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http://fb.com/doosanartcenter |
#
(필자가 본) 이수인 연출의 전작들 <오이디푸스왕>, <노부인의 방문>, <왕과 나>에서 일관되게 표현된 소거법이 이 작품에서도 당당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텍스트랄지, 소재랄지, 공연 ‘이전’에 존재하는 질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언가의 재료들이 당당하게 ‘소거된’ 채로 공연을 대면하고 있는 느낌. 나는 이것을 이수인 연출 특유의 소거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일관된 느낌의 소거법이 무대 연출로 전면화되어 있다.
그리고 장면 중간 중간에 난데없는, 사실 자주 불필요하게도 느껴지는 이질적 언어들의 삽입법. “ㅆㅂ”, “ㅆ” 같은 욕이랄지 난데없이 쌀랑한 바람 한 줄기 지나갈 것 같은 엉뚱한 유머나 엉뚱한 리액션의 삽입. 특히 이번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삽입된 손발이 오그라드는 ‘헐리우드’ 액션. 이것 역시 앞서 말한 전작들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스타일이라고 느끼고 있다. 마치 체홉의 언어 가운데 “차가 식었네요.”와 같은 대사가 주는 이상하고도 쓸쓸한 효과. 그 어떤 짤막한 생경한 틈새를 굳이 삽입하여 장면의 전체 형세를 순간 정지 화면으로(pause) 만들어 놓는 것.
기존에 느껴 온 이수인 연출의 이 두 가지 연출법이 이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나 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의 소거법은 잘 꾸며진 배경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고, 난데없는 이질감의 삽입 역시 철저하고 계산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구현해내는 연출법들이 더욱 공들인 성찬이 되어 차려져 있었다.
# 음악적인 리듬으로 배열된 장면들의 미학 :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
작품 초반부터 주식시장의 생리와 용어들이 발설되는 이 연극은 분명 관객들을 몰입할 수 없게 하는 생경한 요소들을 가득 안고 있다. 그러나 주식 시장의 생리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간들의 욕망을 표현해내는 능력, 텍스트를 넘어선 미학적인 표현 능력이 결코 한 순간도 이 작품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장면마다 시종 음악과 운동이 겸비되는 비트가 모티프를 이룬다. 무릎을 까딱 까딱거리는 배우들의 몸, 인물들 사이에 까딱 까딱 분절되는 대사들, 복잡하게 깜빡 깜빡거리는 주식 시장의 조명등, 금방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장면들의 명멸성 전환. 무대 위의 모든 율동들이 명멸하는 비트의 미감을 입어 다양한 장면들의 성찬을 이루어낸다. 특히 주식시장을 묘사하는 코러스의 막간 장면들은 비트감 넘치는 단체 쇼트의 효과를 준다. 욕설과 긴장과 욕망이 비협화음처럼 부딪치고 화음처럼 섞이며 떠돈다.
무대 위의 모든 명멸은 비트처럼 떠도는 욕망들의 미술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자본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명멸로 다가온다. 이 연극 속의 공간은 주식 시장의 공간과 아울러 자본 시장의 공간성, 그리고 우리 욕망의 공간성마저 확장적으로 표면화시키고 있다. 미술적인 언어, 음악적인 언어가 매우 심플한 지대에서 어려운 경제 용어들을 넘어선, 그리고 복잡한 텍스트를 넘어선 간단한 것들을 발설한다.
# 우리 욕망 속의 해부도 :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상자 속의 텅 빈...
이 작품은 비단 엔론을 둘러싼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엔론이 부여한 생존의 논리, 그것은 자본주의 논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의 논리를 닮았다. 다시 말해 엔론이 만들어 놓은 그 ‘텅 빈’ 상자는 자본주의 논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욕망꼴이다. 우리는 제각기 실체는 텅 비어 있는 상태로‘라도’ 어떤 한 상자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텅 빈 상자인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다시 그 안의 또 다른 텅 빈 상자를 소유하려 한다.
우리 욕망의 종착점, 혹은 실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이 아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깜빡 깜빡 명멸하는 빨간 등으로 연출된다. 이 작은 빨간 등의 명멸이 무대 전체에 명멸하는 조명 효과를 주면서 언제라도 이 모든 우주를 폭파시킬 수 있는 위태로운 핵처럼 표현된다.
이 작품은 엔론이 만들어 놓은 욕망체이자 사실은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 혹은 이토록 큰 덩어리가 되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이 욕망체의 실제를 무대화한다. 여러 개의 텅 빈 상자들과 아주 작은 크기의 빨간 등, 그리고 빨간 등에 투사된 이 무대 전체의 명멸감, 그리고 이 모든 욕망체가 붕괴될 위기 마다 초현실적으로 등장하는 세 마리의 쥬라기 공룡들, 공룡들이 뱉어내는 기분 나쁜 (그것마저 비트감이 탁월했던) 소음들로.
공룡들이 뱉어내는 소음은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초침 소리를 닮았다. 무대에서 비트감으로 표현된 사운드 가운데 하나이다. 엔론의 사장 제프리는 공룡의 소리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의 초침 소리인지 모를 것에 시달린다. 그가 보안 요원을 불러 바닥에 대고 소리를 들어보라고 하는데, 보안 요원이 그건 당신의 손목시계 초침 소리가 아니냐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목 즈음이다. 이 작품에 희미하게 <맥베스>의 모티프가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건. 욕망이 광기가 되어버린 한 사내. 그렇다면 제프리를 추동하여 텅 빈 상자를 가지게 한 앤디는 레이디 맥베스? 더 거슬러 올라가 제프리가 사장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모함했던 클로디아는 뱅코우를 의식한 인물인가.
맥베스의 입김이 이 작품 안에 서려 있는 것을 감지하게는 하였으나, 그것은 지극히 희미한 것이었기에 오히려 이 작품을 빛나게 했다. 결코 맥베스를 맥베스‘적’인 모티프로 활용하지 않고, 맥베스의 입김을 희미한 망령처럼 미약하게 서려놓게 한 것. 그래서 돈, 혹은 돈과 비슷한 무언가에 착종된 현재 우리 모두의 욕망체가 맥베스가 품었던 욕망과 어렴풋이 연결되게 하면서 조금 더 욕망이라는 근원적인 실체가 의식된다.
예고했던 대로 텅 비어 있던 거대한 상자는 결국 아주 작은 빨간 등에 의해 폭파되어버리고 만다. 얼마 전 커다란, 텅 빈 상자가 아주 작은 등의 폭파로 붕괴되어버리는 사태를 경험한 우리 모두는 이 작품 속의 논리를 단지 미국 시장에서 벌어진 사태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모든 논리는 지금 우리의 현재를 장악하는 논리들 그것 자체의 모습이다. 의도적으로 한 장면에서 엔론의 사장을 “선장”이라 지칭하고 “바지나 입으시죠”라는 대사를 삽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객은 이 연극을 보는 내내 그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보았을 것이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