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fb.com/12thTTS/posts/614370755303375 |
연극 <정물화>
관극 : 대학로예술극장, 3/14
작 : 유미리
각색/연출 : 성기웅
by 이예은
Prologue
교실 문이 열린다. 녹이 슨 난롯가에는 얼굴이 벌개진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고, 낯선 선생님이 들어온다. 예를 들면 삼월 이일, 한 교실에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이 모여 앉은 그 첫날, 교실의 천장은 늘 조금 높았다. 공기의 한 군데는 너무도 뜨거웠고, 나머지 대부분의 공기는 차가웠다. 난롯가에 앉은 몇 몇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춥다며 검정 스타킹의 다리들을 교복 치마 안에서 심하게 흔들어댔다. 시끄럽고도 고요하다. 호기심 가는 아이를 발견하여 쳐다보다가도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린다.
+
초연 때의 선돌극장 무대보다 더욱 단정하고 반듯하게 정돈된 무대였다. 재공연을 보고나서야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들리는 느낌이다. 이것은 장면과 장면 사이 순간들에 대한 것이리라. 이 연극에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사이의 장면들이 많다. 그 장면들은 마치 우리 일상의 틈 사이에 반투명하게 서 있는 시(詩)처럼 어중간하게 서 있다. 인물들의 대화가 오고 가는 그 틈 사이에, 혹은 한 인물이 움직이고 대사를 하는 그 틈 사이에 무언가 불투명한 것이 끼어 있다.
그것은 이 연극이 다루고 싶어 하는 시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 연극에는 문학이라는 소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연출의 행간에 문학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문학에 빗대어진 것인지, 아니면 문학과 연극 사이의 것인지, 어쨌거나 이 연극의 행간에 녹아 있는 잘 알 수 없는 것. 나는 그것을 정서라고 느끼고 있었고, 그 정서가 이 작품의 대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무언가 잘 알 수 없는 것. 그것은 나나코(전수지 분)가 왜 죽고, 후유미(류혜린 분)의 언니는 왜 죽었는가에 관한 궁금증과는 조금 차원이 다른 궁금증이었다. 이 교실 안에 마치 태초부터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그저 처음부터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죽 존재할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연극 속을 떠다니는 이 알 수 없는 힘의 매력은 그것이 매우 현실적인 상세 감각들과 혼재해 있다는 점에 있다.
+
반장 치하루(박민지 분)와 덤벙대는 카오리(서미영 분), 보이시한 나츠코(김희연 분)를 바라보고 있으면,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그 인물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껴버렸는지, 여기저기에서 ‘나는 너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어’라는 듯 바쁘게 웃음의 리액션을 보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인물들이 어느 여고의 교실에든 있을 법한 ‘바로 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고 시절에 꼭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그 모든 제스쳐와 표정과 말투와 웃음 소리들. 예를 들면 반장 치하루가 종이에 코를 박고 엎드려 글자를 하나하나 또박또박 쓰는 포즈며, 시험 용액을 들고 사랑의 주문을 외우듯 과학 공식을 외우는 동작, 카오리가 머리를 반만 땋은 채 헐레벌떡 교실에 들어오는 모습, 그리고 가슴 만지기 놀이. “육이오가 왜 일어났게?”라고 물어보고 “왜?”라고 하면, “방심해서”라면서 가슴을 만지고 도망가던 우리 여고 시절의 가슴 만지기 놀이가 떠오른다. 우리가 아는 유미리 작가의 고독한 정서, 그 이면에는 그녀의 유년 시절에도 분명 이렇게 빼곡하게 들어 찬 어느 상세한 유희의 기억들이 있었으리라.
이런 상세 감각은† 성기웅 작/연출의 작품 <삼등병>에서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나는 분명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건만, 마치 군대에 가면 정말로 저러할 것 같은 세 명의 남자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 같은 그 느낌. 이 느낌은 마치 애니메이션이나 클레이메이션의 캐릭터가 인간의 제스쳐, 인간의 말투를 너무도 완벽히 따라해 내어, 오히려 그 캐릭터들이 더 인간 같아 보이는 순간에 느껴지는 궁극의 호감 같은 것이다. 어떤 재현 이상의 재현. 너무도 ‘그’ 인물인 것 같은 것을 넘어설 정도의 ‘그’ 인물 같음. 연극에서 인물 창조란 재현이냐 탈-재현이냐의 문제라기보다 결국 그 인물을 어느 정도 살아있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닐까. 스타일보다는 결국 실제적 전달력이 중요하다.
<정물화>에서 이러한 상세 감각은 아주 작은 것들의 긴밀한 포착들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포착들은 매우 작고도 다양하다. 이 연극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나의 장면에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은 히라타 오리자 작/성기웅 연출의 <과학 하는 마음>에서처럼 군데군데 따로 모여 앉은 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터뜨려 관객이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를 선택하게 하는 명징한 다발성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도 끊임없이 하나의 장면에서 모든 것들이 동시에 말을 하는 연출로 녹아 있다. 이 연극에서 관객은 하나의 장면 안에 있는 그 작고 상세한 것들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
<정물화>에서 치하루, 카오리, 나츠코가 만들어내는 지극히 상세한 감각들은 이 하나의 교실에서 나나코와 후유미가 만들어내는 망령 같은 비현실적인 기운들과 공존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여고생의 정서 안에서 가장 이상한 두려움 같은 것으로 느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학교의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을 거무튀튀한 변태의 눈빛, 다른 하나는 바로 나츠코와 후유미 사이에서 오고가는 그것. 예를 들어 1분단 맨 뒤에 앉아 있는 조금 낯선 아이가 수업 시간 내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 굳이 단어로 표현하자면 동성애에 대한 이상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사진출처: https://www.fb.com/12thTTS/posts/609395499134234 |
예를 들면 이 두 가지의 이상함 같은 것을 둘러싼 알 수 없는 것들이 여고 시절의 교실 안을 군데군데 망령처럼 떠 다녔던 것 같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것을 마다 않을 만큼 현실적으로 떠들어대면서도 한켠으로는 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기묘함에 일제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귀를 기울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단지 동성애 혹은 변태라고 축약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떠한 알 수 없는 기운에 대한 증폭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와 같은 기묘함에 대한 강한 거부와 기대와 두려움과 기다림과 떨림은 늘 우리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비로소 그러한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나면 아이들은 일제히 “이건 비밀이야.”라고 말하면서 소문을 내고 다녔다. 이 연극 역시나 비밀과 소문에 집중한다. 후유미의 언니가 왜 죽었는지, 나나코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관객은 이 작품만을 봐서는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은 연극 속에서 철저히 비밀에 묻혀 졌고, 그리하여 소문만 무성한 채로 끝이 났다. 만일 사건에 의한 플롯 진행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어리둥절한 연극일 수 있다. 이 연극은 부러 비밀과 소문으로 사건들을 철저하게 삭제하고 그 자리에 대신 사건들을 둘러싼 기운들을 채워 넣는다. 나나코가 연극 중간 중간 계속해서 귀신들과 교신하는 것, 그리하여 처음부터 이 연극을 채우고 있었던 이유 모를 죽음에 대한 예감 같은 것은 나나코와 후유미 사이에 오고 가는 이유 모를 설렘과 함께 연극 중간 중간을 떠다니는 초월적인 기운이다.
<삼등병>과 <정물화>. 군대와 여고. 이 두 세계는 철저히 교차되지 않을 법한 세계이지만, 이 두 세계를 떠올릴 때 공통적으로 환기되는 느낌이 있다. 무언가 정밀하게 현실적이면서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거대하게 초월적인 느낌. 우리는 매우 상세한 현실을 살아갈 때 어쩌면 가장 거대한 꿈을 꾸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관계로, 나의 경험을 반추해 보면, 나는 여고 시절에 그러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과 방금 끝난 수업 시간의 선생님 흉을 깨알 같이 보거나 어제 본 TV 프로그램의 남자 주인공 이야기를 피 튀기며 하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 가 귀를 막고 시를 쓰기도 했다. 아, 그 폭발적인 잡담과 폭발적인 고요. 돌이켜 보면, 세속과 초월이 어찌 그토록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존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 시절은 그 폭발적인 것들이 너무도 작고 좁은 우리 교실, 내 책상 위에서 모두 공존하던 아주 이상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치하루, 카오리, 나츠코가 만들어내는 지극히 상세한 감각도, 나나코와 후유미 사이에서 오고 가는 지극히 초월적인 감각도 모두 하나의 교실 풍경 안에서 동등하게 회고된다. 군대에 가보지 않은 내가 <삼등병>을 보고도 마치 그들이 된 듯 아주 좁고도 낱낱한 그들의 상세 감각을 느꼈듯이, 여고를 나오지 않은 남자 어른들도 <정물화>를 보면 이러한 상세 감각들을 느낄 수 있을까?
+
이 연극은 계속 곱씹고, 곱씹고, 곱씹고 싶다. 마치 어린 시절의 사진첩을 긴 세월이 흘러 다시 꺼내어 보았을 때, 그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제야 기다림에 지친 인물처럼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듯이. 이 연극은 시차를 두고 곱씹고 곱씹어서 계속 그 장면의 틈새에 있는 보이지 않았던 것,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계속 발견해 가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 속에서 새로이 시(詩)가 될 수 있는 순간을 재발견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나왔는데 문득 문학이 그립다.
†상세감각
예를 들면 허진호 감독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보여준 지독히도 상세한 감각. 수박을 먹을 때에는 씨를 멀리 뱉기 놀이를 한다랄지,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여러 명이서 먹을 때에는 미리 아이스크림에 금을 그어 놓고 먹기를 시작한다랄지, 증명사진을 찍을 때에는 꼭 앞머리와 옆머리로 얼굴을 최대한 가려 얼굴을 작게 나오려고 한다랄지... 누구나 사소하게 공감할 법한 감각들을 다양하게 포착하여 비주얼라이징함으로써, 사건에 의한 플롯팅이 아닌 그 이면에 흐르는 섬세한 정서로써 플롯팅을 이끌어가는 작업을 본인은 ‘상세 감각’의 연출법이라고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상세 감각의 연출법은 특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연출을 할 때에 정밀하게 요구되기도 하는 일반적인 연출법이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