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작용’ 선돌편 : 7/9~8/31, 선돌극장>
스무 개의 극단(혹은 그룹)이 자생적으로 모여 하나의 축제를 만들고 있다. (축제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고, 아마도 이 글이 게재가 되는 시점에도 끝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7/9~8/31, 선돌극장) 이들이 만들고 있는 축제의 이름은 ‘화학작용’이다. 예기치 않은 극단들이 우발적으로 만났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기획된 축제의 프로그래밍은 오롯이 우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토너먼트 식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편성된 두 개의 팀이 한 회 차의 공연을 구성하는 식이다. 현재 네 번째의 공연 순서까지 진행이 되어 총 여덟 개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화학작용’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공연들의 프로그래밍은 어쩌면 독립된 기획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 수도 있겠다. 기획적 컨셉을 축제의 이름으로 내 건 숱한 ‘축제식’ 공연들은 기획이 과잉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기획이 작품을 압도하여 정작 작품의 색채는 기획의 그늘 아래 퇴색되어버리고 마는, 작품의 목소리가 기획이라는 테두리선에 부식되어버리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비단 축제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연의 목소리가 기획의 틀에 의존해버리고 마는 요즘의 숱한 과잉 기획의 공연들 가운데 오히려 기획의 독립성이 부재한 ‘화학작용’ 속 공연들은 솔직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란 조금 우연하고도 계산되지 않은 채로 발생한다. 이것은 으레 축제 혹은 기획이라는 틀 거리 안에서 하나로 규정되어 왔던 것들, 그러나 규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전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채 계산되지 않은 스무 개의 공연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의 층위가 흥미롭다. 그리하여 이것은 더욱 축제로 다가온다. 스무 개의 극단이 조금 거칠고 솔직하게 모여 있고, 그럼으로 비로소 ‘모여 있다’라는 느낌, ‘우리’가 ‘여기, 이곳’에 ‘모여 있다’라는 느낌을 실물로 전달하는 힘을 지닌 축제.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굳이 이 공연의 묶음을 축제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 공연 전체에 대한 리뷰는 축제가 끝나갈 즈음에 다시 쓸 것을 기약하며, 이 글에서는 세 번째 공연 팀에 속해 있던 구자혜 연출의 <일회 공연>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회 공연>
일시 : 7/20~7/24, 선돌극장
관극일시 : 7/21, 선돌극장
연출 : 구자혜
작가 : 고연옥, 김민정, 백하룡, 이리, 전소영, 오세혁, 정소정, 구자혜, 윤성호, 미하엘 뮐러
출연 : 이리, 장윤실, 박경구, 전박찬, 최순진, 김석기
공연화된 대본의 조각들 :
2006년 고연옥 작 <칼디의 열매>
2007년 김민정 작 <검은 입들의 집>
2013년 구자혜 작 <침입>
년 미하엘 뮐러 작
2012년 윤성호 작 <미인> 그리고 <미인> 중 공연되지 않은 <누수공사를 기다리며>
2012년 이리 작 <배우L의 독백 - 훈제란과 자전거 도둑에 대하여>
2012년 전소영 작 <오늘의 날씨>
2010년 정소정 작 <뿔>
2001년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윤성호 작 <당신에게>
흥얼거림 : 미하엘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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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공연>에서는 발표는 되었으나 무대 위에 상연되지 못한, “태어났으나 태어나지 못한 문장들”을 모아서 무대 위 장면으로, 혹은 무대 위 장면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그 미완의 생명들을 소생시킨다. 고연옥, 윤성호, 전소영, 정소정, 백하룡, 이리 작가 등의 작품 가운데 무대 위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의 파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 꺼내어 놓는다. 시작부터 날카롭게 집중력을 모으게 했던 것은 바로 작품이 꺼내어 놓은 이 시선 자체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탄생했던 것의 죽음, 죽은 것의 소생, 탄생과 죽음과 소생 그 사이를 둘러싼 것들. 혹은 탄생과 죽음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조차 없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그것들의 사이를 오고 갈 시선의 힘이 왠지 몹시 반가웠다. 이 공연을 보는 동안 무언가를 애써 에둘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선의 힘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작품이 취하는 생략과 복원, 미완과 완성 사이를 떠도는 시선은 채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한 무대의 잠재 혹은 무대의 잔재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 보게 하는 쾌감을 자극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결코 구경할 수 없었던 분장실 속 물건들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불가능하고도 은밀한 쾌감 같은 것이다.
# 윤성호 작 <미인>의 한 장면
한창 사랑을 하고 있는 듯한, 그러나 (까닭모를) 이별을 앞두기라도 한 듯한 연인이 등장한다. (사실 이 이별은 군 입대를 앞두고 하는 이별이지만, 군 입대라는 상황에 대한 서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다가 더욱이 이 장면은 문맥이 생략된 채로 보여지는 만큼 이 둘의 이별은 까닭 모르게 다가온다.) 그렇게 문맥을 알 수 없는 두 명의 연인이 등장한다. 이 둘은 그들이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되었던 순간을 회상하고 재연한다. 모든 연인에게는 처음이 있다. 그것은 돌이켜 보고 난 후에야 아는 것이지만. 모든 연인에게는 첫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있다. 그것은 명백한 장면으로 존재한다. 그 장면으로 인해 그들이 보낸 한 시절은 마치 명백한 사실로서 존재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장면과 기억, 기억과 또 다른 기억, 사실, 사실과 기억된 사실, 망각. 그들은 첫 순간을 복원해내며 이 단어의 사이와 사이를 떠돈다. 이 둘은 그토록 선명했(으리라 믿었)던 첫 순간을 복원하려 들지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알 수 없는 관객으로서는 그 첫 순간이 한없이 불투명하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순간’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 그들이 서 있는 관계의 문맥을 안다한들, 아니 그것이 설령 우리 스스로의 사건이라 한들, 우리는 어느 순간 순간들의 행방을 투명하게 알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말하려 하는 생략, 어느 소소한 망각,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죽음들과 그것들을 소생시키려 하는 의지와 같은 것이 작품의 초반을 여는 이 장면에서 가늘고도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을 둘러싼 모든 까닭모를 미완성과 그 미완성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느 한 순간의 미완성이 한데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장면 안에서는 어떤 맺혀진 순간의 힘이 강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존재했던 것, 기억을 초월한 기억. 어쩌면 이 공연은 생략된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사라졌으나 존재하는 것, 흔들리면서도 고요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이어지는 윤성호 작 <미인> 가운데 “누수 공사를 기다리며”
반복되는 말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말들, 점증되는 짜증과 불신, 그럼에도 또 다시 반복되는 헛소리들, 계속해서 지연되는 시간,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그 상태. 이 장면이 시작될 때 배우들이 지면 속의 카툰처럼 벽면에 붙어 서 있다가 차츰 연극 속의 인물로서 호흡을 찾아가며 무대 위로 서는 동작이 흥미로웠다. 텍스트에서 연극으로, 그 테두리를 넘는 행위를 보여주는 움직임. 죽어 있던 것의 호흡, 생략된 것의 복원. 그리고 바짝 무대 앞 선까지 나온 이들이 한 줄로 정렬하여 반복되는 대사를 읊고 그 대사들의 반복은 시간과 정서의 점증을 빚어내는데, 이 장면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방식 또한 흥미로웠다. 그토록 정지된 화면 속 인물들처럼 서 있으면서도 정서와 시간의 부피를 증폭시켜내는 힘이란! 객석을 향해 일렬로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은 지극히 제시적이면서도, 폭발적이다. 이것은 마치 소리 없는 텍스트가 빚어내는 감정과 시간의 증폭 같았다. 다시 말해 연극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독서의 행위 같았다. 관객은 무대 위 장면을 마주하고 있으나, 이 장면이 만드는 효과는 독자가 텍스트를 마주할 때의 효과였기 때문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묵독할 때 텍스트 속의 기호는 낱낱한 문자들일 뿐이나, 독자가 그 기호의 결 사이 사이에서 숨을 쉬며 기호라는 질료를 자신의 감정으로 증폭시키는 묵독의 과정, 그 내면의 행위를 무대 위로 뽑아 표현한 듯한.
이 대목 즘에서 생각했다. 이 연극 왜 이렇게 재미있지? 그 이유는 (그 숱한 메타 연극들이 저지르고 마는 식상한 화법들처럼) 나 이렇게 논다, 하고 자기가 얼마나, 어떻게,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를 제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텍스트와 노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다양하게. 반복되고 늘어지고 지연되고 인내하는 언어의 힘으로 장면의 운동을 만들고, 그 운동 안에서 다시 언어는 지루하고도 의뭉스럽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텍스트가 연극 안에서 놀고, 그 놀이 안에서 연극은 장면이 만들어낼 수 있는 능청스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 이리 작 <배우 L의 독백>
정말 잘 하고 싶어하‘는데’, 정말 잘 해 보려 했‘는데’,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파토가 나버린 일처럼. 이를테면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공연 때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서자 했‘는데’, 갑작스럽게 내일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하고.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루라도 해 보려고 훈제란을 샀‘는데’, 그 훈제란을 갑작스럽게 혹은 별 뜻 없이 혹은 너무 쉽게 바닥에 떨어뜨려버린 일처럼.
세상에 정말 잘 나오려 했‘는데’, 그렇게 잘 나와서 잘 살려 했‘는데’........... 나오자마자 의미를 상실해버린, 혹은 의미를 박탈당해버린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언어. 그래서 ‘그냥’ (별 각인 없이) 죽어버린 역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로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곧 연극 자체가 되게 하는 연출의 방향이 흥미롭다.
이 공연의 전체적인 할 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 스토리텔링을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스토리텔러가 이 공연 전체의 공기를 오롯이 자기의 이야기 속에 실어내었다. 이 연극은 이런 연극입네, 특히나 이 연극은 이런 ‘메타’ 연극입네, 하면서 연출자나 배우가 직접 나서서 서사를 풀어 놓는 그 숱한 연극 놀이들을 만나 왔지만, 이 작품만의 표현 방식은 특별했다. 지극히 재미없을 수도, 복잡하기만 할 수도 있었던 첩첩 쌓인 메타 서사를 특별하지 않게 풀어내면서도 귀에 유유히 전달되게 하는, 자연스러움과 집중력. 아 좋은 스토리텔러의 힘이란!
이 장면의 연기를 한 배우가 사실은 이 장면의 언어들을 만든 작가(이리) 본인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난 후, 이 장면에서 만들어 낸 ‘메타의 메타의 메타 속 이야기’는 ‘작가의 작가의 작가 속 작가’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 공연조차도 관객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드러나지 못했을 법한 것들이 구태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하면서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사라질 뻔한 것들의 운명은 어떤 글을 세우고 부수고의 연속선 안에서 때로는 살아남았고, 때로는 사라졌을 어느 창작의 형체를 둘러싼 것들이다. 창작의 입장에서 창작이란 이토록 불명확한 과정임에도, 수용자에게 창작은 마치 그것이 명확한 테두리를 지닌 무언가로 여겨진다. 하여 미완된 작품의 생략을 복원해내고, 완성된 작품의 허물을 허물어뜨리는 이 공연의 행위는 이토록 불완전한 창작자와 이토록 명백한(듯 보이는) 수용자 사이의 시선과 시차를 희미한 발짓으로 거스르고, 에둘러가는 데에 있다. 이 공연의 엔딩도 (윤성호 작 <당신에게>의 부분) 이러한 작가의 희미한 정체성에 화두를 실고 있다.
# 백하룡 작 <행복이 가득한 집>
곧고 차가운 벽.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 너무도 잘 보인다. 서로 자기의 편에서 단 한 발도 저 편으로 섞이려 들지 않는. 아무리 그 방에서 괴로워하고 꿈을 꾸고 소통을 갈망해도 현실은 그 얇고도 단단한 벽이다. 그 차가움과 냉담함과 단절이 너무도 안정적이다. 빗금으로 그어진 조명 분리선. 그 선에 대한 인식 하나로 표현된 일련의 움직임들. 단절된 소통을 다급한 분노로 표현해내는 움직임과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소통 같은 것)를 습기 차게 갈망하면서도 몸으로는 다시 단절을 인정하고 감내하는 자포. 그것의 반복이 너무도 안정적이고 차갑다. 여고생을 상처받은 사슴 같은 남자 배우가 연기한 것도 이 장면에서 전해지는 그 철저한 단절, 그 꿰뚫을 수 없는 냉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좋았다. 가느다란 빗금 조명등과 가늘게 삽입된 crack 사운드. 단 두 가지의 질료만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장면일 뿐인데, 이 파편의 유희에서 작품의 질긴 공기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건. 이토록 파편의 시가 해 낼 수 있는 것을 미완의 연극으로 그려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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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되었으나 상연되지 못한, 상연되었으나 생략된 장면과 언어들을 ‘일회 공연’으로 올려 낸 이 작품. 이 작품의 소개를 받았을 때에는 그 생략된 것들에 생명성을 부여하는 연극이려니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는 동안 내내 조금 특별했다. 그 이유는 이 연극이 자꾸만 빚어내는 어떤 사이를 떠돌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생략이 아닌 생략이 되기까지의 것, 그래서 또한 부활이 아닌 그것이 되살아나기까지의 것. 우리의 인생처럼 이 연극은 순간이 아닌 순간과 순간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작품 속 장면들은 오롯이 대본과 유희하고 있다. 대본을 연극으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대본과 함께 놀고 있다. 그 대화가 즐겁다. 대본과 연극 사이의 유희의 대화가. 그래서 두텁고, 새롭고, 줄기차다. 기대할 수 있는 연출과 배우와 작가들을 만나게 되어 오랜만에 즐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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