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서른을 말하는 무게: <파니핑크>와 <출출한 여자>

by 이예은

+ 8년 후의 <파니핑크>,
‘서른’이라는 나이를 발설하는 것에 대한 오만함

  서른이 되기 몇 해 전,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나 아직까지도 분명히 ‘좋은 영화’라고 각인되어 온 작품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작품의 원제가 사실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친구의 뒤늦은 부음이라도 접한 것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이 1994년도 발표한 <파니핑크>.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고 흰 해골모양의 액세서리로 온통 얼굴과 몸을 휘감은 파니가 ‘서른’에 대해서 논평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탐욕하는 것만 같이 온 몸을 뼈 무늬로 분장한 흑인 게이 친구 오르페오는 끊임없이 어느 누군가의 잠재적 타나토스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장례 수행에 참가하여 매일 매일 “육신은 흙이 될 것이다”를 읊으며 죽음을 연습하는 파니...


 영화는 온통 분주하게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장례를 치르는 한 편의 장송곡 같다. 영화의 이곳저곳은 비주얼로, 사운드로 그 장송곡의 세부 리듬들을 구현하기에 바쁘다. 실제로 파니의 유일한 친구 오르페오가(그러나 처음부터 ‘실존’하는 인물 같지 않아서 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파니의 끔찍한 고독함을 영화 내내 느끼게 했던) 달빛을 온 몸에 한껏 담아내며 ‘신화적’ 죽음을 맞이하고, 파니를 둘러싼 온 우주는 하얗게 흔들리면서 한 세계를 떠나보내고, 한 세계를 맞이하며 끝이 난다.

파니가 검은 상복을 입고 영화 내내 그토록 장송하고 싶어 했던 오르페오, 매일 밤 집에 있는 관 속에 묻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 안에 그대로 묻혀 있는 것만 같은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파니, 그들은 어쩌면 ‘이십대’라는 은유된 세계 전체를 말하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스물아홉까지의 거대한 한 세계를 보내고, 서른이라는 거대한 한 세계를 맞이하는 인생의 절기에 관한 신화적 상상력이라고 생각된다.



  나 역시도 ‘서른’이라는 나이가 나 자신에게 엄습해 올 즈음, 그 나이를 지극히도 ‘신화적’인 나이로 절감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공연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그 시기, 내 나이 스물아홉에 치렀던 모든 공연의 소개 글에 나는 ‘절기’라는 단어를 습관처럼 사용하곤 했다. 그 시기 세상 밖의 것으로 내다보이는 모든 것들에 나는 바쁘게 스물아홉‘적’인 정의를 내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제까지 아직, 채, 나의 공책에 사유의 화두로 떠오르지 못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이십대의 마지막 시선으로 보듬고 사유화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최대한 명료한 사유와 표현의 기치를 발휘하여 그 시기를 다 지내버리고 나면, 다시는, 결코, 내 인생에서 다시는, 결코, 살지 못할 ‘이십대’라는 청춘의 도장을 팔 수 있는 만큼 다 파내고 싶었다. 지금 쓰여진 이 몇 줄의 문장들에서처럼, 그 시기는 끊임없이 ‘쉼표’들로 난무했던 시기였다. 그 시기 나는 어느 문장의 뒤에도 채 마침표를 찍을 정신없이, 열렬히 장엄하고 싶었다.

  ‘서른’이라는 절기는 그렇다. 우리는 그 절기의 순간, 어떠한 ‘장엄함’을 필요로 한다. <파니 핑크>를 다시 보면서 이제 와서야 생각하는 것은, ‘서른’을 향한 그 모든 욕심은 ‘신화적’인 망상이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다시 꺼내어 본 순간, 사실 첫 장면에서부터 강한 거부감이 고개를 들었다. 셀프 카메라를 돌리며 파니가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씬에는 ‘카메라의 카메라’라는 특별한 장치가 숨어 있다. 즉 카메라의 카메라라는 이중적 카메라를 설정함으로써 영화는 파니에게 ‘당당하게 이 모든 거대한 것들에 대해서 어디 한 번 마음껏 말해 봐.’라며 과도하게 맹랑한 응시와 발언의 능력을 준 것이다. 마치 어떤 발언권이 주어진 자처럼 서른에 대해서, 여자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이런 저런 단어들을 입에 올리며 자조도, 희망도 ‘아닌’ 상처도, 기다림도 ‘아닌’ 정조로 카메라의 렌즈를 응시하는 파니의 얼굴에서 난 ‘허구’를 읽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스물아홉의 허구를 대면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얼마나 ‘발언권이 주어진 자’처럼 맹렬하게 공책을 채우고, 맹렬하게 대화를 채웠으며, 맹렬하게 울고 웃었던가.



  8년 전 난, 나의 파니에게서 ‘자조’ 혹은 ‘희망’, ‘상처’ 혹은 ‘기다림’을 읽었다. 그런데 8년이 지나 다시 만난 파니는 자조나 희망, 상처나 기다림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스물아홉이었던 나와 파니가 그토록 스스로 믿고 싶어 했고, 또 그리하여 힘겹게 인고하고 있다 자랑했던 자조나 희망, 상처나 기다림. 사실 우리는 이것들의 아주 머나먼 저편에서 엉엉 울거나 박장대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뒤늦은 자문을 한다. 우리는 그 어떠한 것도 ‘아닌’ 지대에서 그 어떠한 것이 되어도 괜찮아. 라며 스스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유독 그 시절에는 ‘아니에요’, ‘아니야’라는 말을 많이 했던 기억도 난다. 특히 ‘너 결혼 왜 안하니?’와 같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를 것만 같은 질문들과 충돌했을 때. 오르페오의 품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은 그런 질문들과 충돌했을 때. ‘무언가’를 대답하려고 답을 찾아보지만, 결국 스스로 그 ‘무언가’를 찾지 못하여 단지 ‘무언가’가 ‘아니’라는 상태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을 때. 돌이켜보니, 그 시기는 그 무엇도 ‘아닌’ 것에 나도 몰래 의존하고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무언가’를 지극히 충족시키고 싶어 했던, 그러나 그 ‘무언가’가 전반적으로 흔들리고 요동치고 말았던 시절.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고립된 상태에 있었음에도 그토록 요동치게 흔들렸던 것인가. 어쩌면 이 영화에서 오르페오는 정말로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스물아홉의 요동의 요람이 되어준 비현실적인 신화 (지금은 망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것), 그 신화를 지탱케 해 준 허구의 ‘달’(영화 엔딩에서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보름달의 이미지에 오르페오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이 아닐까.
  스물아홉이라는 절기. 혹은 스물아홉이라는 절기에 빗대어진 인생의 그 어느 절기. 사유와 정서와 표현에 최대치의 집중을 투자하여 그 어떤 ‘장엄한’ 지대에 도달하고 싶었으나 사실, 그 시절은 전반적으로 사유와 정서와 표현 속에서는 모조리 빠져나가고 마는 흔들리는 순간들에 대한 것이었다. 단지 그 흔들림이, 지극히 신화적인 힘을, 그 장엄한 함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 어딘가가 늘 <출출한 여자>


  얼마 전 ‘웹 드라마’라는 생소한 포맷으로 만들어진 <출출한 여자>를 보았다. 총 6부작으로 이루어진 에피소딕 드라마인데, 작품의 각 편은 6분에서 10분 정도에 불과하다. 제목만 보아도 ‘퇴근의 맛’, ‘금기의 맛’, ‘불행의 맛’, ‘의외의 맛’, ‘우정의 맛’, ‘결산의 맛’으로 이어지는 ‘맛’드립은 이 드라마의 형식이 짤막짤막한 에피소드 끝에 ‘요리’라는 조금 무조건적이고 유쾌하고 육감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어서이다.
  생소한 형식과 자극적인 제목에 끌려 처음 클릭하게 된 ‘우정의 맛’을 시작으로 그 자리에서 전편을 다 보게 되었다. 사실 기획에서 밀고 있는 ‘맛’의 향연은 뒷전이었고, 이 단편들에서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6편이 모두 다른 감독들에 의해 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십대 초반’의 ‘싱글’ ‘여자’라는, 듣기만 해도 지겹고, 무시무시할 것도 없이 지루하기만 한 나의 화두를 짧지만, 지속적인 관찰로 보여주고 있는 시선이 무척 재미있다.

  극 중 ‘재영’이인 박희본은 베프의 결혼식을 치르고 온 날 그 결혼‘식’이 별로였다며 엄마에게 긴 수다를 늘어놓기도 하고,(<우정의 맛>) 헤어진 남자친구가 보내 온 옛 짐으로 착각한 옆집의 소포를 자기 방에다가 내다 던지며 “아. 불행하다.”(<불행의 맛>)라는 말을 입 밖의 육성으로 터뜨리기도 한다.

십대 아이돌 출신의, 지금은 삼십대 싱글 여자 박희본
스크린샷 더보기: http://goo.gl/c5yEbl

  이십대에는 분명히 조금 ‘더’ 예뻤을, 아직 조금은 예쁘지만 그렇게까지 예쁘지만은 않은, ‘삼십대 초반의 싱글 여자’를 연기하는 ‘박희본’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삼십대 초반의 싱글 여자처럼 보인다. 극 중 이름인 ‘재영’이든, 실제 배우 이름인 ‘희본’이든 상관없다. 외모에서부터 생각과 행동과 말로 노출되는, 숱하고 과장 없는 그녀의 것들이 어떤 한 캐릭터를 보게 하기 보다는 삼십대 초반의 싱글 여자의 ‘상태’를 보게 한다. 그 과장 없는 ‘상태’를 보는 것의 즐거움이란! 특히 그것이 즐거운 유희로 다가왔던 것은, 이 단편들이 파니처럼 무언가를 품고서 어렵게, 힘겹게, 아프게, 에둘러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단편들은 그다지 ‘우습지도’, ‘서럽지도’ 않다. 어쩌면 제목의 과감함에서 무언가를 기대한 네티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에는 지극히 밋밋한 단편들이다. 나는 그다지 우습지도, 서럽지도 ‘않은’ 시선으로 풍부한 사실감과 위트를 끊이지 않게 구사하고 있는 이 짤막짤막한 논법에 쾌재를 불렀다. 만일 이 단편들이 어떠한 우스움이나 서러움을 빙자하여 ‘삼십대 초반’의 ‘싱글’ ‘여자’를 그 어떠한 ‘캐릭터’로 창조하고, 그래서 ‘그 시절’의 ‘한 상태’를 어떠한 개별성으로 포장하거나 왜곡하였다면, 결코 그 자리에서 전편을 다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단편들에서 구사하고 있는 그다지 우습지도, 서럽지도 ‘않은’ 논법은, 파니가 그토록 비껴가려고 했던, 그 시절의 ‘무의미’, 아무리 ‘무언가’를 답하려고 한들 ‘아니에요’로 끝나게 되는 그 시절의 종결형을 그다지 용감할 것도, 낭만적일 것도 없이 담담하게 고발하는 미덕으로 다가왔다. 이 단편의 논조와 형식과 스타일은 온통 신화적인 질문과 대답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8년 전의 나의 파니에게 뼈아프게 ‘허구입니다.’를 선고해야만 했던 지금의 나를 바라보게 한다.

+

  무얼, 얼마나, 안다고. 무얼, 얼마나, 사랑했다고, 그토록 많은 것을 떠드니? 돌이켜보니, 서른이라는 단어를 ‘쉽게’ 발설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치 무얼, 얼마나, 사랑했다고,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떠들어 댄 첫 사랑의 깨어진 신화처럼, 서른이라는 신화 역시 깨어지고 난 후에야 뒤늦게 느낀다. 그것을 발설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던가를 말이다. 그래서 품속의 칼을 빼듯이 비장한 마음으로 ‘서른’을 발설하는 파니보다 ‘불행’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터뜨리면서도 ‘서른’이라는 단어를 힘겹게 발설하지 않는 재영의 모습을 더욱 응원한다.

원본 사진 보기: http://flic.kr/p/8BaU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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