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최정화-총천연색>
여전히 바쁘고 화려하지만 어딘가 유독 쓸쓸한 서울의 가을, 문화역서울284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꼭 닮은 전시가 열렸다. 최정화 작가의 <총천연색(總天然色)>이다. 그는 누군가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시선’을 주지 않으면 지나치거나 버려질 것들로 꽃을 피워냈다. 편하게 말하자면 ‘잡동사니’들로 말이다. 그래서 처음 전시를 보면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든다. 너무 흔한 플라스틱 접시, 빗자루, 장난감 왕관 같은 사물들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그럴싸한 작품명으로 조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어쩌면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기 보다는, 작가처럼 세상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열심히 보태어 감상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았다. 애초에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물건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든 사람, 사는 사람, 선물하는 사람, 버리는 사람, 그걸 다시 주워오는 작가까지 각자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 해본다. 그러자면 많은 사람과 삶과 이야기가 끌려 들어온다. 어렴풋이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간의 무수한 관계와 삶의 역동이 느껴진다. 이렇게 ‘별게 아닌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관객의 몫인지도 모르겠다.<꽃의 만다라> |
국립현대무용단 <불쌍>
전시를 보고난 며칠 뒤, 최정화 작가의 설치 작품을 전시장이 아닌 ‘무대’ 위에서 만났다. 국립현대무용단과 최정화 작가가 ‘콜라보레이션’을 한 것이다. 이 둘의 만남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냈을까? 전시장에 있을 때와 무대에 있을 때 그 작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재치 있는 공연 제목 <불쌍>은 종교적 상징물인 ‘불상’이 여러 세대와 문화권을 이동하며 일상 속에서 고유의 신성함을 잃고 변형되어 속되게 사용되는 ‘불쌍’한 처지에 놓였음을 말하는 언어유희이다. 이 공연이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불상의 변형은 여타 문화, 전통, 종교, 인물 등의 ‘세속적인 상품화 및 변형’을 함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공연에서조차 불상은 불쌍하게 또 하나의 ‘기호’이자 ‘은유’가 된 것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프랑스 파리의 ‘부다 바(Buddha Bar)’
<사진출처: Buddha Bar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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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상징물을 콜라주하는 것은 시각미술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무대 위에서 무용수의 몸동작으로 콜라주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만들어냈다. 전시장이나 일상에 놓여있을 때와 달리, 무대 위에서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 움직임, 리듬, 속도감이 더해짐으로써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가 오브제에 덧입혀지고, 역으로 오브제의 성격과 영향에 따라 사람의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상호작용이 생겨났다. 사물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몸’과 ‘오브제’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질수록 불상들은 더 초라해졌다. 움직이는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고정된 조형물의 대비 때문이기도 하고, 무용수들이 조각에 신체를 겹쳐서 발을 빨리 움직인다든지 하는 동작을 함으로써 우스꽝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서로 전혀 연관성 없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 사이에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관계들이 생겨나고, 달라지고, 없어졌다. 예를 들면 캐릭터 가면을 쓴 무용수들의 몸이 엉키고 경합을 벌이면서 서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도 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지거나 서로의 몸에 매달림으로써 위아래가 뒤집어지기도 했다. 이를통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를 만드는 지속적이고 단일한 관계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고 서로 교환되는 유동적인 관계가 만들어졌다.
무대에 특정한 소도구나 오브제를 등장시킨다면, 여기에도 ‘무용수’나 기타 요소들 못지않은 그 오브제만의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불쌍>에서 등장하는 최정화 작가의 설치물들은 어떤 목소리를 냈을까. 최정화 작가는 이번 전시 기간에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과 함께 소쿠리를 이용하여 빛을 조절할 수 있는 거대한 등을 설치했는데, 그 형형색색의 소쿠리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또 다른 성격을 보여주었다. 무용수들은 소쿠리를 ‘던지고, 몸에 쌓고, 징검다리처럼 밟고 지나가기, 무대에 쌓았다가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등’ 하나의 오브제를 한 가지 방식으로 활용하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로써 오브제의 성격이 풍부해졌고 동시에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리듬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무대장치 없이도 그 자체로 화려한 오브제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사진제공: 국립현대무용단 |
스티로폼 도시락을 연결해 만든 무대 배경도, (콜라보레이션을 위해서 억지로 무대에 맞지 않는 오브제를 우겨 넣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등퇴장로를 만들어주는 동시에 공연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조명이나 프로젝션된 영상 없이는 드러나지 않지만, 스티로폼 도시락들의 높이가 서로 다르게 설치되어 영상이 투사되었을 때 입체감을 만들어내었고, DJ의 음악이 어우러져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상의 사용을 조금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오브제만큼이나 무술, 브레이크 댄스 등 여러 가지 다른 움직임들이 안무에 활용되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공연으로 직조되기보다는 나열만 되는 듯한 인상이었다. 재치 있는 제목과 ‘하이브리드 놀이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으나 잘 놀았다기 보다는 경직된 느낌이었다. 라이브 디제잉이 무대 한 구석에 있으면서 디제잉 다운 면모를 살리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국립무용단이지만 조금 더 젊은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그래서 관객도, 비록 앉아있지만, 신나게 놀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은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오히려 서로 독이 되어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데, 그래도 <불쌍>은 무용과 시각미술, 음악, 의상 등의 콜라보레이션이 서로를 보완하며 따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새로움’을 만들어 냈다. 더욱 과감한 시도를 기대한다.
공연 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swQo6TQFj28
*이 글은 문화역서울284 모니터링에 게시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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