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백인경
TV와 영화, SNS와 스마트폰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무대 위에서 행위하는 살아있는 몸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만나기 위해 여전히 극장을 찾는다. 행위하는 몸과 그것을 관찰하는 몸이 마주한 공간에서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서사와 살아있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관계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또 다시 어떤 기대를 품고 티켓을 예매하게 하는 연극의 힘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호진 연출의 <왕의 의자>는 연극적 경험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한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다: 피지컬 씨어터. 피지컬 씨어터라는 용어가 요즘 현장에서 특정한 연극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의 신체를 의미하는 “Physical"과 전통적인 드라마(재현 연극)를 연상시키는 “Theatre"의 만남은 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과연 <왕의 의자>는 살아 움직이는(가끔씩 구르고 날아다니기도 하는) 배우의 몸들이 장관을 이루며 재미있는 드라마 한 편을 ‘보여'준다. 깨알같은 조연들의 코믹 연기와 코러스들의 현란한 아크로바틱, 주연 배우의 열연과 마침맞은 캐스팅, 익숙한 스토리텔링은 관객들이 부담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하였으니 ‘액션이라는 영화적 장르의 무대화’라는 연출의 의도는 어느정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이 연극을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연극은 재밌으면 장땡이니까."
- <왕의 의자>, 제작노트 중에서
"연극은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피지컬 씨어터의 서사적 결합’에 대한 연출의 실험과 노력이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것을 단순히 무대 위로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한 명의 관객으로서 이 연극을 심각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왕의 의자>는 '액션 영화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엔 충분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액션 영화에서 느끼는 재미가 어떻게 연극적 재미로 전환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아쉬움과 이에 뒤따르는 물음표들을 남겼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관객과 배우는 모종의 약속 같은 것을 한다. 소품으로 사용된 총에서 실탄이 발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간단한 음향과 조명, 그리고 쓰러지는 배우의 행위를 통해 관객들은 ‘저 사람이 총을 맞아 죽었구나’라고 믿어버린다. 영화에서 한 비중있는 인물을 죽이기(?) 위해서는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와 치밀한 장면구성, 확실한 행동과 사실적 이미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연출이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연극에서만 가능한 상상력의 힘이라고 하자. (나는 상징과 은유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반대로 신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연극이기 때문에 훨씬 곤란한 지점이 많다. 가령 영화에서 피를 내뿜으며 죽어가는 신체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죽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러나 무대 위의 배우가 피를 뿜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 잔인함에 압도되기 보다는 자동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어버린다: '저 소품은 어떤 맛일까?' 혹은 '저거 언제 어떻게 입에 넣었지!' 관객들 또한 살아있는 신체를 갖고 있기에 그들의 생각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체성에 대한 나의 고민은 소위 ‘떼씬’이라 부르는 장면에서도 이어졌다. <왕의 의자>는 무대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의자와 마이크 대에 꽂힌 긴 칼 외에 별다른 무대장치가 없다. 제작 여건 탓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불친절함은 오히려 무대 위의 몸을 부각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막은 바닥에 누운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부터 시작된다. 연극의 초반에는 배우들이 땀을 흘리며 군무를 추는 뮤지컬 스타일의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박자에 맞춰 열심히 움직이는 배우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관객들을 들썩이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라이브’로 본다는 것은 잘 만들어진 어떤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생생한’ 경험을 하게 한다.
그러나 막상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액션 씬에서는 군무씬에서 느꼈던 만큼의 에너지가 전달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상의 위험이 있는 장면들이기에 ‘합’을 맞추기 위한 많은 연습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합’이 매끄러우면 매끄러울수록 신체의 물질성은 이미지 뒷편으로 밀려나 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액션씬이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였다면 아마도 (배우는 물론이며) 관객들은 고통스럽고 불안한 에너지에 압도되어 연극을 편안하게 즐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많은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자학적 행위를 했던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신체가 서사나 이미지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그것의 물질성은 기호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TV 드라마에서의 신체성!
드라마와 신체성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연극사에서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1960년대 이후 무대에서 나타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을 포착한 한스 티스 레만이 <포스트 드라마 연극> 시대를 알린지 15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무대 위의 신체들은 드라마와 그것 고유의 물질성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펼치고 있으며, 관객들 또한 그 팽팽한 긴장 관계를 그것 그대로 즐기기 보다는 '혹시 나만 중요한 서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차 연출가의 노트를 뒤적거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연극에서 신체성과 서사는 그만큼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된 여정의 끝에 이르러, 쏟아지는 땀방울에 옷이 흥건히 젖은 배우가 텅 빈 무대에 앉아 몸을 부르르 떨며 흐느낄 때 그 어떤 장면에서 보다 ‘살아있는 몸’을 느꼈다면 그들이 실은 가장 밀접하고도 상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씨어터는 원래 피지컬하다. 그렇다면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떤 theatre를 어떻게 physicalize 할 것인가? 연출가에게 또한 관객에게 던져진 이 질문은 영원한 숙제이자 공연예술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일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