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타, Educating Rita
공효진, 강혜정의 더블캐스팅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리타>의 원제는 Educating Rita로,대체 언제 결혼했는지 26세에 이미 주부이며, 미용사인 리타가 평생 교육원 수업을 들으면서 변화하는 이야기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타의 촌스러운 드레스와 화장은 품위 있는 그것으로 바뀐다(놀랍게도 공효진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품위 있는 옷을 갖추어 입었을 때는 아름답다. 연말 연시 많은 관객에게 그녀의 모습은 다이어트, 운동 계획을 세우게 했으리라). 또한 배움이 쌓일수록 삼류 작가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했던 리타는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게 되며, 대학생들과 캠퍼스에 앉아 자유롭게 문학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 집에 초대 받았을 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그녀가 이제는 프랑스로 떠나자는 초대를 받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화한 것이다. 리타는 배움을 통해 변한다. 리타의 변화가 값진 것은 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고, 프랭크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스스로 이뤄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리타의 변화는 무기력하게 술로 세월을 보내던 교수 프랭크마저 변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상생일 것이다. 무대 위에서 자신의 무지, 무기력함, 허세를 드러내고, 서로 싸우던 그들은 두 시간 내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쓴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무언가 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 다다르는 것이 내 삶을 꾸려나가는 데 가장 어려운 도전인 것 같다. 그래서 지루하고 장황한 토론 속에 숨겨진 그들의 분투가 마음에 깊이 남는다.
다른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이 작품은 1991년에는 <리타 길들이기>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초연되었다. 연극열전시리즈 중 한 편으로 2008년 재연되기도 했다. 초연작과 재연작 모두 <리타 길들이기>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다. ‘Educating’을 ‘길들이기’로 번역한 것은역자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까? 천방지축 소녀가 지적이며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가는 과정과 그것을 이끈 남자 주인공(남성, 제도) 서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 아닐까(무지한 남성과 여자 교수의 이야기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불끈 의문이 솟지만 이 글에서 성 논쟁까지는 가지 말자). 그러나 앞서 서술한 것처럼 리타는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다. (교육학 개론 시간에 배울 법한 이야기지만) 프랭크는 리타의 내면에 잠재된 욕구, 의지를 밖으로(ex) 끄집어 내준(ducare) 교육자이자 동반자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Educating을 번역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해도 <리타>라는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든다.
그러나 프랭크가 리타를 길들이고 싶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조금 남는다. 리타가 변화할수록 프랭크는 그녀의 변화에 질투를 느끼며, 그녀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와도 헤어진 프랭크가 리타에게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리타의 열정과 저급한(혹은 비속한) 취향이 정의 상관관계를 이루는 것도 아닐 터인데, 그녀의 예전 모습에 애착(또는 집착)을 보이며, 이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삼류 소설가의 작품을 상찬하는 프랭크의 욕망은 무엇일까? 리타의 욕구가 직설적으로 무대 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동안, 프랭크의 욕망은 (술을 사랑했던 그의 욕망까지도) 숨겨지고 사그라진다. 프랭크도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에게 도달했어야 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 한계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아쉽다.
(유명) 배우의 무대 연기
공효진 배우의 연기는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결국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지해수'를 떠올리게 했으나, 리타라는 인물과 그녀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과거에도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을 관극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나의 경우, 무대 위의 배우들도 어색하고, 객석에 앉은 나도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 민망했던 경험들이 떠 오른다.
TV나 영화에서 연기로 호평을 받는 배우들이 무대에 설 때,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그들의 연기력이 문제가 아니라 스크린 연기와 무대 연기 사이에 (나름대로)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스크린 연기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프레임 밖에 있는 배우는 연기를 지속하지 않아도 되며, 카메라, 편집, 스크린에 의해 매개되어 감상자에게 도달할 때까지 그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관객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아주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배우들의 작은 동작이나 표정만으로 감정, 극적 표현을 전달하기 쉽다. 그러나 무대는 그와 다르다. 배우는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며 가만히 서 있다고 해도 무대 위에서 연기를 지속해야 한다. 또한 그 가운데 객석과 호흡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영상매체에 비해 배우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과장된 표현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TV에서 자주 보던 배우를 무대 위에서 만나는 순간, 배우도 관객도 서로 견디기 힘든 경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리타>로 돌아와보자. 많은 관객들은 공효진 배우와 강혜정 배우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점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며, 나 역시 그러했다. 무엇보다 그녀들의 연기가 너무 궁금했다. 과연 그녀들이 무대 연기를 어떻게 해낼 것인가? 공효진은 프랭크(황재헌 분)와 무대를 등지고 서 있어야 할 때, 혹은 별다른 대사나 행동 없이 무대에 남아 있어야 할 때에 무대석(무대 위의 일부 좌석)에 앉은 관객들과 눈을 맞추거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유를 보여주었으며, 특유의 발랄한 연기로 부자연스러워 질 수 있는 과장된 무대 연기를 자연스럽게 감추었다. 특히 무대석은 배우와 객석의 거리를 좁혀주며, 무대의 크기마저도 줄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08년 재연 작품보다 훨씬 줄어든 무대의 크기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최소화할 수 있게 했다. 공효진 뿐 아니라 프랭크 역의 황재헌 역시 무대 연기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랭크 역에 캐스팅된 배우가 건강상의 문제로 공연 직전 하차하게 되면서 연출이 대신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좁은 무대는 무대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두 명의 배우가 무대 위를 움직이며 만들어 낼 수 있는 부자연스러움을 사전에 차단해준다. TV나 영화와 (그나마) 익숙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거의 가만히 서 있는 배우들 대신 무대 자체가 회전하거나,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마저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조명의 변화 등은 무대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공효진의 연기, 연출의 전략은 무척 영리했던 것 같다(강혜정의 연기도 그랬으리라).
앞서 밝혔듯이 기대보다 배우의 연기는 훌륭했고, 공연의 다른 요인들은 영리했다. <리타>로 인해 공효진 배우의 다른 무대 작품, 또 다른 유명한 배우들의 무대 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