 3월 13일 ~ 3월 29일, 국립극장 달오름 

공연정보 보기

초연도 재연도 놓쳐 아쉬운 마음이었는데, 재공연을 한다는 소식에 예매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호평을 받는 작품인데, 어떤 점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는지 저도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사실 2013년 <안티고네>에서 만난 신구 배우의 연기는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를 오래도록 지킨 분들이 보여줄 그 깊이를 기대합니다. <소뿔>과 달리 연극 본연의 표현과 관습(convention)을 유지하는 작품일 것입니다. 두 작품의 관극 경험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