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6일 금요일

2014년도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만난 공연들

이예은의 푼크툼 너머에

저도 한 번 써 봤습니다. ‘연극人’을 따라해 본 꽃점평 (그러나 꽃점은 없습니다. 그리고 쓰다 보니 다소 길기도 합니다.)

# 두산 아트랩 <나는 이런 꿈을 꾸었다>, 윤성호 작, 전진모 연출, 두산 스페이스111, 8/28~8/30 

(+) 낭독이 이야기로, 이야기가 이미지로, 이미지가 순간으로 전환되는 지점들. 찰나의 순간을 넘어서자, 작품 속 망연한 표현들이 희미한 연기를 뚫고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무대 위의 이미지적인 몸체가 ‘분명히’ 맞닿는 순간들을 보았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그 희미한 공기 속에 비계처럼 끼어있는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엇갈림.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막연하나, 그것을 표현해내는 이미지들은 정확하다.  

# <아버지를 찾아서>, 이승헌 연출, 옴브레 음악 감독, 게릴라극장, 8/28~9/7 

(+) 인간에게서 상식이라는 장치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흔쾌히’보여주는 태도가 박력 있다.
(+) 땀으로 젖은 두 배우의 몸, 그 촉각적 기억. 그리고 어느 순간에 컷을 잘라도 인상적인 스틸 이미지가 나올 법한 두 배우의 끊임없는 살아있음.

# <래빗홀>, 데이빗 린제이 작, 김제훈 연출,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8/21~9/6 

(+) 연극과는 가장 상관이 없는 먼 타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연극의 첫 장면을 시작했던 방법. ‘그’ 사건의 가장 먼 데에서부터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방법. 가장 평범해 보이는 듯한 순간에서부터 매 장면을 시작했던 방법. 바로 이 방법들에 작품의 시선이 스며있다. 마치 ‘그’ 사건이 타인의 것이었기를 바라는 이들의 시선. 고통을 일인칭화하는 것의 지독한 어려움.
그래서 결국 장면들의 말미에는 ‘그’ 고통이 피할 곳을 찾다가 나의 고통으로 안착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이 가만히 병들고, 우묵한 슬픔을 응시하는 모습들.
신의 세계에서마저 위안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온전히 또 다른 우주를 꿈꾸지만... 그래서 제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눈에만 보이는 ‘래빗홀(토끼굴)’이지만... 그러나 이 작품 속에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래빗홀에 빗대어지는 어떤 보이지 않는 통로이기보다, 강애심 배우가 힘겹게 읊는 한 장면 속에 녹아 있다. 지독한 고통을 주머니 속의 벽돌처럼 지니고 살아 온 그 세월의 어려움을, 지극히 어렵게 쓰다듬으며 “...좋아” 라고 내뱉는 그 한 마디의 대사 속에. 지극한 고통을 쓰다듬어 온 세월의 지극한 무게,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 태도의 힘.  
(-) 오로지 대본의 훌륭함에 의존하고 만 연극.    

# <남산에서 길을 잃다>, 백하룡 작, 김한내 연출, 국립극단 소극장 판, 9/16~9/28 

( ) 삼국유사프로젝트라는 기획의 타이틀과 이 공연의 사이, 혹은 삼국유사라는 기획의 소재와 이 공연의 근저에 놓인 진심의 사이, 보여주고자 하는 순간과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사이, 그 사이가 너무 멀다.

# <반신>, 하기오 모토 만화 원작, 노다 히데키 작/연출, 명동예술극장, 9/20~10/5
(+) 뇌리에 부딪칠만한 대사의 율동감. 그것이 배우들 몸의 율동감으로, 무대의 미술적 율동감으로 이어지면서 연극의 세계가 마치 마리아와 슈라의 움직임처럼 한 데 손을 맞잡고 돈다. 두 개의 나선이 소용돌이치며 서로를 감싸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빗겨간다. 늘 붙어있으면서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미지의 아연한 리듬감
(+) 이렇게 전반적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끊임없이 지속되는 코믹한 공기의 탁월함
(+) 슈라 : “고독이라는 거 말이야, 사실은 좋은 거지? 그렇지?”
(-) 마리아와 슈라를 잇는 의상이 보다 탄력적이고, 상상력을 만발케 하는 소재였더라면...
(-) 연극이 슈라를 상실한 이후, 무대에 보다 적막감이 흘렀더라면... 슈라의 상실을 보다 상실‘감’으로 채워 넣었더라면... 후반부에 개입된 환타지는 지나친 감이 있다.

#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이경성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9/13~9/21 

( ) 작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을 둘러싼 곳에는 분명히 진심과 따뜻함이 느껴지는데, 그 시선이 작품에 착지하는 속도가 자꾸만 더딘 느낌
( ) 자꾸만 ‘자연스러움’을 읽으려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것이 의심된다.
( ) 애순씨가 등장하는 순간의 앞뒤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났으면...

# <먼 데서 오는 여자>,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 게릴라극장, 9/12~9/28 

(+) 망각과 기억을 둘러싼 이야기라기보다는. 망각을 둘러싼 기억과 기억을 둘러싼 망각, 그것의 사이를 다루는 이야기
(+) 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보듬어내는 말들의 부피, 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억으로 더듬어내는 아픔의 깊이, 대본에서 우러나오는 연극성, 연극성을 초월하는 대본의 힘
(+) 11년 전의 과거로 굳이 거슬러 올라가서 지금의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함 속에 숨겨진 것의 의미

2014년 9월 6일 토요일

9월의 장바구니

산책

독자 여러분 안녕하셨나요? 모니터를 앞에 두고 인사를 건네자니, 무척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7월, 8월 연재를 쉬었기 때문에 혹,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 몰라(정말 아름다운 상상이군요) 인사로 시작합니다. 답답한 세상 일들은 여전하지만,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고 하늘이 높아지니 조금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지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공연을 검색하고 예매를 시작했습니다.

<즐거운 복희>, 8월 26일 ~ 9월 21일, 남산 예술 센터 



어떤 사람을 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복희에게 슬픔이 강요됩니다. 줄거리를 살짝 살펴보니, 그녀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제목처럼 복희는 슬픔을 벗어내고 즐거움을 느끼며 홀로 설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호숫가 펜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밝힐 때, 혹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드러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탐닉하고, 소비합니다. 교통사고도, 화재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도 이야기가 자꾸만 덧입혀집니다. 사람들은 인물과 성격을 창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슬픔이 강요되고, 누군가에게는 우울감, 또는 넘치는 희망이 강요됩니다. 보고 나와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산 예술 센터의 원형 무대에 구현될 호수, 복희 이야기를 넘어서서 작가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을 기대하고 극장에 갑니다.

<위키드>, ~ 10월 5일, 샤롯데씨어터 

 

영국 여행에서 뮤지컬 관람을 빠뜨릴 수 없지요. 가난한 여행자였지만 당일 할인 찬스를 이용해서 <위키드>를 보았습니다. 극장 내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주는 것에 즐거워하고, 작품에 감동해서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위키드>가 한국에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니라 함께 여행 중이던 친구는 다른 작품을 보러 갔었는데, 다음 날 친구를 데리고 가서 한 번 더 <위키드>를 보고 왔습니다.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한참 동안 뮤지컬 넘버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아시아 팀이 대한했을 때 한 번 더 작품을 보았는데, 그때는 처음과 같은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국인 캐스팅으로 진행될 때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 시작된 작품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꽤 놀라운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작품을 찾아주나 봅니다. 추석 연휴에 제공되는 할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매했습니다.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들이 어떨지(번역은 어떨지), 한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장 인물은 원작과 어떻게 같고 다를지 궁금합니다.

<노란 벽지> 9월 25일 ~ 9월 27일,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서울 국제 공연예술제(SPAF)가 9월 25일 시작됩니다. 총 21편의 작품이 공연되는데, 다양한 해외 초청 작품 뿐 아니라 극단 목화와 연희단거리패의 작품 등 국내 초청 작품들도 기대해 볼 만 합니다. 각 작품의 공연 기간이 매우 짧고 이미 조기 예매 등이 진행된 터라 티켓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관심 있는 작품에 좌석이 남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예매하세요! <노란 벽지>는 SPAF의 첫 작품으로, 동시대 최고 연출가로 평가되는 독일의 케이티 미첼의 연출작입니다. 벽지 속에 어떤 존재가 갇혀 있다고 믿는 주인공은 어떻게 될까요?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조인성 분)같군요!) 라이브 필름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방식이 그녀의 이야기와 감정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리라 기대합니다. ㉦

2014년 9월 5일 금요일

인터렉티브와 미래의 연극

2014 두산아트랩 리뷰 8
에스티

약 한 세기전 전기 조명이 처음 등장했을 무렵, 아돌프 아피아는 장차 조명이 연극 무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지 내다보았다: "라이트는 거의 기적적인 유연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밝기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으며, 팔레트처럼 색깔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그것은 음영을 창조할 수도 있고, 음악이 그러는 것처럼 공간에 진동의 조화를 퍼뜨릴 수 있다. 우리는 조명에서 공간의 표현력 전부를 추출할 수 있다. 물론 그때 공간은 연기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1954, 파비스 <연극학 사전>에서 재인용). 다른 곳에서도 아피아는 조명의 "무한히 크고 다양한 효과"를 강조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전기 조명은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피아는 무대의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갖춘 미래의 연극을 구상했고, 크레이그 역시 무대 위에서의 이미지, 동작, 리듬 등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이 연출가에 의해 총체성을 획득한 새로운 예술을 기대했다. 그들의 시대에 그것은 기대에 불과했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꾼 미래가 우리에게는 이미 현실로 자리하고 있다.

카입/황정은/이경화가 함께 만든 "타토와 토"를 보면서 우리 역시 아피아나 크레이그처럼 미래의 연극을 꿈꾸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물론 이번 공연 제목 앞에 "다원"이란 레테르가 붙어야 한다는 건 아직 아피아/크레이그의 미래 조차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무대 예술이 다원적 요소들의 종합 혹은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다원연극"이란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다원이란 접두어는 여전히 연극이 텍스트와 배우의 연기 중심의 예술임을 방증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에서 시도되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는 미래 연극에서 시각적 요소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지 내다보게 해주는 기회로는 충분하다. 공연 중간에 하드 웨어 문제로 잠시 중단 되었던 것도 불편하기 보다는 그러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말끔한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는 점에서 공연의 일부같이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 같은 공간에서 터져버린 조명기는 상당히 시대착오적이다.

우리가 좀더 나이가 든 미래에 보게 될 연극에서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현란한 CGI(computer-generated imagery)가 사용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측면에서 영화의 제작 환경이 연극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이다.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방식과는 별개로 배우가 실제로 연기하는 환경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스틸컷으로 보게되는 영화 제작 현장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최종적으로 보게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배경은 온통 초록색 스크린 (크리스토퍼 리브가 수퍼맨이던 시절만 해도 파란색이었는데, 헐크가 만들어지는 지금은 초록색이다) 으로 뒤덮여 있고, 배우들은 텅 빈 공간에서 앞으로 후반작업에서 채워질 그 영상들을 상상하며 연기를 펼친다. 이순신 장군에게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고 하나, 명량은 단 세 척의 배만 제작한 다음 복사하기와 붙여넣기--훨씬 더 복잡한 실제 작업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로 채워넣었다고 한다. 10여년 전에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 빌>이 나왔을 때, 연극 공부를 갓 시작한 나로서는 그 영화가 무척 흥미로웠다. 영화가 마땅히 보여줘야 할 사실적 일루젼을 취하지 않고 믿기로 하기 make-believe 의 방식으로 그냥 거기 집이 있는 걸로 한다, 또는 무시무시한 셰퍼트가 짖고 있는 걸로 한다는 식으로 장면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 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촬영된 다음 후반 작업이란 걸 하면서 일루젼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실같은 CGI를 보는 것도 분명 재미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 장면이 촬영되던 순간의 연극적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바로 그 촬영장의 상황이 그대로 무대로 옮겨져 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무대 위에 그린스크린을 설치해 두고 배우들이 연기를 펼친다. 관객들은 아무 것도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을 온전히 즐긴다. 그런 다음 집에 돌아가, 혹은 돌아가는 길에 유튜브로 CGI가 채워진 버전을 다시 보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난 지금 2100년대를 얘기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20세기 초기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시도된 키노드라마가 기술의 발달로 요즘 재활성화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만큼 무대연극과 영상의 접목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도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도전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인터렉티브 연극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좀더 잘 알려진 텍스트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텍스트가 낯설 수록 관객은 텍스트에 주의하게 되고 결국 텍스트가 주도하는 연극이 될 수밖에 없다. 제작하는 입장에서야 수개월간 그 텍스트가 익숙해졌겠지만 처음 보는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다른 요소들은 부차적인 '나머지 요소'들로 전락한다. 무대 위에서 오로라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하지만 텍스트가 오로라를 반복적으로 선창하고 ("오로라, 라, 라, 라 ...") 그것을 비쥬얼로 보여준다면, 그러한 인터렉티브는 잠시 신기할지언정 그동안 재현적인 연극에서 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건투를 빈다. ㉦



***
이것으로 저의 2014 두산아트랩 리뷰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 해주신 예술가 여러분과 독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4년 9월 1일 월요일

두산 아트랩: 이파리드리, <별일없이 화려했던>

백인경

북적거리는 도시 속을 느릿하게 미끄러져 가는 버스 안에서 뒷좌석에 몸을 묻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본다. 지나는 거리마다 차와 사람으로 가득하다. 모두들 빠르고 익숙한 몸짓으로 각자 제 갈 길을 가느라 바빠 보인다. 두산 아트랩 하반기 공연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는 마음은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사이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린 길 위의 풍경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광장은 이렇게나 넓고, 하늘은 이렇게나 높으며, 시간은 이렇게나 빠르게 지나가는데, 몸과 마음은 버스 뒷좌석에 묻힌 채 덜컹덜컹 고빗길을 넘어간다. 지금 여기, 우리가 속한 이곳은 누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세계인가. 우리는 어떻게 지워지고 있으며 또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역사가 한 권의 책과 같다면, 우리의 지금 이 순간들은 어떠한 문장들로 서술될 것인가. 세상이 한 편의 연극과 같다면, 내가 존재하는 이곳은 어떠한 장면들로 구성될 수 있을까?


이파리드리의 <별일없이 화려했던>은 별일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20대를 노래한다. 두 명의 배우와 두 개의 큐브가 엎치락덮치락하며 평범한 2000년대의 나날들에 매듭을 엮는다. 자취방, 과방, 할아버지의 장례식장, 연구실, 동네 호프집… 장소가 바뀌고, 옷이 바뀌고, 유행가도 바뀌고, 이상형 마저 핑클에서 소녀시대로 바뀌어 가지만, 한 해 두 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그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기현은 여전히 기현이고, 성우는 여전히 성우이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이지만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20년 지기 절친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특별한 사건 사고 한 번 일어나지 않는다. 단순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친근한 기억들(souvenir)과 과장된 몸짓은 관객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구성 속에서 예의 그 공감의 정서를 느끼기보다는 보편적 추억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얼마나 피상적인 것인지 직면해야만 했다. 무대를 중심으로 기역(ㄱ)자로 배열된 객석에서는 동시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건너편의 관객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아롱다롱한 추억 속으로 채 빠지기도 전에, 나의 지난날들을 돌이키기도 전에, 먼저 웃고 먼저 끄덕이는 낯선 사람들과 대면해야만 하는 것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무대 위에 펼쳐진 이야기가 다양한 의미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때 그 시절의 낡은 기념사진 같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것이기에 특별히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똑같은 표정들로 가득한 단체사진처럼.

아프니까 아직 청춘인 건지 청춘이라 아직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하고 나 또한 별다를 것도 없지만,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잔잔한 호수라고 해도 그곳을 건너기 위해서는 얼마나 열심히 물장구를 쳐야만 하는가. 호수에 내던져진 이상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헤엄치는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헤엄칠 수도 없고, 또 헤엄의 방식에는 정답도 없다. 어쩌면 나는 극장에서 나마 너무너무 진부해서 오히려 신선한 무언가를, 아니면 너무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놀라운 무언가를, 뭔가 그런 것을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밥 한 끼 하자는 정겨운 인사조차 무색해지는 요즘에는 특히나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무얼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