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31일 일요일

모호, 이런 꿈을 꾸었다.

by 에스티

"몽유병환자처럼 잠시 동안 걷는 작가의 경로를 따라온다면 아마도 꿈의 뚜렷한 혼잡함과 삶의 환경들의 다루기 불가능한 뒤섞임의 유사점을 발견할 것이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꿈 연극> 작가의 말에서 (조성관, 홍재범 역, 연극과인간, p.7)

조명기, 사다리, 청소기. 본 공연이 시작되기전 오프닝 매치가 한 차례 있었다. 공연 시작 전 갑자기 뻥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기 하나가 터졌고, 램프 파편이 무대에 흩어졌다. 관객들은 깜짝 놀랐고 무대 위에서 졸면서 꿈을 이야기해주려고 기다리던 배우도 하마터면 부상을 입을 뻔 했다. 잠시 졸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던 배우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남윤일 PD가 곧 설명한 것처럼, 공연이 아니라 사고였다. 공연 시작은 잠시 지연되고 무대 위엔 커다란 사다리와 청소기가 나타났다. 이런 돌발 상황이 배우나 관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 측면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극장의 생얼을 구경하는 것도 관객으로선 색다른 재미다. 다들 무대의 fantasy를 기대하면서도, 환상이 제거된 민낯을 보고 싶은 욕망도 함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번 공연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원작인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도, 윤성호 전진모 두 작/연출가의 이전 작품도 접해본 적없고, 심지어 출연하는 배우들도 대부분 낯설다. 나는 첫대면에서 말을 잘하는 편은 못된다. 그럼에도 어떤 형태로든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심지어 <몽십야>도 인터넷에서 찾아 급하게 읽었다. 이 공연의 제목이자 첫 대사이기도 한 "이런 꿈을 꾸었다."는 소설을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거칠게 나마 낭독 공연의 형식과 장면의 극화가 접목된 형식으로 난 받아들였는데, 솔직히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해보았는데, 우선 이 공연은 나보다 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모델 관객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원작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즐길만한 공연을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제인 "꿈"의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집중이 잘 안되고 '졸립다면' 그건 그만큼 꿈을 잘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객석에 앉아서 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꿈 이야기인데 너무 말똥말똥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진짜 꿈 같은 연극이라면 일단 졸리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공연이 관객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걸 무의식이 활동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지금 내 기분은 어제밤 어떤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해 갑갑해 하는 그런 심정과도 닮아 있다. 어쩌면 다가가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꿈'이 아니었기 때문일른지도 모르겠다. 소설 원작의 에피소드나 그걸 가져온 공연에서 서술되는 꿈들은 흥미로운 게 많았다. 다만 무대에서 서술자를 통해 꿈이 이야기될 때 그 이야기는 관객을 직접 청자로 놓고 이야기 되기 보다는 어딘가 비껴 있다. (배우가 앉아 있는 의자의 각도가 이미 45도로 틀어져 있다.) 객석에 앉은 나는 그 이야기를 훔쳐 듣게 된다. 스토리텔링을 훔쳐 듣고 있는 느낌이랄까. 화자는 육신을 입었으되 청자는 명확하지 않다. 1인칭 화자와 eye contact이 되지 않으니 (소설에서는 독자가 문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으나) 나의 우둔한 내 머리는 이내 집중을 놓쳐 버린다. 연출이 이번 공연에서 의도한 것은 생생한 꿈이 아니라 '아스라한' 꿈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느낀 것도 이 아스라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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