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판소리는 일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의 예술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 공연의 네 소리꾼들-혹은 배우들-은 스토리텔링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상대의 소리 및 이야기를 들으며 논평을 하기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햄릿>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Story-making). 이야기하며 연기하는 소위 ‘텔-액팅’이 최근 몇 년간 대학로를 중심으로 계속 시도 되고 있는데, 소리에 연기까지 더해진 이번 공연이야 말로 텔-액팅 공연으로 분류되기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부분이 소리꾼 출신이기에 그들의 장기가 몸을 쓰는 것보다는 소리를 하는 데 있다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예상이 가장 만족스러운 지점은 다름아니라 햄릿과 레어티즈의 마지막 결투장면이었다. “결투가”라는 이 “판소리 넘버”는 이름 그대로 햄릿과 레어티즈의 검술 경기를 다루는 대목인데, 앞서 장면들이 “미메시스”, 즉 통상적 연극 연기와 함께 극을 진행하며 사이사이 노래하는 일종의 ‘뮤지컬 방식’으로 진행된 데 비해, 이 장면은 보다 전통적인 판소리 공연 방식으로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소리로 장면을 전달하는 “디에게시스”로 진행된다. 작품 전체가 판소리라기 보다는 국악 뮤지컬에 가깝게 느껴진 데 반해 이 대목은 그야 말로 하나의 극중극, 아니 극중판소리라 할 수 있겠는데, 보다 전통적인 방식의 판소리 형식을 기대하고 온 관객들이 즐길만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사실 극에서 사용된 검이 지나치게 장난감스럽게 보였는데, 이 뭉특한 검이 아니라 그들의 날선 소리를 사용한 것이 매우 적절했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던 대목은 미친 오필리어가 노래하는 장면인 “헤이노니 난 나니 노니” 였다. <햄릿> 4막 5장에서 오필리어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그만 미쳐버리고 마는데, 셰익스피어는 미친 오필리어가 이전에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던 (운율이 있는) 말이 아니라 노래를 하도록 했다. 이 노래에 “Hey, non nonny, nonny, hey, nonny”라는 노래말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인데, 맬깁슨의 영화(1990)에서는 헬레나 본햄 카터가, 케네스 브래너의 영화(1995)에서 케이트 윈슬렛이 이 노래말로 흥얼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 <햄릿> 공연에서는 번역 과정에서 운율이 유지되지 않는 데다가 이 장면을 위해 별도로 작곡을 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오필리어가 드디어 제대로 된 우리말 노래를 얻었으니 이 사실만으로도 <햄릿> 팬들에겐 기쁜일이다. 거기다 이 서정적인 노래에 소리꾼의 눈물이 더해지면서 관객에게 큰 감동이 전달된다. <햄릿>에서 배우가 흘리는 눈물은 헤큐바가 아니라더라도 분명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왕이 참회의 기도를 하는 대목(“내 죄의 악취가 하늘을 찌르는 구나”)은 관객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아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이 장면은 본래 3막 3장에 위치하여 햄릿이 기도하는 왕을 칼로 찌르려다 돌아서는 부분인데, 이번 공연에서는 위치를 바꾸어서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죽이고 그로 인해 영국으로 보내지는 결정이 내려진 다음으로 옮겨져 있다. 공연의 목적을 위해 장면의 위치를 바꿀 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영국으로 가고 있어야할 햄릿이 다시 왕에게 다가가 몰래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장면 이동에 따른 부차적인 조율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윤택 연출의 경우 이번 공연에서처럼 왕의 기도 장면을 뒤로 보내는 대신 햄릿의 암살 시도 자체를 덜어냈다.)
이번 공연에서는 100분 가량의 짧은 시간에 <햄릿>의 이야기를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일정부분 비평사적으로 의미있는 내용까지 녹여내고 있다. 여기에 다채로운 음악 스타일로 장면장면을 흥미롭게 가져가면서도 마지막에는 일종의 상여소리로 갈무리되어 비극의 한국적 결말에 도달한다. 이 때 소리꾼들은 그동안 입고 있던 옷과 가발을 벗고 편안한 복장으로 무대를 떠나는데, 그 획일적인 앞머리와 검은 옷이 꽤 답답해서였는지 배우들이 이윤택의 경우에서처럼 전라로 벗지 않아도 그 모습이 한결 가볍게, 내려놓음이 느껴진다. 이번 주말까지 이어지는 구로아트밸리 공연과 3월부터 국립에서 있을 장기 공연에서도 관객들의 호응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
공연문의: 국악뮤지컬집단 타루 02-6481-1213
에스티의 또 다른 <햄릿> 리뷰: <구일만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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