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함스타
연극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이 하나 둘 차례로 나와서 자기 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누구입니다. 스물 여덟살이고요. 데뷔한지 1년 되었습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저는 박누구입니다. 서른 두살이고요. 데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등등. 9명의 배우가 각자의 실명과 나이 그리고 데뷔 연차를 밝히면서, 그렇게 <2014>가 시작되었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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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공동창작
연출: 이영석
단체: 프로젝트 그룹 코라
공연일: 2014.02.12. ~ 02.16.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관람일: 201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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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 자신의 이야기 — 디바이징 씨어터
프로젝트 그룹 코라의 <수다연극>은 이번 <2014>가 처음은 아니다. 2012년 상반기에 <수다연극>의 모태가 되는 공연이 당시 연출이 출강하던 한 대학의 연극영화과에서 학생들의 실제 이야기를 담아 학기말 공연으로 올려졌고, 이후 앵콜 공연을 거쳐, 같은 해 10월에는 두산아트센터의 창작자 육성 프로그램인 두산 아트랩에서 <수다연극: 청춘수업>이라는 제목으로 재공연되었다. 그리고 2014년 2월, (무려) 예술의 전당에서, (무려) ‘신진 유망 연출가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또 하나의 <수다연극>이 관객을 만나게 된 것이다.2014>
나는 안타깝게도 2012년에 몇 차례 이루어진 공연들을 모두 보지 못했지만, 그 컨셉과 창작 방식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었다. 예컨대 연극이 철저히 공동창작으로 구성되었다든가, 연극에서 배우들이 실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든가 하는 정도는 말이다. 때문에 공연을 보기 전 내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기대와 의심이라는 야누스의 얼굴로 떠올랐다.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니 ‘삶의 연극화’니 하는 프로그램북의 문구가 이러한 질문에 더욱 불을 당겼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진짜’ 자신들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연극이라는 거짓말, 혹은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거짓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질문에 대한 작품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배우들은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말의 ‘내용’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을지 모르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자신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정확하게는 자신에 대한 내용을) ‘연기하고’ 있었다. (가장 자연스럽게,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서 무대에 있는 사람은 연출뿐이었다는 것이 이 연극의 최대 아이러니다.)
물론 그렇다. 연극이란 본디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실제인 양 받아들이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약속이 없다면, 그 어떤 말을 한대도 그것은 ‘연극’일 뿐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연극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다연극>과 같이 (그리고 오늘날 다큐멘터리 연극이나 소위 포스트드라마적 경향의 연극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공연자들의 실제 이야기로 이루어진 공연의 경우에도 그러한가? 예컨대 <수다연극>의 청춘 배우들은 자신들의 공연에 대해서 ‘연극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분명히 연극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수다연극>에서는, 연극이 거짓말이라는 그 말도 거짓말이다.
<수다연극>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연극’이라는 규정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에 항존하여 그것을 아름답고 흥미롭게 만드는 특별한 긴장들이 만나는 지점. 허구냐 실재냐, 거짓이냐 진실이냐, 재현이냐 현존이냐의 문제들이 부딪치는 지점. 이런 지점들을 보다 과감하게 돌파했다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해 봄직한 굵직한 문제들을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2014>를 되짚어보고자 한다.2014>
‘수다’연극의 말, 말,말
<수다연극>을 보고, 혹은 보기 전에, 관객으로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술자리에서 들으면 훨씬 재미있을 이야기를 왜 굳이 연극으로 봐야 해?” 혹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극장까지 와서 내가 이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해?”
가능한 대답들 중 유일하게 정당한 대답이 있다면, ‘그것이 들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는가? 잠깐,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대답되어야 할 질문이 있다. 당최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인가? 가치라는 게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가? 잠깐, 질문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어 신과 우주에 대한 논증까지 가기 전에 질문의 방향을 돌려보자. 그 이야기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왜 ‘이야기’인가?
2012년에 연출은 다음과 같이 썼다.
“관객은 허구적 캐릭터의 행동action을 ‘보기’ 보다는 무대 위 사람들 삶의 이야기story를 ‘듣게’ 된다. 일상을 영위하는 살아있는 한 사람으로서 체험이 무대를 채우게 되며, 말하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을 통해 공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삶의 연극화’와 ‘연극형식의 확장’ 은 그대로 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되는 것이다.” (2012년 두산아트랩 <수다연극: 청춘수업>)
2014년의 공연에서도, ‘말하기’가 공연의 혹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라는 연출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서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타인 (관객)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자신의 진실과 진심을 ‘말’로써 전달할 수 있는가?
미안하지만 나는 네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
공연 후반에 한 배우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사고’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공연 내내 그 사고에 대해 에둘러서 암시만 하다가, 결국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것의 정체에 대해서 ‘다소간’ 털어놓는다. 그렇게 언급을 피하고 싶고, 그렇게 얕게 밖에는 털어놓을 수 없을만큼 그의 인생에 큰 상처가 되었으며 또한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리라. 그런 사건에 대해서 저 밑바닥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된 도리로서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다 보여주지 않는 배우를 만나러, 속시원치 못한 이야기를 들으러 극장을 찾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배우의 가장 사적인 내면의 처절한 밑바닥을 보러 극장을 찾은 것 또한 아니다. 관객은 그저 배우의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았을 뿐이다. 그 속에 삶의 진실한 어떤 한 조각이 흔적이나마 담겨 있어서, 그것이 자신의 삶에 공명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차라리 배우가 그 당시 느꼈던 처절한 마음을 괴성을 질러서 표현했다면, 막춤이라도 추고 노래라도 불러서 쏟아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관객은 그 슬픔과 상처의 강렬함,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자 달려온 의지까지도 함께 경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관객으로서 나는 그렇다. 배우들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강렬할 수 있을지, 그래서 나를 어디로/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이것은 연극이 아니다” — 재현과 현존의 경계에서
르네 마그리트가 평범하디 평범한 파이프 하나를 그리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듯이, 대상은 재현되는 순간 더이상 원본이 아니다. 경험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더이상 그 실재 혹은 진실로부터 멀어진다. 결국 <수다연극>은 재현의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무대 위에서 뱉어지는 모든 말들이 단 한 순간도 재현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재현에 그치지 않는 살아있는 순간 그 자체를 무대 위에 세워보고자 하는.
1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이 영화 촬영 현장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좀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이 장면은 실제 경험을 재연한 것도 아니라, 사실상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을 재현하는 장면이었다. 분명히 배우들도 그 장면이 제일 재미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계속 자신이라는 가면을 쓰지도 벗지도 못하던 배우들이, 재현이라는 틀 속에 들어가는 순간 ‘역할’이라는 가면을 제대로 쓰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어정쩡한 연기를 보기가 상당히 거북했던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연출과 배우들이 관객들 앞에 반원형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가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들의 연기가 보다 안정을 찾았을 수도 있고, 이야기의 주제가 ‘먹고 사는 문제’와 같이 좀 더 깊숙한 주제로 들어가면서 관객의 공감대가 넓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주요했던 건 공간 배치의 변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객석 발코니를 포함하여 공간을 다원적으로 활용하던 1부와 달리 모두가 관객을 마주보고 일렬로 앉음으로써, 무대와 객석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아, 저 유명한 제 4의 벽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더 이상 관객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신들끼리만 시선을 주고받으며, 마치 관객이 없는 듯 떠들 수 있게 되었고, 관객들 또한 무대 위 대화를 마치 텔레비전 토크쇼를 보듯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재현과 현존 사이를 휘청거리며 위험한 줄을 타던 작품은 비록 재현으로 안착되고 말았지만.
삶의 연극화를 꿈꾸며
짐작해 보건대, 연극이 끝나고 연출이 많이 들은 코멘트 중 하나가 “차라리 아주 다 짜고 쳐 보지 그랬어…”가 아닐까 싶다. 아마 제대로 짜고 쳤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공연작보다 더 완성도 있는 연극, 보기에 즐겁고 편안한 연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연출이 보여준 말을 가지고 노는 뛰어난 감각과 밀도 있는 연출력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이미 가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은 혹평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살아지는 대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훨씬 어려운 법이니까. 프로젝트 그룹 코라가 <수다연극>을 혹은 디바이징 씨어터에 대한 실험을 계속 해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싹을 틔운 ‘연극’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소중히 키워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리뷰는 <오늘의 서울연극> 제 41호에서 재수록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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