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흔정의 DRAMATIC.CITY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공연(사실 워크숍 발표라고 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7월 19일 단 하루, 2회에 걸쳐 진행된 이 공연은 무료였지만 한 회에 단 40명의 관객만이 허용되었다. 주최측에 따르면 티켓 오픈 후 불과 5분 만에 신청이 마감되었고, 이번 공연을 본 사람들은 소위 ‘광클’에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장소 특정적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 이라 이름 붙인 공연은 대부분 관객들이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관람하도록 되어있어 이는 불가피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다 보니 여기에는 마치 ‘한정판’이 비싼 것을 이해하라고 하듯, 애초부터 관객을 묘하게 낮은 위치(?)에 놓이게 하는 힘의 작용이 있었다.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내가 초대해줬으니까 음식이 혹시 별로라도 맛있게 먹어”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이 공연을 본 사람은 겨우 80명에 불과하다. 그 중 한 명으로서, 부족하더라도 글을 남기고 공유해야 할 책임감과 익명의 누군가가 이 글을 참조하게 될 상황에 대한 부담을 느끼며 글을 시작한다.
구서울역 로비, 사진출처 서울역284 http://seoul284.org/
공연의 제목처럼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와 연행자들은 ‘문화역서울284’라 개명한 구 서울역을 깨웠다. 그리고 관객 역시 이 공간을 깨우는 것에 동원되었다. 불과 5일 동안 진행된 워크숍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트리스탄 샵스가 서울역에서 발견해낸 ‘감시(surveillance)’라는 주제와 그것을 풀어낸 방식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했다. 관객들은 먼저 구 서울역의 중앙홀에 모여 안내를 기다린다. 12개의 거대한 석재기둥과 돔 형식의 높은 천장을 지닌,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공간 안에서 관객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오래된 건물에 들어서면 새롭고 깨끗한 공간에서 보다는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신경이 날카롭게 긴장된 이유는 곳곳에 배치된 정장차림의 요원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국가정보기관이라는 명찰을 목에 건 흰 셔츠와 검정 바지의 요원들이 무작위로 관객 두 명씩을 각기 다른 방으로 안내한다.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있고 인적 사항을 조사하는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직업, 나이, 시민단체 가입여부 등을 묻고 사진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 관객은 그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과연 몇 명이 성실한 답변을 하고 몇 명이 답변을 거부했을까, 혹은 거짓말을 했을까. 누군가는 이 인터뷰를 다소 신기한 퍼포먼스의 일부로 즐겼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연이라는 거리감을 깰 정도의 불쾌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도록 강요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감시’ 라는 주제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관객들의 공연 해석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관객들은 자유롭게(그리고 동시에 사뭇 경쟁적으로) 구서울역을 누비고 돌아다닌다. 왜 경쟁적이라고 느꼈는지를 먼저 말하자면, 공연을 안내하는 주최측이 관객의 적극성에 따라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고 끊임없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출가 샵스가 발견했듯이 서울역에 유난히 많은 ‘유리창’ 때문에 관객들이 서로를 계속해서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리창 밖에서, 때로는 유리로 된 천장 위에서까지 요원들이 관객을 계속 감시 혹은 관찰하고 있었다. 감시라는 주제는 사뭇 단편적이었지만, 실제로 자유롭게 관람하도록 안내 받은 후에 감시를 당하고 감시 당하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깨어나는 감각과 감정은 퍼포먼스에 직접 속해있지 않고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관객은 구서울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 초반에 인터뷰한 자신의 모습이 영상으로 녹화되어 재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동시에 떨어져 있는 방이라 할지라도 이쪽 방의 모습이 카메라로 녹화되어 저쪽 방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재생되고, 공연 내내 건물은 완전히 폐쇄되어 있었지만 서울역 외부의 현재 상황도 모니터에 재생된다. 4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동안 모든 것이 감시되고, 기록되고, 매개되고, 재생된다.
이 같은 전체적인 주제 및 콘셉트는 흥미로웠지만 이번 공연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연행자들의 퍼포먼스가 다양하지 못했고 연행자들의 에너지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층 홀에서 연행자들은 굳어버린 조각상처럼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주제나 의도와 상관없이 몸의 움직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다소 약한 느낌이었다. 관객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조각상이 있어야 할 곳에 살아있는 사람이 올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각상보다 관람자의 시선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그리고 비슷한 동작이 지하에서 반복되고 마지막에 1층 중앙홀에서도 다시 반복되면서 긴장의 정도가 더욱 떨어졌던 것 같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어느 곳보다 정치적인 기운이 역력한 그 곳에서 연행자들의 동작은 ‘억압, 고통, 죽음’과 같은 것을 연상케 했는데, 몸의 에너지보다 그것에 부과된 의미가 강한 느낌이어서 조금은 인위적이었던 것도 같다. 아마 연행자들의 몸과 동작이 건축물에 녹아 들지 못한 것은 그 공간과 교류한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식 공연을 위한 예비적인 쇼케이스라고 하니, 정식 공연으로 발전시켰을 때에는 보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구서울역을 ‘깨우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 구서울역 바로 앞에는 그 날도 집회가 한창이었다. 여느 때처럼 경찰도 보였고, 노숙자는 여기 저기에 앉아있었고, 여행객과 비즈니스맨들은 바삐 움직였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40분 간 구서울역에서의 경험은 2014년의 서울역과 어딘가 모르게 매우 단절된 느낌이었다. 이것은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공연은 구서울역을 깨워야 했다면 “왜” 깨워야 하는지를 더욱 고민했어야 되지 않을까? 또한 지금의 관객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게 할 것인지 조금 더 깊은 고민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장소의 역사와 기억을 깨웠다면 그것을 ‘현재’에 연결해 주어야 동시대에 그 공간을 깨운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연출가 스스로 밝혔듯이 연출가가 스스로 장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서울역이 ‘장소 특정적 공연의 거장’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번 공연의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는 구서울역을 하나의 일상적인 ‘기차역’이라기 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건물로 받아들인 것이 자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연출가는 그가 주로 작업했던 백화점, 공원, 지하철역 등과 같은 일상적 장소 중 하나로, 단지 아티스트에게 창작의 영감과 즐거움을 주는 독특한 건축물로 구서울역에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출가와의 대화에서 샵스는 연행자들의 동작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밝혔는데,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다가왔을지는 의문이 든다. 건축물의 물리적인 속성과 그것에 반응하는 퍼포먼스를 탐구할 것인지, 건축물의 사회적, 역사적 장소성을 탐구할 것인지는 연출가의 선택인데, 후자를 선택한 경우에 보다 조심스럽고 진지한 태도가 요구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관객이 어떤 태도로 공연에 접근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연출가의 접근방향이 어찌되었건, 앞서 말했듯 아주 제한된 인원이 참여했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공연 후 연출가와의 대화에서 오갔던 질문들로 추측해 보건대) 관객 중에는 일반 대중보다는 관련 전공자로 서울역이라는 장소보다는 ‘장소 특정적 공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관객들이 이번 공연에서 느꼈을 경험과 감정의 편차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장소 특정적’ 공연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발하기 위해서는 “그 장소에서 생활한, 그 장소를 처음 방문한, 그 장소를 소유한, 그 장소에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장소가 불쾌한, 그 장소가 애틋한(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관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공간’이라 부르지 않고 ‘장소’라 부르는 것은 그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시간, 사건, 감정, 기억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선택된 장소가 관객에게 일관된 의미와 경험을 전달할 뿐이라면, 그것이 블랙박스씨어터나 화이트큐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관객이 다소 편향된다는 것, 공간에 대한 탐구와 장소에 대한 탐구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장소 특정적 공연(이라고 칭하는 공연)에서 아쉬운 지점이다. 하지만 역으로 개념이 실천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기에, 현재 진행 중인 장소 특정적 공연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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