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2일 수요일

연극 <홍당무>, 무대 위 영상을 바라보는 시선

by 김재영

연극을 보고 나와서 길을 걷는 내내 단 한 가지의 장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딘지 주눅들어 보이고 부끄러워 하는 듯한 홍당무의 클로즈업 된 얼굴이었다. 어렸을 적 보았던 ‘홍당무’ 동화책 속 어느 삽화에선가 봤을 법한 그런 그림체로 된 홍당무의 얼굴 말이다. 하지만 연극에서 클로즈업 된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무대 정면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아니었다면 홍당무의 그런 묘한 분위기의 표정은 내게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홍당무 역을 번갈아 가며 연기했던 두 명의 남녀배우의 표정보다 그리고 그들의 몸짓과 대사보다 연극의 마지막에 맞딱드리게 되었던 애니메이션 영상 속 홍당무의 표정이 내게 더 인상적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고, 영상 이미지에 너무 쉽게 압도당할 정도로 배우들이 관객과 교감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영상은 어디까지나 배우의 연기를 보조하는 역할 즉, 극의 배경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마지막 영상 이미지가 내게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왔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천천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극단 청년단 <홍당무>
민새롬 연출


  연극이 시작되면, 홍당무 역을 맡은 배우들은 각각 좌측과 우측의 관객석에 앉아서 번갈아 가며 자신들의 과거 에피소드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관객은 한번은 좌측의 배우(박수진)를 보며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측의 배우(왕보인)를 보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 동안 무대 정면에는 홍당무 가족의 가족사진이 정지된 애니메이션 영상 화면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상 속 가족은 총 4명이다.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홍당무의 가족은 아빠, 엄마, 형, 누나 그리고 홍당무 자신까지 총 5명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관객은 가족사진에서 홍당무가 빠져있음을 알게 되고, 영상 속에 부재한 홍당무가 지금 우리의 좌측과 우측에 배우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몇가지 에피소드들을 관객에게 들려준 후, 배우들은 관객석으로부터 무대 위로 이동하여 가족사진 영상이 위치해 있던 무대정면에 앞뒤로 위치한다. 연극의 첫부분이 주로 가족과 관계된 홍당무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이 부분에서는 소설 ‘홍당무’에서 가장 강렬한 에피소드들이자, 홍당무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두더지’, ‘붉은 뺨’, ‘르픽씨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배우들은 이제 관객에게 회상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소년 홍당무를 직접 연기하기 시작한다. 이 때 영상은 극의 전개에 따라 학교 기숙사 공간이 되었다가, 학교 창문이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한다. 영상은 주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의 배경으로서 기능하지만, 때론 배우와 상호작용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배우가 두더지를 영상에 대고 던지는 액팅을 하면 영상에는 두더지의 피가 튀는 이미지가 나타나는 식이다.

 이러한 영상의 활용 방식에서 알 수 있듯이, 영상은 극 전개 과정에서 장소를 나타내는 배경으로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른다. 반면, 배우들은 마치 빛바랜 가족사진으로부터 뛰쳐 나와 우리 앞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존재로 보이며, 자신들의 가장 강렬한 이야기들을 온 몸으로 표현해 낸다. 두 명의 배우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번갈아 가며 연기하는데, 하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느꼈던 서운한 감정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와의 편지 교환에서 느꼈던 씁쓸한 감정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고 두 개의 에피소드가 묘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겹쳐지면서 어린 소년의 분노가 비뚤어진 방식으로 무대 위에서 표출될 때 극의 긴장감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있던 두 배우는 무대 정면에서 만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데, 이 장면에서 두 배우가 서로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위로하고 도닥여주는 것과 같은 느낌이 전달된다.

 이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면, 배우들은 연극의 첫 부분과 마찬가지로 각각 좌측과 우측으로 돌아가 관객석에 앉고, 영상에는 다시 홍당무의 가족사진이 정지화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홍당무의 앨범’ 이야기가 마무리될 쯤, 가족사진의 정지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 속 가족들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 화면이 서서히 가족들 사이의 틈새로 클로즈업되기 시작한다. 앞에 서 있는 아버지와 형, 누나를 지나 그들의 뒤로 화면이 움직이면, 형과 누나 사이에 어깨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홍당무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나타난다. 연극 내내 영상 속에서 부재하고 있던, 배우의 몸을 통해 영상 밖 관객들 바로 앞에 존재하고 있던 홍당무의 모습이 그 순간 영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영상 속 홍당무의 이미지가 배우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클로즈업을 통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홍당무의 표정이 왜 그렇게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그것은 배우들이 발산했던 사춘기 소년의 질풍노도와 같은 격정적인 감정들이 바로 그 표정 안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보이지 않았던 어떤 공간을 들춰내었을 때, 그리고 영상 속에 부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홍당무가 모습을 드러낼 때, 그가 실은 가족들 사이에서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앞서 두 배우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볼 때 전달되었던 뜨거운 감정의 교류같은 것들이 영상 속 홍당무와 나의 눈 맞춤으로 인해 내게도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 하나의 표정이, 그것도 거친 질감으로 그려진 옛날 동화책 속 그림과 같은 이미지 하나가 그토록 많은 의미들과 감정을 한꺼번에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엔딩 장면은 아쉬움을 또한 남긴다. 배우들의 말과 몸짓에 집중되어 있던 관객들의 마음을 너무나 쉽게 영상 속 이미지에 빼앗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무대 위 배우들의 존재는 마치 영상 속으로 별안간 사라져 버리고 없어진 것처럼 느껴졌으며, 배우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저 영상 안에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연극 무대가 한없이 작아 보였고,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배우들이 연극을 마무리하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영상으로 비춰지는 가족들 틈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무대 한 가운데 서서 관객과 마주보고 있는 홍당무의 모습이 더욱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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