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1일 일요일

《비유로 말하라》 : 말함과 들어줌의 새로운 역학

《비유로 말하라》, 유진 피터슨, 양혜원 역, IVF, 2008.
-말함과 들어줌의 새로운 역학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우리는 누구나 전적인 발화자 혹은 청자가 될 수는 없다. 때로는 스스로 발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청자가 되어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는 성장기에 줄곧 발화자가 되는 편을 좋아했다. 특히 연애를 할 때에는 가관이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기만 하면 연애를 하곤 했는데 여기에서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건 다시 말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을 말했다.

  그런데 차츰 성장하면서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 정성을 다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인 만큼 나의 이야기에 힘을 실어 발화하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몰입력이 깊어지면서 상대에 대한 친밀감과 공감력이 함께 깊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여 이제는 어느 편이 이야기를 하고 어느 편이 들어주는가라는 일방적인 관계의 지평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얼마나 들어줄 만큼 깊은가 그리고 또 나는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 발화할 마음이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말함과 들어줌, 이 두 행위 사이의 일방적인 방향성 혹은 두 행위 사이의 양적 차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이 두 행위 사이의 쌍방적인 행위 자체에도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는다. 말함과 들어줌, 이 두 행위 사이에 형성되는 질적인 깊이, 너와 나 모두가 ‘아닌’ 우리 사이의 것에 집중한다. 오히려 우리보다는 우리의 ‘사이’, 언어보다는 ‘비’언어가 더욱 신뢰할 만한 것이다.

  이 생각에 도달하니 이야기를 듣는 것과 이야기를 하는 것, 그 행위 사이에는 그다지 큰 차이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야기를 주고받음, 그 안에서 형성되는 충일된 에너지, 어떤 새로운 숨결의 창조, 그것에 몰입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한 에너지에 집중하며 대화를 하고, 강의를 하고 나면, 혹은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나면, 너와 나 사이의 구분, 나와 세상 사이의 구분이 조금 볼품없이 부식되어 있어서 좋다. 관계들 사이의 장막이 남루하게 낡아져 있어서 좋다. 그 형편없는 남루함, 초라함과 낮아짐이 좋다. 그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이 맑아져서, 그럼으로 세상과 나, 존재와 가치를 둘러싼 구분들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신뢰할만한 언어의 형태는 (이를테면) 춤이다. 춤은 순간순간 변화하면서도 변화하는 형체조차 어떠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순간 안에서 솟아오르며, 솟아오른 그것은 오로지 공간과 기억 속에서 이내 사라지고, 다시 다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존재하나 끊임없이 사라지는 춤이라는 에너지는,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발화 에너지이리라. 춤의 에너지를 닮은 또 하나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시(詩)일 테다. 시와 춤의 공통점은 발화자와 청자, 주체와 상대가 (일상 언어를 주고받을 때의 주체와 상대에 비하여) 덜 가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춤 혹은 시로 소통하는 두 명의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두 명의 사람은 정작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 두 사람이 빚어내고 있는 춤 혹은 시가 돋보인다. 아니 우리 눈에 돋보이는 그것은 춤 혹은 시도 아니며, 춤과 시가 빚어내는 공기의 밀도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춤과 시가 가장 온전하고 훼손되지 않은 절정의 소통 에너지라면? 만일 소통의 가장 이상적인 실체가 춤과 시라면? 그토록 소통하고 싶어 하고, 그토록 이해받고 싶어 한 우리의 종착지대가 춤과 시라면? 이 책은 지금의 시기에 내가 당도한 소통과 진실과 화해와 가치의 ‘절정 지대’에 새로운 차원의 길을 제시해 준다. 유진 피터슨이 <비유로 말하라>에서 고찰하고 있는 텍스트는 성경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고찰하는 발화란 인간의 육성에 깃드는 구술 언어의 힘, 그 힘조차도 초월하는 (신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고찰하는 들어줌이란 끊임없이 구조화되지 ‘않은’ 채의 이야기들, 마치 여행 중의 발걸음처럼 자연스럽고도 불확정적인 것들 모두를 걸러냄 없이 받아주는 흔연한 들어줌이다. 말함과 들어줌의 역학 안에 신이 개입되자, 춤과 시의 지대 안에서 맛보았던 소통의 최대치가 다시 한 번 남루하게 부식된다. 황홀함이 초라함이 되는 순간. 최대치라고 믿었던 에너지의 정밀함이 흐리멍덩한 공기가 되어 아무렇지 않게 주변의 것들과 비로소 섞이는 순간.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맑아져서 지금까지의 구분과 정의,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으나, 인간이 신을 바라볼 때(혹은 신을 향할 때) 신을 닮을 수는 있다. 그리하여 신의 기운에 전염된 눈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것. 그것은 비단 예술만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시선이다. 학문과 예술과 삶에는 ‘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시선의 감각이 필요하다. 그 감각을 놓치지 않고 삶을 지속하는 일은 그것의 종착점을 신이라는 단어로 발설하는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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