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두산아트랩-6] 바바서커스 <외투, 나의 환하고 기쁜 손님>

by 에스티


처음엔 좀 의아했다. 두산아트랩 공연이 만7세 이상 관람가일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실제로도 오늘 공연에는 7세 어린이가 참석하지 않았고 앞으로 남은 이틀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의문은 공연을 보고나니 금새 해결되었다. 바바 서커스는 남녀노소 다 즐길만한 공연을 만들 수 있는 팀이라는 것을.


노문학도들은 기뻐해야 한다. 신체극을 지향하면서 가면까지 손수 만드는 이 재능 많은 연출가가 하필 고골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이다. 고골 이야기의 그로테스크함은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가면들로 전달되고, “공중에 붕 떠서 흔들거리는 [고골의] 도시와 사람”을 표현하고자 배우들은 무대에 매달린 공중그네를 타고 논다. 뿐만 아니라 첫 장면에서 무대 뒷 벽면에 투사된 눈송이들 사이를 다 헤어진 외투로 힘겹게 헤쳐나오는 아까끼 아까끼에비치의 모습은 흡사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관객을 극속으로 인도한다. 그동안 아트랩에서 신체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여러 팀을 봐온 터라 움직임 자체가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오래전 읽었던 소설을 되뇌이게 하는 솜씨가 퍽 유쾌하다. 아까끼가 새외투를 입게되는 시점까지가 대략 공연의 전반부인데, 후반부에 비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1) 초저녁잠이 많은 나의 탓도 있을 테고 2) 또한 아까끼가 새 외투 하나 장만하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렵고 고된 일인지 요즘같이 옷이 흔한 시대에는 실감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연에서 밝혀준 대로 하급 공무원 연봉의 대략 3분의 1이라고 환산해보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옷은 옷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공감하기 어려운 일이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인간 복사기 노릇을 했던 하급 관리 아까끼의 인생은 외투를 입는 그 순간 아주 잠시 행복의 극치를 맛본다. 영화 <매트릭스> 셋째 편에 보면 네오와 트리니티가 기계 도시(the Machine City)로 비행해 가는 길에 아주 잠시 구름 위를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오는 장면이 있는데, 시종일관 어두웠던 그 장면에서 단 한순간 밝은 빛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트리니티의 감탄사가 인상적이었던 그 순간을 지나면 그들은 다시금 어두 침침한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아까끼 또한 잠시잠깐 지복(至福)의 상태를 경험하고선 이내 그 옷을 빼앗기고 마는데, 새옷을 강탈당하는 그 모습보다 우리를 더 안타깝게 하는 것은 아까끼가 다음날 (실제로는 다음다음날) 예전 외투를 입고 다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 이후로부터는 이 이야기가 결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뻬쩨르부르그에서외투를 강탈당한 아까끼는 소치에서 금메달을 빼앗긴 김연아와 겹쳐진다. 아까끼의 탄원을 듣고도 자기 머리 만지기에 바쁜, 공약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건 잘하지만 정작 그 자리(공중그네)에 앉아 있는 것도 잘 하지 못하는, 그 여 기관장에 대한 불만은 우리 사회에서도 낯익은 모습이다. 공연은 아까끼는 외침으로 끝난다. 새 외투를 강도당했다고. 좀더 크게 한번 더 "새 외투를 강도당했다"고. 난 이게 열린 결말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외투는 빼앗겼고, 다시 찾을 방법은 없는데 무슨 가능성이 있단 말인지 모르겠다. 김연아는 금메달을 빼앗겼고 올림픽은 끝이 났다. 선거는 끝이 났고 김연아를 본받아 결과에 승복하라 한다. 다른 가능성이 있는가?




(두산아트랩 2014 상반기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2014 수다연극-청춘인터뷰 (한토끼)


 보고 쓴 사람. 한토끼




보러가기 전엔 이영석 연출의 전작 <숨쉬러 나가다>와 같이 말의 밀도가 높은 연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레짐작하고 언어가 주가 되는 연극에 대한 서두를 신나게 미리 써두고 출발했는데. 보고 나니 <우리 사이>와 같은 사실주의적 노선에서 더 나간 쪽으로 분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쓰니 엄청 많이 본 것 같다. 사실 내가 본 4개 남짓 작품들을 머릿속에서 나름대로 나누어본 것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개 안되는 정보라도 잘 나눠서 간수하고 싶어하니까. 아무튼 이영석 연출의 작품들은 당연히 다양했지만 대체로 말이 풍성했는데, 그 때문에 말과 연극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실제 인터뷰같은 수다들이 실제 어느 사람들의 모습들과 겹쳐있었다. 내가 그의 인터뷰를 들을 때에 리얼리티는 리얼리티의 조상이 되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말로 이루어진 리얼리티 쯤이 되지 않을까.

<숨쉬러 나가다> 중에서
ⓒ극단신작로2011


연극은 배우를 업으로 결정해 준비 중이거나, 막 시작했거나, 한참 활동 중인 26~33세까지 9명의 배우들이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풀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대에는 인터뷰 현장인 듯 책상과 물병만이 놓여있다. 각각의 배우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 소개를 하며 시작한다. 몇 살이고, 데뷔한 지 몇 년이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러니까 이 배우들은 자신이 그 배우인 동시에 그 배우를 연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인터뷰어가 있다. 바로 이 공연의 연출가이기도 한 이영석 연출인데, 그는 직접 무대에 등장해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고는 어떤 생각에서 이 배우들을 모아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지금의 청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이 공연의 시작이다.

이 과정은 마치 페이크(fake) 다큐멘터리처럼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져서 이 상황이 실제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터뷰인지 아니면 대본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인지 궁금해지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풍부한 현장성을 띠고 있지만 사실 2% 빼고는 다 대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완벽하게 허구라고도 할 수 없다. 그 대본 자체가 실제 배우들의 삶과 성격에서 추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다시 쌓아올린 실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적인 허구는 기껏해야 배우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재연한 지점에서만 순간 생겼다가 사라진다.

이러한 형식으로 창작되는 연극을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라고 한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배우들이 참여하는 창작 방법이다. 기존에 준비된 희곡 대신 배우들이 극의 주제 선정과 자료 조사 등 공연 준비의 첫 단계부터 함께 한다. 즉흥극이나 꼬메디아 델라르떼와 비슷하게 보이는 면이 있지만 디바이징 씨어터에서는 참여자들이 진행될 장면과 결말을 미리 합의하여 완성해둔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형식으로 인터뷰 현장을 재현하면서 이 공연에서는 재연의 이중성이라는 긴장감이 생긴다. 관객 모두는 이것이 재연이란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인터뷰 현장을 중계하는 듯 하지만 연극은 원래 짜고 치는 거니까. 관객이 모두 이것이 진짜가 아님을 의심하고 있는 긴장감. 여기에 더하여 어디까지 가정하고 어디까지 속아주어야 하나 고민하는 관객의 이중적 고민. 이러한 지점은 모호함 속에서 관객의 집중을 구하며 극 전반적으로 유효하게 작용한다.

이들의 웃음은 지금 이 순간의 웃음인가, 그때 그 웃음의 재연인가?

이 공연에서 이 모호한 재연성을 지닌 구성 형식으로 조심스럽게 포장해서 관객 앞에 풀어놓는 것은 원래의 소재였던 배우개개인의 잡담 섞인 신변이 오가고 진심 섞인 얘기와 넋두리가 오가는 부산스러운 인터뷰 현장이다. 인터미션이 지나 시작된 2막에서도 연기에 대한 생각에 이어 먹고사는 상황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차분히 이어진다. 여기서 일반적인 연극에서 기대할법한 허구는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관객에게는 다소 김빠질 일일수도 있겠다.

실제 현장인지 아닌지의 진위를 알아내는 것은 이 공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극에서 진짜 인터뷰로 보이도록 집중하면서 조명하는 것은 페이크 속의 새로운 허구적 이야기보다는 인터뷰이의 모습 자체이기 때문이다.

수다연극은 많은 말들로 현실의 어떤 순간과 대상을 다치지 않게 떠다가 정밀하게 다시 풀어놓는다. 이 바탕에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무척 면밀한 관찰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관찰이다. 한번 보고 선을 백번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백번 보고 선을 하나 그리는 것. 아마 이 공연을 위한 프로덕션 과정에서도 배우들에 대한 여러 겹의 면밀한 관찰과 이야기 듣기, 꺼내기가 있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 바닥에는 현재를 함께 사는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깔려있었을 것이고.

어떤 정황이나 사람을 한마디 말로 정의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때로는 폭력적이다. 어떤 시각의 일방적 설정 자체가 그러하다. 때문에 어쩌면 무언가를 그대로 떠오고 함께 보기 위해서는 수없이 부유하고 떠도는 질문과 말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테이블에서 마주하고 나누는 말은 부끄럽거나 솔직하지 못해서 미처 서로에게 다 닿거나 이해되지 못하더라도 그곳의 공기에는 어느 순간 함께 하고 있다는 리얼리티가 떠다니게 마련이다. ㉢㉣㉤㉦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헤이노니 타루: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

by 에스티

(전날 또 다른 판소리를 봐야하는 바람에 첫공연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틑날밤에"입니다. )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소개하던 날 그는 당시 대세였던 스마트폰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가 가진 지저분함을 디스하면서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심지어 블랙베리 역시 터치스크린 폰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비록 그날 이후 우리는 고질적인 오타에 때로는 심각한 사고를 치는 일도 겪고 있으며,  급기야 아이폰에 블랙베리식 키보드를 붙일 수 있는 케이스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터치스크린은 출력과 입력이 공간적 구획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던, 그래서 우리의 사고 또한 거기에 맞춰 움직여야 했던 시절에서, 이제는 커다란 (점점 더 커지는) 스크린이 필요에 따라 입력 장치가 되기도 하고 출력 공간이 되는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www.taroo.com)의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에서 나는 아이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유연함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햄릿>을 판소리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배우 또는 소리꾼이 때로는 다같이 햄릿을, 또 때로는 이야기 속 인물들을 연기하기도 한다. 이 시도는 <햄릿>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통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햄릿>의 비평사나 공연사를 조금 살펴보기만 해도 이런 시도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 얀 코트에 따르면, “<햄릿>에 관한 연구 논문 목록은 바르샤바 전화번호부 보다 두 배나 두껍다”라고 한다. 아직도 전화번호부가 만들어지는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은 전화번호도 많이 늘었겠지만, <햄릿>에 대한 연구 목록은 거의 작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학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다양한 시도가 끊이지 않는 이 <햄릿> 판이다 보니, 판소리 <햄릿>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클로디어스가 말하는 자연의 순리(“This must be so.”)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사실 단순히 국내 인지도를 생각할 때 판소리 브레히트보다는 판소리 셰익스피어가 먼저 등장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뮤지컬 <햄릿>이라는 범주에서 놓고 비교하더라도 이번 작품은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이 전통문화를 적극 활용한 음악인형극이나 체코에서 제작되어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뮤지컬 <햄릿> 의 뒤를 잇는 것이다. 따라서 후발 주자로서 <판소리 햄릿 프로젝트>는 단순한 형식적 변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작업들로부터 발전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이자람의 비극하는 마음을 응원하며: 두산아트랩-5 판소리 단편선 <추물/살인>

(질문할 기회를 놓쳐 공개 서신 형식을 빌어 씁니다.)

이자람 예술감독님께,




저는 오늘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과연 창작 판소리에서 제대로 된 추임새라는 게 가능할까?사실 저의 질문은 '처음 듣는 소리에 어떻게 추임새로 반응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지만, 오늘 공연 중 <살인>에 대해서는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얘기가 나왔던 대로 (다른 의미에서) ‘없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여전히 판소리 듣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원작을 읽고 가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꽤 바빴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이 질문을 하는 저에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정답이 먼저 설정되어 있었던 것 같네요. 소리꾼과 고수 그리고 관객들이 에너지를 (소리로) 교류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판소리가 가진 매력이고 생명이지만, 이 당연한 명제도 질문에 붙여봐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달았습니다. 사실 저같이 추임새도 하지 못하면서 판소리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공연을 보고 난 후, 그리고 아티스트와의 대화 시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들으며, 감독님의 실험에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추임새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판소리로 만들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약속하신 대로 앞으로도 ‘벨칸토 판소리’ ‘고수 없는 판소리’ 등 모던 판소리 실험을 계속 이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적지 않은 관객들이 좀더 밝은 이야기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괜히 전통 판소리도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걸 보면 이건 꽤 오래된 습관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비극적 판소리가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더 실험이 필요한 장르라 생각됩니다. 사실 감독님의 작품이 이미 <사천가>에서 <억척가로>, 그리고 이번에 <살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보아왔기에 감독님은 이미 그길에 한참 들어와 계신 거죠.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추물> 역시 마지막에 약간의 희망을 열어 빠져나가긴 했지만 저에겐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어두운 이야기에 더 끌리는 것을요. 밝고 경쾌한 이야기는 또 다른 소리꾼들이 만들어가면 되겠지요.



<살인>을 보고나서 한 10년 전에 샤를리즈 테론이 주인공으로 나온 <몬스터>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비록 샤를리즈 테론이 그 영화를 위해 살을 찌워야 했던 반면, 이승희님은 얼마 전 <비빙> 공연 때와 비교해도 헤쓱해진 모습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왔더니 제 친구가 그런 영화는 왜 만드는 거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전 그때, 단지 연극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제가 만들지도 않은 그 영화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소용없더군요. 설명하고 심지어 수긍시킬 수도 있지만 보러 가게 할 수는 없더라구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이 틀렸나봅니다. 좋은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듣기만 해도 전율하니 보러 가지 않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그저 끌리는 사람이 만들고 또 끌리는 사람이 보러 가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살인> 텍스트를 구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그냥 부정확한 상태로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 전 오늘 <살인>의 음악이 좋았다는 몇몇 분들의 말에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음악 자체나 악사님들의 연주는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넘습니다. 훌륭했고 그 자체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살인>의 텍스트, 특히나 텍스트의 문체와 소리가 과연 어울리는지,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이것은 단편소설이라는 특수한 문학 장르와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단편소설로 연극도 하고 영화도 만드는데, 판소리라고 안될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살인>의 문체는 제게는 상당히 건조하게 들렸습니다. (원작 소설의 텍스트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남윤일PD님께 잠시 여쭤본 바로는 많은 부분이 다시 쓰여졌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텍스트는 이승희님이 아무런 음정을 넣지 않고 평이하게 읽어주시던 부분이 가장 듣기에 편했습니다. 특히나 짧게 끊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그 자체로 매우 절제된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체 같아서 거기에 음악적인 요소가 첨가되는 게 제게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텍스트는 의미를, 소리는 감정을 각각의 채널로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소리와 텍스트가 좀더 긴밀하게 맞붙기 위해선 양자가 서로를 좀더 닮아가야 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만들고 더 보다보면 알게 되겠지요.

2014년 2월 21일 밤에

임승태 드림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서른을 말하는 무게: <파니핑크>와 <출출한 여자>

by 이예은

+ 8년 후의 <파니핑크>,
‘서른’이라는 나이를 발설하는 것에 대한 오만함

  서른이 되기 몇 해 전,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나 아직까지도 분명히 ‘좋은 영화’라고 각인되어 온 작품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작품의 원제가 사실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친구의 뒤늦은 부음이라도 접한 것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도리스 되리 감독이 1994년도 발표한 <파니핑크>.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고 흰 해골모양의 액세서리로 온통 얼굴과 몸을 휘감은 파니가 ‘서른’에 대해서 논평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탐욕하는 것만 같이 온 몸을 뼈 무늬로 분장한 흑인 게이 친구 오르페오는 끊임없이 어느 누군가의 잠재적 타나토스를 자극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장례 수행에 참가하여 매일 매일 “육신은 흙이 될 것이다”를 읊으며 죽음을 연습하는 파니...


 영화는 온통 분주하게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장례를 치르는 한 편의 장송곡 같다. 영화의 이곳저곳은 비주얼로, 사운드로 그 장송곡의 세부 리듬들을 구현하기에 바쁘다. 실제로 파니의 유일한 친구 오르페오가(그러나 처음부터 ‘실존’하는 인물 같지 않아서 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파니의 끔찍한 고독함을 영화 내내 느끼게 했던) 달빛을 온 몸에 한껏 담아내며 ‘신화적’ 죽음을 맞이하고, 파니를 둘러싼 온 우주는 하얗게 흔들리면서 한 세계를 떠나보내고, 한 세계를 맞이하며 끝이 난다.

파니가 검은 상복을 입고 영화 내내 그토록 장송하고 싶어 했던 오르페오, 매일 밤 집에 있는 관 속에 묻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 안에 그대로 묻혀 있는 것만 같은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파니, 그들은 어쩌면 ‘이십대’라는 은유된 세계 전체를 말하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스물아홉까지의 거대한 한 세계를 보내고, 서른이라는 거대한 한 세계를 맞이하는 인생의 절기에 관한 신화적 상상력이라고 생각된다.

2014년 2월 13일 목요일

그럼에도, '인사이드' 르윈

by 이예은



  코엔 형제의 ‘최초의’ 음악 영화가 상영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음악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코엔 화되었을까?’였다. 음악이라는 감각적 달콤함도, 예술이라는 열정적 사명도 비껴갈 것이 분명한 ‘코엔 식’의 음악 영화의 전개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지극히 코엔적이면서도, 기존의 코엔적인 것을 비껴가며 그들 나름의 ‘관용’을 베풀었다고 말하고 싶다. ‘음악 영화’라고 말을 하기에 이 영화에는 음악적 순간들이 지극히 빈약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빈약한 음악적 순간들을 둘러싼, 그 나머지 것들의 팽배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제목이 ‘인’사이드 르윈이지만, 정작 영화의 대부분은 ‘아웃’사이드 르윈을 그리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영화를 못보신 분을 위한 예고편: 

+ 사실은, ‘인사이드’가 아닌 ‘아웃사이드’ 르윈    


  클럽 공연 무대로 시작되는 오프닝 씬. 무대를 비추는 흔들리지 않는 노란 핀 조명은 건조하고도 안전하다. 안온한 이국성을 풍기는 작은 클럽의 무대. 한 곡의 노래를 긴 테이크로 잡는데, 사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르윈’(오스카 아이삭)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노래를 하게 내버려두는 두 장면 가운데 한 장면이다.

2014년 2월 12일 수요일

네 진심은 이게 아니잖아: 데이빗 해어 작, 김광보 연출, <은밀한 기쁨>

by 산책

<은밀한 기쁨 Secret Rapture>,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데이빗 해어 작, 김광보 연출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 (1895년)>을 본 초기 관객들은 정말 기차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들은 스크린에 투사된 기차의 영상을 “진짜”로 믿었고, 그래서 “진짜”로 반응한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우리는 영화를 보고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 또는 진짜라고 믿지 않는다. 연극의 경우 그것을 진짜로 믿는 것이 더욱 어렵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장면을 재현하려고 해도, “무대”는 사람들을 어떤 시간과 공간에 묶어 놓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해도, 이야기 속에 빠져 같이 울고, 웃고 기뻐하고, 때로는 두려워하며 영화와 연극을 본다. 스크린에 투사된 세계, 무대에서 보여지는 세계는 현실의 우리에게 거짓이지만, 그 안에서는 나름의 세계과 그 세계의 진실성을 보여주기에 그 세계로 기꺼이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어떤 관객(아름다운 여자분)이 <은밀한 기쁨>의 원어 희곡을 찾았다고 기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분께 다가가서 뭐하시는 분인지 묻고 싶었다. 그 마음과 열정에 감탄하며, 이명행 배우의 잘나온(?) 사진에 흐뭇해 하며 극장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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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시작되기 전 암전이 참 좋다. 조용하고 깜깜한 아주 잠깐의 그 시간 동안 다른 세계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조명이 팍! 켜지는 순간 마법처럼 무대 위에 나타난 배우를 다른 세계의 어떤 인물로 만나게 된다. 이것은 극장에서 내가 느끼는 큰 기쁨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은밀한 기쁨>은 조명이 꺼진 상태도, 그렇다고 환하게 켜진 상태도 아닌채 시작된다. 생각보다 너무 가녀린 추상미 배우가 조용히 무대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극장이 떠나가라 소리친 배우가 테이블 위의 책을 챙겨 나가고, 소파를 옮기고 벽을 민다. 물론 이런 공연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유독 장면 전환 되는 순간, 일을 하는 배우를 보는 것이 참 편치 않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어윈(이명행 분)이 이자벨(추상미 분)에게 “진심같은 것은 없는 여자”라고 소리친 순간 나는 알 수 없이 불편하던 내 마음의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등장 인물들의 진심, 그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의 속내를 느끼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공감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꺼이 그들의 세계로 옮겨갈 마음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나 역시 그들에게, 진심이 무엇인지, 이게 네 진심은 아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하는 이자벨의 답답함 때문이거나, 마리온, 톰, 캐서린, 어윈이 보여주는 이상한 성미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캐릭터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윈이 더 날뛰었으면, 이자벨은 답답하지만 그렇게라도 하면서 지키고 싶은 그 마음을 더 느끼게 해줬으면 하고 바랬으니까. 톰은 차라리 더 웃겼으면, 론다는 진짜 카오스를 가져왔으면, 캐서린은 더 구제불능이고, 엉망 진창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은밀한 기쁨>의 서사에서 말은 무척 중요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과거를 복기하고,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고, 남을 설득하는 그들의 말에는 무엇인가가 빠진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건지 알수 없이 어색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무대 한 켠에 서 있다. 또 울부짖는 한 사람을 보며 미동도 않고, 에너지와 감정을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져가는 두 인물의 케미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또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에너지를 내뿜는데, 그 에너지의 파동이 서로 다르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소리내고 말하는 방법 조차 각기 다르다.

파멸 직전, 총을 보고 놀랐지만, 총성은 장난감 총의 그것 같아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인척 하는 가짜들을, 가짜라고 배짱부리는 순간에도 진짜인척 하고 싶어하는 장면들은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도, 연극을 연극으로 보는 것도 방해하고 만다. 하지만 진심은 그게 아니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순간 순간의 보여준 표정과 그 말들은 진짜로 느껴졌고, 마음으로 불쑥 들어왔으니까.

작품을 보고 하루가 지난 후, 말을 듣는 사람과 관계 없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말하는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 작가, 또는 연출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내 말을 들어 달라고, 혹은 날 그냥 내버려 두라고 소리치고, 협박하고, 울부짖어도 내 말은 그에게 가 닿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가족이고, 연인이었나보다. 물론 그런 가족과 연인은 실재할 것이다. 또 하나, 가족이라고, 연인이라고, 그리고 함께 연기한다고 해서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어야 생각했던 것도 내 짧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가 늘 조화롭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이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이 작품은 정치, 종교, 가족, 사랑, 이런 중요한 가치들에 도전하고 질문을 던진다. 작품을 보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세히보기:
http://youtu.be/CKRyhyJswqc
덧붙임. 원서로 읽을 마음은 없지만, 그들의 진심을 더 이해하기 위해 번역된 희곡은 읽어보려고 한다. 한국어 번역서 제목은 <남모르는 환희>이다. 데이빗 해어는 “남모르는 환희(The Secret Rapture)”를 수녀가 죽음의 순간 예수와 일치할 기대에 차 느끼는 기쁨이라고 설명한다. 저 유명한 베르니니의 성데레사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기쁨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자벨은 마지막 순간, 아무도 모르는 극도의 기쁨을 느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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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홍당무>, 무대 위 영상을 바라보는 시선

by 김재영

연극을 보고 나와서 길을 걷는 내내 단 한 가지의 장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딘지 주눅들어 보이고 부끄러워 하는 듯한 홍당무의 클로즈업 된 얼굴이었다. 어렸을 적 보았던 ‘홍당무’ 동화책 속 어느 삽화에선가 봤을 법한 그런 그림체로 된 홍당무의 얼굴 말이다. 하지만 연극에서 클로즈업 된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무대 정면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영상이 아니었다면 홍당무의 그런 묘한 분위기의 표정은 내게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홍당무 역을 번갈아 가며 연기했던 두 명의 남녀배우의 표정보다 그리고 그들의 몸짓과 대사보다 연극의 마지막에 맞딱드리게 되었던 애니메이션 영상 속 홍당무의 표정이 내게 더 인상적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고, 영상 이미지에 너무 쉽게 압도당할 정도로 배우들이 관객과 교감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영상은 어디까지나 배우의 연기를 보조하는 역할 즉, 극의 배경 정도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마지막 영상 이미지가 내게 그토록 강렬하게 다가왔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천천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극단 청년단 <홍당무>
민새롬 연출


  연극이 시작되면, 홍당무 역을 맡은 배우들은 각각 좌측과 우측의 관객석에 앉아서 번갈아 가며 자신들의 과거 에피소드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관객은 한번은 좌측의 배우(박수진)를 보며 이야기를 듣고, 그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측의 배우(왕보인)를 보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 동안 무대 정면에는 홍당무 가족의 가족사진이 정지된 애니메이션 영상 화면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상 속 가족은 총 4명이다.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홍당무의 가족은 아빠, 엄마, 형, 누나 그리고 홍당무 자신까지 총 5명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관객은 가족사진에서 홍당무가 빠져있음을 알게 되고, 영상 속에 부재한 홍당무가 지금 우리의 좌측과 우측에 배우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몇가지 에피소드들을 관객에게 들려준 후, 배우들은 관객석으로부터 무대 위로 이동하여 가족사진 영상이 위치해 있던 무대정면에 앞뒤로 위치한다. 연극의 첫부분이 주로 가족과 관계된 홍당무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이 부분에서는 소설 ‘홍당무’에서 가장 강렬한 에피소드들이자, 홍당무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두더지’, ‘붉은 뺨’, ‘르픽씨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배우들은 이제 관객에게 회상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소년 홍당무를 직접 연기하기 시작한다. 이 때 영상은 극의 전개에 따라 학교 기숙사 공간이 되었다가, 학교 창문이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한다. 영상은 주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의 배경으로서 기능하지만, 때론 배우와 상호작용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배우가 두더지를 영상에 대고 던지는 액팅을 하면 영상에는 두더지의 피가 튀는 이미지가 나타나는 식이다.

 이러한 영상의 활용 방식에서 알 수 있듯이, 영상은 극 전개 과정에서 장소를 나타내는 배경으로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른다. 반면, 배우들은 마치 빛바랜 가족사진으로부터 뛰쳐 나와 우리 앞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존재로 보이며, 자신들의 가장 강렬한 이야기들을 온 몸으로 표현해 낸다. 두 명의 배우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번갈아 가며 연기하는데, 하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느꼈던 서운한 감정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와의 편지 교환에서 느꼈던 씁쓸한 감정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고 두 개의 에피소드가 묘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겹쳐지면서 어린 소년의 분노가 비뚤어진 방식으로 무대 위에서 표출될 때 극의 긴장감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있던 두 배우는 무대 정면에서 만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데, 이 장면에서 두 배우가 서로를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위로하고 도닥여주는 것과 같은 느낌이 전달된다.

 이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면, 배우들은 연극의 첫 부분과 마찬가지로 각각 좌측과 우측으로 돌아가 관객석에 앉고, 영상에는 다시 홍당무의 가족사진이 정지화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홍당무의 앨범’ 이야기가 마무리될 쯤, 가족사진의 정지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 속 가족들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 화면이 서서히 가족들 사이의 틈새로 클로즈업되기 시작한다. 앞에 서 있는 아버지와 형, 누나를 지나 그들의 뒤로 화면이 움직이면, 형과 누나 사이에 어깨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홍당무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나타난다. 연극 내내 영상 속에서 부재하고 있던, 배우의 몸을 통해 영상 밖 관객들 바로 앞에 존재하고 있던 홍당무의 모습이 그 순간 영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영상 속 홍당무의 이미지가 배우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클로즈업을 통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홍당무의 표정이 왜 그렇게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것일까. 그것은 배우들이 발산했던 사춘기 소년의 질풍노도와 같은 격정적인 감정들이 바로 그 표정 안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보이지 않았던 어떤 공간을 들춰내었을 때, 그리고 영상 속에 부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홍당무가 모습을 드러낼 때, 그가 실은 가족들 사이에서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앞서 두 배우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볼 때 전달되었던 뜨거운 감정의 교류같은 것들이 영상 속 홍당무와 나의 눈 맞춤으로 인해 내게도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 하나의 표정이, 그것도 거친 질감으로 그려진 옛날 동화책 속 그림과 같은 이미지 하나가 그토록 많은 의미들과 감정을 한꺼번에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엔딩 장면은 아쉬움을 또한 남긴다. 배우들의 말과 몸짓에 집중되어 있던 관객들의 마음을 너무나 쉽게 영상 속 이미지에 빼앗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무대 위 배우들의 존재는 마치 영상 속으로 별안간 사라져 버리고 없어진 것처럼 느껴졌으며, 배우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저 영상 안에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연극 무대가 한없이 작아 보였고,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배우들이 연극을 마무리하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영상으로 비춰지는 가족들 틈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무대 한 가운데 서서 관객과 마주보고 있는 홍당무의 모습이 더욱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라진 이야기를 찾아라!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

by 사이

어릴 적 먹던 영양제 생각이 난다. 겉에는 달콤한 무언가가 얇게 발리고 단맛이 가시면, 또는 단맛에 혹하여 함께 넘어가도록 들어 있었던 약은 기발했다. 하루에도 몇 개씩 스스로 챙길 만큼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후에 조금 더 영악하게도 달콤한 맛이 지나고 나면 눈치를 봐서 꼭 뱉어냈던 것도 그 약이었다. 의도도 방법도 좋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쉽게도 영양제는 정작 중요한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제목에서부터 아린 역사의 향기가 묻어 날 것만 같았던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를 보고 나서도 비슷하게 그랬다. 첫 맛은 재치와 발랄함이었지만 달달함은 시간이 지나 달아나버린 또 한 번의 경험. 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뱉어낸 것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게 다를 뿐이다.

공연정보: http://goo.gl/LhqvmF 

재치와 발랄함의 첫 맛

픽션 사극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의 재치와 발랄한 달콤함은 무대와 극의 장면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다. 작은 극장을 들어서서 처음 마주한 것은 무대뿐만 아니라 객석의 일부까지 톡톡한 역사의 향기로 채워주고 있는 조각보의 형상이다. 조각보의 매력은 각각 다른 형태와 색을 가진 자투리 천들이 잇대어져 전체를 만들어내는 품(榀)에 있다. 역사를 소재로 끌어들였다는 극은 전반적인 모티프로 이러한 조각보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인물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옷장으로, 의자로, 서가로도 변신하는 무대 도구들은 모두 다른 크기의 입체 조각(爪角)이다. 이것들의 방향을 바꾸고 위치를 옮기면서 새로이 다른 조각보의 모양을 입체적으로 무대에 만들어 둔다. 여기에 각 도구의 표면 역시 비단조각과 한지조각을 이어 붙여 모티프에 있어 일관성을 더한다.

사진출처: http://page1207.tistory.com/archive/20140127

극 장면의 운용과 배열도 조각보의 부분인 서로 다른 자투리 조각들 같다. ‘믿거나 말거나’로 운을 떼며 시작한 극은 시종 픽션임을 강조하면서 극 중의 시간과 공간들을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8년의 조선에 1901년에 초청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존재하며 연회에 모셔온 요리사는 조선 중기의 장금이다. 심지어 1960년대 영국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내관(內官)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어긋나고 조각난 시간이 동시에 뒤죽박죽으로 섞여 발생하는 혼란과 모순은 이 극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극 속의 인물과 배우 자신을 넘나들며 의도적으로 극을 조각낸다. 특히 극 전체의 해설을 겸하는 내관의 역할은 가장 적극적이다. 그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무대와 관객석의 1차적인 경계를 허물어낸다. 또 무대감독처럼 다른 배역에게 등장할 시간을 알려주고, 쇼 사회자처럼 “명성황후가 부릅니다, 세자가 떠나고 부터”라며 이어지는 노래를 소개하기까지 한다. 극 내용의 안과 밖을 드나들며 장면 장면을 조각조각 자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려진 조각의 장면들은 하나의 색에서 옆 칸의 다른 색과 형으로 급변하는 조각보처럼 장면 점핑의 효과도 가진다. 이것은 많은 설명과 시간이 걸리는 장면에서 영상 편집 기술을 차용한 것과 유사한 방법을 활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길게 반복해야 하는 설명은 “관객이 지루할 텐데 또 해?”와 같은 물음으로 이미 들은 것이 된다. 이렇듯 극에서 보이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점핑(jumping)은 생략에 강하고 빠른 전개를 가능하게 하여 극 초반의 시선을 끌고 흥미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게다가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의 조각난 각 장면들은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톡톡 튀며 기발하다는 매력을 더한다. 특히 극 내내 활용되는 언어유희는 이 극의 재치와 발랄함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요즘에 유행하는 통신 기술인 SNS를 ‘애수앵애수’로 표현하거나 영어 단어인 ‘Some’과 두꺼비를 뜻하는 한자어 ‘섬(蟾)’을 연결하는 재기에는 그저 감탄하며 웃음 지을 수밖에는 없다.



단맛과 함께 사라지다

하지만 이러한 찰나의 감탄은 극 전체에 대한 경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재기발랄함을 이끌었던 언어유희는 가볍고 일회적이라는 치명적인 단점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극에서 그러모은 언어유희의 대상들은 요즘의 우리가 즐기는, 소위 현(現)시대에 ‘유행’하는 것이다. 유행은 한정된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극의 포인트인 언어유희는 순간의 웃음으로 피었다 사그러지는 위험에 필연적으로 노출되어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같은 표현방법이 반복되면 이러한 언어유희는 생각보다 빨리 간파당하여 읽힌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무장된 극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 것이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중반을 지나면서 극에서 덜어진 웃음은 이런 탓이기도 하다.

더하여, <라스트 로얄 패밀리>에는 역사의 옷을 입힌 보편적인 이야기를 깔끔하게 펼쳐내고 싶은 욕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현재 우리 주변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배경을 백여 년 전으로 이동시켰고, 거기에 모두가 알만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들의 가족관계를 덮었다. 그리고 현재적 웃음을 주고 공감을 살만한 장면의 조각으로 포장해 두었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이 모든 욕심을 가진 조각들이 정확하게 이어져 정작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혼란하다는 데 큰 아쉬움이 자리 잡는다. 앞서 재기로 가득했던 독특한 색을 가진 장면의 조각들은 그저 흩뿌려 늘어놓아 지기만 할 뿐, 그 뿐이다. 완성된 조각보처럼 전체를 바라보고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 게다가 역사의 이야기도, 가족의 이야기도, 성장의 이야기도,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도 모두 건드리고 품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분명히 펼치고 있지는 못하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해야 하니 불필요한 장면들이 파생되고 삽입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단지 오르골을 손에 쥔 채 부르는 이중창 하나로 가늠해야 하는 왕세자 척과 꼭지의 로맨스 장면은 급작스럽고 인형으로 벌이는 꼭지와 꼭도의 줄타기 장면 역시 왕세자와 함께 성장시켜야 하는 캐릭터들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할애한 지루한 선택이 되었다. 쏟아진 장면의 조각들을 잇지 못하는 극을 보면서 그렇다면 굳이 역사 소재를 들여올 이유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도 또한 생겨난다. 내용은 의도적으로 대한제국의 시대일 필요도 없고 대상이 마지막 왕가의 가족일 필요는 더더군다나 없다. 역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비춰보고 싶었다는 변명이 이어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풍기는 역사의 냄새를 이용해서 기대감을 갖게 하지는 말았어야 한다는 반론 역시 존재할 것이다. 이 극에서 역사와 사극을 표방한다는 이들의 제목은, 그리고 소재는 소모되고 있을 뿐이다. 박수칠만한 부분이 많음에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아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몸에 좋은 영양제가 되려면

이렇게 흩어진 이야기와 장면의 조각들을 의미 있게 봉합하는 노력은 이제 오롯이 배우들의 손에 맡겨진다. 작품의 완성도가 배우의 조각을 살리는 역량이나 개인기(?) 또는 팬덤에 의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는 극이라면 관객의 입장에서도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 없다. 관객은 극을 완전히 즐길 수 없고 창작자는 흔들리는 작품의 질에 고뇌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고종역의 배우 지혜근은 제몫을 다한다. 극을 보는 눈이 둔감해서 일지는 모르나 극의 종반까지 그가 1인 2역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지척의 거리에서 빤히 보일 법한 역할의 변화를 잠시 나마 숨겨준 배우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 배우가 매 공연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다해 주는 것은 이 극으로서 정말 다행이다.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반짝이는 재치를 가득 안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이 꽉 찬 재치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름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현재의 유머는 언제든 빛 바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이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분명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이 작품에 주어진 숙제다. ‘척’하지 않고 조각으로 부서지지 않는 이야기로 걸음을 옮기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진정 ‘라스트’ <라스트 로얄 패밀리>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2014년 2월 10일 월요일

[두산아트랩]피지컬 씨어터;지호진 연출 <왕의 의자>

by 백인경

TV와 영화, SNS와 스마트폰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무대 위에서 행위하는 살아있는 몸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만나기 위해 여전히 극장을 찾는다. 행위하는 몸과 그것을 관찰하는 몸이 마주한 공간에서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서사와 살아있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관계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또 다시 어떤 기대를 품고 티켓을 예매하게 하는 연극의 힘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호진 연출의 <왕의 의자>는 연극적 경험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한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다: 피지컬 씨어터. 피지컬 씨어터라는 용어가 요즘 현장에서 특정한 연극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물질적 재료로서 무대 위의 신체를 의미하는 “Physical"과 전통적인 드라마(재현 연극)를 연상시키는 “Theatre"의 만남은 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과연 <왕의 의자>는 살아 움직이는(가끔씩 구르고 날아다니기도 하는) 배우의 몸들이 장관을 이루며 재미있는 드라마 한 편을 ‘보여'준다. 깨알같은 조연들의 코믹 연기와 코러스들의 현란한 아크로바틱, 주연 배우의 열연과 마침맞은 캐스팅, 익숙한 스토리텔링은 관객들이 부담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하였으니 ‘액션이라는 영화적 장르의 무대화’라는 연출의 의도는 어느정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이 연극을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연극은 재밌으면 장땡이니까."
- <왕의 의자>, 제작노트 중에서

"연극은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러나 ‘피지컬 씨어터의 서사적 결합’에 대한 연출의 실험과 노력이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것을 단순히 무대 위로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한 명의 관객으로서 이 연극을 심각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왕의 의자>는 '액션 영화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엔 충분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액션 영화에서 느끼는 재미가 어떻게 연극적 재미로 전환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아쉬움과 이에 뒤따르는 물음표들을 남겼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관객과 배우는 모종의 약속 같은 것을 한다. 소품으로 사용된 총에서 실탄이 발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간단한 음향과 조명, 그리고 쓰러지는 배우의 행위를 통해 관객들은 ‘저 사람이 총을 맞아 죽었구나’라고 믿어버린다. 영화에서 한 비중있는 인물을 죽이기(?) 위해서는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와 치밀한 장면구성, 확실한 행동과 사실적 이미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연출이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연극에서만 가능한 상상력의 힘이라고 하자. (나는 상징과 은유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반대로 신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연극이기 때문에 훨씬 곤란한 지점이 많다. 가령 영화에서 피를 내뿜으며 죽어가는 신체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죽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러나 무대 위의 배우가 피를 뿜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그 잔인함에 압도되기 보다는 자동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어버린다: '저 소품은 어떤 맛일까?' 혹은 '저거 언제 어떻게 입에 넣었지!' 관객들 또한 살아있는 신체를 갖고 있기에 그들의 생각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체성에 대한 나의 고민은 소위 ‘떼씬’이라 부르는 장면에서도 이어졌다. <왕의 의자>는 무대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의자와 마이크 대에 꽂힌 긴 칼 외에 별다른 무대장치가 없다. 제작 여건 탓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불친절함은 오히려 무대 위의 몸을 부각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막은 바닥에 누운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부터 시작된다. 연극의 초반에는 배우들이 땀을 흘리며 군무를 추는 뮤지컬 스타일의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박자에 맞춰 열심히 움직이는 배우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관객들을 들썩이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을 ‘라이브’로 본다는 것은 잘 만들어진 어떤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생생한’ 경험을 하게 한다.



그러나 막상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액션 씬에서는 군무씬에서 느꼈던 만큼의 에너지가 전달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상의 위험이 있는 장면들이기에 ‘합’을 맞추기 위한 많은 연습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합’이 매끄러우면 매끄러울수록 신체의 물질성은 이미지 뒷편으로 밀려나 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액션씬이 위험하고 위태로워 보였다면 아마도 (배우는 물론이며) 관객들은 고통스럽고 불안한 에너지에 압도되어 연극을 편안하게 즐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많은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 자학적 행위를 했던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신체가 서사나 이미지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그것의 물질성은 기호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TV 드라마에서의 신체성!


드라마와 신체성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연극사에서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1960년대 이후 무대에서 나타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을 포착한 한스 티스 레만이 <포스트 드라마 연극> 시대를 알린지 15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벌써 한 세기 전의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무대 위의 신체들은 드라마와 그것 고유의 물질성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펼치고 있으며, 관객들 또한 그 팽팽한 긴장 관계를 그것 그대로 즐기기 보다는 '혹시 나만 중요한 서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재차 연출가의 노트를 뒤적거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연극에서 신체성과 서사는 그만큼 불편하고 어려운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된 여정의 끝에 이르러, 쏟아지는 땀방울에 옷이 흥건히 젖은 배우가 텅 빈 무대에 앉아 몸을 부르르 떨며 흐느낄 때 그 어떤 장면에서 보다 ‘살아있는 몸’을 느꼈다면 그들이 실은 가장 밀접하고도 상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씨어터는 원래 피지컬하다. 그렇다면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떤 theatre를 어떻게 physicalize 할 것인가? 연출가에게 또한 관객에게 던져진 이 질문은 영원한 숙제이자 공연예술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일 것이다.

<맥베스> 혹은 <햄릿>을 연상시켰던 강기둥 배우의 열연!

2014년 2월 7일 금요일

[두산아트랩-4] 지호진 작/연출 "왕의 의자"

by 에스티



불 구경과 싸움 구경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연극을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내는 액션 스펙터클로 설명하는 지호진은 야망이 큰 연출가이다. 두산아트랩의 2014년 네 번째 공연 <왕의 의자> 또한 그가 지향하는 “피지컬 씨어터”의 노정에 있는 작품이기에 관객은 영화에서나 보던 ‘액션 활극’을 코 앞에서 펼쳐지는 ‘라이브’로 본다는 기대를 하기에 충분했다.


연출이 설명한 대로의 “피지컬리티”, 즉 배우들의 합을 통해 만들어내는 액션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70분 공연의 마지막 10분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화려한 액션은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충분했지만 앞서 60분의 공백이 그만큼 크게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물론 공백이란 표현이 꼭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앞에서도 배우들의 군무와 아크로바틱이 장면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몇몇 배우들은 뺨을 적잖이 맞기도 하고 등짝을 맞기도 한다. 왕에게 주어진 장검은, 비록 이가 나간 게 보이는 모조품이라 하더라도, 꽤 근사한 바람소리를 만들어내고, (실수로 보이긴 하지만) 잘못 휘두른 칼은 객석으로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반대편 객석에 앉은 관객은 코 앞에서 풀스윙으로 휘두르는 골프채 때문에 적지않은 ‘신체적’ 긴장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서사이다. 짧은 공연 시간과 프로덕션의 목적을 고려할 때 서사는 “피지컬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데 봉사하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할텐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할애되고 말았다. 연출이 제작노트에 쓴 다음의 문장에는 많은 고민이 들어 있다:

“더욱 간결해진 서사로 전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움직임과 무대 활용을 통해 피지컬 씨어터의 특징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사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작품 제목에 완벽하게 압축 요약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게다가 객석에 앉은 이후 약 15분 가량 무대 벽면에 이글거리는 형상으로 영사된 제목을 보고 난 후에는 더더욱,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는 특별한 흥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작가이기도 한 연출의 입장에선 할 수 있는 한 간결하지만 전형적이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싶었겠지만, 공연의 목적이 이야기의 재미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관객이 당혹스러울만큼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이어도 괜찮지 않았을까?불면증에 시달리는 왕은 나로서는 맥베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차라리 <맥베스>를--<햄릿>이나 <보리스 고두노프>라도 상관없다--필요한 만큼만 가져와 신체 움직임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짧은 공연이라도 이야기를 완결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모든 극작가에게 던져진 저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고전적 올가미는 결국 드라마가 연극 전체를 지배하고 나머지 요소들은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봉사하도록 이끄는데,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탈춤의 쓰다만 듯한 스토리텔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탈 속에서 웅얼웅얼하는 대사들은 잘 알아듣기도 힘들고 앞뒤 설명도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관객이 알아야 할 이야기는 대체로 명쾌하게 전달되고 그 속에서 연희자들의 몸과 춤사위는 빛을 발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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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일 토요일

2월의 장바구니

by 산책



<은밀한 기쁨> 2월 7일 ~ 3월 2일,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여러 이유로 작품을 예매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어윈 역을 맡은 이명행 배우 때문에 예매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 <푸르른 날에>에서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저는 이 배우에게 반했습니다. 주먹을 꼭 쥐고 함께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그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은밀한 기쁨> 공연 사진에서는 이렇게 생겼던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다른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은밀한 기쁨>은 영국 극작가 데이빗 해어(David Hare)의 작품으로, 전쟁 후 영국 최고의 희곡으로 극찬받았다고 합니다. 추상미 배우의 출연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여자의 사람이 파국으로 치닫는 드라마”라는데, 제목은 ‘은밀한’ 그리고 ‘기쁨’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을 무대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로미오 & 줄리엣> 2월 14일 ~ 2월 23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극단 여행자, 양정웅 연출의 <로미오 & 줄리엣>입니다. 이제까지 양정웅 연출의 작품은 꽤 많이 관극했습니다. 처음 극단 여행자의 작품을 만났을 때는 연출은 너무 똑똑하고, 배우들은 연기를 너무 잘하고, 고전은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느꼈습니다. “너무”라는 말을 남발하며 “너무” 좋아했던 탓인지, 관성에 이끌려 계속 작품을 보러 가면서도 처음의 그 쾌감은 쉽게 느낄 수 없고, 되려 이런 저런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래 사귄 친구를 한 번 더 믿어보고 싶은 것처럼 또 한 번 믿어보려고 합니다(?). 남녀가 바뀐 로미오와 줄리엣을 얼마나 재기발랄하게 보여주는지 기대해봅니다. 이 글을 빨리 보시는 분들은 2일(일) 까지 50%할인 금액으로 예약하실 수 있다고 하니, 서두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40%할인, 커플 관계 인증시(?) 에도40%할인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


<롤리타> 2월 20일 ~ 3월 9일, 산울림 소극장

산울림 소극장에서는 기획 공연으로 “고전 읽는 소극장, 산울림 고전 극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4년 이미 <설국>, <분노의 포도> 이렇게 두 작품이 공연되었고, 제가 예매한 <롤리타>전에도 <홍당무>가 공연될 예정입니다. 고전은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죠. (나도 모르게 읽지 않은 작품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는 척 한 경험을,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롤리타’라는 말은 무척 선정적으로, 그래서 부정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들(!) 하는데도 책을 사서 읽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년 문학 동네에서 <롤리타>의 새 번역판이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SNS에 이 책 사진을 올리고, 평들을 올렸던 생각이 납니다. “엄청나게 매력적인 소설”이라지만, 역시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산울림에 가기 전, 어쩌면 다녀와서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을 시작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1월 낭독 공연 <지금도 가슴 설렌다>를 재미있게 보고 왔습니다. <롤리타>역시 소설을 어떻게 들려주고, 또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롤리타 (반양장) - 10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문학동네


* 공연을 더 예매하면 업데이트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