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와 결말이 노출됩니다.)
매표 직원까지도 배우처럼 분장을 하고 관객들을 맞는다. 그러니까 아래 사진처럼 색색의 옷을 입고 배시시 웃으며 “별도 프로그램은 없고요, 휴대 전화는 꺼주세요.”라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이다.
극단의 제안인지, 두산 아트 센터의 시도인지 모를 그 누군가의 세심한 준비에 고마웠다. 극장에 들어 가기 전 배우들의 모습을 미리보기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매표하는 순간까지 공연의 일부로 만들어 준 기분이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기이하게도(?) 한 무리의 남자 관객들이 있었는데, 단체 관람을 온 모양이었다. 극장 안에서 이렇게 많은 한 그룹의 남자 관객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이는 묘하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재미있는 공연을 보고 웃으러 온 관객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 작품을 예매할 때 나는,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속 시원히 웃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삐뚤삐뚤한 벽과 문, 노랑, 보라, 분홍, 연두, 파랑 등 과도한(?) 색을 칠하고 입은 배우들은 마치 미술 작품처럼 “보는” 재미를 주었고, 남편과 몰래 여행을 간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번호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 사람씩 지우거나 (결국 그 여자를 찾아 낸다) 시체를 참치 안에 넣는 (경관도 속일 만큼 그럴 듯 하다) 기상천외한 해결책들도 물론 재미있었다. 시체를 처리하느라 바다에 버린 참치가 발견되면서 참치가 사람을 공격한 것으로 오인되고, 참치주의보가 내렸다는 사실도 우습다. 또한 이 소식을 전해주는 얀커 순경은 극 내내 관객을 웃기기 위해 등장한다. 그를 통해 전달되는 말장난이나 그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태도, 아니 무엇보다 기름을 발라 머리를 넘긴 그의 모습 자체가 웃음을 유발한다.
이렇게 재미있고 우스운 점들이 많은데, 나는 왜 실컷 웃지 못했을까. 나는 순수하게 웃음을 터뜨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것은 연극을 좋아하는 내가 연극을 공부하면서 감수해야 하는 십자가일지 모른다. 손뼉까지 치며, 그야말로 포복절도 하는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의 즉각적인 반응을 부러워하며, 어떻게 저만큼 웃을 수 있지 궁금했다. 이렇게 생각은 생각을 낳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나를 반추하면서 나는 내가 앉은 그 자리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묶여 있었다.
요한나는 남편의 친구로부터 “냉동참치”같다는, “녹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며, 시간을 들여 녹여봐야 맛도 없다”는 자신에 대한 남편의 평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다른 여자와 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과 여행을 간 여자는 바로 자신의 동생이다.
요한나가 처음부터 남편을 죽이려 했다면 괜찮았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전생 때문이라며, 독을 탄 와인을 마시고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나 열려 있던 마개를 닫아주고, 차갑게 마실 수 있도록 냉장 보관 해 준 마리사의 배려로 요한나는 살고, 토마스는 죽는다. 이렇게 내가 어쩌지 못하는 삶의 우발성은 때때로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끌어 버린다. 이러한 점에서 삶은 경이롭지만 한편 두려운 것일 테다.
“죽음”은 삶에서 가장 두려운, 산 사람을 절대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이다. 그러나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죽음은 너무 가볍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고, 속을 파낸 참치 안에 그 시신을 넣어 바다에 버렸다. 남은 참치는 스테이크로 즐겼다. 그녀들은 "유쾌하게 사건을 간단히 요약"했으며, "통쾌하게 고민을 역전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이 잘못을 저지른 토마스를 깔끔히 해결한 것을 보고 통쾌하기 보다는 깔깔 웃으며 참치를 먹으러 포르투갈에 가자는 그녀들의 모습에 끔찍함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웃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다. 이 역시 오로지 내 문제일 것이다.
사람들은 웃음이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웃음이란, 실제적이거나 또는 상상적이거나 같이 웃는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 말하자면 공범의식 같은 것을 숨기고 있다. 극장에서 관객의 웃음은 장내가 만원일수록 더 커진다는 것은 누누이 이야기된 바가 아닌가? 다른 한편, 희극적 효과를 지닌 많은 것들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질 수 없으며, 결국 일정한 사회의 관습과 관념과 상호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수없이 지적된 것이 아닌가? 베르그손, <웃음>, 김진성 옮김, 종로서적, 1997.
이러한 점에서 나는 극장 안에서 소외된 한 사람이었다. 하필 내 자리는 무대에 걸린 거울에 내 얼굴이 그대로 비치는 자리였는데, 내가 너무 양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종 신경 쓰였다. 사람들이 깔깔 웃는 재미있는 연극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꾸며져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외도, 자살, 살인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이것을 현실적인 사건이라 불러야 하는 것이 슬프다―비현실적으로 다루고, 해결한다. 이는 관객들에게 ‘일어 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안전감을 준다(비록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런 인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이런 일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를 깜빡 속인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은 로비에 나와 관객들과 사진을 찍어 주는 배우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것처럼 배우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외도도, 살인도 (다행히) 잊게 되는지 모르겠다.
* 김소연, "유쾌, 상쾌, 경쾌, 통쾌", <마음사전> 참조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