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뛰다'의 <바후차라마타>
연출 : 배요섭
공연장 : 남산드라마센터
관극 : 4/12 (토) 7시
by 이예은
'뛰다'의 공연은 단지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오지 않고 순례 중에 있는 여행의 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나는 잠깐이나마 그 여행에 동행하고, 공연이 끝나면 여전히 이들은 어딘가에서 그 여행을 멈추지 않아주기를 하는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관객으로서 '뛰다'의 공연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은 그 어떤 작품적인 것을 조금 넘어서는, 작품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작품을 보듬는 마음에 대한 것이 더욱 크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느끼게 할까, 또 무엇을 반성하게 할까. 연극이란 것이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연극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그리고 연극이 이런 것이라면 참 해 볼만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가지게 해 주는...
사실 '뛰다'는 내가 연극과 첫사랑에 빠질 무렵, 연극이라는 아름다움을 나의 감각 속에 깊숙이 각인시켜 준 극단이다. 하륵, 하륵 하면서 음악 같기도 춤 같기도 한 그 하나의 단어로 결국 세상의 모든 언어를 뛰어넘어버렸던 <하륵 이야기>는, 분명 작은 무대이면서 하나의 큰 우주였다. 단 하나의 단어로도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말하는 서사의 상상력이 아름다웠고, 동시에 그 상상력의 공간을 채워 넣는 정성 어린 소리들과 율동들의 세밀함이 빛났다. 어떠한 세계의 초월을 거뜬하게 이루어내고 있으면서도, 그 거뜬함을 지극히 정성 어린 습기들로 일구고 있는 농부 같은 견실함이 아름다웠다. 이어지는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또채비놀음놀이>를 기다리고 만나면서 그 어느 어린이 관객보다도 커다랗게 기뻐할 준비를 하며 무대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항상 다시 기다렸다. 그 어떤 새로운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줄지. 마치 팀 버튼을 처음 만났을 때, 조금 커서는 코엔 형제와 미셸 공드리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세상의 다양한 드라마들을 최대한 많이 이 감독들의 연출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뛰다'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러했다. 연극으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이 극단의 작업으로 만나고 싶었다. 이러한 기대가 든 것은 연극 집단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뛰다'가 표현하고 드러내려 하는 것은 단지 무언가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진심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로 할 수는 없으나, 이들이 품고 있는 그것. 다 말로 할 수도, 다 말해질 수도 없는 정신과 정성. 그것이 장면 장면마다에 결코 거짓말 하는 법 없이 묻어 있어서 좋았고, 그 진심은 배요섭 연출이 이 공연 프로그램북에 쓴 말처럼 “어떤 화려한 미장센이나 감동적인 이야기”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임을 안다.
이 공연에서도 '뛰다'는 그 어떠한 화두 혹은 장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 어떤 주제나 형식으로 따지자면, 이 공연에서 다루고 있는 성 정체성, 성 전환 수술, 트랜스젠더, 동성애 등의 화두를 발설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일인지 모른다. 이 공연은 이 화두를 발설하거나 질문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화두와 관련된 그 어떤 아픔을 이입시키거나 이해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에 있지도 않다. 그러면 이 화두를 둘러싼 무엇에, 어디에 이 공연은 존재할까?
작품 초반부에 공연은 무던히도 관객과 배우, 그리고 배우와 캐릭터 사이를 소통케 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그럼으로써 현실과 서사, 사실과 사실 가능성, 그리하여 나와 타자 그 ‘사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호소하고 표현하고 싶어 했다. 배우들은 저마다 어떠한 캐릭터를 맡아서 연기를 하고 있었으나 그 연기의 대부분은 스토리텔링이었기에 허구와 현실 사이를 호소하였고, 장면의 중간 중간에 연출이 “연출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연출로서” 등장하여 무대 위에 허구가 ‘아닌’ 것들을 개입시키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 초반부의 이 모든 호소들은 표현되고, 보여지고, 질문되고, 그리하여 호소되는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연이 중반부 즈음에 달했을 때 연출이 관객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이 무대 위에서 한 번 객석을 바라보면 어떻겠느냐고. 마치 힘겹게, 힘겹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다가 ‘이 모든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고 술이나 한 잔 하자’와 같은 태도였다. 초반부의 모든 장면들이 어느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 걸으며 채 율동을 터뜨리지 못한 터라 그 제안에 흔쾌히 자리를 일어나 무대 위로 걸어갔다.
관객들이 자리를 옮겨 앉았을 때 연출은 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결국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했다는 고백을 한다. 그것은 그제까지 이 공연을 보던 관객들이 객석에서 느꼈던 고민과 같은 것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연출이 몇 번 관객에게 말을 걸어 왔지만, 그의 말이 비로소 처음으로 몸으로 들어 왔다. 이어서 그는 그 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이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을 한다. 이 공연의 순간 역시 그러했다. 관객의 몸이 무대의 몸속으로 들어 온 그 순간. 이토록 간단한 몸의 이동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공연의 창작 과정에서의 경험들이 이 공연을 보는 관극 과정 안에서 다시 고스란히 체험되고 있었다.
무대 위로 관객을 초청한 것은 저 너머의 세계를 한 번 넘어와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무대 위에서 바라본 객석,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 본 무대, 그리고 무대 위에서 바라본 이 공연은 이 공연이 그토록 넘어보고 싶었던 그 너머의 세계였다. 관객이 무대의 몸 속으로 들어오면서 공연도 실제와 합치되고, 이 모든 재료 안에서 글래디가 고백을 한다. 자신이 성을 바꾸게 된 역사를. 그 고백은 실제이다. 우리는 함께였다. 무대 안에서, 상처 안에서. 너무도 간단한 몸의 움직임이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던 정신의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공연 초반부에 그토록 어렵게 호소했으나, 그럼에도 체화되지 못했던 이 공연 속의 화두들. 그 화두들이 체험이 되어, 아픔이 되어, 상상 너머의 것이 되어 이 공간 속에 낭자하다. 공연 초반부에 쌓여 온 것들은 어쩌면 이 순간의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 위한 축적의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체험이라는 것, 예를 들면 간단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이동하는 행위. 그 행위는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선 위에서는 그 어떠한 표현이나 발설이나 그림으로도 풀어내지 못하는 영역의 공감을 너무도 간단하게 끌어낸다. 세상의 모든 화두나 담론들 그 바닥에 서려 있는 아주 간단한 진리, 예를 들면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하고 싶고, 우리 모두는 상처 받으면 아프다 라는 사실 같은 것. 이토록 간단한 진리란 어쩌면 매우 간단한 체험만으로 체득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객석에서 무대로 건너오라고 한 이 공연의 제안처럼. 단, 체험은 그 간단함 속에 오로지 한 가지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그 어떠한 거짓도 없는 진심일 것. 그렇기에 체험이란 그 어떠한 표현이나 주제, 방법론을 뛰어넘는 것이다. 진리란 사실 매우 간단해서 그 어떠한 강요도, 유혹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진리란 매우 간단하고 보편적이어서 그 어떠한 화두들에도 적용이 된다. 이 공연에서 성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걷어내면, 이 공연의 자세는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어그러진 삶 속에 적용된다.
참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기보다 연극을 체험하고 온 기분이다.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극장 안에서 크게 숨을 쉬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배우들과 연출이 이 날의 공연이 어떠했는지 스스로 느낀 점을 이야기한다. 보통의 공연 같으면 너무도 당연히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후에야 노트를 들고 연출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이 날의 공연 모니터링을 하는데, 그 모습을 관객 앞에서 자연스럽게 꺼내는 태도가 예쁘다. 이 공연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이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 담고 있는 정신 안에서 벌어진 정신적인 것들을 오롯이 관객 앞에 꺼내고 싶어 한다. 그 순수와 그 자연스러움이 관객에게까지 유출될 수 있는 힘이란, 연출이 공연에 개입을 해서도 아니고, 모든 배우들이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건네서도,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서도 아니다.
이 공연이 해 낸 몫은 그 어떠한 방법이나 내용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다. 그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힘, 체험의 힘을 이루어내었다는 점에 고마움을 느낀다. 연극에서 체험을 끌어내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운 일일까? 보는 입장에서는 늘 기다리고, 만드는 입장에서는 늘 고민한다. 관객과 가장 몸이 맞닿아 있으면서도 단지 그 몸의 열기만으로는 결코 이끌어낼 수 없는 그것. 오히려 우리의 몸이 이토록 가까이 있으면서도 얼마나 우리는 먼 곳에 있는가를 느끼며 극장 문을 나설 때가 대부분이다. 체험을 만나는 일은 마치 진짜 사람을 만나고 오는 일처럼 어렵고, 또 불가해하다. 우리가 ‘함께’라는 것의 체험. 그것은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순간, 극장 밖의 세상으로도 흘러들어간다.
<노래하듯이 햄릿>, <앨리스 프로젝트>, <내가 그랬다고 너는 말하지 못한다>를 보면서 '뛰다'의 새로운 모습들에 새로운 기대를 가졌었는데, 오늘의 이 공연은 '뛰다'에게 또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체험의 에너지와 진실의 깊이와 무게감의 질감이 전작들과 조금 다르다. 더디게, 부디 오래 오래 성장하고, 건강하고, 계속 살아나가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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