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먹던 영양제 생각이 난다. 겉에는 달콤한 무언가가 얇게 발리고 단맛이 가시면, 또는 단맛에 혹하여 함께 넘어가도록 들어 있었던 약은 기발했다. 하루에도 몇 개씩 스스로 챙길 만큼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후에 조금 더 영악하게도 달콤한 맛이 지나고 나면 눈치를 봐서 꼭 뱉어냈던 것도 그 약이었다. 의도도 방법도 좋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쉽게도 영양제는 정작 중요한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제목에서부터 아린 역사의 향기가 묻어 날 것만 같았던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를 보고 나서도 비슷하게 그랬다. 첫 맛은 재치와 발랄함이었지만 달달함은 시간이 지나 달아나버린 또 한 번의 경험. 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뱉어낸 것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게 다를 뿐이다.
공연정보: http://goo.gl/LhqvmF |
재치와 발랄함의 첫 맛
픽션 사극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의 재치와 발랄한 달콤함은 무대와 극의 장면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다. 작은 극장을 들어서서 처음 마주한 것은 무대뿐만 아니라 객석의 일부까지 톡톡한 역사의 향기로 채워주고 있는 조각보의 형상이다. 조각보의 매력은 각각 다른 형태와 색을 가진 자투리 천들이 잇대어져 전체를 만들어내는 품(榀)에 있다. 역사를 소재로 끌어들였다는 극은 전반적인 모티프로 이러한 조각보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인물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옷장으로, 의자로, 서가로도 변신하는 무대 도구들은 모두 다른 크기의 입체 조각(爪角)이다. 이것들의 방향을 바꾸고 위치를 옮기면서 새로이 다른 조각보의 모양을 입체적으로 무대에 만들어 둔다. 여기에 각 도구의 표면 역시 비단조각과 한지조각을 이어 붙여 모티프에 있어 일관성을 더한다.사진출처: http://page1207.tistory.com/archive/20140127 |
극 장면의 운용과 배열도 조각보의 부분인 서로 다른 자투리 조각들 같다. ‘믿거나 말거나’로 운을 떼며 시작한 극은 시종 픽션임을 강조하면서 극 중의 시간과 공간들을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8년의 조선에 1901년에 초청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존재하며 연회에 모셔온 요리사는 조선 중기의 장금이다. 심지어 1960년대 영국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내관(內官)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어긋나고 조각난 시간이 동시에 뒤죽박죽으로 섞여 발생하는 혼란과 모순은 이 극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극 속의 인물과 배우 자신을 넘나들며 의도적으로 극을 조각낸다. 특히 극 전체의 해설을 겸하는 내관의 역할은 가장 적극적이다. 그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무대와 관객석의 1차적인 경계를 허물어낸다. 또 무대감독처럼 다른 배역에게 등장할 시간을 알려주고, 쇼 사회자처럼 “명성황후가 부릅니다, 세자가 떠나고 부터”라며 이어지는 노래를 소개하기까지 한다. 극 내용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장면 장면을 조각조각 자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려진 조각의 장면들은 하나의 색에서 옆 칸의 다른 색과 형으로 급변하는 조각보처럼 장면 점핑의 효과도 가진다. 이것은 많은 설명과 시간이 걸리는 장면에서 영상 편집 기술을 차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을 활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길게 반복해야 하는 설명은 “관객이 지루할 텐데 또 해?”와 같은 물음으로 이미 들은 것이 된다. 이렇듯 극에서 보이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점핑(jumping)은 생략에 강하고 빠른 전개를 가능하게 하여 극 초반의 시선을 끌고 흥미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게다가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의 조각난 각 장면들은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톡톡 튀며 기발하다는 매력을 더한다. 특히 극 내내 활용되는 언어유희는 이 극의 재치와 발랄함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요즘에 유행하는 통신 기술인 SNS를 ‘애수앵애수’로 표현하거나 영어 단어인 ‘Some’과 두꺼비를 뜻하는 한자어 ‘섬(蟾)’을 연결하는 재기에는 그저 감탄하며 웃음 지을 수밖에는 없다.
단맛과 함께 사라지다
하지만 이러한 찰나의 감탄은 극 전체에 대한 경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재기발랄함을 이끌었던 언어유희는 가볍고 일회적이라는 치명적인 단점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극에서 그러모은 언어유희의 대상들은 요즘의 우리가 즐기는, 소위 현(現)시대에 ‘유행’하는 것이다. 유행은 한정된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극의 포인트인 언어유희는 순간의 웃음으로 피었다 사그러지는 위험에 필연적으로 노출되어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같은 표현방법이 반복되면 이러한 언어유희는 생각보다 빨리 간파당하여 읽힌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무장된 극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 것이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중반을 지나면서 극에서 덜어진 웃음은 이런 탓이기도 하다.더하여, <라스트 로얄 패밀리>에는 역사의 옷을 입힌 보편적인 이야기를 깔끔하게 펼쳐내고 싶은 욕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현재 우리 주변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배경을 백여 년 전으로 이동시켰고, 거기에 모두가 알만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들의 가족관계를 덮었다. 그리고 현재적 웃음을 주고 공감을 살만한 장면의 조각으로 포장해 두었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이 모든 욕심을 가진 조각들이 정확하게 이어져 정작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혼란하다는 데 큰 아쉬움이 자리 잡는다. 앞서 재기로 가득했던 독특한 색을 가진 장면의 조각들은 그저 흩뿌려 늘어놓아 지기만 할 뿐, 그 뿐이다. 완성된 조각보처럼 전체를 바라보고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 게다가 역사의 이야기도, 가족의 이야기도, 성장의 이야기도,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도 모두 건드리고 품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분명히 펼치고 있지는 못하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해야 하니 불필요한 장면들이 파생되고 삽입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단지 오르골을 손에 쥔 채 부르는 이중창 하나로 가늠해야 하는 왕세자 척과 꼭지의 로맨스 장면은 급작스럽고 인형으로 벌이는 꼭지와 꼭도의 줄타기 장면 역시 왕세자와 함께 성장시켜야 하는 캐릭터들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할애한 지루한 선택이 되었다. 쏟아진 장면의 조각들을 잇지 못하는 극을 보면서 그렇다면 굳이 역사 소재를 들여올 이유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또한 생겨난다. 내용은 의도적으로 대한제국의 시대일 필요도 없고 대상이 마지막 왕가의 가족일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다.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비춰보고 싶었다는 변명이 이어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풍기는 역사의 냄새를 이용해서 기대감을 갖게 하지는 말았어야 한다는 반론 역시 존재할 것이다. 이 극에서 역사와 사극을 표방한다는 이들의 제목은, 그리고 소재는 소모되고 있을 뿐이다. 박수칠만한 부분이 많음에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에 좋은 영양제가 되려면
이렇게 흩어진 이야기와 장면의 조각들을 의미 있게 봉합하는 노력은 이제 오롯이 배우들의 손에 맡겨진다. 작품의 완성도가 배우의 조각을 살리는 역량이나 개인기(?) 또는 팬덤에 의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극이라면 관객의 입장에서도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 없다. 관객은 극을 완전히 즐길 수 없고 창작자는 흔들리는 작품의 질에 고뇌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고종역의 배우 지혜근은 제몫을 다한다. 극을 보는 눈이 둔감해서 일지는 모르나 극의 종반까지 그가 1인 2역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척의 거리에서 빤히 보일 법한 역할의 변화를 잠시 나마 숨겨준 배우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 배우가 매 공연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다해 주는 것은 이 극으로서 정말 다행이다.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반짝이는 재치를 가득 안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이 꽉 찬 재치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름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현재의 유머는 언제든 빛 바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분명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이 작품에 주어진 숙제다. ‘척’하지 않고 조각으로 부서지지 않는 이야기로 걸음을 옮기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진정 ‘라스트’ <라스트 로얄 패밀리>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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