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우정
그로부터의 편지가 닫혔다.* 이내 마음을 흐르는 또 하나의 음악이 떠올랐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한 줄의 유행가가 마음과 마음을 더 잘 전달하기도, 공감의 농도를 짙게 하기도 한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그녀의 해맑은 미소면 되었다. 그는 그렇게 바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어오던 미소가 그에게는 힘겨웠다. 결국 그는 삶과 사랑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슬픈 청년 베르테르의 이야기다. 독일의 대문호(大文豪)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무대화 한 뮤지컬 <베르테르>가 작년에 이어 다시 돌아왔다. 첫 사랑처럼 잊지 못하고, 오래 두고 보아야 할 작품이 다시 공연되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더해서 일 년의 지난 시간 동안 새롭게 해끔한 모습으로 단장하여 돌아와 준 것에 고맙기까지 하다. 다시 돌아온 그대, <베르테르>,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처음 느낀 그대의 빛은...
베르테르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몇이나 될까. 섬광처럼 스쳐가는 순간에서 감정을 발견하고 영원할 것처럼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이란 어렵다. 절대적으로 어렵다는 말로도 부족하여 현실에서는 없다고 갈음된다. 그렇게 베르테르의 사랑은 비현실적이다. 사실이라 존재하지 않아서 동경하고 어쩌면 바라는 이야기는 다시 돌아 온 <베르테르>에서 그처럼 비현실적인 미장센으로 풀어진다. 빛과 색으로 그리는 한 폭의 ‘그림’이 그것이다. 그림 속의 장면은 그 자체로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담기도 하고 현실을 바꾸는 힘도 가지고 있다. 슬프고 처연해서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사랑의 이야기가 이번의 공연에서는 무대에서 색과 빛으로 그리는 ‘그림’의 모습으로 제 옷을 입은 것이다.뮤지컬 <베르테르>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그리고 작년, 그리고 이전의 공연과 두드러지게 달라진 것은- 극이 뿜어내는 색과 빛이다. 무대의 빛은 절대적으로 환해졌다. 19세기 독일 고전(古傳)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오는 어둡고 음침한 가문비나무 숲 속 같은 밝기가 더 이상 아니다. 무대는 희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놓여있는 것만 같다. 이 햇살 아래 무대 위 모든 것들은 그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렇게 시야를 확보한 동시에 최대한 색을 절제해 버린다. 왜. 드러나게 하고 보여주지 않는가.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다채로운 색의 가능성을 얻게 한다는 데 놀라움이 있다. 막이 열리고 첫 장면에서 만나는 배경 건물은 흰색과 회색의 무채색 천이다.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 살짝 흔들리는 흰색의 천은 그들의 마음이 함께 떨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도 충분하다. 동시에 투명하고 얇아진 재질과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흰색은 무대의 빛과 색을 잘 흡수하고 통과시킨다. 이것은 조명에 따라, 등장하는 이들의 색깔을 따라 변화하고, 전반에 사용된 흰색은, 흰색을 모든 색에 섞어 사용하는 유화의 느낌을 무대에 구현했다. 무대는 그것이 가진 색과 빛으로 ‘조르주 쇠라’의 유화처럼 질감을 얻고 이는 비현실적인 극의 색채를 더해주는 효과를 낳는다. 무대 자체가 모든 색을 배제했지만 모든 것을 그릴 수도 있는 캔버스가 된 셈이다.
이런 느낌? |
불투명해서 현실을 떠난 것만 같은 흰색의 향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배우들의 의상과 장면의 상황 속으로까지 전이되는 것이다. 흰색은 자체가 주는 감정과 감각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 또한, 현실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입지 않음으로 해서 무대 위에서 보이는 비현실을 강조하고 그림 속으로 들이미는 효과를 더한다. 이젤로 다가가는 추모의 행렬도, 롯데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발하임의 사람들도, 오르카의 행복한 손님들도, 그리고 아프고 순수한 사랑의 베르테르도. 그의 죽음 속 분분히 흩뿌려지던 꽃잎들도. 무대 위의 많은 부분이 모두 흰색이다.
하얗게 깨끗한 배경에는 등장하는 인물과 물체가 가진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색채가 당연히 더 잘 드러난다. 베르테르의 또 다른 모습인 하인즈의 살인과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 색, 위로와 평안을 주는 오르카의 초록색, 그리고 무대를 밝히는 해바라기는 노란색이다. 저 마다의 색을 오롯이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또 하나의 주조색이라고 불릴 만한 해바라기의 노란색은 어둡지 않은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고 동시에 공감각(共感覺)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 무대에 놓인 여러 개의 해바라기들을 본다. 스스로에게 권총을 겨눈 베르테르의 뒷모습과 함께 이들은 위태롭게 서 있다. 그리고 베르테르 그처럼 스러져 간다. 여기에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죽음의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 맹목적이고 목숨까지 거는 베르테르의 절실함이 매달린 노란색 해바라기들이 꺾일 뿐이다. 손 뻗어 잡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관객의 마음도 함께이다. 소리 없는 해바라기의 비명은 강렬한 색채의 감각으로부터 감정으로 전이되어 아릿함을 더한다. 이렇게 다시 돌아 온 <베르테르>는 감각과 감정이 드러내는 가능성을 색과 빛을 통해 하나 둘 열어 놓았다.
♭ 다시 돌아 올 그대에게...
감상을 위해 작품 앞에 서면, 내 눈앞에 펼쳐진 캔버스는 하나다. 무대도 역시 그렇다. 화면 안에 등장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 일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 전체가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를 향하여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걸작을 향한 노력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다시 돌아 온 올해의 <베르테르>는 한 걸음을 떼었다고 볼 수 있다. 빛과 색으로 일관된 분위기를 추출하였고, 더불어 이전의 공연에 불필요하게 삽입되었던 과도하거나 의미 없는 극적인 요소들을 분리해 내었기 때문이다. 안일한 리얼리즘의 표현에서 오는 구체성(의상의 현대화 ; 더 이상 롯데는 19세기의 의상을 입지 않는다) 과 잡다한 색의 섞임(전체적으로 흰색과 회색으로 무대 톤을 조정하였다)을 일정한 흐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과장된 장면의 표현 (카인즈의 살인과 죽음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이나 의미 없는 등장(롯데의 조카들은 그녀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은 과감히 변화시키기도 했다. 더해서, 작아진 공연장은 한 편의 그림 같은 뮤지컬로 다시 되돌려주기에 충분했다.하지만, 아직 만족해서도 자만해서도 안 된다. 2000년에 뮤지컬로 초연된 이 작품은, 그리고 19세기에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뻔한 소재에 세월의 무게까지 더불어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그렇게 통속적인 소재여서 누구나에게 어울리지만 또, 누구도 외면해 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어울릴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 <베르테르>가 가진 운명이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베르테르일 수 있고, 롯데가 될 수 있다는 공감을, 비현실의 사랑에서 현실의 사랑으로 걸어 나오게 하는 과제가 아직도 남아있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공연 된 만큼, 앞으로도 계속해서 <베르테르>만이 가지고 있는 명확한 주제의 결을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매 번 다른 종류의 ‘그림’을 그려 보여 주는 시도도 다채로운 변주곡을 빚어내는 매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번은 그 첫 번째 변주곡이었을 뿐이다.
다시 돌아 올 그대, <베르테르>를 위해.
*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書柬體) 소설이다. 장면의 묘사가 작가가 아닌 서술자 베르테르의 1인칭 시점으로 되어 있고, 소설을 읽게 되는 독자는 베르테르에게 편지를 받는 대상이 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무대를 살필 때, 처음과 끝의 막의 형상에서 연상되는 것은 편지를 열고 닫아 읽는 행위와 유사하다.
** 정신 의학자 융(Jung)이 정리한 색채상징체계에 따르면 ‘노란색’은 남성적인 성향을 가지는 색이며 태양과 금, 다혈질적인 사람을 상징한다. 또한, 심장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져서 색채치료에 활용되기도 한다. ‘흰색’은 전지전능하고 생명을 만드는 색채로, 은, 뇌(이성), 달과 죄가 없거나 헌신을 상징한다. : 하랄드 브렘, 『색깔의 힘』, 김복희 역, 유로서적, 200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