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 문제적인 포스터가 하나 걸렸다. 공연 포스터라는 이름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초상화 그 자체이다. 밀집모자를 쓴 한 남자가 웃고 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그려져 있다. 한국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도상을 그저 한 시골 촌부로 여길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초상화 상단에는 그의 별명 ‘바보’가 쓰여져 있으니 이 그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너무나 명백해진다.
그(의 얼굴)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나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이 들어간 달력이나 걸개 그림을 자신의 가정이나 일터에 두고 지내고 있다. 이런 행동이 그에 대한 추모의 방식이라면, 반대로 그를 혐오하는 사람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소비한다. 이들은 주로 포토샵이라는 기술을 통해 그를 전혀 새로운 맥락 속에 배치시킨다. 그들은 가라앉는 세월호 유리창에서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망자를 욕보임으로써 쾌감을 얻는 그들의 심리는 한편으로는 屍姦症(necrophilia)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느 곳에나 그의 얼굴을 기입하는 충동을 느끼는 그들은 표면적으론 그를 조롱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누구보다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해 말 <변호인>이란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제작사 측에서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좀처럼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감독이나 주연배우는 가급적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이 작품이 특정 정치인과 세력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를 지지하거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의 노력은, 비록 뒤이어 개봉한 <겨울왕국>이 알 수 없는 대흥행을 이루면서 약간 빛이 바래긴 했지만, 관객수 1100만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반면, 지난 5월에 김기덕 감독은 <일대일>이라는 영화를 극장에 걸면서 이 영화가 “[그 분]에게 드리는 고백이자 자백”이라 밝혔다. 이 영화는 그를 직접 언급하거나 그의 일대기를 그린 것도 아니지만 감독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는 의제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불행히도 이 영화는 크게 실패했다. 관객수 7000명이라는 초라한 숫자로 개봉 8일차에 영화를 내려야 했다. 실제로 <일대일>은 감독이 말하듯 우리 사회에 결여된 상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록 때로는 영화밖 현실을 너무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변호인>을 본 1%도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극장을 찾을 7000명이 김기덕의 팬인지 영화에서 그가 꿈꾸던 세상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변호인의 실명을 직접 거론한다고 해서 관객들이 김기덕이라는 문턱을 쉽사리 넘어오진 않는다는 점이다.
<바보햄릿>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 있다. 일단 첫날 공연에서는 포스터가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적지않은 관객이 그에게 우호적인 그룹에서 단체로 극장을 찾은 것 같았다. 공연 중 객석은 더웠다. 난방도 냉방도 되지 않는 이 무렵 소극장이 늘 그럴 수도 있지만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에 관객들은 열심히 반응했다.
추모의 성격이 강한 공연임에는 분명했다. 극의 말미에는 그가 남긴 유명한 연설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이미 관객들은 전반부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가 언급될 때 그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데, 마지막에 오리지널 버전이 재생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무대 바닥에 놓여진 국화는 그를 추모하는 직접적인 제스쳐이기도 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하다.
<햄릿>의 주제를 애도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결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애도하는 것은 단순히 그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극에서 직접 언급되기도 하거니와 그는 햄릿의 아버지 처럼 “나를 기억하라”하지 않고 “나를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버리는 일은 그대신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번 공연에서 바깥 프레임을 이루는 기사 정정 에피소드는 결국 한 소시민의 각성과 변화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실천을 강조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이 시점에서 이 연극은 먼저 간 그들을 남은 자들이 어떻게 기릴 것인지 질문한다.
“햄릿” 그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최근 트렌드에 따라 Shakespeare retold 방식의 설정, 테넌트의 <햄릿>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된 CCTV 등이 이 공연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무엇보다 이윤택의 <햄릿>과 닮은 점이 많다. 극 초반에 햄릿이 벗은 몸을 보여준다든지, 왕과 오필리어의 관계, 그리고 Closet Scene에서 햄릿이 어머니를 겁탈하려는 모습 및 왕비가 왕자를 달래주는 장면은 이윤택 버전의 되풀이라 할 수 있다.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보내는 편지의 문구에서도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연출 자신이 이윤택 <햄릿>의 초대 햄릿이란 사실을 기억할 때 이런 아이디어들을 단지 이윤택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해아래 새로운 햄릿은 없다. 하지만 꿈이라는 상황 설정이 이 점을 가중시키는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한 장면들의 정당성이 쉽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
7월 20일까지
대학로 아름다운극장 (070-8776-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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