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1일 토요일

공존을 위한 말걸기: <배수의 고도>

by 에스티



언제부터인지 소위 웰메이드 드라마에서 어떤 불편함을 가지게 되었다. 얼핏 보기엔 톱니가 딱딱 맞물려 매끄럽게 돌아가는 듯하지만 연결 부위가 되면 배우들의 동작이 왠지 어색해보이고 리듬이 흐트러지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연극들에 대한 괜한 반감이 작동해서 그런 부분만 주목해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올해 상반기에 가장 기대하고 있던 <배수의 고도>가 ‘사실주의적 문제극’의 외형을 갖추고 있음을 극장에서 확인한 순간 약간의 실망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소재가 가지는 무게감 때문에 위기와 절정에 이르기 위해 발단과 전개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을, 그것도 두번씩이나, 보고 있는 것은, 비록 그 사이에 코믹 릴리프가 적지 않게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다소 지루한 일이었다. 쯔나미 직후를 시점으로 하는 1부와 그로부터 12년후를 배경으로 하는 2부 각각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기까지 배우들의 잦은 등퇴장과 필수적인 정보들이 찔금찔금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있는 일은 아주 즐겁지만은 않았다.

특히나 나 자신도 그렇게 느꼈지만 많은 사람들이 1부와 2부를 두 편의 연극이 인터미션을 사이에 두고 연달아 공연되는 것처럼 보았다. 이 공연을 호의적으로 본 사람들에게서마저 2부가 사족처럼 느껴졌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드라마트루그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원작에서는 인터미션 없이 연달아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아마 이렇게 했다면 양 파트의 연관성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2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그 자체가 나빠서라기 보다는 너무 만족스럽게 끝난 1부 탓이 큰 것 같다. 특히나 1부 마지막에서 하성광이 연기한 노자키씨의 고백이 큰 울림을 만들어냈는데, 거기서 이미 충분한 만족을 얻었기 때문에 인터미션 이후 다시 시작하는 듯한 리듬이 부담스럽게 다가오고, 정작 그렇게 시작한 미래가 머리를 건드리되 가슴으로 다가오긴 어렵다는 점 또한 작용한다.

안좋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것은 이 작품을 결코 폄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작품의 저점이라 생각되는 부분들을 재빨리 언급하고 본론에 들어가기 위함이다.

작년에 같은 극장에서 타다 준노스케 연출의 <가모메>를 보면서도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일본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후쿠시마 대재앙은 어떤 의미이고 앞으로 어떻게 그들의 작품에 등장할 것인가? 타다의 <가모메>의 무대에서는 쯔나미를 직접 언급할 일은 없었지만, 그때 무대는 내 눈에 너무나도 건조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건조함은 쯔나미가 지나가고 나서 바싹 말라버린 것 같은 건조함이었고, 연출 스스로도 무대 구성에 있어서 쯔나미를 염두에 두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누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레어티즈의 첫 반응은 이미 너무 많은 물을 먹었으니 자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결핍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미 그것이 충분하다는 반증인 것이다.

작품에 대한 정보를 보다가 놀란, 어쩌면 조금은 의아했던, 지점은 이 작품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6개월만에 초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면 놀라운 속도이다. 남들이 이 사건의 여파에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작가로서 자신의 임무가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있다는 것을 빨리 자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신속함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작가는 3.11 이후 6개월만에 12년 후의 일본을 상상한다. SF 팬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미래 세계라는 설정이 무색할 정도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이패드의 세대 수가 두 자리가 충분히 넘어갈 시점이지만 여전히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아이패드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연출이나 디자이너 역시 그 부분에 대해 특별한 비전을 가지진 않았던 것 같다. (안 한 걸 못했다고 하면 안된다. 하지만 더 잘못된 것은 안 한 걸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불변성이 2막이 보여주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

1막에 등장한 인물들이 2막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은 분명 '의도적인' 억지 설정이다. 이 정도면 1막 이후 카타오카 다이고의 죽음으로 2막에서는 등장하지 못한 선종남 배우도 등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런 엉뚱함을 받아들이고 나면, 작가가 인물을 선악의 구도로 나누거나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꼭두각시로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옳고 그름의 대결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라는 연출의 표현대로 이 연극엔 악당이 없다. 있다면 쯔나미라는 거대한 괴수일테고, 이 괴수에게 상처받은 사람들과, 어떻게든 살아남아보려는 사람들만이 보인다. 노자키씨와 유우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일반적인 극 세계에서도 실제 세계에서도 용서받기 힘든 일이지만, 그 날이 다 용서한다. 노자키씨와 유우의 고백에 의해 먼저 관객이 용납하니, 이시즈카 선생님도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정치인 오다기리마저 공공의 선을 위한다는, 우리 현실에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진정성이 느껴진다. 사실 갈등이 벌어질 수 있는 인물 구성이 아니다보니 1막이나 2막의 중심 사건은 사실상 처음부터 좋게 해결될 수 있는 수준에서 벌어지는 갈등이고, 이점은 사실주의적 드라마트루기로서는 약점일 수도 있다.

주제나 형식에 있어서나 입센의 문제극이 떠오르는 이번 작품은 특히나 <민중의 적>을 떠올리게 한다. 2년 전 샤우뷔네 베를린에서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민중의 적>을 볼 수 있었다. 원작의 2막 2장에는 스토크만 박사가 온천 개발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강연을 하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도 스토크만이 객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관객을 향해 직접 연설하도록 고안되어 있는데, 이날 공연은 이러한 방식을 따르면서 아예 관객들로 하여금 스토크만 박사에게 직접 질문하고 장내에서 즉석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었다. 관객들이 참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이 시간은 다행히 토론하기를 좋아하는 독일 관객들에 의해 차고도 넘쳐났다. 2막의 타이요는 자신이 공공의 적이 될지언정 거대한 악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는 투사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스토크만 박사와 유사하다. 물론 그는 이 문제가 토론이나 데모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급진주의자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작가 자신이 타이요의 방식을 지지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극 전체가 생각할 문제를 던져주는 발제문 같다. 여기에 연출가의 에필로그가 이 발제문을 읽고 토론해야 할 쪽은 이웃나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전세계에서 원전밀집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고, 그 원전이 크고 작은 고장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새로운 원전이 지워지고 또 계획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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