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산책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저 유명한 CM송이 어느 날, “에이, 이제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로 바뀌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던 마음은, 이제 말을 해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만에 바뀐 광고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었지만, 조금은 쓸쓸한 마음을 안겼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엄마, 아빠, 작은 아빠, 숙모, 옆집 할아버지와 주인공 달리, 달리의 친구가 등장한다. 이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소하다. 사소하고 시시한 그런 일들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심들도 있고,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숨겨진 마음들도 있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그 마음들이 오가고 전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우습고, 시시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을 들킨 것 같고, 조금은 먹먹한 기분도 든다. ‘지금도 가슴 설렌다’는 고백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말을 들은 배우의 눈도 순간 빨갛게 되고 말았다.
아주 오래 전, “진짜 첫 사랑은 너”였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겨울이 오기 직전, 시험공부를 위해 깜깜한 새벽부터 일어나 도서관에 가던 날, 보온 도시락에 넣어진 엄마의 편지였다. 이미 십여년 전의 일이라, 거의 모든 내용이 생각나지 않지만, “진짜 첫 사랑은 너”였다는 엄마의 고백만은 지금도 생각 난다. 그 편지를 읽었을 때 내 기분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날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을 뚝뚝 흘리다 결국 피곤해져서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 편지는 어디로 갔을까?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가족으로 같이 살아 간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참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일인 것 같다. 단순하고, 복잡한 이 마음들을 <지금도 가슴 설렌다>에서 만날 수 있다. 그들이, 그들 중 누군가가 내 가족처럼 느껴질 것이다. 작은 극장 안에서 여기저기 터지는 울음을 듣고, 울컥하며 움찔거리는 뒷모습들을 보면 안심이 된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행복해지려고 애쓰면서, 때로는 다투면서, 손짓 하나 작은 마음 하나에 크게 실망하고, 감동하면서.
극 내용은 단순하다. 이렇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감상에 젖을 만큼 관람자에게 여유를 준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꽤 재미있다. ‘낭독 공연’이라는 형식이 이런 재미를 만들어 낸 것일텐데, 예를 들면 “절뚝거리며 걷는다”고 지문을 읽어 주지만 할아버지는 꼿꼿하고 당당하게 걸어 다닌다든지,대본을 들고 읽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이 분명이 나누어 지는 것, 주인공 ‘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을 낭독하지 않고 홀로 움직이며 연기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우리는 지문과 다른 배우의 나머지 행동을 상상해야 하고, 보지 않고도 대사를 할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한데에도, 떳떳하게(?) 무대 위로 올라온 대본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 대본을 낭독하든, 낭독하지 않고 연기를 하든 흔들림없는 배우들의 모습은 색다른 재미를 준다. 가만히 앉아 대본을 들고 읽을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배우는 배우가 아니라 등장인물 그 자체였다. 무대도 거의 텅 비어있고, 배우들은 행동도 하지 않는데, 이 극이 드라마가 되고, 감정이 전해지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며, 과연 연극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의 목소리, 사람의 표정은 정말 강렬한 것 같다. 수많은 연극을 보며 배우의 몸, 배우의 움직임 등에 감탄하게 될 때가 있었는데, 가만히 앉아, 대본을 들고 표정으로, 목소리로 전달하는 폭발적인 감정들은 새롭고, 또 대단했다(대단했다고 한 마디로 설명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연극들이 만들어질까? 이 작품의 배우들, 연출, 작가의 다음 행보도 궁금해진다.
오랫만에 극장을 나서며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년 기획 “장바구니”를 읽고 이 작품을 보고 싶다던 첫 독자과 함께 관람한 작품이었다. 그 글을 읽고, 누구라도 ‘이 연극 나도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이 이렇게나 빨리 이루어지다니! 하지만 나의 기대에 자신의 기대를 얹은 사람과 작품을 함께 본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이었다. 게다가 낭독공연이라니, 보고 나와 서로 민망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극장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뿌듯하고 배부른 기분이었다. 오랫만에 참 좋은 작품을 봤다. 누구에게라도 또 소개하고 싶다. 극, 연기, 연출, 무대, 그리고 가수들의 콜라보레이션까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공연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작품의 결이 따뜻하고 아름답다. 다행히 26일까지 연장 공연에 들어 간다.